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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대학로에 있는 쇳대박물관에는 고려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옛 자물쇠와 열쇠ㆍ빗장ㆍ열쇠패 등 350여 점을 전시해놨다. 소장품 중 10%만 내보인 것이다. 지난해 까다롭기로 유명한 일본 민예관에서 초청 특별전을 열었고, 다음 달 뉴욕 전시를 앞두고 있다. 쇳대박물관의 해외 전시는 한국에 청자·백자만 있는 게 아니라 빼어난 금속공예도 있었음을, 한국의 민초들은 빗장 하나에도 의미를 담아 공들여 만들었음을 보여줬다. 최 관장은 “결과적으론 애국이 되었지만, 모두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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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은 “고물딱지 모아 뭐에 쓰려는 거냐”며 갸웃거렸다. 남들과는 당초 가는 길이 달랐다. 대학에 떨어져 재수 비용이라도 벌자고 철물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 시작이었다.
“어린 시절, 측백나무에 물이 오르면 피리를 만들었어요. 그걸 위해 봄을 기다렸죠. 자연이 주는 혜택과 선물은 그때 다 받은 거겠죠. 저는 잡풀도 못 뽑아요. 진딧물도 손으로 일일이 잡고요. 철물장이라 거칠 것 같지만, 실은 감성적이고 소심하고 예민해요. 그렇지 않으면 철을 못 만져요. 거칠게 다루면 부러지니까….”
거칠어 보이는 철이야말로 섬세함과 부드러움을 필요로 하는 소재였다. 철물의 매력에 ‘꽂힌’ 그는 철물장이의 길을 택했다. 친구들이 대학 캠퍼스를 거닐 때, 그는 철을 주물렀다. 학벌 콤플렉스는 그를 더욱 매섭게 채찍질했다. 경험만으로 채울 수 없는 부분은 독학으로 보충했다. 일의 연장선상에서 수집이 이뤄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벽증이라 해도 좋을 만큼 그에겐 완벽함을 추구하는 장인정신이 있었다.
2003년 설립한 박물관도 남달랐다. 건축가 승효상이 쇳대박물관의 컨셉트에 맞게 설계한 건물은 단순 전시만이 아니라 공연 등이 이뤄지는 복합문화공간이었다. 당시로선 혁신적인 일이었다. “문화란 식물 하나, 의자 하나도 아무렇게나 두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는 그는 완벽한 문화공간을 꿈꿨다. 개관 초기엔 국내 대표 작가, 건축가들의 특별 기획전을 연간 4~5회씩 열었다. “자비를 들여 5년을 그러고 보니 총알(재정)이 떨어졌어요. 요새 다시 철물점 일에 열중하는 것도 그 때문이죠.”
그가 꿈꾸는 박물관을 만들기 위해서는 할 일이 많다. 우선 오래된 대장간 하나를 구입할 예정이란다.
“전통 기법을 쓰는 옛날 대장간을 재현할 거예요. 박물관이란 단순히 유물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쓰였는가, 어떤 의미와 정신이 담겼는가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옛날 ‘장이’들은 먹고살기에만 급급하지 않았어요. 일은 곧 삶이자 놀이였죠. 지금처럼 각박하지 않았어요.”
그는 박물관이 “사치스러운 노후의 놀이터”가 되길 꿈꾼다. 이제 그에게 “고물딱지 모아 뭐하느냐”고 묻는 사람은 없다. 그의 일에 반대도, 찬성도 하지 않던 아내는 요즘 대학원에서 민속학을 공부한다. 적극적인 협력자가 된 것이다. 큰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컬렉터의 길로 들어섰고, 둘째는 미술을 전공한다.
“10년 이상 컬렉션을 하면 다른 인생 공부가 필요 없어요. 몇천만원짜리를 몇만원에 사는 횡재도 하고, 몇만원짜리를 몇백만원에 사기도 하죠. 한번 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수중으로 안 들어오니, 고도의 전술도 필요하고요. 가끔 ‘박물관이 아닌 사업에 투자했다면?’이란 질문을 던졌다가 이내 거둬들이곤 해요. 매년 2억원씩 손해를 보지만 10년 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정신적 부를 축적해왔다고 생각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