익산 함라 출신 荷堂 李集仟씨(서기1899~1959) 는 당시 갑부 고을로 유명한
함라뿐 아니라 호남을 통틀어서도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했던 부호였다.
재산 규모는 당시 익산군17개면을 통틀어 함라, 웅포, 용안, 성당,황등면등
익산군 내에 荷堂의 토지가 없는곳이 없었고 그 면적만도 9백여 정보의
만석군었으니 그 부를 짐작 할만하다.
하당의 이 같은 부는 하당의 조부 이석순(본, 경주) 대로 부터 비롯된다.
다른 대부분의 만석군들이 토지를 이용하여 큰 재산을 모은것과는 대조적으로
형성 방법이 완연이 다른 상업으로 부의 기반을 잡았다는데 荷堂이 부를 이루웠던
특색을 엿볼 수 있을것 같다.
아무런 자본도 또 요즘과 같은 기업 조직도 없이 혼자의 힘으로 무에서 유를
창출 해냈던 그 과정 중에는 피나는 노력과 근검 절약등 요즈음의 기업 경영
이론을 모두 실천하였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당시 옥구 임피에 살았던 이석순씨가 함라에 자리잡고 장사를 했었던데는
다음과 같은 우연한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있다.
임피에서의 생활이 갈수록 기울자 석순씨는 부인 박씨의 웅포면 재석 부락으로
가기위해 어느날 저녁무렵에야 길을 떠났다는것.
도중에 날이 저물어 함라에 하룻밤을 묵게된 일행은 어느 헛간에서 밤을 지샌 뒤
다음 날 새벽 굶주린 배를 달래려고 석순씨 주머니에 있던 몇 푼을 털어 마을 어귀
주막에 해장국을 사러 갔었다 한다.
내준 해장국을 먹지않고 가져가려는것을 본 주막 노파가 이상히 여겨 물어보자
부인과 아들에게 주려고 가져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노파는 한그릇을 더 줄테니
먹고 가져가라고 말한 뒤 맛있게 먹는 석순씨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는것.
고향서 살기가 복잡해 처가살이 하러 간다는 얘기를들은 노파는
<좁쌀 3말만 있으면 처가살이 않는다>는데 자기가 일러주는것을 하면서
함라에서 생계유지를 하며 머므르지 않겠느냐고 의향을 물었다 한다.
이 권유를 받아드린 집천씨의 조부 석순씨는 처음 머물렀던 헛간 옆의
오두막집에서 거처하면서 노파가 지적한 누룩을 그집 뿐 아니라 여기저기에
대주기 시작했다 한다.
완주군 고산 누룩을 가져다 함라를 비롯 임피 등지에 파는 판매업을 시작한
석순씨는 우람한 체격을 가진 강한 채력에 특유의 부지런과 성실로 차츰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에따라 웅포에 있는 동생도 이 사업에 끌어들였다.
이 같이 차츰 기반이 잡혀가자 석순씨는 결국 누룩장사로만 만족하지 않았다.
어느정도 기반 위에 배 2척을 장만한 두 형제는 배를 이용한 판매업을 시작했다.
어느 해의 믿지못할 얘기 한토막!
전남의 어느 섬에가서 벌목을 하여 나무를 가득 싫고 목포로 가 보리와 교환을
했다한다.
배가 부두를 막 떠날 때 석순씨는 동생의 배에 흰옷 차림의 예쁜 여자가 승선
하는것을 보았다.
두 배가 같이 웅포를 향해 오면서 석순씨는 동생의 배로 가까이 다가가 얘기를
하고 배를 샅샅이 뒤지게 했으나 그 여자는 보이지를 않더라는것.
군산을 거쳐 웅포로 갈 계획이던 이들 일행은 군산에서 경기 인천 지방에 흉년으로
곡식이 몹씨 달린다는 소문을 듣고 뱃머리를 인천으로 돌렸다.
그 소문은 사실대로 들어맞아 보리 한 가마에 거의 엽전 한가마씩 바꿀 정도로
보리 가격이 엄청나게 비쌋었다고 한다.
두배에 엽전을 가득 싫고 돌아오는 길에 큰 풍랑을 만났으나 두배는 아무런 위험도
격지않고 항해를 계속 무사히 웅포에 도착하였다.
엽전을 함라 집에 운반 해 와 곳간에 넣을 때 석순씨가 다시 배에 탔던 여인이
곳간으로 들어가는것을 보았다는것.
허황된 전설같은 얘기지만 이일이 있은 후 부터는 하는 일이 전보다 더욱 융성
순풍에 돛단듯 하는 사업마다 실패가 없었다.
이런 일 등으로 석순씨는< 부는 하늘이 도와줘야 모아진다 사람의 힘만으로는
억지로 모아지지 않는다 옳은 마음을 먹고 노력할 때 재복을 내려준다>는
신념으로 장사를 계속했다.
석순씨가 지어 사용하던 그때의 그 곳간은 그 뒤로 초가를 기와로 바꾸고
허물지 않은체 지금껏 쓰고 있으며 당시 누룩을 걸어 놓았던 기둥의 못도
그대로 있다고 지금 이집을 지키고 있는 석순씨의 회손 양몽씨는 말하고 있다.
첫댓글 옛 부자들은 어찌 살았나 어찌 부자가 되고 망했나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