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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죽음은 당신의 벗이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두가지 가운데 하나는 죽음의 신체적인 경험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과 함께 맞이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지각능력과 의식, 존재에 대한 의식의 상실이다
치유와 회복 15 '죽음과 죽음의 과정"
죽음과 죽음의 과정은
몸에 작별인사를 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장의 끝부분에 이르러서는
이 과정을 평소보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기를 바란다.
이제부터 임상경험과 연구,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배운 것들을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 한다. 더불어 죽음과 죽음의 과정에 대해서 내가 경험과 자각한 것들도 이야기한다.
내 강연을 들으러온 청중은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사람들의 지적인 수준이
그렇게 높지 않으므로
이해를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였다.
영적인 작업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내용을 즉각 이해하고
조금도 어렵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설명과정에서 다시 의식지도를 언급할 것이다. 죽음과 죽음의 과정을 논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두가지와 의식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두가지 가운데
하나는
죽음의 신체적인 경험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과 함께 맞이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지각능력과 의식,
존재에 대한 의식의 상실이다.
의식지도에 나타나있는 의식의 단계를 살펴보자. 이 지도는 인간의 에고, 즉 흔히 나나 나자신이라고 말할때 소문자 s로 표현하는 작은 나 self를 나타낸다. 지도의 중간에는 용기의 단계가 있다. 용기의 단계 아래에서는 감정상태를 드러내주는 모든 화살표들이 부정적인 방향을 향한다. 이 상태들의 상대적인 힘과 에너지들이 수치로 표현되어 있는데, 무감정은 두려움 100보다 훨씬 적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또 죄책감은 30의 단계에, 무감정이나 절망 50의 단계에, 슬픔과 후회는 70, 걱정과 불안의 형태로 나타나는 두려움은 100, 갈망과 결핍감을 동반하는 욕망은 125, 분노는 150, 자부심은 175단계에 있다.
생명은 오로지
생명으로부터만 생겨난다는
진실을 말하면
우리는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200의 단계에 이른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대부분은
생명은 생명으로부터만 생겨난다는
이 주장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임을
제대로 이해하고 깨닫지 못해 생겨난다.
물질이나 에너지처럼
생명은
오로지 그 구현형태만
변화할 뿐이다.
진실을 말하면
부정적인 에너지 장은
위의 긍정적인 방향을 향하게 된다.
생명자체의 근원에 대한
의식적 자각을 향해 올라가면
사랑과 기쁨이라는
높은 단계들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600의 단계에 이르면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속으로 들어가
존재를 다르게 경험한다.
더이상 자신을
별개의 개인적이고
신체적인 몸과 동일시하지 않을 것이다.
또
큰 나의 본래 모습을 깨닫기 시작하고
의식의 확장으로
개인적인 작은 나를
넘어선다.
의식의 단계들 오른 편에는 각 단계들에 동반되는 감정들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아랫부분에 있는
죄책감의 단계에서는
수치심과 자기혐오가 나타난다.
의식속에서 진행되는 과정도
부정적인 방향을 향한다.
무감정은
가망없음 및 절망과 연관되어 있으며
에너지의 상실과정이 진행된다.
슬픔의 단계는
후회와 상실감, 낙담과 연관이 있고,
의식속에서는 낙담의 과정이 일어난다.
두려움의 단계에는
걱정 및 불안과 연관이 있다.
두려움은 미래와 관련되어 있으며
위축의 과정을 불러일으킨다.
죽음을 생각할 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슬픔과 두려움을 떠올린다.
한결 높은
분노의 단계로 이동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죽음의 전체 경험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고
나중에는 불만을 갖기 때문이다.
자부심 단계로 올라가면
낮은 단계에 있을 때보다
훨씬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부심의 단계에서는
부정이 따라붙는다.
이 부정을 이겨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부정은 두려움에서 생겨나므로 일단 두려움을 이해하면 부정의 태도는 사라져 버린다. 그러면 더욱 많은 에너지를 지닌 용기의 단계 200으로 올라간다.
용기의 에너지 장에서는
삶의 사건들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룰 수 있는
정서적 능력을 보여준다.
무언가에 대해 진실을 말하면
힘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한결같은 긍정적 태도로 자발성의 단계로 올라가면 이런 식으로 말하게 된다.
"그 일 자체를 위해
그 일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어"
그러면
에너지 장은 더욱 강력해진다.
목적을 잘 파악하겠다는 의도가 투입되고
그것을 둘러싼 지배적인 조건들을 받아들일 능력도 있기 때문이다.
200미만의 단계들에서는 스스로 힘을 포기하므로 의심이 커지고 자신감이 결여된다.
그러나
문제를 들여다보려는
자발적인 의지를 가지면
마음이 열리면서
수용의 단계 350으로 올라간다.
받아들임(수용)은
죽음의 가능성을 다루는데
중요한 능력이다.
이 단계에서는
다시 자신의 힘을 회복하고
스스로 적합한 존재라고 느끼며
자신감을 얻는다.
의식속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또
"내 행복의 원천이 바로 나 자신이며,
내게는
스스로 진실을 발견할
능력이 있다"
라는 자각도 일어난다.
드디어
사랑의 에너지 장 500으로 올라가면
생명을 지지하고 보살피는 능력으로
이 일에 헌신하게 된다.
또
용서에 대한
자발적인 의지도 생겨난다.
이로 인해
치유 그리고 감사와 연관이 있는
기쁨 540의 에너지 장이 드러난다.
기쁨의 에너지 장은
내면의 평화를 가져다주며,
타인들의 마음에 공감하는 능력인
연민을 특징으로 한다.
또
사랑에 대한
자발적인 의지도 생겨나며
어떤 형태의 생명에 대해서도
판단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고요한 변화가 일어나면
평화의 단계 600으로 올라간다.
이 신성한 평화의 단계에서
드디어 지복을 경험하며
점진적인 빛비춤의 과정이 일어난다.
그러면 마치 빛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 형언할 수 없는 상태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설명하기가 힘들다.
또 몸의 중요성이 사라져 버리면서
몸이 나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몸은
개인적이고 개별적이며
제한적인 작은 나와의 동일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잊어버리게 된다.
더욱 깨우친 상태에서는
의식이 절묘하게 확장되면서
몸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게 되고
개인적인 작은 나도 사라져 버린다.
600이상의 에너지 장들에서는
완전함과 전체성
모든 생명과의 일체성, 신과의 합일을 느낀다.
겸양은 마음을 열어준다. 그리고 마음이 열리면 처음으로 이렇게 말하게 된다.
진실이란 무엇일까?
신이시여!
부디 제 마음이 열려서
제 의식 안의 진실을 스스로 알게 해주소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신성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반영한다.
중립의 단계 250에 있는 사람은
세상을 문제없는 곳으로 본다.
그래서 죽음을 포함한 모든 경험도 문제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신도 자유의 존재로 인식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낮은 단계들에서는
신을 두려워하고
죄책감을 느끼며
신을 강력한 응징자로 인식한다.
이 단계들에서는 질투와 미움이 널리 퍼져있기 때문이다. 지도의 거의 맨 밑바닥에서는 증오를 일삼는 존재가 신이라고 여기고 인간과 인간성을 증오하는 실체가 신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를 창조한 존재가 신이라면 이 모든 생각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진실의 단계로 올라가면
삶과 세상, 죽음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경험하고
이것들을 긍정적인 것을 받아들인다.
신도
이제는
믿음을 주는 희망적인 존재로
인식한다.
이로 인해
죽음도 해방을 통해
의식이 훨씬 폭넓게 확장되는 것으로,
천국이라는 자각의 상태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인식하고 기대한다.
의식에 대한 연구 결과
천상의 영역은
다양한 것으로 밝혀졌다.
인식의 힘을 되찾아
수용의 단계를 넘어서면
용서와 이해로 충만한
사랑의 상태로 들어간다.
이 상태에서는
드러남의 과정이 시작되고
모든 생명을 사랑스러운 존재로 경험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모든 곳에서 사랑을 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자애로운 신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간다.
사랑이
근본적인 실재임을 깨닫고
기쁨의 내적 상태에 이른다.
이로 인해
연민이 생겨나고
의식의 변화를 통해
모든 창조물이 완전함을 깨닫는다.
모든 생명의 일체성을 깨달아
기쁨의 상태에 이르고
빛비춤과 깨어남의 상태속에서
일체성과 합일을 경험한다.
600의 단계에서는
일시적인 의식의 에너지 장에서 벗어나
비선형적인 에너지 장속으로 들어간다.
600대 중간의 에너지 장에서는
깨어남과 빛비춤이라는
한층 진화된 의식상태와 자각을 경험한다.
앞서 말한 내용이 철학적이거나 이론적인 것으로 들릴 수도 있다. 이런 분들을 위해 오랜 임상경험과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깨달은 점들을 이야기해보자. 이 이야기들을 통해서 죽음의 경험이 실제로 무엇을 불러일으키는지에 대한 한층 실제적인 참조의 장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내게 일어났던 몇가지 일들과 이 일들이 그 후의 사건들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었는지 이야기하기 위해 어린시절로 돌아가보겠다.
"열두살때 나는 북위 위스콘신에서 신문배달원 일을 했다. 어느날 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서 정말로 얼어죽을 것처럼 추웠다. 나는 커다란 눈 더미 한면에 작은 방 모양으로 구덩이를 파고 그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고속도로 옆에 눈이 6미터높이로 쌓여있었지만 맹렬하게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을 피하기 위해 이 피난처 안으로 기어들어간 것이다. 그러자 몇초도 안돼 심신이 노곤해지면서 엄청난 온기가 내몸을 뒤덮었다.
몸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고
믿을 수없는 기쁨과 평화가
나를 압도했다.
그리고
빛이 나를 에워쌌다.
감싸고 녹여주는
무한한 사랑의 의식으로
나를 어루만지며
함께 있어주는 듯한
빛이었다.
나는
이 무한한 장과
하나가 되었다.
이 장은
시작도 끝도 한계도 없이
시간의 밖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이 큰나의 상태가
억겁의 시간동안
영원히 계속되는 것 같았다.
이 경험은
완전하고 완벽했으며
부족한 것도 놓쳐버린 것도
더이상 이루어야 할 것도
없었다.
형언할 수 없는
심오한 사랑과 평화의 상태,
완전한 상태였다.
처음에는
안도감이 일더니
곧이어 고요한 기쁨과 황홀경이 뒤따르고
이어서 이 황홀경도 넘어섰다.
기쁨을 넘어
일상적 의식 저너머의
영원하고 무한한 상태에 이르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큰나는
에고, 즉 작은 나보다
진정으로 훨씬 사적이었다.
얼마후 아버지가 나를 발견했다. 그는 혼란과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흔들어 깨우며 소리쳤다. 다시는 이런짓 하지마라 얼어죽을 수 있다는 것 몰라"
당시에는 이 경험을 해석할 배경지식이 전혀 없었고 이런 경험을 뭐라 불러야 할지도 몰랐다. 말할 수 없이 강렬한 경험이었지만 사춘기 소년의 정신으로는 할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에게도 한마디 꺼낼 수 없었다. 그에게도 이 경험을 해석할 길이 전혀 없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아버지는 크게 놀란 상태였다. 결국 우리 둘다 이 경험이 무엇을 의미하고 가리키는지 모르는 채 지나갔다.
당시에는 임사체험에 대한 책도 구할 수 없었다. 영화 부활도 지난 10년 사이에 나왔다. 임상학적으로 이 영화는 임사체험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임사체험을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영화속의 여자가 경험한 내용이 진실임을 입증한다. 영화속에서 여자는 자동차 사고로 죽음을 맞이한다. 수술대에서 사망확진을 받은 여자는 몸을 벗어나 내가 방금 묘사한 것과 똑같은 믿을 수없는 무한의 상태를 경험한다.
아버지와 내게는 이 경험을 해석하거나 이해할 맥락이 없었다. 내가 간단하게 이 경험을 이야기해 줘도 아버지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당시 아버지가 너무 충격을 받아서 다시는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결국 훨씬 어른이 되기까지 난 이 경험을 이해하지 못했다.
삼십대에 들어선 후
심각한 진행성 질환으로
죽을 뻔 한 일이 있었다.
빈사의 위중한 상태로 병상에 누워있는데
갑자기 놀랍게도
내가 몸에서 3미터 위로 붕 떠올랐다.
공중에서
나는 투명하고 가벼운 완벽한 상태의
몸을 하고 있었다.
중력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몸과 정신의 능력들은
모두 멀쩡했다.
생각하고 추론하고
보고 듣는 것들 모두가 가능했다.
약 2미터에서 3미터 아래
병상에 누워있는 내몸을 내려다보니
금방이라도 숨을 거둘듯 했다.
그러나 몸을 벗어난 나는 그 몸을 내려다보면서 '진정한 나는 신체적인 몸과 다른 무엇'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에 유체이탈에 대해서 들어본 적도 없었다)
이처럼
중병을 앓는 동안
나는 몸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아직 떠날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중에 다시 몸속으로 들어갔다.
이후
나는 이 특별한 병에서 회복돼
계속 살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후에 이 병이 재발해
악화되었다.
나는 깊은 절망상태에,
지옥과도 같은 완전하고
절대적인 무기력과 가망없음의 상태에
놓여있었다.
몇초만 지나면
다시 몸을 떠날 것 같았다.
당시 나는
20년간 무신론자로 있었다.
몸이 아닌
무언가로 존재하는 믿기지 않는 경험들을 했어도
여전히 이 경험을 해석할
맥락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무신론적인 생각을 지닌 채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신이시여 계시다면
제발 절 도와주세요"
그러고는
바로 의식을 잃어버렸다.
다시 의식을 되찾았을 때
나는 전체적으로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나는 더이상
나의 신체적인 몸과
나를 동일시 하지 않게 되었다.
또 온갖 해야 할일들을
처리하며 돌아다녔지만
언제나 무한한 에너지 장속에
서 있었다.
이 장의 힘과 크기는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 장은
나를 절대적으로
안전하게 지지해 주었다.
마치 바위같았다.
동시에
말할 수 없이 부드럽고
온화하기도 했다.
이런
덧없는 부드러움과 온화함으로
무한한 사랑이
나를 안아주고 있는 것 같았다.
또 개인적인 의지나 정신,
개인적인 나같은 실체가 없었기 때문에
내 몸이 자발적으로 움직였다.
이런 상태로 나는 몇달간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이 느낌을 이해할 막락은 여전히 없었다. 이런 느낌을 뭐라고 설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마치
절대적인 어둠속에서
신과 완전히 단절된 것같은 느낌을 받다가
나와 신 사이의 장애물이 사라지면서
무한한 현존속에 서있게 된 것 같았다.
임사체험이 비교적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불과 최근 몇십년 사이의 일이다. 빅토리아 시대에 쓰인 고전적인 이야기들도 한정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문제를 다룬 책들이 많이 나와있다.
조사결과
약 65%의 사람들이
임사체험이나 유체이탈의 기억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중에 나는
이것이
마음대로 터득할 수 있는
하나의 기법임을 알았다.
저절로 혹은
의지를 갖고 자신의 몸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런 재능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명상을 하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가
즉각 이런 경험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임상의학자에 과학자로서
이 현상에 관심을 갖다가
나는 이것을 연구하는 과학 지향적인 단체를 발견했다.
그리고
로버트 먼로가 지은
"몸을 벗어난 여행"을 읽고
먼로 연구소를 찾아가 열흘간의 훈련에 참가했다.
그들은 마음대로 몸을 벗어날 수 있게
두뇌를 변성된 의식상태로 만들어주는 진동수를 지닌
오디오 테이프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이런 상태에 이르는 능력을
타고나지 않은 사람들이나
저절로 이런 능력이 개발되지 않는 사람들도
이것을 터득할 수 있음을 알았다.
이 훈련의 목적은
우리가 단순한 몸 이상의 존재임을,
신체적인 몸보다는 더욱 위대한 존재임을,
신체적인 몸이 우리에게 속해있지만
우리는 몸에 제한되지 않음을 깨닫는데 있었다.
죽음과 죽어감의 문제를 다룬 것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책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저서들이다. 실제로 그녀의 저서 '죽음의 순간'은 이전까지 금기시하던 주제를 논의하고 친숙해질 수 있게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주제를 공론화했다. 덕분에 그녀가 요약한 네 단계는 이제 비교적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물론
충격에 대한 첫 반응은
부정(denial)이 지배적이다.
신체적인 죽음은
일반적으로 지각있는 존재 누구에게나
생물학적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주된 요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천년 동안
죽음을 회피하고 하나의 개체로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들은
무수하게 고안해 왔다.
더불어
생물학적인 지성의 기능이
학습과 기억으로 표출되면서
생존기술들도 진화했다.
덕분에
더욱 작은 형태의 생명체들이
생물학적으로 원형질의 죽음을 당하는 동안
오로지 인류만이
선견지명으로
죽음을 의식적으로 예견하게 되었다.
부정은
자신을 두려움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에고의 기본적인 기제중 하나다.
그러나
부정을 내려놓으면
에고를 위해 존재하던
소멸에의 두려움은
인식되지 않는다.
이런 두려움은
몸과 자신을 동일시한데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협상의 단계에서는
에고/마음이 불가피한 것을
지연시키려한다.
또 신을 인식하고
신에게 에고를 위해
중재에 나서달라고
간청하기도 한다.
에고의 자기애적 핵심과
대치와 통제의 상실로 인해
분노가 분출되기도 한다.
어린아이 같은 면이
들고 일어나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과 맞서지만
자기 마음대로 하지는 못한다.
이처럼
어린아이같은 바람이 좌절되고
거부당하면
불공평하다는 느낌을 갖는다.
따라서
미래에도
자신의 존재가
영원히 계속되리라는 기대가 꺾이면서
슬픔과 비탄에 빠진다.
앞에서 말한
모든 반응의 바탕에는
자신과 자신의 존재를
신체적인 몸과 동일시하고
몸을 존재의 근원으로 보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몸에
이런 식으로 의미를 부여한 탓에
몸이 소멸되리라는 예상에
저항감이 일어나는 것이다.
신체적인 죽음에 대한 예상은
잊힘, 의식과 자각력의 소멸,
이것의 유일한 특성인
'경험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영적인 감응과 자각은
이런 신체적인 단계들을
훨씬 쉽게 밟아나가도록 해준다.
그래서
신과의 관계와
이런 문제에 서서히 관심의 초점을 맞추게 된다.
희망과 믿음 그리고 순응으로 인해
점진적으로 영적인 가르침들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생기고
평화를 불러오는
더욱 고차원적인 단계들로
의식이 변화된다.
죽음의 과정이
지금은 물론
고차원적인 단계들로
의식이 변화된다.
죽음의 과정이
지금은 물론 과거에도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에게 일어났던
보편적인 것이라는 인식으로 인해
죽음을 수용하게 된다.
그리고
여전히 살아있거나
살았던 모든 존재들의
공통적인 경험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
죽음의 보편성으로 인해
죽음의 과정자체에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상실의 고통을 없애려면
에고가 살아생전에 가졌던 많은 애착들,
특히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도 죽음의 과정에 직면하고
똑같은 운명에 처하리라는 사실을 인식하면
이런 애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면
사랑도
실재에 대한 에고의 제한된 시각을 초월해서
사랑 자체인
영원히 진화하는 신성의 실재와
하나가 될 수있는 도구가 되어준다.
이로 인해
타인들을 사랑하면 할수록
상실감은 더욱 적어진다.
타인들의 유일한 가치가
사랑에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요컨대
작은 나는 나누지만
큰나는 통합한다.
이로써 죽음은
빛비춤의 상태로 나아가는
받침대가 되어 준다.
살아생전 영적인 작업을 많이 할수록
죽음을 예감하는 순간에
해야 할 일은 적어진다.
의식이 진화된 사람은
언제나 몸을 떠날수 있음을 알아도
마음이 편안하다.
영적인 진보를 가속화시키는
하나의 방법은
궁극적인 죽음의 가능성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죽음의 순간에 일어날 수도 있는
모든 애착과 환영들을 처리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런 훈련은
삶에 대한 두려움을
크게 감소시켜준다.
한때
호흡을 포함해서
의식의 연구를 위한
대안적 방법들을 공부한 적이 있다.
이때
나의 몸을 벗어나
더 이상 몸을 경험하지 않게되었던
이전의 부드럽고도 온화했던 상태를
똑같이 경험했다.
열두살때
눈더미속에서 경험했던
그 상태속으로 되풀이해서
돌아가곤 한 것이다.
다시
그런 상태속으로 들어가
내몸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몸에서 벗어나면
몸에서 일어나던 모든 현상들을
몇초도 안돼 잊는다.
그래서
평생 몸에서 일어났던 일이나
몸에 대한 기억도
사라져 버린다.
몸의 모든 것들이
아무 관계도 의미도 없어지고
실체성도 사라진다.
대신에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있는
그 믿기지 않는 평화와 사랑을 느끼면서
본래의 큰 나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순수한 의식만 남으면서
무한한 존재로서
현존하는 실재를
예민하게 자각한다.
다시 의식지도로 돌아가면, 지도의 아랫부분에서는 소유에 엄청난 관심을 기울이고 소유(having)를 토대로 사람을 평가한다. 그러나 용기와 능력, 역량이 있는 더욱 강력한 단계들로 올라가면 행함(doing)에 관심을 기울인다. 여기서 다시 지도의 맨 윗부분을 향해 올라가면 오로지 자각상태(being)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우리가 변화하는 모습과 본질에 가치를 부여한다.
누구도
우리의 소유나 행함에
더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몸을 벗어날 때
우리가 가져가는 것은
본래의 우리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도
자신에 대한 진실,
자기 본래의 모습은 경험하지만,
소유했던 것들은
모두 잊어버린다.
돈이나 소유물,
권력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고
우리가 했던 모든 일들도
망각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이런 상태에 있을 때
자신이 곧 몸이라고 생각하며
세상에서 했던 일들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아무런 기억도 안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본질에 대한 기억은
아주 강력할 것이다.
열두살 이후 또 한번 아주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 어머니와 나는 사이가 별로 가깝지 않았다. 어머니는 플로리다에, 나는 뉴욕에 사는터라 자주 만나러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날 뉴욕의 숲속에 있는 플로리다로 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어머니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직감한 것이다. 마치 무언가가 "당장 이리로 와"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 다음날 아침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예약을 마친뒤 어머니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어머니가 입원중이라고 했다. 난 어머니가 돌아가시리라는 걸 알았다. 병원으로 들어서는 순간 커다란 안도감이 밀려왔다. 갑자기 엄청난 긴장에서 해방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머니의 병실에 들어서니 의료진들이 병실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이 작은 병원의 의료진들에게 나는 뉴욕에서 온 "저명한 전문가"였다. 그래서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으며 모든 조처를 취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병실안에는 의료진 전원이 모여있었다. 어머니는 온몸에 온갖 종류의 튜브와 산소 탱크, 심장을 멈추지 않게 해주는 전자기계와 측정기를 부착한 채 병상에 누워있었다. 그러나 병실에 들어서는 바로 그 순간 나는 갑자기 그녀가 몸을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죽음의 순간에 어머니가 느꼈던
그 절대의 황홀경이
내게도 그대로 느껴졌다.
어머니는
몸을 벗어나게 된 것을
즐거워했다.
마치 무한한 기쁨과
황홀경의 상태에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어머니와 마치 한 몸처럼 이것을 경험했다. 어머니가 느끼는 것이 그대로 내게도 전해졌다. 그녀는 몸을 벗어나기 위해 도착할때까지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둘의 의지가 하나로 어우러져 죽음의 순간을 함께 느꼈다.
어머니는
내가 임종의 순간을
당신과 함께 경험하기를 바랐다.
덕분에
어머니가 영원히 확장되는
무한의 그 절대적인 황홀경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나도 똑같은 상태를 경험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몸에서 벗어나는 걸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했다.
몇년 전부터 몸을 떠나고 싶었던 터라,
그 순간이 오자
정말로 말할수 없이 행복했던 것이다.
물론 의료진들은 어머니가 떠났다는 걸 아직 알아차라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텔레파시와 같은 것으로 심장전문의에게 "그녀가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 기계를 끄세요"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어머니의 죽음을 알아차리고 기계를 끄려했다. 어머니의 심장을 뛰게 만들어주던 기계가 꺼지자 의사가 청진기를 어머니의 가슴에 대보며 말했다. "오 사망하셨습니다" 그러자 의료진들이 일제히 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내가 비탄에 빠지리라고 예상한 듯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와 똑같이 황홀경의 상태속에서
어머니와 함께 있었다.
그런데 슬퍼할 것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어머니는 삶에서 이보다 더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보조 간호사 한명은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고 활짝 웃어보이며 말했다. 아 선생님의 어머니는 늘 행복해하셨어요. 당신도 아는군요. 물론이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둘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씨익 웃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우리 둘만은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마 내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거나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게 되어 있어서 어머니의 죽음을 반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이 속으로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신만이 아실 것이다. 그러나 그 간호 보조사와 나는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아는 터라 기쁨의 상태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몸과의 이별에 대한
나의 경험과 기억, 회상들은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내가 여러번 경험했던 것처럼
무한한 사랑은 느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몸을 벗어나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어느 쪽이든
신체적 죽음은 경험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아도,
다른 몸을 받고 태어났을때
기억이 되살아나기도 했다.
이 생에서 세살이었을 때
나는 갑자기 망각에서 벗어나
이 몸을 인식했다.
아주 어렸던 시절을 되돌아보면
내가 있다, 내가 존재한다라는 것을 인식했던
그 순간이 기억난다.
앞에서 마음속에 품은 것들이 세상에서의 경험을 결정짓는 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신에 대한 경험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몸에서 벗어나
망각속으로 들어간다는
생각을 품고 있다.
그러나
나는
무한한 현존을 경험했다.
거의 천사같은
무한한 존재들이었다.
그날 죽어가는 사람들과 함께
다른 세상에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처음에 떠오른 것은
전쟁터에서의 경험이었다.
나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두려움,
신체적인 고통을 바라보면서
그들과 함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죽어가는 사람과 함께 하는
그 무한한 사랑,
무한한 상태가 찾아왔다.
바로
내 눈앞에서
사람들이 변화했다.
그들이 몸을 벗어나가
모든 상처들이
치유되었다.
마치
나의 가슴을
신에게 바친 것처럼
나의 사랑도
신의 사랑과 하나가 되었다.
그러자
절대적인 사랑인
천사같은 존재들의 에너지 장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나의 의식은
죽어가는 사람과
여전히 거기 있었다.
이 에너지 장의
강렬한 사랑이
모든 상처와 두려움을 치유해 주었는데
내게도 그 두려움이 보였다.
죽어가는 사람의 두눈이
다시 활짝 열리는 순간,
나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이 경험과 함께
녹아들고 있음을 알았다.
모든 공포와 두려움,
죄책감, 분리감이 녹아버리자,
그들이 감사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들에게 신성하거나 중요한 무언가를
그들이 보고 있음을
나자신을 형체가 없는 존재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와 똑같은 경험은
이 생에서도 일어났다.
더이상 신체적인 몸이 없는
고차원적인 의식상태속으로 들어가면
사람들은 자신이 투사하는 것들을 본다.
그래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눈을 뜬 순간
그들은 우리를 그들에게 가장 의미있는 존재로,
어떤 형체도 없는 존재로 본다.
때로는 우리를
그들의 어머니나 연인처럼
그들이 깊게 사랑했던 존재들로 보기도 한다.
혹은 신성한 존재를 보기도 하는데,
이런 일은 의식의 현상안에서 일어난다.
사실 이 모든 것이 의식의 현상이다. 요컨대 죽어가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가장 큰 치유를 주는 존재로 본다.
이제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죽음에 대한
우리 자신의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마치 응급실같은 세상 저편에
자신이 있다고 그려보는 것이다.
가슴을 열고
천사같은 존재들과 연결되어
그들과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이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로 다가가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이때 우리는
여전히 신체적인 몸을 갖고 있으며
연민의 에너지를 그들에게 보내준다.
의식자체는
몸에 제한받지 않는다.
몸은 에고 및 에고의 제한된 시각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제 상상속에서 연민의 에너지 장을 뿜어내는 자신을 그려본다.
누구에게든
상상속에서 이런 일을 해볼 수 있다.
지구상에는 언제나 60억 이상의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매 시간
그들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이중에서 유아용 침대에 누워있는 아기든, 방금 자동차에 치인 십대 청소년이든, 전장에서 총탄을 맞은 누군가든, 분만중인 산모든, 자살을 시도중인 사람이든, 사랑을 가장 많이 쏟아부어 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을 선택한다.
그런 다음
연민의 마음을
가장 많이 불러일으키는 사람을 그리면서
상상속에서 그에게로 달려가
무한한 사랑을 부어준다.
어느 면에서는 이런 순간이
그 어느때보다 외로울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다.
평생 쌓아두었던 사랑과
부드러움을 쏟아부어주면서
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과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들에게로 가서 치유를 해주기 시작한다.
두팔에
그들을 안고
가슴을 통해 그들 속으로
사랑을 쏟아붇는 자신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고차원적인 존재로부터
우리의 가슴을 통해 뿜어져 나와
그 사람을 가득채워 준다.
그러면
서로의 두려움이
녹아버리는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죽음에 대해
어떤 두려움을 안고 있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의 순간에
깊은 평온속으로 들어간다.
마치
위대한 존재들에게서 흘러나온
연민의 에너지가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에
그들에게 닿는것 같다.
죽어가는 사람이
"오 신이시여, 도와주소서"라고 말하면
문이 열리면서
우리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보내주는
이 연민의 마음이 흘러들게 된다.
이 세상은
자유의지가
영향을 미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죽어가는 사람의 옆으로 다가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를 보살피고 치유해준다.
손을 뻗어
그를 몸에서 벗어나게
들어 올려주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그는 안전하다.
고향으로 돌아가 보살핌을 받고
신에게 크나 큰 사랑을 받는다.
이로써
그는 진실을
내적으로 경험하기 시작한다.
이때
우리는 개인적인 작은 나를
옆으로 밀어놓아야 한다.
이때
작은 나가
필요없기 때문이다.
호불호나 혐오감,
매력을 지닌
개성도 필요없다.
오로지
가슴을 통해 흐르는
그 에너지로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치유의 에너지는
우리의 자발적인 의지를 통해
우리에게서 타인들의 존재속으로 흘러든다.
그러면
우리는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의 변화를
목격하게 된다.
실제로 그것을 느끼게 된다.
두려움이 죽어가는 사람의 눈을 떠나고
고통스러운 긴장이
그의 몸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도 고통이
그의 몸을 떠나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면
그는 생명과 사랑의 에너지에 둘러싸인 채
무한한 평화의 상태속으로
들어간다.
자신이 완전하고
완벽한 존재임을 느끼며
치유된다.
두려움이나 분리감, 죄책감,
불안은 더이상 없다.
그러면
그와 우리는 함께
곧장 몸밖으로 들어 올려진다.
부주의하게도 원형 톱날에 엄지손가락이 잘려나갔을 때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처음에는 물론 충격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이 충격속에서 갑자기 내안에서 합창 소리같은게 들려왔다. 마치 천사같은 존재들이 나를 에워싼 채 성가를 불러주는 것 같았다. 내가 가사를 잃어버리기라도 한 듯 그들은 계속 이렇게 읊조려 주었다.
"그대는 몸이 아니야,
그대는 완벽하게 자유로워,
그대는 몸이 아니야,
그대는 완벽하게 자유로워"
병원으로 실려가는 내내
이 노랫소리가
떠나질 않았다.
병원에서 나는
절단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어떤 마취제나
진통제도 받아들 일 수 없었다.
그래서 의사들은 결국 마취제나 진통제를 투여하지 않고 수술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의사가 걱정을 하기에 나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음 통증을 다스리는 법은 제가 알아요.
그러니 어서 수술을 진행하세요"
그런 다음 나는 다시 누워 통증에 깊이 순응하기 시작했다. 통증에 저항하거나 딱지를 붙이지 않는 것이다. 이 순응은 개인적인 의지와 관련된 것이었다.
순응의 순간
전과 똑같은
엄청난 경험이 시작되었다.
천사같은 존재들이
나를 붙잡고
깃털조차도 거칠게 느껴질 만큼
아주 가볍고 부드럽게
나를 몸에서 들어 올려주는 것 같았다.
그러자
내 몸은
여전히 거기 있었지만
나는 더이상
몸을 경험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에
어떻게도 설명할 수 없는
무한하고 깊은 평화의 상태속으로
들어갔다.
형용할 수 없는
무한한 내면의 행복과
기쁨의 상태였다.
나는 다른 차원에서
나의 엄지손가락
혹은 그것의 재현물같은 것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엄지손가락이 절단되는 과정을
행복하게 지켜보았다.
내게
엄지손가락을 제거하고 싶었던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참기 어려울만큼 고통스러웠던 경험이
황홀하게 다가왔으며
무한한 평화가
나를 감싸고 있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다.
우주의 사랑이,
신의 사랑이,
신성의 광휘가
나를 한없이 보호해 주고 있었다.
죽어감의 경험을 돌아보면
그것이 결국 순응과
내려놓음의 경험이었음을 알게 된다.
자발적으로
가슴을 열어
타인에게 사랑이 되어주는 경험이
바로 죽어감의 경험이다.
죽어감의 문제를 묵상하면서
내가 이제까지 이야기 한 것들을
실천하고 있다면
아침에 눈을 뜨자 마자
신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저의 의식을,
저의 사랑을,
그들과 하나가 되려는
저의 자발적인 의지를 보냅니다"
그러면
우주의 힘들이
우리 의식의 힘을 이용해서
이런 마음을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전해줄 것이다.
처음에는
이런 일이
우리의 상상에 불과한 것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몇번 이렇게 하다보면
이 일을 하는 것이
더이상 우리 자신이 아님을,
우리를 통해
이 일이 행해지도록
우리가 허용하고 있는 것뿐임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실제로 이런 일은
우리를 통해 행해지며,
이로 인해 우리는
고차원적인 기쁨과
황홀경의 상태속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신체적인 몸이
우리를 떠나고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자동차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
이런 상태속에 있을 때
나는 실제로 신성한 에너지가
나를 관통해 들어와
나의 가슴부분에서
그들에게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느낀 것이다.
이 강력한 사랑의 에너지는
개인적인 나를 뛰어넘어
고속도로를 따라 1.6킬로미터 가량이나
흘러갔다.
고속도로의
커브부분을 달릴 때였다.
이 에너지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그 순간
뒤집혀 있는 자동차 한대가
눈에 들어왔다.
방금 사고를 당했는지 바퀴가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탑승하고 있던 사람들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는지 그들이 신을 향해 절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이동중인 안테나같은 나를
무전탑 삼아서
신이 사랑의 에너지를
보내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같은 날 여기서 약 8킬로미터 떨어진 고속도로에서 다시 똑같은 경험을 했다. 이번에도 강력한 에너지가 나를 통해 흘러나가서 자발적으로 도로 앞쪽을 비추었다. 그리고 커브 부분에 이른 순간 나는 두번째 교통사고 현장을 목격했다. 다른 차 한대가 또 전복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경찰차 한대도 현장에 있었다.
그런데
그곳을 지나치는 순간
이 에너지가 계속 교통사고 현장을 향해
뒤로 흘러갔다.
한참을 가도 이 현상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서서히 멈추었다. 사고를 당한 사람이 더욱 무한한 에너지 장과 연결된 것 같았다. 이런 일이 다른 장소와 다른 환경속에서도 거듭 일어났다.
이런 경험을 하는 동안
나는 내게 몸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이 경험이 주는 기쁨이
너무도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살아있는지 죽어가고 있는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신의 종복이 되어
개인적인 나를 잊고,
천사와 같은 존재들이
나의 의식과 에너지를 이용하게 하고 싶다는
자발적인 의지만 있을 뿐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무한한 큰나다.
이것은 천상의 영역과도 연결되어 있다.
우리 안의 천사와 같은 상태를 인정할 때
긍정의 자발적인 의지를 통해
이 상태와 결합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음을 인정할 때
이 에너지가
자신을 맡기고
죽은 자들과 죽어가는 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음을 인정할 때
실제적인 죽음이나 죽어감 같은 것은
없음을 깨닫게 된다.
몸을 내려놓고
몸에 작별을 고하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생명은 생명을 향해 흐르며,
결코 멈추지 않는다.
생명이 몸을 떠날때도
우리는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다.
다른 존재들과 함께하는 것에
너무 정신이 없어서,
신체적인 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거의 깨닫지 못한다.
이렇게
신체적인 몸의 경험을 넘어서면
설명하기 힘든
경험들이 다가온다.
이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평화의 경험을 위해
우리도 스스로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죽음과 죽음의 과정은 몸에 작별인사를 보내는 것
임상의학자에 과학자로서 이 현상에 관심을 갖다가 나는 이것을 연구하는 과학 지향적인 단체를 발견했다. 그리고 로버트 먼로가 지은 "몸을 벗어난 여행"을 읽고 먼로 연구소를 찾아가 열흘간의 훈련에 참가했다.
죽어감의 경험을 돌아보면 그것이 결국 순응과 내려놓음의 경험이었음을 알게 된다. 자발적으로 가슴을 열어 타인에게 사랑이 되어주는 경험이 바로 죽어감의 경험이다. 죽어감의 문제를 묵상하면서 내가 이제까지 이야기 한 것들을 실천하고 있다면 아침에 눈을 뜨자 마자 신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저의 의식을, 저의 사랑을, 그들과 하나가 되려는 저의 자발적인 의지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