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 스님의 금강경 강설
11. 정신희유분(正信稀有分 - 바른 믿음은 희유함)
집착‧망상 없는 깨끗한 믿음 있다면 여래가 나요, 내가 곧 여래
분별심 일으키지 않는 습 기르면 신구의 삼독심은 절로 사라져
희로애락은 파도와 같아…아상이라는 바람 무서운 결과 가져와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는 분별심이 클수록 마음의 파도는 거칠어질 뿐이다.
수보리 백불언 세존 파유중생 득문여시언설장구 생실신 부(須菩提 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得聞如是言說章句 生實信 不) 불고 수보리 막작시설 여래멸후 후오백세 유지계수복자 어차장구 능생신심 이차위실(佛告 須菩提 莫作是說 如來滅後 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 能生信心 以此爲實)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혹 어떤 중생이 이와 같은 말과 글귀를 듣고 참다운 믿음을 낼 수가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기를, “그런 말 하지 마라. 여래가 멸도한 후 오백세를 뒤로 하더라도 계행을 지키고 복을 닦는 사람은 이와 같은 말과 글귀에 능히 믿음 마음을 내어 이것을 진실이라 여길 것이니라.”
사람들은 모두가 재수 좋기를 바란다. 재수란 복이 있다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재물이 생기면 기분이 좋아지고, 좋은 일이 생기면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복이 있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복이 있으면 재수가 좋을 것이고, 기분 좋은 일이 많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재수 좋고 복이 많아서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지는 것까지는 더 말할 나위가 없겠으나, 세상에 공짜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렇게 재수 좋고 복 있는 것도 인과에 의해 생기는 것이므로, 다음의 결과는, 재수 없고 복이 다하는 인과로 말미암아 기분이 나빠지게 되는 과보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부처님께서는 인과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49년 동안 줄기차게 가르쳐 주셨다. 그 가운데 ‘금강경’이라는 위대한 경전도 탄생하게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깨닫는 이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있으며, 5백세 후에도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주고 계신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도 5백생 동안 환생을 거듭하며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를 깨치기 위해서는 한 점 의심 없는 신심을 가져야 한다. 신심이란 마음을 믿는 것, 또는 마음으로 믿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믿는가? 인과를 믿는 것이다. 그리고 연기와 공을 믿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이기 때문이다. 인과를 믿고 연기와 공을 믿으면 곧 부처님을 믿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일체의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는 말씀이다. 이와 같이 신심을 지닌 중생들은 지금도 깨칠 수 있고, 앞으로도 깨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인과와 연기와 공을 완벽히 믿는 신심을 가진다면, 저절로 재수가 좋아지고, 복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니, 신심이야 말로 공덕이 되고 복덕과 지혜를 얻는 최첨단의 기술이라 할 것이다.
당지 시인 불어일불이불삼사오불 이종선근 이어무량천만불소 종제선근(當知 是人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 而種善根 已於無量千萬佛所 種諸善根) 마땅히 알아라. 이러한 사람은 한 분의 부처님, 두 분의 부처님, 셋, 넷, 다섯 분의 부처님에게만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요,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 계신 곳에서 모든 선근을 심었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신심을 가진 중생들이 깊고 깊은 말과 글귀에 대해 신심을 내는 것이 결코 수월하다고 보지는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 셋, 넷 다섯 부처님께 선근을 심어서 이렇게 쉽게 됨이 아니다. 이미 한량없는 수많은 부처님께 모든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와 같이 어려운 말귀에 신심이 생기는 것이니, 이 말귀의 뜻은 허공같이 광대하고 보배구슬과 같이 고귀하여서 티끌같이 하잘 것 없고 개, 돼지같이 형편없는 근기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지만, 5백세의 기나긴 세월 속에서 한량없는 부처님께 모든 선근을 심기를 거듭하고 거듭하였던 결과, 드디어 근기가 익고 익어서 도를 감내할 만한 힘을 길러 신심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귀를 알아듣고 신심을 내는 자는, 과거 한량없는 부처님께 무량한 공덕을 쌓았음인 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 너희들도 그러했고 나도 그러했느니라”고 하심이다.
기차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를 탔는데, 사람들은 오른쪽에 모두 서있고, 왼쪽으로는 걸어서 올라가고 있었다. 아마도 사람들이 왼쪽은 비워 두고 오른쪽에 붙어서 있는 것은, 바쁜 사람들을 배려하기 위한 사회적 관행이 된 것 같다. 나도 앞사람을 따라서 올라가는데 갑자기 멈춰 서고 말았다. 위를 쳐다보니 한사람이 왼쪽 계단을 막고 비켜주지 않았다. 두 사람 뒤에 있던 내가 가로막고 있던 이를 보고 “실례지만 먼저 가면 안 될까요?”하고 양해를 구했더니 버럭 화를 내면서 걸어가려면 계단으로 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스님이 되어 더 이상 뭐라고 하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 아무 소리 않고 그대로 멈춰선 채로 끝까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속으로 조금 화가 나면서 막고 선 사람이 못내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야속한 생각을 했던, 그리고 순간적으로 화를 낸 나 자신에 대해 참회를 했다. 분별심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빨리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이 무심한 생각을 앞섰기 때문에, 상대에 대한 야속함이 생기면서 화가 났던 것이나 곧 참회를 했다.
세상 모든 모습은 그대로 인연연기로서, 자연의 움직임이 되었건, 사람의 행위가 되었건, 그 자체가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시공(時空), 시비(是非), 광협(廣狹), 대소(大小), 거래(去來), 고락(苦樂), 선악(善惡), 생사(生死) 등등의 것은 그 자체로서의 모습일 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시비고락(是非苦樂)의 업에 의해 좋고 싫은, 옳고 그른 분별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분별심이 모두 멸해지면 세상에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되는 것이니, 아래의 구절과 같이 완전한 해방을 얻어서 자유자재의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사소한 행동에서부터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는 습을 길러야 한다. 그리고 모두 자신의 업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참회해야 한다.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신구의(身口意-행동, 말, 생각) 삼독심이 사라지게 된다. 항상 이 화두를 놓치지 말 것이다.
문시장구 내지 일념생 정신자 수보리 여래 실지실견 시제중생 득여시무량복덕(聞是章句 乃至 一念生 淨信者 須菩提 如來 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無量福德) 이러한 말과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깨끗한 믿음을 내는 자는, 수보리야! 여래는 이를 다 아시고 다 보시나니, 이 모든 중생들이 이와 같이 한량 없는 복덕을 얻게 되는 것이다.
“모든 형상은 허망한 것이니 만약 형상을 형상 아님으로 보는 자는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이러한 깊고 미묘한 사구게(四句偈)를 능히 아는 자는 근기가 매우 수승하다 할 것이다. 또 이를 아는 자는 한 생각이라도 깨끗한 마음을 잃지 않는 자로서, 공을 이해하고 청정한 믿음을 지니고 있을 것이므로, 여래께서 이를 다 아시고 다 보신다는 말씀이다.
여래는 만고에 남되 남음이 없고, 시방에 다하되 다함이 없고, 티끌을 용납하되 좁음이 없고, 성스러움에 처하되 더함이 없고, 평범함에 머물되 덜함이 없고, 악에 대하여 책망함이 없고, 선을 행하되 찬탄함이 없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선과 악에 대해 분별을 여의고, 성(聖)과 범(凡)의 차별을 여의며, 넓고 좁은 광협(廣狹)에 공간을 여의고, 옛과 지금의 고금(古今)에 시간을 여의며, 옳고 그른 시비의 사량을 여읜 연고이다. 여래의 땅은 이러히 청정한 곳이니, 탕탕(蕩蕩)하여 미세한 티끌에 집착하지 않고, 호호(浩浩)하여 미세한 티끌의 버림이 없는 곳이다.
이러하여 이곳에서는 버릴 바가 없으니, 십악(十惡)에 대해 미워할 것이 무엇이며, 십선(十善) 또는 성(聖)을 찬양할 것이 무엇인가, 이곳에서는 고(古)와 금(今)이 없으며, 부처님이 계신 적멸의 때와 지금의 때가 다른 것이 무엇이며, 이곳에는 공간과 장소가 없으니 사위국과 대한민국 서울을 가릴 것이 무엇이며, 범인과 성인이 없고 부처와 중생을 찾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를 잘 아는 것은 오로지 신심의 힘이니, 즉 사량 분별을 여읜 집착과 망상이 없는 깨끗한 믿음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이같이 깨끗하고 군더더기 없는 믿음만 있다면, 곧 여래께서 이를 아심이요, 보심이다. 내가 곧 여래를 알고 여래를 보는 것이다. 아니다. 여래가 곧 나요, 내가 여래인 것이다.
아이들은 싸움이 잦다. 싸움을 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 좋아라 한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이유 없이 싸우지는 않는다. 아이들 나름대로 서로의 주장을 첨예하게 펼치다가 끝내 싸움으로 이어지기 일쑤다.
이렇게 싸우는 아이들을 말리는 어른의 입장에서는 아이들의 싸움의 이유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없다. 그저 말릴 뿐이다. 그리고 잘잘못을 떠나 싸움을 한 두 아이 모두에게 벌을 주기 일쑤다. 아이들은 서로가 불만을 갖는다. 나는 잘못이 없고 상대아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른이 주는 벌이 무서워 억지로 화해를 하기도 한다. 어른들은 어떨까? 어른이라고 해서 아이들과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잘잘못이란, 일반적, 또는 사회적, 인간적, 법적으로는 중요할지 모르겠지만, 진리의 차원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공하기 때문이다. 바람 불어 파도가 이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바람은 바람일 뿐, 좋은 바람 나쁜 바람, 정의로운 바람, 불의의 바람으로 분별하며 탓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이 바람과 같은 욕심으로 마음이 출렁이는 것이다. 바람이라는 욕심을 빼면 마음의 바다는 그저 공할 뿐이다.
바람은 바로 나, 아상과 같다. 아상의 바람이 불지 않으면 파도라는 분별된 인상이 생기지 않는다. 또한 이 파도 저 파도라는 중생상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바람이 불지 않으면 파도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오래 살아남는다. 바람과 파도라는 생각 또한 분별심이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오래 살아남는 것을 수자상이라 한다.
삶에 있어서의 시시비비, 희로애락은 바람 불어 파도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나라는 아상의 바람이 불어 생기기 때문이다. 나라는 아상의 욕심이 강할수록 바람은 쎄지고 인상이라는 파도는 크게 출렁이게 된다. 그러니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는 분별심이 클수록 마음의 파도는 거칠어 질 뿐이다. 아상이라는 바람은 이렇게 무서운 인과를 낳는다.
[1636호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