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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10년전 겨울, '전설적인 여배우' 윤정희와 클래식계의 거장(巨匠) 백건우를 가까이서 보는 영광을 누렸다. 2011년 12월 백건우 피아노독주회 청주공연 때다.
공연을 앞두고 백건우는 부인 윤정희와 오후 3시쯤 청주예술의 전당에 도착해 1시간30분간 리허설 했다. 카키색 골덴 바지와 짙은 회색의 스웨터 차림으로 그랜드 피아노앞에 앉은 백건우는 브람스 피아노소품,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14번 월광, 리스트 피아노소나타 b단조를 쉬지 않고 연주했다.
난 클래식 매니아는 아니지만 그의 연주는 질감이 달라보였다. 때론 다이내믹하고 때론 매끄러웠다. 감동이 절로 밀려왔다. 60대 중반의 나이에 매일 다섯 시간 이상 건반을 두들기고 해외투어로 공연 일정이 꽉찬 거장도 리허설만큼은 빈틈이 안보일 만큼 진지했던 기억이 난다.
공연이 끝난 뒤 백건우가 200여명의 팬들에게 정성껏 사인을 해주고 일부 팬들과 환한 표정으로 기념사진도 찍는 동안 윤정희는 사랑스런 눈길로 남편을 지켜보았다. 왕년의 미모는 다소 퇴색했지만 소탈하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은 여전했다.
10년전 청주공연에 함께 온 백건우^윤정희 부부.
윤정희는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스타'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연기의 스펙트럼이 넓고 깊어 다채로운 캐릭터의 배역을 능수능란하게 소화한 천상 배우였다. 청룡영화상, 대종상, 백상예술대상 등 국내외의 각종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만 무려 24번이나 수상한 것은 그가 얼마나 대단한 배우라는 것을 웅변한다.
2010년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선 68세의 나이에도 몰입감 있는 연기로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었다. 시 강좌를 듣는 할머니 미자 역할을 맡은 윤정희는 특히 '내 생애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을 발표하는 장면에선 어릴 적 자신을 부르는 언니의 목소리와 손짓을 기억하며, 많은 학생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발표해 관객들을 울렸다. 당시 영화를 본 배우 김혜수는 "나의 아름다웠던 순간을 떠올리게 한 영화였다"며 존경심을 표시했다.
윤정희가 연하의 백건우를 처음 만난 것은 한창 인기와 미모가 절정인 28세 때였다. 독일 뮌헨에서 열린 재독작곡가 윤이상의 오페라 '심청이'공연에 갔다가 조우했다. 이후 윤정희가 2년 뒤 프랑스로 유학중 한국 교포 식당에 들렀다가 백건우와 재회해 1976년 백년가약을 맺었다.
당대 톱배우로 '만인의 연인'이었던 윤정희가 피아니스트를 배우자로 선택한 것은 감성과 지성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부부는 프랑스 문화계 명사로 문화 훈장을 받았으며 외동딸 백진희씨는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이런 윤정희가 파리 변두리 아파트에 방치된 채 홀로 투병 중'이라는 내용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와 충격을 주었다. 청원자는 "2019년 4월에 남편 백건우와 딸이 서울에서 치료를 받던 윤정희를 파리로 끌고 갔다.", "현재 윤정희는 본인의 집에서 쫓겨나 파리 외곽의 아파트에서 홀로 알츠하이머 및 당뇨병 투병 중이다."라며 "백건우는 아내를 만나지 않은 지가 2년이 훨씬 넘었고, 아내의 병 간호도 못 하겠다면서 형제들한테 떠넘긴 지가 오래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백건우·윤정희 부부의 지인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황당한 거짓말'이라며 "작년 가을에 윤정희 생일 때 음식점에 가서 가족들이 찍은 사진도 저한테 왔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가족끼리 따님하고 손자하고 파티하는 사진도 받았다"고 했다. 성년후견인 선정을 둘러싸고 벌어진 갈등이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진실을 뒤집을 수는 없다.
10년 전 청주공연에서 함께한 백건우·윤정희 부부의 얼굴엔 자연스런 미소와 행복과 사랑이 묻어났다. 지금은 부부 모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됐지만 애틋한 부부의 정은 더욱 돈독해졌을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여배우의 치매가 형제들에 의해 들춰지고 방치여부가 진실공방으로 비화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누가 뭐래도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윤정희에겐 남편과 자녀가 가장 사랑스럽고 소중한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