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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
박 태 원
그때 한동안 나는 매일이라고 책상 앞에 앉아 소설을 하나 써보려고 원고지와 눈씨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의 누를 길 없는, 그러나 터무니없는 창작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서의 애달픈 노력이었다.
매일이라고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갠 날이 계속되었다. 창 바깥 천변길을 오전에는 무장수 배추장수 오후에는 전화 교환수 그리고 밤에는 기생 아씨를 태운 인력거가 끊임없이 오고 갔다. 그 속에 햇빛 잘 안 들어오는 이 칸 방―소설책이라 시집이라 잡지라 악보라 화투짝이라 담배합이라 성냥통이라…… 머릿살 아프게 어수선한 책상 앞에 앉아 나는 소설 하나 쓰기 위하여 끙끙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 자도 써지지 않았다. 아니 좀더 정직하게 자백할 양이면 아무런 정돈된 구상(構想)도 내 머리에는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터무니도 없는 창작욕은 그대로 아무 분수 염치 없이 불길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에꿎은 담배만 태웠다. 한 갑…… 두 갑…… 세 갑…… 그러나, 설혹 담배를 태우면 소설이 써진다손 치더라도, 아마 세 갑쯤으로는 아무 보람이 없는 듯싶었다. 나는 으레 네 갑째의 피존을 빈 갑을 만들어 놓고 아침부터 이제까지 공연히 잉크를 찍어서는 그대로 말리고 찍어서는 그대로 말리고 한 원수의 펜을 내동댕이치고 그대로 자리에 쓰러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잠이 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대개 오전 한시, 좀 이르대야 자정…… 아무리 창작에 대한 집착이 강렬한 소설아귀(小說餓鬼)도 곤하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이다.
오늘도 나는 세 갑째 담배의 마지막 한 개를 글자 한 자, 아니 콤마 하나 찍어 놓지 않은 원고지―처녀 원고지라 할까―앞에서 피워 물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고 갈피를 잡을 수 없게시리 복잡한 여러 가지 ‘생각’이 한데 뒤범벅을 한 머릿속을 정돈시키려 하였다. 일분…… 이 분…… 삼 분…… 오 분…… 그리고 칠 분…… 내 머릿속에 모든 ‘생각’이 깨끗하게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그리고 다시 일 분…… 이 분…… 삼 분……오 분……십 분……그리고 또 십 분…… 그러자 참으로 참으로 뜻하지 아니한 묘상(妙想)이 머리 한구석에서 구름과 같이 떠올랐다.
나는 꾹! 참았다. ‘그놈’이 ‘그놈’이 더 좀 가깝게 더 좀 농후하게 그리고 더 좀 강렬한 색채로 내 눈을 쏠 때까지 나는 결코 어설피 붓을 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끝끝내 나는 참지 못하였다.
아! ‘인스피레이션’이다. ‘영감’이다. 이제 나는 소설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이 주일 동안의 시일을 소비하고 평소의 이 배나 되는 담뱃갑을 들여논 것이 결코 헛것이 아니었다―이렇게 생각할 사이도 없이 나의 철없는 펜은 원고지 위에서 뛰놀았다. 마음껏 뛰놀았다. 그러나 그 즉시 나는 손을 멈추었다. 두 줄 남짓한 이 주일 만의 첫 ‘거둠’―그것에 내 스스로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때 한동안 나는 매일이라 책상 앞에 앉아 소설을 하나 써보려고 원고지와 눈씨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혼자 싱겁게 웃고 그만 펜을 내어던졌다. 이렇게 하여서 소설이 써질 것인가. 나는 깨끗이 책상 앞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우선 재정 여하를 조사하여 보았다. 이십삼 원 사십오 전―물론 ‘노는 돈’은 아니지만 이만하면 족하다. 나는 양복저고리를 입고서 모자를 손에 들고 밖으로 뛰이나갔다. 현재의 나에게 절대로 필요한 것은 좋은 자극(刺戟)이다. 알맞은 엽기취미(獵奇趣味)다. 나는 광교로 나서자 우선 종로 네거리로 발길을 향하였다.
거리는 한껏 복작거렸다. 그리고 캄캄한 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총총하다. 캄캄한 하늘에는 별밤이 좋고 푸르른 하늘에 달밤이 좋다면 불붙어 뜨거운 새빨간 내 가슴은 사랑의 햇발이 그리울 것이다…… 하, 하. 나는 딴때 없이 마음이 기뻤다. 이렇게 마음이 기쁘기만 하다면 소설 같은 것은 못 써도 좋다. 내 손으로 만들어서 그 속에서 살고 싶다, 생각하는 나의 조그마한 예술의 세계가 설혹 나를 경원(敬遠)한 나 할지라도 나는 넉넉히 현실의 이 거리와 친할 수 있지 않은가. 알지 못게라 거리여, 너와 나 사이에 무슨 은원(恩怨)이 있기에 내 너를 차마 잊지 못하고 네 또한 자로 나를 부르는가…….
나는 아무 주저 없이 야시장 군중 속에 몸을 내어던졌다.
수백 명 수천 명 또 수백 명 수천 명…… 앞으로 뒤로 밀리는 장안 사람의 물결은 소화 사년도 조선총독부 주최의 조선 박람회 구경 온 시골 마나님, 갓 쓴 이들을 한데 휩쓸어 이곳 저곳에서 물결치고 있다. 오래간만에 나온 까닭일까. 나는 그들을, 이 무리들을, 이 무리들의 갈 곳 몰라하는 발길을, 이 무리들의 부질없는 시간소비를 결코 멸시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많은 군중 속에 내 몸을 내어던지는데서 깨닫는 비할 데 없이 크나큰 기쁨을 맛보고 있는 나 자신을 나는 발견하였다.
‘하여튼.’
이 주일 만의 첫 산보가 나오는 길로 이만큼만 축복받았으면 그만이다. 무슨 별다른 계획은 없었지마는 나는 이 위대한 행렬 속에서 나와서 파고다공원 문 앞에 우두머니 섰었다.
‘어디로 갈까…….’
아까도 말하였지만 내 주머니 속에는 돈―이십삼 원 사십오 전―이 들어있다.
‘어디로 갈까…….’
더 간대야 덜 간대야 오 분씩은 틀리지 않는 내 팔뚝시계는 열시 이십칠 분 전에서 재각거리고 있다.
‘어디로 갈까…….’
나는 두어 발자국 바른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다시 돌쳐서서 서너 발자국 왼편으로 걸어갔다. 그때 ―
때마침 한강 나가는 버스가 왔다.
‘저놈을 타? 말아? 탄대야 어디로 가누? 그렇다고 꼭 타지 말라는 이유야 없지 않은가? 하 하…….’
그러자 나는 문득 버스가 열점까지밖에 다니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 보고,
‘내가 참말 불행하게도 오늘 밤 안으로 죽는 일이 있다면 버스하고는 영 이볕이로구나, 하 하, 우스운 놈…….’
나는 이러한 덧없는 생각을 하였음으로 하여 마음속에 이름 모를 기쁨조차 느끼면서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아스팔트 위를 질주하기 시작하였다. 근래에 구경하지 못한 쾌속력으로 종로 네거리를 돌파하고 구리개로 향하였다.
‘이만하면 세계 일(世界一)로 빠른 버스일 테지. 과연 세계 일일까? 그럼 세계 일이고말고. 세계 일일 터이지. 세계 일일 수도 있지. 세계 일일…….’
그러자 나는 ‘걸’이 조금 아까부터 내 앞에 와 서 있는 것을 깨닫고 돈을 꺼내 주었다. 오 전이라니 오 전이라니, 동소문에서 한강까지 또는 동대문에서 악박골까지 오 전이라니…… 이야말로 틀림없이 세계일로 값싼 버스다.
‘그리고 버스 걸도 세계 일로 어엽……’ 하다가 나는 고개를 들었다.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뾰로통! 하니 저편을 향하고 서 있는 ‘아씨’는 불행하게도 결코 미인은 아니었다. 나는 쓰디쓴 웃음을 윗니와 아랫입술로 깨물어 버리고 흘깃! 바깥을 내어다보았다. 본정 어귀의 휘황한 전등빛, 이 빛이 내 눈을 쏘자 나는 저도 모르게 허둥지둥 일어나서 지금 막 출발하려는 버스애서 내렸다.
술과 계집과 재즈와 웃음이 있는 곳, 카페가 갑자기 그러워진 까닭이다.
첫번에 들어간 카페에는 손님이 많지 않았다. 나는 우선 뱃속을 든든하게 할 작정으로 음식을 두어 가지 시키고(무슨 소설가라는 나의 직업(?)이 본능적으로 활동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심심풀이로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여 보기로 하였다.
우선 내 옆 테이블에 도꾸리 다섯 개를 쓰러뜨려 놓고 앉아서 제 맘대로 웃고 지껄이고 하는 두 일인(日人). 나는 바라보자 그 길로 그들의 풍채가 늠름한 데 놀랐다. 저만만 하면 염려 없이 영웅숭배자들의 무한한 존경을 받으려니…… 하고 생각하였다, 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들의 얼굴이 각각 미라보와 크름웰과 흡사한 까닭이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세 번 감탄하였다.
그러나 목부터 아래는 아주 제로〔零〕이다. 허름한 양복, 허름한 와이사쓰, 허름한 넥타이에 칼라와 구두코만 새로우니 새빨간 얼굴을 마주대고 기탄없이 웃고 떠들고 하는 그들, 그러나 차림차림은 어떻든 간에 그들의 기쁨은 비할 데 없이 큰 모양이었다. 술잔 기울일 시간조차 아까운 듯이 웃고 떠들고…….
‘아마 치통(齒痛) 이 완치된 게로군…….’
이렇게도 생각하여 보았으나 미라보는 그걸로 만족한다 하더라도 크름웰의 기쁨은 확실히 그 이상인 듯싶다.
‘그러면…… 자기 계모가 간밤에 죽기나 한 것일까? 하 하…….’
나는 유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입가에 웃음을 띄운 얼굴을 그대로 저편 구석에 앉아 있는 사나이에게로 돌렸다. 그러나 그 순간―그 사나이를 본 순간 나의 신경은 황망하게시리 나의 웃음을 거두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나의 눈은 호기심과 의아(疑訝)가 뒤섞여 시선을 그 사나이에게로 던졌던 것이다.
조그마한 ‘붉은 실감기’를 손에 들고 그놈을 한 자 길이 가량 풀었다가는 다시 감고 감았다가는 다시 풀고…… 이 단조롭고 무미한 어린이 장난 같은 것을 이 쌀쌀한데도 철겨운 레인코트를 입고 그 큰 키와 긴 얼굴에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캡을 쓴 그 사나이는 크고 둥글고 옴폭하고 퀭한 두 눈에 어린이와도 같은, 천치나 바보와도 같은, 아니 정신이상자 외에는 구경할 수 없을 광적(狂的)의 기쁨을 띠고 응시하고 있다.
감았다가는 풀고 풀었다가는 감고…… 붉은 실감기, 손등에 털이 듬성듬성 난 꺼―먼 두 손, 광적으로 빛나는 두 눈, 그리고 철겨운 레인코트…… 그것은 확실히 괴기(怪奇)한 장면이었다. 에드거 앨런포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세계 이상으로 괴기한 장면이었다.
그러자 그는 무엇에 놀란 듯이 가장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시선은 서로 부딪쳤다. 그 순간 불쾌한 빛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그와 함께 그는 황당스럽게 실감기를 양복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처넣고 나에게 적의(敵意)를 품은 날카로운 시선의 직사를 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적의를?―아니 그것은 적의라는 것보다는, 그러한 적극적의 것이라는 것보다는, 자기의 비밀?―이 폭로되지나 않았나 하는 데서 나를 경계하는 소극적의 태도이었다.
나는 웬일인지는 모르나 그에게 대하여 퍽 미안한 생각을 품고 얼른 그의 시선의 직사를 피하여 지금 막 웨이트리스가 갖다 놓은 프라이드 피시 접시를 앞으로 다가놓고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저 사나이는 정신이상자인가? 아니다, 미친 사람으로서는 너무나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저 사나이에게는 무슨 비밀이 있는 것일까? 붉은 실감기를 가지고 하는 장난, 그것을 내가 좀 보았기로 그렇게 불쾌하여 하며 자리를 일어서기까지 할 것이야 무엇 있노……?
나는 주저주저 끝에 고개를 들어 그 사나이 쪽을 바라보았다. 지금 막 웨이트리스에게 돈을 치르고 난 그는 내 쪽은 보지도 않고―의식적으로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듯하였다―레인코트 자락으로 가만한 바람을 일으키며 내 옆을 지나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이윽히 문 쪽을 바라보다가 내 테이블 위의 분 냄새를 맡고 고개를 돌렸다. 둘째 접시―커틀릿―를 갖다 놓고 내 맞은편에 앉은 ‘계집’이 내가 고개를 돌리자 무슨 국가적 중대한 비밀이나 발로시키는 듯이 조심스럽게 속삭거렸다.
“저것은 분명 미친 게죠?”
나는 대답 대신에 빙그레 웃었다. 계집은 내가 대답 없는 것은 괘념도 않고 곧 이어서,
“분명 미친 게에요! 들어오는 길로 한 번도 본 일이 없는데 내 손목을 덥석 붙들고 아주 덤벼들어 입을 맞출 듯이 반가워하겠죠? 퍽 놀랐에요, 그리고 그게 뭐람, 실감기가…….”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레인코트를 입은 사나이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계집의 손목을 잡고 반가워하는 장면을 눈앞에 그려 보았다. 그 장면은 내 마음의 소극적 방면을 자극시키는 것이었다. 나는 약간 센티멘털하여졌다.
옆 테이블에서는 미라보와 크롬웰이 계집 에게 테이블을 치우라고 소리친 다음에 팔들을 걷고 팔씨름을 하고 있다.
나는 음식을 반나마 남겨 논 채 밖으로 나왔다. 다른 곳으로 가서 술을 좀 먹으리라 하는 생각으로 길거리를 걸어갔다. 마음은 저도 모르게 레인코트 입은 사나이의 뒤를 쫓으며…….
둘째 번에 들어간 데는 매우 흥성거렸다. 문에 들어서자 나는 중학생들의 잡담과 계집들의 웃는 소리와 재즈 레코드의 폭스 트롯을 들었다. 그리고 담배 연기와 흥분된 붉은 뺨과 하카마(겉에 입는 일본 하의)를 걷어 올리고 난잡한 춤을 추는 대학생의 넓적다리를 보았다.
‘이왕 카페일진댄 이렇게 극단으로 세기말적(世紀末的)의 곳이 좋을까.’
나는 혼자 쓰디쓴 웃음을 웃고 한쪽으로 가서 앉았다. 바로 내 옆에서는 얼굴이 거무테테한 게 몹시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나이와 남자로는 아까울 만치 색깔 흰 금테 안경잡이가 ‘사회주의’에 관하여 토론을 하고 있다. 둘이 다 조선 사람이다.
나는 계집이 ‘아 쌀쌀한데 또 찬것을……’ 하는 것을 모른 체하고 맥주를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로 보아 눈썹을 부모에게 받은 것보다 닷 푼 가량이나 올려다 놓은 화장술 능란한 나의 사랑하는 계집의 충고는 결코 틀린 것이 아니었다. 그 차디찬 액체를 두 컵 연거푸 마시고는 그만 정종으로 하기로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나는 계집이 ‘그것 보세요?’ 하고 아양떨듯이 흘겨보는 눈초리에 또다시 쓰디쓴 웃음을 금치 못하며 옆 테이블에 앉은 두 젊은이의 ‘사회주의론’(?)에 귀를 기울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무엇이냐? 말이지…… 결국…….”
우락부락한 사나이가 ‘알코올’에 정복당한 혀끝을 가까스로 놀려가며 ‘금테안경’을 설복(說伏)하고 있는 모양이다.
“결국……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전복시켜 가지고…… 무어 근본적으로 전복? 그렇지. 근본적으로 전복시켜 가지고 우리 프롤레타리아를 해방시키는 것은…… 해방시키는 것은 ‘마르크스’주의 말고는…… 말고는 없다…… 이렇다 말이야. 물론 자네와는 내가 각별히 친하지…… 친해! 그러나…… 그러나 만약 자네가 자네 ‘근성’을 자네 뿔조아(부르주아) 근성을 버리지 않는다면 말이지…… 금테안경을 니켈캡으로 갈지 않는다면 말이지…… 아루빠카(알파카) 구두를, 아루빠카 구두? 아니 참 캥거루 구두를 고무신으로 갈지 않는다면 말이지…… 자네와는 이렇게 마주앉아 술도 못 먹네…… 왜 그러냐고? 왜 그러냐고라니…… 이 사람아, 나는 프롤레타리아요 자네는 쁠조아라…… 즉 그 사이에 하등의 타협성을 발견할 수 없는 불공대천지수니까 말이……지 이렇게 말했다고 노여워하는 대신에 자네 근성 뿔조아 근성부터 내버리게…….”
‘근성 쁠조아 근성 이란 무엇 인고?’
하고 나는 생각하여 보았다.
‘근성 근성 쁠조아 근성이라니·…‥ 하 하, 곤조(根性)라는 말이로군. 딴은…….’
나는 감탄하면서 ‘상섭 (想涉)’이 ‘차지(差支)’를 모멸하는 이상 나에게도 ‘근성’을 모멸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구절을 자세히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는 ‘염상섭’ 씨의 「만세전」을 참조하시오.)
그러자 나는 금테안경이 근성더러,
“자네 저자 아나? 저 구석에서 커피차 먹고 있는 자 말이야.”
하는 소리를 듣고 무심히 금테안경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그리고 놀랐다. 바로 아까 본 레인코트 입은 사나이를 그중 구석진 테이블에서 발견한 까닭이다. 그는 분명히 내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와 있었다. 물론 내가 그쪽을 주의하여 보지는 않았었지만…….
그는 전등불을 등지고서 내게 모로 향하여 앉아 있다. 나는 그의 구레나룻이 듬숭듬숭 난 가장 야생적인 검숭한 바른편 뺨에 눈 아래로 동전만큼이나 한 검푸른 사마귀가 있는 것을 새로이 발견하였다.
그는 술잔을 기울이며 그 사나이를 바라보고 있다가,
“아니 저자를 모른다니 말이 되나. 미친놈 말이야. 자동차 운전수…… 아니 왜 상준이를 자동차로 치어 놓은 놈 말이야.”
하는 금테안경의 말소리를 듣고 그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저놈이……?”
‘근성’은 허청 난 소리로,
“아닐세. 아니야. 그놈은 지금 ‘동팔호실’에 갇혀 있는데 무슨 말이야.”
“글쎄 저자가 그자라니까 그러는군. 거기선 잘 뵈나? 이쪽으로 보게. 그래 저자가 그자가 아니야?”
“옳지. 그래…… 저자가 그자란 말이야. 그런데 동팔호실에선 어찌 나왔노?”
“정신병이 완치됐거나…… 그렇지 않으면 뛰어나온 게지…….”
“뛰어나오다니…… 하여튼 저놈이 그놈이란 말이야. 그래 상준이가 저놈의 자동차에 치여서 근 한 달이나 고생했지……? 까딱했더라면 병신이 될 뻔했단 말이야. 그래 저놈을 사형에 처할 것이지 그래…….”
그들의 이야기를 여기까지 듣자, 나의 머리에는 이번 사월에 정신에 이상이 있는 자동차 운전수가 자정 넘은 구리개 네거리에서 젊은 남자를 치어 놓았다는 신문기사가 떠올랐다. 나는 그 사나이―레인코트를 입은 사나이에게 비할 데 없이 큰 흥미를 느끼고 금테안경과 근성의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그의 멍하니 건너편에 붙은 미인 포스터를 바라보고 있는 듯싶은 눈초리를 보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서는 잠깐 동안 잠잠하다가,
“그러니 저자가 분명 도망해 나온 게야…… 그래도 감시가 엄중할 텐데 어떻게 나왔을꼬?”
근성이 혼자말같이 중얼거리는 것을 받아서,
“낸들 알 수 있나 저자한테 물어 보게그려, 허 허.”
하고 금테안경은 억지로 웃음을 만들어 웃으며 술잔을 기울인다.
“그래 자네도 알지만 취조받을 때 저놈이 한 소리 좀 봐…… 그래 아무 관계는커녕 일면식(―面識)조차 없는 사람을 왜 치어 놓았니? 하니까 공연히 죽이고 싶어 치어 놓았소! 했다지? 그래 그런 놈이 어디 있나? 그냥 공연히 죽이고 싶다니 그런 미친놈이 어디 있어?”
근성의 말소리가 몹시도 흥분된 어조를 띠어 올 임시하여 레인코트 입은 사나이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몽롱한 두 눈이 내 눈과 마주치자 놀란 표정이 그의 미간을 스치며 그 순간 그의 꿈꾸는 듯한 두 눈에 매섭게도 날카로운 빛이 떠올랐다. 우리는 서로 잠깐 동안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돌리며 의자를 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렸다.
‘저 사나이와 두 번씩이나 만나다니…… 무슨 인연이 있는가? 인연이……? 하하…….’
나는 술을 마셔 가며 그와의 인연(?)을―‘인연’이라는 것보다는 ‘우연’이라는 것이 적절할는지도 모르지만―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하여튼 그는 흥미 있는 인물이다. 정신병자든 무엇이든 간에 어떻든 흥미 있는 인물이다.
이렇게 혼자 입안말을 중얼거리는 중에도 나의 눈앞에는 거의 끊일 길 없이 레인코트 입은 사나이의 몽롱하니 꿈꾸는 듯한 눈―그러나 때로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빛을 띠는―이 떠올랐다. 그 눈은 때로 광적 기쁨으로 빛나고, 때로 악마에 가까운 광채를 갖고, 때로 적멸(寂滅)의 빛을 띠었다.
‘이 사나이…… 이 사나이가 정신이상자든 무엇이든 그것은 상관 없는 일이다. 어떻든 이 사나이의 존재와 이 사나이의 행동은 우리 인간의 소극적 방면을 그리고 우리 인간의 약점을 가장 명백하게 계시(啓示)하고 있지나 않은가?’
나는 이러한 생각을 시작하다가 이것이 나의 약간 염세미(厭世味)를 띤 인생관(?)에 극히 위험한 자극을 줄 것이 두려워서 곧 그치고 계집이 막 따라 놓은 술잔을 기울인 다음 셈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이대로 집으로 돌아갈 마음은 없었다. 집 ― 돌아간대야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단 말이냐. 휑한 이 칸 방에 살풍경하기 짝이 없는 침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에 지나지 않지 않은가. 나의 악취미의 한끝을 보이고 있는, 잘 자리에 읽는 탐정소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에 지나지 않지 않은가.
하여튼 좀 쌀쌀하기는 하지만 한점 가까운 이 밤거리를 좀더 산책하리라고 생각하였다.
밤거리를 늦도록 산책한다는 것, 이것은 혹은 나의 나쁜 버릇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왜 쌀쌀한데 거리를 돌아다니노―그것의 이유는, 원인은 나도 모른다. 벗은 일찍이 나의 이 ‘버릇’을 가리켜 실연(失戀)한 까닭이라 하였다. 그러나 나의 이 버릇은 실연하기 전, 아니 내가 사랑이라는 것을 알기 전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이를 먹을수록 빈번하여진 것이다.
그야 어떻든 이 ‘밤중의 산책’이 나에게는 너무나 쓸쓸하고 외로운 것이었으나 또한 그와 동시에 이름 모를 ‘가만한 기쁨’을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때의 나의 심정은 비극적에 가까운 것이었으나 그와 함께 또한 착 가라앉은 몹시도 안태(安泰)(?)한 것이었다.
나는 한 시간 넘어나 발길 나서는 대로 지향없이 돌아다니다가 차라도 한잔 마실까 하고 바로 길 옆 카페로 들어갔다. 그리고 들어서자 나는 텅 빈 그 안 한편 구석에 세 번째 레인코트를 입은 사나이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나는 결코 놀라지 않았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나에게는 ‘어슴푸레’하나마 ‘그’와 또 만날 것과도 같은 예감이 있었던 까닭에―(왜냐고? 예감이라는 것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그의 바로 건너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목적을 변경하여 술을 또 먹기로 하였다. 계집은 술병을 들고 와서 내 옆에가 앉으며 씽긋! 웃어 보였다. 나이는 스물대여섯이나 되었을까 핏기 없는 얼굴에 투덕투덕 바른 분과 몹시 거친 그의 두 손은 나에게 ‘살기 위하여서 사는 인생’의 너무나 처참한 실경을 보여 준다. 나는 도꾸리 두 개를 쓰러뜨려 놀 때까지 잠자코 계집이 따라 주는 술과 늘어놓는 아양만을 받아 가며 의식적으로 레인코트 입은 사나이 쪽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것은 그 사나이를 봄으로 하여 내 마음속에 검은 그림자를 깨닫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서가 아니라 나의 아무 뜻 없는 시선 하나로 하여 그가 불쾌한 감정을 맛보게 될 것을―물론 그 까닭이야 알 길 없으나―염려하여서이다. 나는 계집이 따라 놓은 술 한 잔에 어쩐 일인지 매튜 아널드의 시 한 구절을 연상하였다.
…………
꿈은 깨어 사라지고 벗은 봄의 꽃이나같이 웃다가는 그만 가버누나.
…………
계집은 호젓한 웃음을 띄운 내 입가를 곁눈질하더니 그대로 일어서서 술을 가지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나는 모를 사이에 레인코트 입은 사나이가 내 옆에 와 선 것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잠깐 머믓거리더니―그러나 그가 주저한 것은 말하기가 어려워 그런 것이 아니라 아무쪼록 순한 말, 아무쪼록 사람의 호감을 얻을 말을 고르느라고 그러는 것같이 보였다―그는 비굴한 웃음을 입가에 띄우며,
“같이 노시죠!”
하고는 떼다붙인 듯이 ‘하, 하……’ 웃고,
“처음 뵙는 터에 실례입니다마는…….”
하고 내가 채 응락하기 전에 내 옆의자에가 앉아 버렸다. 그리고 그는 내가 따라 준 술을 받으며,
“내가 노형에게로 온 것은 첫째는 술이 더 먹고 싶은데 돈이 없는 까닭…… 하, 하 그리고 둘째는 노형한테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은 까닭…… 이것이죠. 하, 하…… 물론 싫다시면 그만입니다마는…….”
하고 술잔을 든 채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이러한 그의 태도에, 자기의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하는 그의 어린이와도 같은 대담하고 시원스런 태도에 한없는 부러움과 호감을 느끼고 선뜻! 대답하였다.
“그런 염려는 마십쇼 하, 하.”
나의 이 대답과 이 웃음은 그에게는 각별히 기쁜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황망스럽게 술을 따라 나에게 권하고 내 손을 힘있게 쥐며,
“오늘 뜻하지 않고 노형을 뵈어 참 유쾌합니다. 참 유쾌해요.”
하다가 마침 계집이 술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고,
“야! 너도 여기 와 앉어라.”
하고 참말 유쾌하여 못 견디는 모양이다. 계집은 흘기는 눈초리로 그를 보며,
“왜 아까는 ‘나는 여자는 보기 싫다!’ 하시더니 왜 또 지금은…….”
“아까는 아까고 지금은 지금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형장! ……우리가 시시각각으로 나이를 먹어 가는데 어찌 마음인들 그대로 같을 수 있나요? 그렇죠? 그 증거로는 노형도 말씀이죠, 노형도 맨처음 카페에서 뵈올 때는 유쾌하여 못 견디겠다는 얼굴이더니 둘째 번에 만날 때는 조금 기쁨이 감한 모양이고…… 지금은 아주 딴판이시니까요. 하, 하…… 형장께서는 시인이십니까?”
나는 대답 대신에 가만히 미소하였다.
계집은 가만히 눈치만 보고 있다가,
“그러면 조금 있으면 또 내가 보기 싫겠죠?”
하고 빈정거린다.
“올라잇! 벌써 보기 싫다. 가서 잠이나 자라!”
그의 이 말에 계집은 비죽하여서,
“에이, 보기 싫여!”
하고 정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의 뒷모양을 유쾌스러운 웃음으로 보내고 있던 그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를 몹시 날카로운 눈으로 들여 다보며,
“내가 노형께 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노형은 우선 나를…… 내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아니 어떠한 평판을 받고 있는 사람인가를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잠깐 말을 끊고 내 동정을 살피는 모양이더니 곧 이어서,
“나는 미친놈입니다. 정신병자라는 지명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밤에 병원을 빠져 나왔습니다…… 이러해도 노형은 나를 아까와 조금도 다름없이 정의(情誼)로 대하여 주시겠습니까.”
나는 진정을 띤 나의 눈으로 그를 마주 바라봄으로 하여 대답을 대신하였다.
“진정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진정이에요……?”
그의 두 손은 나의 왼손을 힘있게 움켜쥐고 그의 두 눈은 한없는 감격에 빛났다.
“고맙습니다. 나는 노형을 만나 뵈옵기 위하여 내 한평생 ―이십칠 년이라는 한평생을―아니 그렇게까지는 안 되더라도 적어도 과거 오륙 년 동안은 살아온 셈입니다. 나는 기뼈요!”
이렇게 말하는 그의 눈으로서 두 줄 눈물이 뺨으로 흘러내렸다.
‘사람이란 왜 벗 없이는 살지 못하는 것일꼬…… 만 사람의 조소, 비웃음을 받고도 아무렇게도 여기지 않는 이 사나이가 지금 나 한 사람의 이해(理解) 아래 이렇게 감격하여 울고 있지 않은가?’
나는 시계를 보았다. 석점 십 분 전이다.
‘세시나 되었는데 이렇게 여기 있을 수도 없고…….’
나는 그를 보고 말하였다.
“내 집으로 같이 가시지요. 가서 같이 주무시든…… 이야기라도 하시든…….”
“형께선 인생이라는 것에 대하여 진실한 마음으로 생각하여 보신 일이 있습니까…… 너무나 실례의 말씀일는지도 모릅니다마는…… 실례니 뭣이니 사회 체면이니 하는 것은 벌써 내버린 셈으로 있는 터이니까 우선 그런 것은 형장께 양해를 받기로 하고…… 내가 늘 형 같은 이를 뵈오면 토파하고 싶어하던 이야기나 하기로 하지요…….”
우리가 같이 집으로 돌아온 것은 세시 반이나 되었을 때다. 자다가 깬 어린 누이가 만들어 준 홍차 그릇을 가운데 끼고 앉아 우리는 말없이 마주보고만 있다가 책상에 놓인 시계가 네시를 가리킬 때 그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이야기래야 결국 내 이야기, 내 생각…… 이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마는…… 어떻든 좀 들어 주십시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우리 사람이란 동물이 왜 딴 동물에 비하여 비극적 존재일까요…… 나는 우선 이러한 문제를 생각하기로 합니다. 실상은 희극적 존재인지도 모릅니다마는…… 나는 그 문제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즉 우리가 ‘무엇’에 대하여 의혹을 품는다는 것, 이것이 우리 인생의 비극의 시초나 아닐까 하고요…… 뉴턴은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에 의혹을 품고 ‘만유인력 (萬有引力)의 법칙’을 발견하였습니다. 물론 훌륭한 발견입니다마는 그걸로 말미암아 우리의 아름다운 ‘꿈’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지 않았습니까? 사과가 나무에 주렁주렁 달렸다가 농익어서 아래로 떨어졌다, 이것으로 충분하다고는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아름다운 꿈이 아닙니까? 이 꿈은 뉴턴이 이에 대하여 한 번 의혹을 품자 여지없이 무참하게도 깨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그 아름다움을 영구히 잊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즉 우리가 무심히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볼 때에 반드시 뉴턴의 인력설(引力說)을 연상하지는 않으니까요.
하늘은 왜 푸르른가? 춘하추동의 절계(節季)는 왜 순환하나? 비는 왜 오며 바람은 왜 부나? ……다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과학의 발달로 하여서 우리의 아름다운 꿈이 적지않이 미적 요소를 잃게 되었다고는 하지만도 그래도 오히려 우리는 그곳에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생각이 한번 인생이라는 것에 이르면, 즉 우리가 인생이라는 것에 의혹을 품게 되면 우리는 할 수 없이 인생의 최대 비극을 깨닫게 되고 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사람이란 놈은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우리는 무엇을 하러 이 세상에 나온 것이냐, 우리는 결국 우리의 한없는 욕망을 만족시키려고 허위대다가는 죽는 동물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냐―이러한 것을 생각하기에 이르러 우리 인생의―아니 그렇게 커다마하게 떠들 것이 아니라 ‘나’라고 하지요―나의 비극은 그예 발생하고 만 것입니다. 결국에 있어서 나의 이야기가 허무사상가(虛無思想家)나 염세사상가(厭世思想家)나 다름없는 이야기가 되어 버릴지도 모르지만 어떻든 들어 주십쇼.
내가 인생이라는 것에 의혹을 품기 시작한 것은 열네 살 적 중학교 이학년 때였습니다. 그때 나는 가장 평범한 중학생으로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는 세수하고 밥 먹고 책보 끼고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끝나면 운동을 좀 하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저녁이 되면 저녁 먹고 그리고 놀러 돌아다니든 공부를 하든 하다가 자리에 쓰러져 자는 한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매일 판에 박아 놓은 듯이 이런 생활을 하여 오는 중에 어떤 날인가 나는 문득 이러한 생각을 하여 보았습니다. 나는 과연 무엇을 하러 이 세상에 나온 것일까 하고요. 밥을 먹으러 나온 것인가? 아니다. 밥은 나의 생명과 건강을 위하여 먹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잠을 자러 나온 것인가? 아니다. 잠은 새로운 힘을 기르기 위하여 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공부하러 나온 것인가? 이것은 그때 어린 나로서도 한참 생각하였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끝끝내 나는 그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부는 우리의 지혜를 돋우기 위하여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똥 누고 오줌 누기 위하여 이 세상에 나온 것이냐? 그것은 물론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생명과 건강과 새로운 힘과 그리고 지혜를 가지고 놀기 위하여 이 세상에 나온 것일까? 그러나 어린 나로서도 우리의 인생의 진의를 그러한 곳에 찾기는 죽어도 싫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무엇을 하려고 나온 것일꼬? 앨 써 생명을 보존하고 건강을 잃지 않고 새로운 힘과 지혜를 길러 뭣에 쓰자는 것인고 하고 그때 나는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매일 하는 일에 자는 것과 밥 먹는 것과 공부하는 것과 노는 것과 또 똥 누고 오줌 누고 하는 것 외에는 한 가지도 없으니까요! 나는 더욱더욱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끝끝내 내가 이러한 일 외에 매일 하는 일이 ‘시계 태엽 감는 일’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나는 비관하여 버렸습니다. 내게는 우리 인생이 결국 하루하루 시계 태엽을 감아 가다가 죽어 버리는 것같이 생각된 까닭이에요.
참으로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스운 일이든 싱거운 일이든 간에 나의 존재가 만약 후천적으로 비극적의 것이 되었다 하면 그것은 분명히 이때, 열네 살 때 이런 생각, 이런 의혹을 품게 된 순간부터일 것입니다. 나는 그때부터 모든 일에 흥미를 잃었던 것입니다. 학교 공부가 하잘것없는 것 같아서 며칠씩 결석을 하였고 공연한 생각 객쩍은 생각에 잠기어 잠 못 자는 밤이 며칠씩 계속되었습니다. 나는 그때부터 흐린 날, 비 오는 날을 좋아하게 되고 그리고 학교 안 가는 날 공일 같은 때면 대낮에도 침침한 방 안에 자리를 깔고 이불을 들쓰고 누워서는 혼자서 덧없는 공상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공상이라는 것도 결코 흔히 어린이들이 하는 그러한 ‘환’하고 즐거움고 천진스런 공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과연 어떠어떠한 공상에 잠기었던가 물론 일일이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마는 대개 이러한 것이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즉 ‘해가―태양 말씀입니다―해가 서쪽으로 떨어질 때 영구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떠할꼬? ……영구히 암흑만이 계속된다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일꼬! 수전노는 이 무서운 어둠에 한없는 공포를 느끼고 금고를 부둥켜안고 있을 것이며 연애 지상주의자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끼고 어둠 속에서 떨고 있을 것이며 허무사상가들은 자기네들 시대가 온 것이라고 어둠 속에 축배를 올리며 미쳐 날뛸 것이며…… 하여튼 얼마나 흥미있는 일일까?’ 하고 대개 이러한 병적(病的) 공상에 잠기어서는 혼자 이름 모를 기쁨에 만족을·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공상 중에도 가장 나의 기쁨을 고조시키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할 사이에 누가 와서 나를 죽여 버린다면 어떡할 것일꼬?’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내가 알지 못할 사이’가 아니라도 좋은 것이었습니다. 누구한테 내가 죽음을 받는 것인지 어떠한 까닭으로서인지 그러한 것을 모르고 아무 고통도 없이 잠자듯이 죽어도 좋고 또는 ‘죽음’이라는 것의 한없는 공포를 맛보자면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몸을 뒤럭거리며 소위 ‘단말마(斷末魔)’의 부르짖음을 소리소리처 가며 죽음을 받아도 좋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고 있는 ‘죽음’이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공포에 싸인 고통으로 찬 그러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나에게는 절대로 즐거웁고 기쁘고 그리고 아름다운 것―한없는 매력을 가진 것같이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법열경(法悅境)이라는 것, 신비경(神秘境)이라는 것 ― 이러한 것은 아무래도 ‘죽음’ 외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슨 자진하여서 자기 존재를 부정한다거나 하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에는 물론 나라는 인물이 그다지 용기가 있다든 결단성이 있다든 하지 못한 까닭도 있었겠지마는 이것의―그렇게까지 죽음이라는 것에 한없는 동경(憧憬)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 그때 자살을 하지 못한 것의―가장 중대한 원인은 나의 어머님이 너무나 깊이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이었습니다. 참 어머님 이야기가 나왔으니 아주 말씀합니다마는 나의 어머님은 일찍이 자살을 계획하셨던 일이 있는 분입니다.”
여기서 그는 잠깐 말을 끊고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여 두어 모금 빤 다음에 후― 연기를 내뿜고 그것이 천장으로 소리 없이 아롱지어 올라가는 양을 이윽히 보고 있더니 그것이 자취 없이 흩어질 임시하여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그것은 내가 일곱 살 적 약주가 늘 과하시던 가친께서 대취하셔서 돌아오시다가 어두운 비탈길에서 낙상하여 뇌진탕으로 돌아가신 후 이레 되던 날 저녁때 일이었습니다. 동무의 집에서 실컷 놀다가 어둑할 임시하여 집으로 돌아온 나는 마당을 들어서자 안방에서 어머님 우시는 소리와 동릿집 아주머니가 무어라고 타이르듯이 말하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억제하고서 발소리를 죽이고 미닫이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어머님은 흑! 흑! 느껴 울고 계신데 동릿집 아주머니가 이러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 여보 아직도 나 어린 자식을 두고 글쎄 그게 무슨 짓이란 말이오! 그래 지각없는 일도 유분수지…… 어린 자식 생각만 하더라도 꾹! 참을 일이 아니오? 아무리 가신 어른이 그리우시다 하더라도 어린 자식 생각을 하고서야 어찌…… 원 그게 무슨 분수없는 짓이오.’ 나는 이 말을 끝까지 듣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냥 나는 방으로 달려 들어가 이렛동안 물 한 모금 안 마신 어머님의 빼빼 마른 가슴에 그대로 머리를 파묻고 엉엉 울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공연히 무서운 생각이 들어 ‘어머니가 날 버리고 가면 안 돼, 안 돼’ 하고 발버둥질치고 울었던 것입니다.
그날부터 어머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진지도 잡수셨습니다. 일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눈물 한 방울―참말로 어떠한 일이 있든 눈물 한 방울 흘리시지 않았습니다. 어머님은 오직 나 하나 키우시기 위하여 한없이, 참말로 한없이 두터운 애정을 가지고서 어머님은 나를 사랑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일찍이 어머님 얼굴에 참말 기쁜 빛이 참말 즐거운 빛이 떠오르는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아니 나는 도리어 그곳에 이 세상에서 있을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사실’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머님은 아버님 돌아가셨던 그 순간에 완전히 그의 생존욕(生存慾)을 잃어버리셨던 것에 틀림없습니다. 어머님에게 있어서 인생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의도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었겠지요. 그러한 어머님이 모성애라는, 죽음보다 더한층 강한, 죽음보다 더한층 위대한 ‘힘’에 이끌리어 이를 악물고 인생의 행진곡을 울음과 함께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사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느 시인이었던가 이러한 말을 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 존재 부정 이상의 비극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그러나 우리 어미님의 존재는 확실히 그 이상의 비극이 될 것이겠지요.
그야 어떻든 어머님의 ‘생(生)의 목적’이 이미 그러한 것인 이상 어머님이 나를 길러 주신다는 것은 ‘사람의 어머니’ 되는 이의 가히 자랑할 만한 특권으로서가 아니라 ‘사람의 어머니’인 까닭으로의 너무나 가엾은 의무로서였던 것입니다. 까닭에 철이 좀 난 뒤의 나는 어머님의 사랑을 속 깊이 느낄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은 감정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그 ‘사랑’은 ‘피’ 아니고는, 아니 ‘목숨’ 아니고는 바꿀 수 없는 것이겠지요.
부모에게서 남편에게로 남편에게서 자식에게로 옮아가는 것이 ‘여자의 사랑’이라고는 하지만도 나의 아버님에게서 나에게로 옮아온 어머님의 사랑은 너무나 가엾은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말을 잠깐 끊고 가만히 한숨지었다. 그의 눈에 애련(哀憐)의 빛이 잠깐 돌더니 눈가에 한 방울 이슬이 맺혔다. 그러다가 그는 자기의 감정을 억지로라도 억제하려는 듯이 갑자기 허, 허, 허…… 하고 너틸웃음을 웃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그러한 어머님에게 대하여 나라고 하는 놈은 너무나 몹쓸놈이었습니다. 어머님의 슬픔을 위로하여 드린다거나 또는 어머님의 근심을 덜어 드린다거나 하기는 고사하고 나는 너무나 가지가지의 불효만을 끼쳐 드렸던 것이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나의 기질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아까도 말씀 여쭈었던 것과 같이 ‘시계태엽을 감아 주기 위하여 살아가는 인생’을 설워하며 매일이라고 햇빛 없는 방 속에서, 숲 속에서 병적의 공상만을 하여 왔던 것입니다.
그러자 어머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를 사랑하여 주시던 오직 한 분의 어머님은 내가 열여덟 살, 즉 중학을 마친 해 가을에, 마치 다 탄 촛불 모양으로 소리 없이 이 세상을 떠나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무서운 ‘힘’으로서도ㅡ―바로 아까 말씀한 ‘죽음’보다도 더 강하고 죽음보다도 더 위대한 ‘사람의 어머니’인 까닭으로의 희생적 사랑의 힘으로서도 어머님을 더 사시게 할 수는 도저히 없었던 게죠.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나는 갑작스레 나의 마음이 가뿐하여진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면 어머님의 사랑에 대하여, 그 아무것하고도 비길 수 없는 한없이 큰 사랑에 대하여 너무나 불손한 언사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하여튼 어머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극히 자유스러운 호흡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러한 어머님의 너무나 ‘가엾은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을 받고 있는 동안 나는 몹시도 견디기 어려운 압박을 받고 있었던 것이니까요.
까닭에 열네 살 적부터 내 마음에 검은 그림자를 던지기 시작한 나의 염세사상이 때로 나에게 나 자신을 처결(處決)하기를 요구하는 일이 있어도 어머님의 일을 생각하는 순간에 나의 온갖 자유는 여지없이 속박을 받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즉, 어머님과 나와의 관계를 말씀할 것 같으면 나를 위하여서의 어머님이었으며 어머님을 위하여서의 나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서로 ‘저편’을 위하여 살아왔던 것이며 또한 ‘저편’으로 말미암아 죽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과연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입니까. 그리고 그와 동시에 또한 얼마나 비참한 사실이었던 것입니까?
까닭에 나는 어머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때 ‘자살’을 꾀하였던 것인가요? 아니올시다. 어머님의 죽음은 나에게 자유를 주는 동시에 또한 나의 생존욕을 억지로 고취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면 모순된 말이겠으나 사실에 있어서 어머님의 죽음은 그의 생존시 이상의 압박(?)을 나에게 가하였던 것입니다―즉 이머님의 십일 년 동안을 하루같이 비할 데 없이 큰 희생적 사랑으로써 길러 주신 데 대하여서라도 나는 곧 이 세상을 버릴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까닭에 지금 말씀한 바와 같이 억지로라도 나는 살아갈밖에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까닭에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그때까지 사 년 동안 신경병환자, 우울병환자로 똑같이 염세미를 띤 인생관, 똑같이 쓸쓸한 심정, 그리고 똑같이 병적의 공상을 가지고 지내 온 나는,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그 순간 마음에 자유를 느꼈던 것이며 그 다음 순간 그 자유를 스스로 취소하여 버리고 나의 모든 생각을 고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즉 독서와 사색으로써 나의 인생관을 어떠하게든지 좀 ‘환’한 것으로 고칠 수는 없을까? 하고요.
그러나 여기에 관한 이야기는 길게 늘어놓을 필요가 없을 줄 믿습니다. 그 결과에 있어서, 즉 이 년 넘는 독서생활, 그리고 사 년 가량의 사색 끝에 이러한 것들이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한 이십사 세 청년인 나 자신을 나는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에요. 뿐만 아니라 나는 인생, 아니 자기 존재에 한없는 권태조차 느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생존욕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생존욕’을요? 네 과연 나는 생존욕을 완전히 결(缺)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한 가지 말할 것이 있습니다. 즉 ‘인생’에 대하여 한없는 ‘권태’를 느낀 ‘나’는 그 대신에 ‘생존욕’이 조금도 없는 ‘나’라고 하는 ‘존재’에 비할 데 없이 큰 흥미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이렇게요. 형께서는 이 심정의 기미(機微)를 이해하시겠습니까? 물론 이해 못 하신다면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마는…… 다만 이에 대한 사실, 즉 내가 ‘인생에 권태를 느낀 나 자신’에 한없이 큰 흥미를 느꼈다는 것, 이것 하나만 기억하여 주시면 그만입니다.”
그는 꺼진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그 ‘흥미’라는 것을 말씀할 것 같으면 이렇습니다. 즉 나라는 존재를 완전히 유희화(遊戱化)시킨다는 것 ― 이것에 나는 흥미를 느꼈다는 것입니다. 물론 변태적인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인 것은 나도 부인하지 않습니다마는…… 좀더 자세하게 설명 하겠습니다.
생존욕을 완전히 상실한 인생, 형장께서는 우선 이 특수한 존재가 어떠한 것인가를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백지와도 같은 것입니다. 즉, 생존욕을 완전히 잃고 있는 나에게는 아무런 번민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고통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로 아무런 욕망도 아무런 관념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으로 보아서 ‘그것’은 대오입도(大悟入道)한 불교의 선승(禪僧)에게도 비할 수 있을 것이겠지요.
이러한 ‘백지 인생’에 칠(漆)을 하여 보면 어떠할까?―하는 생각이 나의 흥미를 끌어내었다는 것입니다.
‘백지’에다 칠을 한다는 것, 이것은 즉 ‘나’라고 하는 인물을 완전히 ‘나 아닌 인물’로 만들어 보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원래의 나’와는 판연히 틀리는 ‘새로운 나’를 제조하여 보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형장! 이보다 더 흥미있는 일이 또 있겠습니까? 아니 그것은 둘째 치고라도 이러한 것을 다만 상상하여만 본다 하더라도 재미있는 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살아간다’ 하는 데 권태를 느낀 ‘나'에게 그것은 분수에 넘치는 대상(代償)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것은 어떻든 간에 내가 ‘새로운 나’를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이 들자 문제가 하나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만약 새로운 나를 만든다 하면 ‘어떠한 나’를 만드는 것이 그중 좋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실로 이레 동안을 이 선택에 몰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즉 ‘이 세상에서 참말 행복스런 사람’을 만들면 그만이니까요. 그러면 ‘이 세상에서 참말 행복스러운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까? 그것은 아주 용이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 할 수 있겠지요. 즉 정신이상차말고 참말 행복스러운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까닭에 나는 ‘새로운 나’를 정신이상자로 만들어 버렸으면 그만 아닙니까?
그러나 여기서 형장이 오해하실 것을 두려워하여 나는 정신이상자에 관하여 간단한 설명을 하겠습니다.
내가 정신이상자가 되려고 한다 하지마는 무슨 이중인격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형께서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 L. Stevenson)의 「닥터 지킬 앤드 미스터 하이드(Dr. Jekyll and Mr. Hyde)」를 읽으신 일이 있으십니까? 물론 문학자이신 형께서는 읽으셨을 줄 믿습니다마는…… 하여튼 나는 그러한 인물이 되기는 참으로 싫으니까요. 그렇다고 몽유병자가 되려는 것도 아닙니다. 몽유병자라는 물건은 반드시 비극(悲劇)과, 아니 비극을 지나쳐서 참극(慘劇)과 관런하는 것이 통례이니까요. 까닭에 나는 ‘이 세상에서 참말 행복된 존재’라는 수식어를 꼭 가지고 있는 정신이상자가 되기 위하어서 ‘희극(戱劇)만을 연출하는 정신이상자’가 되려는 것입니다. ‘희극’만을 연출한다는 것, 이것은 이것대로 중요한 요점 인 것입니다.
여기에 내가 희극이라고 부르는 것은 ‘허식 (虛飾)’과 ‘허례(虛:禮)’로 찬 세상 사람들이 이르는 바의 희극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뒤집어서 말할 것 같으면 허식과 허례를 완전히 버리고 나선 새빨간 인간 본래의 ‘알몸뚱이’가 하는 언동에 붙여 놓은 것이 내가 말하는 희극이라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잘 이해하여 주십시오.
재미도 없는, 아니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하여 죄송합니다마는 마저 들어 주십시오. 그러면 희극에 관한 실례를 두어 가지 말씀하겠습니다.
우리는 가끔 불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집이 활활 타고 세간이 활활 타고 사람들이 갈팡질팡하는 것을 봅니다. 그때에 우리는 처참한 감정을 맛보고 연민의 정을 일으키고 또한 몹시도 흥분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형께서는 때때로 이 ‘흥분’,으로 말미암아 일종의 ‘유쾌한 맛’을 볼 때가 없으십니까? 더구나 사람들이 어찌 된 것을 목도할 수 없는 때, 예를 들면 멀리 떨어진 곳에 불이 일어난 것을 볼 때 (물론 반드시 그렇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때때로 ‘통쾌(痛l央)’에 가까운 감정을 맛보시는 일이 없으십니까?
‘야― 시원스럽게 잘도 탄다!’ 하고 소리치면서 온통 길거리로 뛰어다니고 싶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때라도 우리의 그 ‘이상한 충동’을 억제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닙니까? ‘인사 체면’을 차릴 줄 아는 우리의 ‘마음’이 이 욕구를 견제하고 있는 까닭에 우리는 마음에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만약 이곳에 불이 타오르는 것을 보고 춤을 추며 ‘통쾌! 통쾌!’를 부르짖는 사람이 있다 하면 우리는 조금도 서슴지 않고 그의 ‘정신상태’에 의혹을 품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것을 가리키어 ‘정신이상자’가 연출하는 ‘희극’이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실상 그러한 희극(?)은 정신이상자 아니고는 못 할 일이겠지요. 다시 말하자면 ‘인간 본래의 알몸뚱이’가 아니고는 못 할 일이겠지요. 나는 이것, 즉 마음에 하고 싶은 바를 누구 꺼릴 것 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만약 ‘불 이야기’가 극단에 가까운 것 같은 ‘혐의’가 있다 할 것 같으면 다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여기서 그는 잠깐 생각하는 모양이더니 다 탄 담배를 재떨이에 던지고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형장, 여기에 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합니다. 그 사람의 용모가, 또는 태도가, 또는 차림차림이, 또는 행동이 우리를 웃길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그 사람과 퍽으나 친한 사이가 아니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을 면대하고서는 또는 여러 사람 있는 데서는 아무리 우리가 웃고 싶다 하더라도 무한한 고통을 맛보면서라도 웃음을 참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인사 체면이 우리에게 그러한 실례되는 행동을 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이러할 때 즉 웃고 싶을 때 아무도 꺼릴 것 없이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는 것입니다.
또는 목을 놓고 울고 싶을 때 누구 꺼릴 것 없이 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는 것입니다.
까닭에 내가 나 자신을 ‘개조’하는 데 ‘그것’을 ‘정신이상자’로 하겠다 하는 것은 결국 내가 정신이상자에게서 ‘이 세상의 으뜸 되는 행복’을 깨달았다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정신이상자의 언동, 아무도 꺼릴 것 없이 자기의 하고 싶어하는 바를 할 수 있는 ‘그 점’을 취한 것입니다.
까닭에 만약 정신이상자 아니고도 부러워할 만한(?) 심경(心境) 속에서 소요할 수 있다고만 하면 나는 물론 구태여 정신이상자라는 ‘삿갓’을 쓰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정신이상자 외에서 이러한 ‘참말 행복’을 발견할 수는 없었던 것 입니다.
이 참말 행복은 절대적의 것인 모양입니다. 나는 과연 얼마나 큰 ‘기대’와 얼마나 큰 ‘동경’과 그리고 얼마나 큰 ‘기쁨’으로 ‘정신이상자'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인지요. 그 당시의 나의 마음속을 혹은 형께서도 이해하실 수 있으실는지도 모릅니다.
그야 어떻든 나는 생각이 이에 미치자 생전 처음으로 참으로 유쾌한 웃음을 웃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계집을 완전히 정복하였을 때의 기쁨 같은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그러나 나의 취하고자 하는 ‘언동’이 비록 정신이상자의 ‘그것’과 관련이 있다고는 하지만도 그것이 결코 ‘광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형장께서는 우선 이해하여 주셔야 되겠습니다.
형께서 오해하실 것을 염려하여 이제까지 수없이 되풀이하여 놓은 것을 또 한번 되풀이합니다마는 그것은 ‘사람의 맛’을 완전히 버린 ‘광란’―얼마쯤 비극인 것같이 생각은 되면서도 그 반면으로 몹시 환한 ‘분위기’ 속에서 빚어 나온―그러한 ‘연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허례와 허식, 이러한 인사 체면을 완전히 버리고 조금도 구애함 없이 자기의 하고자 하는 바를 하여 간다는―그러한 약간의 희극적 요소를 그 속에 품고 있는 비극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비극?―녜 그것은 비극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비극은 얼마나 많은 기쁨을 내게 주었던 것이며 얼마나 ‘끈기 있는’ ‘매력’으로 나를 잡아끌었던 것인지, 그리고 현재에 있어서도 나의 마음을 솔깃하게 하는 것인지, 그것을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떻든 간에 너무나 전제(前提)가 길었으니 이제 무어 내가 ‘그때로부터 어떠한 생활을 하여 왔는가’를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무슨 ‘제이오디케이(J. O. D. K)’의 프로그램 모양으로 차례차례 번을 찾아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형장! 내 생활에서 ‘연락’이라는 것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이고 내 행동에서 ‘인과관계(因果關係)’ 같은 것을 끄집어낼 수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내 생활, 내 행동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그대로 하여 온’ 그 순간 그 순간의 ‘연쇄(連鎖)’일 따름에 지나지 않으니까오. 까닭에 나는 이제 형장께 ‘토막 토막’ 잘린 내 생활의 몇 가지를 이야기하여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원래가 나라고 하는 놈이 제 자신에게 ‘신경병환자’니 ‘우울병환자’니 하는 이름을 붙이고 있느니만큼 ‘외로움’이니 ‘애달픔’이니 ‘술픔’이니 ‘쓸쓸함’이니 하는, 이러한 ‘소극적 방면’에 대한 ‘감수성’은 남보다 ‘투철하게’ 강하였던 것입니다. 까닭에 나는 때때로 철없는 장난을 하이 ‘천진(天眞)’한 ‘근대 청년’들의 ‘모멸’이라든 ‘조소’를 받는 데서 이름 모를 기쁨을 맛보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 것 같으면 대개 이러한 것입니다.
어떤 때 나는 나이프와 포크질이 하고 싶어 저녁을 먹으러 카페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곳에는, 아직 초저녁 임에도 불구하고 소위 모던 보이 둘이서 위스키 잔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옆 테이블로 가서 자리를 정하고 앉아 ‘정식(定食)’을 시켰습니다. 그것을 보고 그 두 사람은 내 쪽을 흘깃흘깃 보면서 멸시하는 빛을 띤 눈초리로 저희끼리 서로 동의(同意)나 청하는 듯이 마주 바라보고는 삐죽! 웃었던 것입니다. 아마 나의 ‘차림차림’이라든지 용모가 이러한 곳에 시간을 대어서 저녁을 먹으러 들어올 사람같이는 수긍되지 않았던 게죠!
나는 그들이 확실히 나를 멸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아니 아무 거리낌 없이 멸시할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다는 데서 그들이 일종의 만족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웬일인지 알지 못하게 나도 그들을 멸시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는 나의 ‘조고마한 장난’으로 그들의 ‘나에게 대한 멸시’를 확대시켜 줌으로써 맛보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형께서는 혹은 이것을 가리키어 ‘가장 비굴한 행동’이라고 하실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내가 타고 나온 성질이니 어찌할 길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나는 꼭 이 장난이 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던 것 이니까요…….
우선 수프가 내 앞에 놓이자 나는 넥타이 핀을 ㅂ빼어 냅킨을 가슴 한복판에다 찍어 달았습니다. 달고 나서 흘깃 그 사나이들 쪽을 바라보니 나의 예상한 그대로 그들의 얼굴에는 멸시하는 빛과 함께 멸시할 수 있는 사람과 대하고 있는 데서 깨닫는 일종의 ‘기쁜 빛’이 떠돌았던 것입니다. 나는 만족하여 스푼을 들고서 저쪽에서부터 내 앞으로 떠먹었습니다. 그렇게 먹어 가며 나는 내 머리 위에 그들의 멸시하는 눈초리를 깨달았습니다.
다음에 나는 빵을 나이프로 잘라 먹었습니다.
비프스테이크는 가장 대담한 소리를 내어 가며 나이프질을 하였습니다.
프라이드 피시는 포크로 꿰어 들고 먹었습니다.
아스파라거스는 한 개를 온통 베물어 먹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동안에도 나는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되는 그들의 멸시를 콧등이 위에 확실히 인식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멸시는 내가 핑거볼의 물을 한 모금 마시었을 때 드디어 ‘홍소(哄笑)’로 변하여 버렸던 것입니다.
물론 나의 그들에 대한 비웃음도 그와 동시에 폭발하였던 것입니다마는…….“
나는 그때의 광경을 다시금 눈앞에 그려 보려는 듯이 멀거니 맞은 편을 바라보고 있다가 ‘하하, 하, 하’ 하고 호걸웃음을 웃었다. 그러나 그는 즉시 웃음을 거두고 ‘어떤 때는……’ 하고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어떤 때는 또 이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집안에만 붙박여 있었던 몸이라 어디로든지 한바탕 휘돌아다니고 싶어 안국동 네거리로 뛰어나갔던 것입니다. 원래 나온 목적이 그러한 것이니까 정처도 없이 우선 종로 네거리로 발길을 향하였던 것입니다. 내가 막 종각 앞을 지날 임시하여서 갑자기 소나기를 만났습니다.
쨍쨍하게 볕이 내리쬐다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쏟아진 터이라 거리 위의 사람들은 모두들 백화상점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처마 밑으러 다가선다, 또는 목적한 곳으로 달음질친다…… 어떻든 야단법석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때 기약지 않고 내 마음속에 ‘어린이와 같은’ 자랑이 떠올랐습니다. 즉 ‘너희들은 모자를 위하여 옷을 위하여 또는 신발을 위하여 그렇게들 야단이지만 날 좀 보아라 어떤가!’ 이러한 ‘철없는 우윌감’을 느끼고 싶어 견디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까닭에 나는 죽죽! 쏟아지는 소낙비를 그대로 맞아 가면서 나의 산보를 계속하였던 것입니다. 하하…….
또 어떠한한 때 내가 구리개 네거리로 걸어가려니까 갑자기 ‘앵앵앵’ 하는 경적 소리가 남대문 쪽으로서 들려 왔습니다. 돌아다보니 소방 자동차가 이리로 향하여 질주하여 옵니다.
원래가 ‘소방자동차’란 놈은 우리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는 물건으로 그 ‘앵앵앵’ 하는 경적 소리부터 깊은 밤중 같은 때 들으면 음산하고 야릇하고 언짢은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마는 그렇게 대낮에 듣노라니 아주 판연하게 다른 맛이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소방자동차란 놈이 한번 질풍같이 달려오자 거리 위의 모든 것은, 전차라 인력거라 자전거라 거리 자동차라 길 가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모든 것은 있으나 없음이나 다름없고, 오직 넓은 거리 위에 존재하는 것이란 빨갛게 칠한 소방자동차 한 대라는 그러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형께서도 일찍이 경험하여 보신 일이 있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떻든 그것이 내게는 한없이 장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 중에도 더욱이나 ‘위세당당’하여 보이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교통순사 옆을 돌파하여 나갈 때였습니다. 그것이 만약 보통 때라 할 것 같으면 규정에 위반하였다고 자동차 운전수를 붙들고서 또는 좌측통행을 하지 않았다고 자전거 탄 아이를 붙들고 한껏 기세를 높이는 교통순사도 그만 이 소방자동차라는 ‘괴물’ 앞에서는 그 ‘존재’를 여지없이 무시당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까? 그뿐 아니라 자기의 존재를 무시당하면서도 도리어 ‘그것’을 위하여 길을 치워 주어야만 할 것이 아닙니까?
이것을 생각한 순간 난 저도 모르게 ‘통쾌하다!’고 소리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봉건시대의 전제군주(專制君主)를 예를 들 것 같으면 ‘진시황(秦始睾)’이라든 ‘네로(Nero)’ 같은 이를 알지 못할 사이에 연상하고 그 ‘절대권력’과 같은 것에 마음 깊이 탄복한 결과 손뼉까지 쳤던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잠깐 이야기를 끊었다. 그리고 가장 유쾌한 듯이 껄껄……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몹시도 공막(空漠)한 느낌을 나에게 주는 음향이었다.
그는 다 식어 버린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한참 동안이나 멀거니 천장을 보고 있었다. 그 동안에 태운 담배로 하여 방 안에 연기가 숨막히도록이나 가득하였으므로 나는 일어나서 창문을 열어 젖혔다. 싸늘한 바람이 밤을 새워 가며 창 열어 주기만 고대하고 있었던 듯이나 불어 들어왔다.
바깥에는 ‘꿈을 차차로이 깨어 가는 우리의 서울’이 오전 여섯시 이십 분 전에 하품하고 있다.
나는 이윽하니 창 밖 청계천(淸溪川) 빨래터에 새파란 손을 찬물에 담그고 아주 무표정한 얼굴로 빨래를 하고 있는 오십 넘은 아낙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의 가엾은 친구’가 자기의 이야기를 마저 들어 주기를 바라고 앉았는 생각을 하고 창을 닫고 내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는 담배를 새로 붙여 물고 스스로 자신을 비웃기나 하는 듯이 자기 입을 삐쭉거리고 싱겁게 웃고 나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형장께서는 우리 인생 이란 물건이 과연 얼마만한 정도의 ‘허위’로 꽉! 찬 것인지를 생각하여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이렇게 ‘그럴 듯한 말’을 하고 있는 나 자신부터가 우선 얼마만한 허위를 지껄대고 있는 것인지, 생각하여 보면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것이 인생인가 봅니다.
서로 속이고 서로 속고, 이렇게 한평생 살다가 싱거웁게도 죽어 버리는 것이 인생인 것이라 깨달을 때 가장 자연적으로 ‘염인병환자(厭人病患者)’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요?
없는 놈은 있는 체, 있는 놈은 없는 체, 못난 놈은 잘난 체, 잘난 놈은 더 잘난 체…… 하여튼 가장인형(假裝人形)이 즉 우리네 사람이란 동물이 아닙니까?
이만한 예비지식을 가지고서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관찰할 때 나는 과연 얼마나 재미있는 희극을 그들의 가장 분망(紛忙)한 걸음걸이에서 구경할 수 있었던 것인지요.
발자크(Balzac)의 『인간희극(La comedie humaine)』 이 십구세기 불란서의 완전한 사회사(社會史)라 할 것 같으면 내 눈에 비친 희극(?)은 ‘이십세기 경성의 허위로 찬 실극(實劇)’이라고― 말이 좀 어색합니다마는―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야기는 길게 늘어논대야 형장께서도 깊이 생각하고 계신 것을 내가 되풀이하게 될 따름이니 그만두고 내가 이 ‘허위로 찬 인생’을 번릉(翻弄)하였던 이야기나 잠깐 하겠습니다.
분명히 재작년 가을이라고 기억합니다. 다방골 사시는 형께서는 물론 경험하신 바이겠으나 광교 아래에는 일년 동안 언제든 ‘애거지 〔小乞人〕 ’떼가 모여 있습니다. 그놈들이 낮 같은 때는 아주 ‘낙천가(樂天家)’(?)의 본령을 발휘하여 띕박질도 하고 팔씨름도 하고 콧노래도 부르고…… 야단법석 이 아닙니까? 그리고 할 일 없는 사람들이 천변을 지나가다가 발을 멈추고 무슨 재미있는 연극이나 구경하는 셈으로 곧잘 그놈들의 장난을 보지들 않습니까?
나는 그때 광교를 지나다가 이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 절뚝발이 하나가 제법 한몫 끼고 싶은 듯이 동무 거지의 뜀박질을 하고 있는 것을 곁에서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그 순간 나의 마음에 한 가지 ‘철없는 생각’이 들어 그 생각을 실증(實證)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으므로 곧 다리 아래로 내려가서 시험삼아 장난을 하여 보았던 것입니다.
무엇 이냐고요? 하 하…… 지금 이야기하겠습니다.
내가 다리 아래로 내려가 거지들 모여 있는 곳에서 세 칸통 가량 떨어진 곳에 이르자, 나는 길 가던 사람들이 모두 걸음을 멈추고 나를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길 가던 사람들이 우선 이러하니 거지들이 일제히 하던 장난을 그치고 내 쪽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의 일입니다. 나는 거지들 쪽을 향하여 손짓을 하고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습니다. 그것을 본 그들의 눈은 갑자기 ‘거지의 본능’으로서 ‘탐욕’으로 말미암아 빛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라고 내 앞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이 장안 천지에 일부러 ‘거지의 소굴’로 찾아와서 자선사업, 자선사업? 하 하…… 자선사업을 하려는 독행가(篤行家)의 존재를 시인할 수 없었던 게죠. 모두들 허욕(虛慾)으로 찬 눈을 의아스러이 굴리면서 내 쪽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뿐 아니라 다리 위의 사람들의 호기심이 나의 일거일동을 거지들과 똑같은 열심히 주의하고 있었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겠지요.
나는 그 두 종류의 사람들을 일시에 만족시켜 주기 위하여 돈을 뿌렸던 것입니다. 즉 거지들의 탐욕을 채워 주고 구경하고 있는 자들의 ‘그네들이 마음놓고 모멸할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다는 데서 깨닫는 만족감’을 맛보게 하여 주기 위하여서 말씀입니다.
결과는 나의 예상하였던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즉 거지떼는 서로 앞을 다투어 돈 떨어진 내 발 앞으로 달려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절뚝발이’가 ‘선봉대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 하…….
참으로 그것은 세상에도 진기한 광경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좀 과장한 말 같은 ‘혐의’가 없지 않으나 그것을 인생의 ‘축도(縮圖)’라고 할 수 있겠지요.
바로 요전 순간까지 평화롭던 ‘우리 거지 사해동포 세계’에 대분란(大墳亂)이 야기되었습니다. 몇십 전의 돈으로 말미암은 투쟁이 그곳에 전개되었습니다. 물론 ‘강식약육(强食弱肉)’이라는 문자가 가장 웅변으로 그곳에 입증(立證)되었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겠지요…….
다리 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이중으로 쾌감을 맛보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즉 거지들의 금전을 위하어서의 쟁투를 구경할 수 있는 데서, 또 마음 턱 놓고 ‘나’라고 하는 사람을 ‘미친놈’이라고 비웃을 수 있는 데서 그들은 틀림없이 쾌감을 맛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그들 중에서도 그 절뚝발이가, 아니 그 ‘가짜 절뚝발이’가 몇 푼 돈 앞에 아무 거침없이 ‘탈’을 벗어 버린 것을 깨달은 사람이 있었던 게죠.
“저놈 뚝발이가 성한 놈보담 먼저 뛰어왔네!”
“저놈이 내일버텀은 곰배팔이 노릇을 할 테지? 원 참…….”
“저놈이 꼭 정말 병신인 줄만 알았지 누가 사지가 멀쩡한 놈인 줄야 꿈엔들 생각했소?”
이러한 소리가 구경꾼 중에서 왁자하게 들렸던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자 나는 어떠한 방법을 안출(案出)하여서든지 그들의 탈을 벗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하였으나 곧 그 생각을 버리고 개천에서 올라와 골목 안으로 도망질쳐 버렸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장난을 하여 보기에는 내가 그들의 삼중 사중의 탈을 쓰고 있으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것에 비할 데 없이 큰 ‘혐오’를 느꼈던 까닭이야요.
실상 몇 전이나 몇십 전으로는 용이히 벗지 않는 ‘가면’인만큼 ‘허위’의 정도가 훨씬 높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겠지요? 참말로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든 ‘허위로 찬 인생’을 비웃기만 한다든, 한탄만 한다더라도 아무 소용 없는 일이니 이만 하고 간단히 이야기를 끝막기로 하겠습니다.
어떤 때는 ‘철인(哲人)’ 디오게네스를 흉내내어 통 속에서 온 하루를 보낸 일도 있습니다…… 아직 촛불을 켜들고 대낮의 거리로 정직한 사람을 찾으러 나간 일은 없습니다마는…….
또 어떤 때는 갑자기 사람들의 얼굴이 보기 싫어 삼 주일 가량 방속에 꼭! 들어앉았던 일도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유달리 마음이 기뻐 ‘장안 천지에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여 줄 여자가 한 명쯤이야 있을 게지!’ 하는 생각으로 온종일 거리로 헤매어 다니며 만나는 여자마다 ‘혹은 저 여자가 남몰래 나를 사모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자세자세 상고하여 본 일도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자동차를 실컷 타보고 싶어 공연히 타고서 장안 천지를 이리저리 돌아다닌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버스를 타는 것이 훨씬 더 재미가 있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운전수 한 사람의 ‘이놈 할 일도 없는 놈인가? 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 하는 듯이 혼자 입을 삐쭉거리는 것을 보는 것보다는 버스 걸과 운전수의 ‘연합’한 비웃음이 내게는 좀더 유쾌한 것이었던 까닭에요. 물론 그야 그러한 때에는 대개 그들의 존재란 내게는 몹시도 몽롱한 것이었음에는 틀림없습니다마는…….
또 어떤 때는 바늘을 실에다 매어 가지고 개울로 낚시질을 하러 나간 일도 있습니다. ‘태공망(太公望)’을 본뜬 모양이죠.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하고 앉아서 사색에 잠기려 하여서가 아니라 태공망의 심경을 내 마음속에 재현시켜 보고 싶었던 까닭입니다…….
이 외에 여러 가지 이야기는 더 늘어놓는대야 별 소용 없겠기에 그만둡니다마는 하여튼 나의 ‘이러한 행동’은 분명히 장안 사람들에게 좋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하였던가 합니다. 까닭에 내가 거리로 나다닐 때 소방자동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도 웃는다든, 손뼉을 친다든 하는 일이 없으면, 혹은 소낙비를 만나고도 그대로 비를 맞고 있지 않고 딴사람이나 일반으로 처마 밑으로 들어가 비를 거닌다든 하면, 그들은―우리 ‘천진스런 서울 사람’들은 적이 실망하는 모양이었습니다.
그야 어떻든 간에 나는 작년 겨울까지 그러한 ‘그날그날’을 보내면서 내가 아주 ‘이상적 정신이상자’가 되어 버렸다고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뜻하지 않았던 ‘공포’가 내 머리를 스치자 나는 세상에도 가장 비참한 ‘존재’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즉 작년 겨울 어떠한 날 아침엔가 나는 다음과 같은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내가 나 자신을 정신이상자로 만드느니 무엇이니 하기 전에 선천적으로 정신이상자나 아닌가?’ 하고요. 그리고 이 의혹은 한걸음 더 나아가 ‘혹은 나라고 하는 놈이 내가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몽유병자나 아닌가?’ 하는 그지없는 공포를 품은 의혹으로 변하여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의혹은 무슨 나 자신의 ‘공상’이 심심풀이로 꾸며 낸 터무니도 없는 ‘그러한 종류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에는―내가 그러한 의혹, 공포를 느끼게 된 데에는 한 가지 움직일 수 없는 ‘근거’가 있었던 것입니다. 즉 나는 그 전날 딴때 없는 정성으로 밤중에 구두를 발갛게 닦아 놓고서 앨런 포의 『블랙 캣(BIack cat)』을 읽다가 새벽 세시나 되어서 비 오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 이튿날 잠이 깨었을 때 나는 내 자리에 ‘진흙 발자국’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은, 즉 그 발자국이 ‘나 자신의 발자국’에 틀림없다는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자리에서 뛰어 일어나 섬돌에 놓인 ‘나의 구두’를 보았습니다. 어젯밤에 닦아 논 채 한 번도 신은 일이 없는 그것이 흙투성이였습니다.
까닭에 나는 머리를 쥐어뜯어 가며 고민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결코 어젯밤에 밖에 나간 일이, 아니 적어도 기억이 없는 이상 그 ‘고민’을 풀 도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크게 부인(否認)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혹은 나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몽유병자가 아닌 것인가?’ 하는 두려운 생각에 몸서리를 치면서 그 ‘사실’을 부인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 ‘전날 밤에 외출한 기억’이 절대로 없는 이상 무엇이 능히 이 사실을, 이 흙투성이 구두의 존재를 ‘몽유보행(夢遊步行)’ 이외의 사실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한껏 고민하였습니다. 이 나의 몽유보행이 거듭한 끝에 드디어 그 무서운 ‘참극’을 일으킬 것을 생각하고는 부르르 떨었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나는 ‘편안한 잠’을 한 시간이라고 자본 일이 없습니다. 이 무서운 의혹이, 비참한 공포는, 나에게서 영구히 사운드 슬립(Sound sleep)을 빼앗아 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밤마다 밤마다 자기 자신을 경계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제 자신조차 믿고 있을 수 없다는 것, 이 ‘사실’보다 더 비참한 사실이 또 존재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나의 그러한 ‘경계(警戒)’가 과연 효과가 있은 까닭이었던지 이번 봄까지 아무 일 없이, 나의 그 의혹, 그 공포를 조장시킬 만한 눈곱만한 사건의 발생도 없이 지내 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금년 사월에 이르러 나는 그 대신에 즉 내가 염려하도록 금단의 ‘몽유병자’가 아니라는 것을 믿고 안도를 느낄 수 있는 대신에 내 마음이 가장 두려운 ‘악마’의 손에 붙잡혔다는 것을 뜻하지 아니한 기회에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며, 또한 이 ‘두려운 사실’을 아무리 싫어도 시인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형께서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나 그것은 즉 이번 봄에 내가 자동차로 사람을 치어 놓았을 때의 일을 가리켜서 하는 말씀입니다.”
그는 여기서 잠깐 이야기를 끊고 ‘그 언짢은 기억’을 나에게 이야기하여 주기 위하여 되더듬느라고 그러는지 힘없는 눈에 고민의 빛을 띠고 한참을 묵묵히 있었다. 나는 마침 우리의 동정을 살피러 한잠 붙이고 나온 누이에게 홍차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여 그것이 나오자 그는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그때 일을 나는 자세히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떻든 그날 밤에 내가 이상하게도 흥분되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아마 어디서 술을 조금 먹었었던 것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무엇이라 형용하면 적절할는지요. 어떻든 불끈 솟아오르는, 아무에게 대한 것도 아닌, 그와 동시에 누구에게든지 대한 정체 모를 울분의 감정을 억제할 길 없이 거리로 돌아다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거리라고 막연하고 모호한 문자를 쓸 수 있을 뿐이지 그날 밤에 어디로 해서 어디로 돌아다니었던지 또는 그 자동차, 운전수 없는 자동차를 어디서 어떻게 발견하였던 것인지는 조금도 모릅니다. 현재 내가 기억하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그 당시에도 생각건댄 확실한 의식은 없었던 게죠.
까닭에 이 사건외 진상을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의 인물인 나이건만 그것을 애애매매(曖曖昧昧)한 중에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은 딱한 일입니다마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하여튼 내가 그 자동차를 발견하고 또 운전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나 자신이 운전하여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것입니다. 다행히, 아니 불행히도 나는 중학을 마치자 동창생 중에 자동차부를 경영하고 있는 친구가 있었던 것을 기회로 둘이서 가끔 ‘삼선평’이나 ‘훈련원’ 같은 데나 가서 장난을 한 일이 있으므로 보통 운전은 할 줄 알았었던 것입니다.
나는 행인 드문 큰거리로 질주하여 갔습니다. 질주하여 가면서 서투른 운전에 대담한 속력을 내는 데서 모험적 쾌감을 맛보고 있던 ‘나’를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는 앞으로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그저 무작정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러자 나는 나의 행로에 갑자기 나타난 ‘한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헤드라이트에 드러난 그의 전신은 웬 까닭인지 나의 마음에 크나큰 파문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나는 지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사나이의 작달막하고 뚱뚱한 몸집이 그리고 가장 거만스럽게도 큰거리를 좁다고 걸어가는 걸음걸이가 이름 모를 혐오를 나에게 주었던 것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엽(枝葉)의 문제요, 내가 그 사나이로 말미암아 갖게 된 혐오감은 혹은 우리가 서로 ‘사람’인 까닭에 갖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렇게 말하는 게 적당하겠지요.
형장……! 우리에게는 ‘창세(創世)’의 오랜 옛날부터 항상 우리 성정(性情)에 잠겨 있어 무슨 조그마한 자극이 있어도 즉시 폭발하는, 골육간(骨肉間)의 증오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또 동성간(同性間)의, ‘동성’인 까닭으로의 ‘증오’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진실로 우리에게는 우리가 서로 ‘같은 사람’이라는 데서 깨닫는 증오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그 사나이를 나의 행로에서 발견하였을 때 참을 수 없는 증오를 그 사나이에게 깨달았다는 것을 아마 그렇게 해석하는 게 옳을까 봅니다.
그야 하여튼 우리의, 그와 내 자동차의 간격은 갑자기 축소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나이는 뒤 한번 돌아다보는 일 없이 그대로 똑바로 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나는 ‘경적’을 울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걷고 있었습니다. 아마 자동차가 길을 돌려 갈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던 게죠.
그 순간 ‘악마’가 내 귀밑에서 속살거렸던 것입니다.
‘너는 저 사나이를 죽여 버려라!’ 하고요. 그러나 나에게는 그럴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악마는 두 번째나 속살거렸습니다. 나는 주저하면서 몇 초 후에 당연히 일어날 결과를 피하려 방향을 돌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세 번째 그리고 마지막의 악마의 속살거림을 듣자, 너는 네가 하고 싶어하는 바를 아무도 꺼리지 않고 하겠다는 것이 숙원이 아니냐? 그러면서도 이제 너는 저 사나이를 죽이지 못한다. 에이! 빙충이 같으니…… 이러한 소리를 듣자, 나는 그 사나이의 몸 위로 자동차를 올려놓아 버렸던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어이없는 듯이 쓸쓸한 웃음을 웃고 나서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이러한 언짢은 이야기로 형장의 마음을 한없이 불쾌하게 하여 드려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마는 이왕 길게 늘어놓은 이야기니 마저 끝을 내겠습니다.
나는 그 즉시로 체포를 당하여 경찰서에 가서 취조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과실로 한 일이냐? 고의로 한 일이냐? 묻는 말에 나는 사실대로 ‘고의로 한 일이로라’고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이 ‘답변’에 그들은 ‘왜……?’ 하고 잼쳐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죽이고 싶어 치어 놓은 것’인 이상 그 외에 무슨 이유를, 동기를 그곳에 발견할 수 있었겠습니까? 까닭에 나는 그대로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취조하던 경부는 어이가 없는 듯이 한참을 벙하니 나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더니, 나가 있으라고 하고는 그 이튿날 다시 나를 불러 가지고 웬 ‘안경 쓰고 수염난 사람’에게 나를 맡겼던 것입니다. 그들의 회화로 이 사람이 의사라는 것과 특히 정신병의 권위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내가 그의 감정 (鑑定)에 의하여 ‘동팔호실(東八號室)’에 수용되자 나는 혼자서 가만히 생각하여 보았던 것입니다.
내가 이제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다보고 내가 이제까지 하여 온 일을 되생각하여 보았던 것입니다. 그곳에 나의 과거에, 나는 무엇을 보았겠습니까? 무엇을 깨달았겠습니까? 무엇을 들었겠습니까?
그것은 검은빛과 회색빛에 약간의 빨간빛을 가미한 색채였습니다.
그것은 얼음장같이 싸늘한 진저리치도록 싸늘한 촉감이었습니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귀를 싸고 ‘그 소리 안 들리는 곳으로’ 도망질 치게 하는 ‘망국적(亡國的)(?) 음향’이었습니다.
나는 머리를 쥐어뜯어 가며 마룻장 위를 뒹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소리내어 한껏 울었던 것입니다. 나는 나의 과거에 ‘눈곱만한 행복’도 발견할 수 없었던 까닭에요.
나는 내가 생각한 바를 그대로, 즉 내가 하고 싶다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누구 꺼릴 것 없이 하여 온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으뜸 되는 행복’이어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나는 어떻게 내 과거에서, 이제까지 이야기하여 온 ‘개조 후(改造後)’(?)의 ‘나의 생활’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결국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 즉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참된 것, 사장 거룩한 것…… 이러한 모든 것은 우리에게 오직 그 외관만을 찬미할 수 있는 권리를 줄 따름에 지나지 않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챤미할 따름으로 만족하지 않고서 손을 내밀어 그 신비로운 ‘자물쇠’를 건드릴 때, 우리는 그 순간에 그만 모든 아름다운 것, 모든 참된 것, 모든 거룩한 것들의 형상조차 잃어버리고 그러한 외람한 짓을 한 벌(罰)로 ‘절망의 구덩 이’에서 ‘환멸(幻滅)’의 비애(悲哀)를 맛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나 아닌가요?
‘장미가 하도 아리땁기에 손을 내밀어 꺾으려 하였더니 그만 날카로운 가시에 찔리고 말았다!’ 이 가장 범속(凡俗)한 말이 ‘범속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만년(萬年)의 진리’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이러한 것을 비로소 깨닫자 나는 언젠가 저도 모를 사이에 다시 ‘옛날의 나’로 돌아간 나 자신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생존욕’은 완전히 상실하고 있는 ‘나.’ 그리고 생에 대하여 한없는 ‘권태’를 느끼고 있는 ‘나.’ 이 ‘옛날의 나’로 돌아온 ‘나’는 이제 무덤으로 돌아갈 수밖에 길은 없겠지요, 하 하…….
나는 그곳에서 여름내 그렇게 고민으로 지내 가며 기회를 엿보다가 오늘 밤에, 아니 벌써 어젯밤이 되었습니다그려, 어젯밤에 그곳을 빠져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 ‘번거로운 세상’이 그리워서 그곳을 뛰어나온 것은 이닙니다. 형장께 한없는 불쾌를 또 맛보시게 하게 되어 참으로 죄송하기 짝이 없사오나 내가 그곳을 뛰어나온 정말 목적은 ‘나의 행동에 자유를 얻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사실 나는 ‘옛날의 나’로 돌아온 ‘현재의 나’는 비할 데 없이 큰 동경을 가지고 ‘죽음의 나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과연 얼마나 큰 기쁨을 나는 지금 맛보고 있는 것인지요.
얼마나 아름다운 매력이 나를 지금 끌고 있는 것인지요.
그곳은 나에게 있어서 이제 발을 들여놓을 오직 ‘한곳’이라 할 수 있겠지요.
연전에 자살한 일본 문사(文士) 모씨의 「어느 옛벗에게 주는 수기」란 속에, ……나는 지금 ‘죽음’과 더불어 놀고 있다―이러한 구절이 있지 않았습니까?
‘죽음과 더불어 놀고 있다’는 것, 그 ‘경지’야말로 우리 인간으로서 맛볼 수 있는 ‘참된 기쁨’을 주는 ‘오직 한곳’이 아닐까요? 참말의 법열경이 아닐까요? 그리고 참말로 축복받은 용사가 아니고는 엿볼 수 없는 경지가 아닐까요?
나는 지금 ‘그 천지’에서 소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과 손을 마주 붙들고 노래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비할 데 없이 큰 기쁨 속에 가만히 도취하여 있는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 즉 생에서 자신을 만족시킬 만한 아무런 의의도 발견하지 못한 사람,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하여 한없는 ‘권태’조차 느끼고 있는 사람, 그리고 ‘생존욕’을 완전히 상실한 사람, 이러한 사람에게 있어서 ‘자살’이라는 것, 스스로 자기 몸을 처결한다는 것, 이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일 뿐 아니라 또한 절대로 피치 못할 일이나 아닐까요?
크리스천은 자살을 가리키어 ‘신(神)에게 대한 의무를 결(缺)하는 것이라’ 하여 죄악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히 일소에 부쳐 버릴 말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겠지요.
‘생의 의의’를 ‘신에게 대한 의무 이행에 있다’ 생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하루하루 시계 태엽을 감아 주다가 죽어 버리는 인생’보다도 더 ‘하잘 나위’ 없는 것이나 아닐까요.
그야 어떻든 자살을 죄악시한다는 것은 적어도 문젯거리입니다.
나는 때때로 이러한 것을 생각합니다. 즉 자살을 한다는 것은 혹은 숙명적의 것이나 아닌가 하고요. 법의학(法醫學)은 우리에게 ‘자살자에게서 거의 일정한 공통적 체질을 인정할 수 있다’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 않습니까? 즉 ‘흉선임파체질(胸腺淋巴體質)’이라고 하는 것 말씀입니다.
까닭에 혹은 나의 체질도 그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나는 무슨 형장을 대하여 ‘자살’에 관한 ‘강화’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살을 죄악시한다는 것은 적어도 문젯거리라는 것과 또 죽어서 행복을 얻을 사람이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것보다 이 비참한 사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만 이해받았으면 그만입니다.
나는 생각하여 봅니다.
가만히 고요히 죽음의 나라를 크나큰 ‘동경’과 ‘기대’로써 바라보고 있던 사나이가 그 ‘기쁨’이 고조에 이로렀을 때 가장 만족하게 가장 자유롭게 그곳으로 달려가는 모양을·…‥.
그리고 그 자기의 특권을 행사하여 참말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죽음의 나라에서 축배를 들면서 죄악의 나라에서 허위대고 있는 우리를 비웃는 모양을…….
참으로 그것은 얼마나 축복받는 무리들인 것일까요? 그러나 나는 '죽음의 나라’를 동경하고 있는 ‘나’는 ‘동경’하고 있는 까닭으로 하여서 죽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최대 비극이 생긴 것입니다.
바로 아까도 말씀한 바입니다마는 나는 현재 죽음과 더불어 놀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큰 기쁨을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죽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가장 ‘행복스러운 세계’로 발을 들여놓을 용기를 결(缺)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고 형장께서는 응당 물으실 터이지요 그것은 바로 지금 말씀한 바와 같이 내가 너무나 큰 동경과 기대를 가지고서 죽음의 나라를 바라보고 있는 까닭입니다.
현재의 나에게 있어서 ‘죽음의 나라’는 가장 ‘행복스러운 나라’인 것이요, ‘그 나라로 간다’는 것은 ‘가장 큰 행복을 차지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그 행복을 획득하려 함에 주저하지 아니할 수 없다는 것은 ‘그 행복이 참으로 크나큰 것이다’ 하는 것을 그것에 지지 않을 만한 큰 ‘기대’로 대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기대가 크니만큼 그곳에서도 나는 ‘환멸’을 또 맛보지 않으면 안 되지나 않을까요?
일찍이 ‘정신이상자’의 세계가 나의 기대를 배반하고 도리어 나에게 끝없는 실망을 주던 것과 같이 이 ‘죽음의 나라’도 역시 나에게 절망을 주려고 하는 것이나 아닐까요? 내가 아까 말씀하였던 것과 같이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참된 것, 가장 거룩한 것은 우리가 오직 그 외관만을 찬미할 따름으로 그칠 것이요, 손을 내밀어 그 ‘신비로운 자물쇠’를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닙니까?
‘죽음’이라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스런 것인 이상 나는 그것에 대하여서도 오직 크나큰 동경과 기대를 가질 따름으로 그칠 것이요, 결코 그 행복을 차지하기 위하여 외람히도 그 나라에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닙니까?
까닭에 나에게는 ‘환멸의 비애’를 예기하고서는 도저히 ‘자살’을 결정할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버린 목숨, 그리고 세상을 버린 목숨이 죽음의 나라를 그리우면서도 들어가지 못하고 사생간(死生問)을 경계선 위에서 부르르 떨고 있는 것입니다. 한없이 괴로웁니다. 한없이 숨찹니다. 이러한 괴로움을 맛보고 있느니보다는 환멸의 비애를 맛보게 된다더라도 죽어 버리는 것이 훨씬 낫지나 않을까?
그리고 혹은 ‘죽음의 나라를 찾아간 나’는 그곳에서 더 생각하는 일은 없을 터이지…… 그곳에서 또 다른 욕심을 낼 리는 없을 터이지…… 이러하게도 생각됩니다마는 아직까지도 ‘죽음의 나라’에 대한 동경과 기대가 나에게 있는 이상 나에게는 스스로 자신을 처결할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이후에 혹은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는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기껍게, 가장 만족하게, 그리고 가장 자유스럽게 행복의 절정에서 죽음의 나라로 달려간 것이 아니라 죽음의 나라의 행복을 잘 알고 있는 까닭으로 하여 그곳을 피하려고 무진 애를 쓰다 쓰다 못하여 기진역진(氣盡力盡)하여 되어 가는 대로 몸을 맡기어 버린 것인 줄 형은 아실 터이겠지요.
그것은 이미 ‘자살’이 아니라 ‘자멸(自滅)’인 것입니다. 자멸이라고요? 네, 이 말말고 나의 죽음에 대한 적절한 해석은 또 없겠지요, 하 하.
에이, 인제 그만두지요. 너무나 오랫동안 떠들어 놓았습니다. 그것을 이제까지 눈썹 하나 찡그리시는 일 없이 끝까지 다 들어 주신 데 대하여서는 무엇이라 감사하온 말씀을 여쭈어야 옳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후에 ‘미친놈 때문에 공연한 밤을 새우게 되었다’는 것과 ‘미친놈의 하는 소리 때문에 불쾌한 감정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을 깊이 후회하시지 않으신다면 그만치 고마울 데는 없겠습니다.”
그는 모자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아침이라도 같이 자시고……’ 하는 것을 굳이 사양하고 그는 구두를 신고 뜰에 내려섰다.
“이제 또 뵈옵기는 아마도 어려울까 합니다. 하룻밤 ‘사귐’에 지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도 나를 이해하여 주시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한 분'인 형과 또다시 뵈올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니 ‘폐인(廢人)’이라고 어찌 마음이 슬프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참으로 기쁩니다. 형께서 나의 마음을 알아주시고 또 이야기를 들어 주신 까닭에 나는 참으로 기쁩니다.
‘관중(管仲)’이가 ‘생아자는 부모요, 지아자는 포자라(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 말한 그 마음속을 내가 능히 이해할 수 있는 것같이 생각됩니다. 하, 하…… 자, 그러면 안녕히 계십쇼.”
그의 입가에는 호젓한 웃음이 떠올랐으나, 눈에는 이슬이 맺혔었다. 그는 내가 신을 신고 뜰로 내려오는 것을 보자, 황망히 인사를 하고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내가 문간에 나갔을 때에는 그가 이미 수십 칸통이나 걸어갔을 때이다. 호리호리한 몸이 긴 다리를 쭉쭉 뻗어 가며 (그러나 기운 없는 걸음걸이로) 휘청휘청 걷고 있다.
나는 새벽 바람에 가만히 날리는 레인코트 자락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갑자기 나의 마음이 울 것 같은 것을 깨달았다.
그 이듬해 오월까지 나는 레인코트 입은 사나이의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도처에서―저녁 산보 나간 길거리에서, 먼 곳에서 돌아오는 벗을 마중 나간 정거장에서, ‘제팔예술(第八藝術)’을 감상하고 있는 군중 속에서……그리고 진실로 몇 번인가 나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서― 레인코트 입은 사나이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
나에게는 아직까지도 기억이 새로운 서력(西曆) 일천구백삼십년 유월 하순, 저 장마가 시작되기 전 마지막 가만한 비가 옛 서울을 힘없이 축이던 날 저녁이었다.
나는 레인코트 주머니에 팔을 꽂고 황혼의 거리를 정처없이 산책하였다. 그러나 저도 모를 사이에 나의 마음은 언젠가 레인코트 입은 사나이를 좇고 있었다.
오! 외로운 벗이여.
그대는 지금 어디 있나.
…………
내가 입안말로 이렇게 중얼거리자 나는 언뜻 어느 신문사 게시판 앞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나는 거의 기계적으로 그 앞으로 다가가서 삼면 기사에 눈을 던졌다. 그리고 그곳에, 작년 가을에 동팔호실을 탈출한 정신병자가 어젯밤에 한강에 투신자살하였다는 것과 오늘 아침에 건진 그의 시체에는 다 낡은 레인코트가 걸쳐 있었다는 기사를 발견하였다.
나는 갑자기 나의 마음이 공허하여지는 것을 깨달으며 그 앞을 떠났다.
그예 그는 가고 말았다.
그예 그는 가고 말았다.
…………
나는 질척질척한 길거리를 밤이 이슥하도록 거닐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중에도 레인코트 입은 사나이의 기억이 자꾸 꼬리를 물고 나의 머리에 회생(回生)하였다.
그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 ‘광적’ 기쁨을 눈에 띠고 붉은 실감기를 응시하고 있던 그.
셋째 번에 만났을 때 나에게로 와서 같이 놀아 달라고 내 손을 붙들고 눈물을 홀리던 그.
어머니의 생애를 이야기하면서 어머니의 슬픈 신세를 한숨짓던 그.
광란의 가지가지를 이야기하고 날마다 몹시 공막한 느낌을 주는 웃음을 웃던 그.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참된 것, 가장 거룩한 것은 오직 먼 곳에 놓아 둔 채 찬미할 따름, 결코 그것에 손을 대지 말라고 비장한 소리로 부르짖던 그.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와 작별지을 때의 눈물을 삼키고 나의 얼굴을 섭섭하게 바라보고 있던 그의 얼굴이 보였던 것이다. 그와 함께 나의 머리에는 그가 이야기를 마치기에 이르러 나에게 하던 말이 떠올랐다.
“……이후에 혹은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는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기껍게, 가장 만족하게 그리고 가장 자유스럽게 행복의 절정에서 죽음의 나라로 달려간 것이 아니라 죽음의 나라의 행복을 잘 알고 있는 까닭으로 하여 그곳을 피하려고 무진한 애를 쓰다 쓰다 못하여 기진역진하여 되어 가는 대로 몸을 맡기어 버린 것인 줄 형은 아실 터이겠지요. 그것은 아마 자살이 아니라 자멸인 것입니다…….”
나는 그가 한 ‘이 말’을 다시 생각하여 보고 행인 드문 비 오는 밤거리를 ‘울음’과 함께 걸어갔다.
그러자 나의 눈앞에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지난해에 내가 본 그의 얼굴―너무나 쓸쓸하고 너무나 호젓하고 너무나 외로운―그러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한 가장 큰 기쁨으로 찬 가장 만족스러운 얼굴에 틀림없었다.
나는 ‘이 얼굴’의 출현으로 하여 문득 이러한 생각을 하여 보았다.
‘죽음의 나라에서는 가엾은 그 사나이의 기대와 동경을 배반하는 일 없이 참말 행복스러운 품안에 그를 안아 준 것이나 아닐까?’ 하고.
물론 ‘이 생각’에는 ‘실감’이 상반하지 않는 ‘비애’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룻날 나는 이태원 묘지(梨泰院墓地)로 그의 영(靈)을 찾아갔다.
아직 오후 세시 반도 안 되었건만, 잠잠하고 우중충한 이곳 기운(?)은 인생의 ‘황혼시(黃昏詩)’를 연상한다.
묘지는 언제든 우리에게 침묵을 준다, 적막을 준다, 그리고 사색과 인생에 대하여 어느 의미에 있어서 가장 옳은 이해를 가질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의 무덤 앞에 세워 놓은 무명(無名)의 비석(하룻밤의 정의(情誼)로 내가 세워 놓은 것이다)에는 후세 다정다한(多情多恨)한 젊은이가 남몰래 무슨 시구(詩句)라도 적어 놓는 일이 있을까?
꽃 한 가지 없는 이곳 풀밭은 너무나 쓸쓸하구나. 바람도 안 불건만 잡초들은 왜 이리 잔물결치노?
‘그는 지금 나에게 무엇을 속살거리고 있는 것일까?’
사람은 무덤을 대하여 인생의 무상(無常)을 깨닫는다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한 유치한 연상(聯想)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무덤을 대하여 인생의 전면용(全面容)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예술이며, 종교며, 철학이며…… 이 모든 것을 깨치려 하는 사람아. 모름지기 무덤 앞에 정좌(正坐)하여 하룻밤을 새우라.
나는 무덤 앞 잡초 위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레인코트 입은 ‘나의 가엾은 친구’가 보여 준 ‘너무나 쓸쓸한 인생’을 슬퍼하였다.
허위로 찬 인생을 저주하였기 때문에 도리어 가혹한 저주를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참말 ‘다행한 빛’을 찾아서 한평생을 거리에서 거리로 돌아다니다가 끝끝내 찾지 못하고서 가버린 ‘그.’
발광이란 것에 행복을 깨닫고, 그것에 대하여 너무나 큰 기대와 동경을 가졌었기 때문에 또한 너무나 큰 ‘환멸의 비애’를 맛보지 않을 수 없었던 ‘그.’
나는 고개를 들어 그가 누워 있는 무덤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 숙여 한숨 쉬었다. 그러면서도 나의 입은, 레인코트 입은 사나이와 작별한 지 며칠 후에 써놓은 일기의 한 구절을 외웠던 것이다.
“……여기에 한 사나이가 있다. 너무나 쓸쓸한 심정의 소유자이다. 너무나 날카로운 신경의 소유자이다. 그는 낳기 전부터, ‘무엇’에게 저주받았던 것이다. 그를 ‘쓸쓸한 존재’로 만들어 놓은 것이 그 ‘저주’이다. 그를 ‘날카로운 신경’의 소유자로 만들어 놓은 것이 그 ‘저주’이다.
그 저주는 그에게 ‘그의 그림자'의 존재를 깨닫게 하여 줌으로 마침내 폭발하여 버렸다. 그가 그의 그림자의 존재를 깨달았을 때 그의 ‘실제’의 존재는 영구히 스러져 버렸던 것이다.
그 뒤로 그는 한길 위에 떨어진 ‘제 그림자'에 또는 무심히 들여다 본 거울 속의 ‘제 그림자’에 과연 몇 번이나 놀랐던 것일꼬.
이곳에 제 그림자의 존재를 깨달은 사람이 있다. ‘자신’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는 ‘그림자’의 존재를…… 그는 그 그림자의 존재를 깨달은 동시에 언젠가 그 그림자의 상실을 염려하였던 것이다. ‘그림자의 상실’을?
이곳에 ‘자기 존재 부정’ 이상의 ‘비극’이 비로소 생기었다.”
나는 여기까지 외워 오다가 그만두어 버렸다.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쓸쓸하게 하는 ‘인생의 이 방면’을 자꾸 파고들어갔다더라도 소용없는 일이 아닌가? 나는 그곳을 떠났다. 석양녘 이곳에는 행인도 드물다. 나는 말없이 걸어갔다. 그러면서도 나의 마음은 언젠가 이러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인생은 꿈이다. 그리고 인생 이 좇고 있는 것도 꿈이다……’라고.
이것은 인생의 ‘일면의 진리’일 뿐 아니라 진실로 레인코트 입은 사나이의 전생애의 총결산이나 아닐까?
인생은 꿈이다.
그리고 인생이 좇고 있는 것도 꿈이다…….
(《동아일보》, 1930. 2. 5∼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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