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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姓名) |
이증(李增) |
본관(本貫) |
고성(철성) 固城(鐵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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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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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
자겸(子謙) |
호(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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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履歷) |
안동향교지(安東鄕校誌) 第一節 人物 이증(李增) 고성인(固城人). 좌상(左相) 원(原)의 자(子)이다. 단종(端宗)1(1453) 진사(進士)가 된 후(後) 과거(科擧)에 응(應)하지 않고 음보(蔭補)로 진해(鎭海). 영산현감(靈山縣監)이 되었는데 선정(善政)으로 거사비(去思碑)가 있다. 단종(端宗) 손위(遜位)에 의분심(義憤心)을 품고 현감(縣監) 임기(任期) 전(前)에 안동(安東)에 전거(奠居)하여 학행(學行)과 덕망(德望) 있는 고장(故障)선비 12인과 우향설(友鄕楔)를 맺고 덕업(德業)을 상권(相勸)하며 우유자적(優遊自適)하였다. 영남지방(嶺南地方)의 고성이씨(固城李氏)는 모두 공(公)의 손(孫)이다.
이증(李增):1419(세종 1, 기해)~1480(성종 11, 경자). 본관 固城. 자는 자겸(子謙). 原의 子. 1453년(단종 1) 진사시 합격. 蔭補로 鎭海 靈山 현감 역임. 영산현감으로 있을 무렵, 임기도 마치기전에 벼슬을 버리고 安東으로 定居. 學德있는 고장의 선비 12人과 함께 友鄕?를 修?하여 서로 덕업을 권하고 친목을 두텁게 하며 風化를 밝히는데 기여함. ▣참고:永嘉誌 | ||||
묘(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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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父) |
이원(李原) 1368(공민왕 17)∼1430(세종 12).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차산(次山), 호는 용헌(容軒).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암(#암10)의 손자이며, 밀직부사 강(岡)의 아들이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1382년(우왕 8) 진사가 되고, 1385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복시승(司僕寺丞)을 거쳐 예조좌랑과 병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392년 조선왕조가 개국되자 지평이 되었고, 1400년(정종 2) 좌승지로 있을 때 방원(芳遠)이 그의 동복형인 방간(芳幹)의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한 공으로 1401년(태종 1)에 좌명공신(佐命功臣)4등에 책록되었다. 그해 철성군(鐵城君)에 봉작되었고, 같은해에 공안부소윤(恭安府少尹)을 거쳐 대사헌으로 있을 때 순군(巡軍) 윤종(尹琮)을 구타한 죄로 한때 파직되었다. 이듬해 복직되어 경기좌우도도관찰출척사(京畿左右道都觀察黜陟使)가 되었고, 1403년에 승추부제학(承樞府提學)으로 있으면서 고명부사(誥命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에 평양부윤으로 있으면서 병마도절제사를 겸하였다. 1406년에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와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를 겸직하였다. 이어 대사헌과 판한성부윤을 거쳐, 1408년에 태조가 죽자 국장을 주관하는 빈전도감판사(殯殿都監判事)가 되었고, 이듬해에 경상도관찰사로 영상주목사를 겸직하였다. 이해에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1414년 영길도도순문사(永吉道都巡問使)를 거쳐, 이듬해 6월에 예조판서로 있다가 12월에 대사헌이 되었다. 이어 참찬을 거쳐 1416년 3월에 판한성부사, 5월에 병조판서가 되었다. 1417년 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와 찬성을 거쳐 이듬해 우의정에 올랐다. 1419년(세종 1) 영경연사(領經筵事)를 겸하였고, 1421년 1월에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해 12월에 좌의정으로 승진되었고, 우의정 정탁(鄭擢)과 함께 도성수축도감도제조가 되어 8도의 정부(丁夫) 32만5000여명을 징발, 1422년 1월부터 두 달에 걸쳐 그때까지 토성으로 되어 있던 도성 성곽을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1425년에 등극사(登極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에 많은 노비를 불법으로 차지하였다는 혐의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공신녹권(功臣錄券)을 박탈당하고 여산(礪山)에 안치되었다가 배소에서 죽었다. 세조 때 관작이 회복되었다. 그는 고려 말기부터 문명이 알려져 조선 초기에 국기를 다지고 제도를 확립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한 중신이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부귀가 한몸에 모이자 지나친 위세를 부려 사람들의 지탄을 받아, 급기야 공신녹권까지 박탈당하고 고독한 귀양생활을 하다가 유배지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용헌집》·《철성연방집 鐵城聯芳集》이 있다. 시호는 양헌(襄憲)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世宗實錄, 國朝人物考. 〈李在範〉 | ||||
모(母) |
양천허씨(陽川許氏) 전리판서(典理判書) 허금(許錦)의 女 부(父) 허금(許錦) ?~1388(우왕14) 고려의 문신. 자는 재중(在中), 호는 야당(야堂), 찬성사(贊成事) 관(冠)의 증손, 지신사(知申事) 경(絅)의 아들. 공민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 교서 교감(校書校勘)·예의 정랑(禮儀正郞)을 지내고, 우왕 때 좌상시(左常侍)를 거쳐 전리 판서(典理判書)에 올랐다가 얼마 후 물러났다. 권력자(權力者)에게 아부하지 않았으며, 조준(趙浚)·윤소종(尹紹宗) 등과 친교가 있었다. 은퇴 후에는 재산을 기울여 약(藥)을 저축해 두었다가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고 병자에게 약을 주어 치료케 했으며 50세가 못되어 죽었다. 시호는 문정(文正). 조부(祖父) 허경(許絅) 관(官) 지신사(知申事) 증조(曾祖) 허관(許冠)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무신. 본관은 양천(陽川). 공(珙)의 셋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정당문학 극민(克敏)의 딸 윤씨( 尹氏)이다. 부인은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송빈(宋#분23)의 딸이다. 낭장에 임명된 지 4년이 지나도록 사은(謝恩:은명에 사례하고 직임에 나가는 것)하지 않고 과거를 준비하였는데, 1302년(충렬왕 28)에 드디어 병과의 수석으로 급제하자, 왕이 평소에 그 이름을 듣고 발〔簾〕 앞까지 불러서 서각띠〔犀帶〕를 주었다. 대창서승(大倉署丞)·승봉랑 판도좌랑(承奉郎版圖佐郎)을 거쳐 호부산랑(戶部散郎)에 이르니 찬성사를 증(贈)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石灘集, 韓國金石全文(陽川郡夫人許氏墓誌, 金文英公夫人許氏墓誌, 許載墓誌, 許載墓誌). 〈金基德〉 | ||||
모(母) |
전주최씨(全州崔氏) 군기총랑(軍器摠郞) 최정지(崔丁智)의 女 | ||||
배(配) |
배(配) 정부인(貞夫人) 경주이씨(慶州李氏) 관찰사(觀察使) 이희(李희)의 여(女) 이희(李희) 字(자)는 明仲(명중), 號(호)는 청호(淸湖). 1423년(세종 5) 司馬試(사마시)에 합격, 1427년 臺諫(대간)·持平(지평)을 거쳐 掌令(장령)·執義(집의)를 역임하고, 吏曹 參議(이조참의)·弘文館 副提學(홍문관부제학)·관찰사에 이르렀다. 大提學(대제학)에 追贈(추증)되었다. 조부(祖父) 이담(李擔) 관(官) 좌부대(左副代) 이담(李擔) 1370(공민왕 19)∼1405(태종5).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문하시중(門下侍中) 제현(齊賢)의 증손자이고, 학림(學林)의 아들이다. 1393년(태조 2) 춘장문과(春場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글씨를 잘 써서 항상 상서사(尙瑞司)의 벼슬을 지냈으며, 1401년(태종 1) 직예문관으로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1403년 의정부의 이방녹사(吏房錄事)를 탄핵하여 의정부 당상들이 시사(視事)하지 않는다는 물의가 빚어졌다. 그뒤 우부대언(右副代言)에 이르렀는데, 자기 집 광견(狂犬)에 물려 죽었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國朝榜目. 〈權仁赫〉 증조(曾祖) 이학림(李學林) 관(官) 소부윤(小府尹) 외조(外祖) 안등(安騰) 본(本) 죽산(竹山) 관(官) 판서(判書) 안 등 (安 騰 : ?~1435)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竹山). 공민왕비 정비안씨(定妃安氏)의 아버지인 삼중대광정당문학 문정공(文貞公) 극인(克仁)의 손자이며 삼사좌윤 천노(天老)의 아들이다. 1400년(정종2) 사헌부시사(司憲府侍史), 1404년(태종4)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가 되었다. 1407년에는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로서 해안방어의 성실유무를 감찰하기 위하여 전라도에 파견되었고, 1410년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를 거쳐 이듬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이어서 대사헌을 거쳐 1415년에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노모가 상주에 있고 또한 경상도관찰사 이지강(李之剛)의 처부모가 평택에 있었으므로 양자의 관직을 맞바꿔 다시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한성부윤으로 전근되어 돌아와, 경상도 김해근처의 산록에 말을 방목하기 적합한 곳이 있으므로, 주위 7, 8 리(里)에 담을 쌓고 양마(良馬)를 기른다면 1만여필을 방축할 수 있음을 건의하여 실시하였다. 1416년 형조판서가 되었다. 시호는 정경(貞景)이다. | ||||
자(子) |
이굉(李굉) 1440(세종22)~1516(중종11) 조선의 문신. 자는 심원(深源), 호는 귀래정(歸莢亭)·연생당(戀生堂), 현감 증(增)의 아들. 1480년(성종1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자(正字)가 되고, 1493년 지평(持平)이 되었다. 1500년(연산군 6) 집의(執義)를 거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다가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에 김굉필(金宏弼)의 일당으로 몰려 관직이 삭탈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1506) 후 다시 기용되었다가 치사(致仕), 안동(安東)에 내려가 풍류(風流)를 즐겼다. 시문(詩文)에 능했다. | ||||
녀(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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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兄弟) |
형(兄) 이대(李臺) 자(字) 자익(子益) 호(號) 둔재(鈍齋) 관(官)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배(配) 정부인(貞夫人) 예천권씨(醴泉權氏) 목사(牧使) 권상(權祥)의 여(女) 조부(祖父) 권군보(權君保) 관(官) 이조(吏曹)판서(判書) 증조(曾祖) 권섬(權暹) 관(官) 예빈경(禮賓卿) 외조(外祖) 임경종(任敬宗) 본(本) 과천(果川) 관(官) 부령(副令) | ||||
형제(兄弟) |
누나 유방선(柳方善) 주부(主簿) 태재집(泰齋集) 1388(우왕 14)∼1443(세종 25). 조선 초기의 학자.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자계(子繼), 호는 태재(泰齋). 아버지는 기(沂)이며, 어머니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종덕(李種德)의 딸이다. 1405년(태종 5) 국자사마시(國子司馬試)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1409년 아버지가 민무구(閔無咎)의 옥사에 관련된 것으로 연좌되어 청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영천에 이배되었다. 1415년 풀려나 원주에서 지내던 중 참소로 인하여 다시 영천에 유배되어 1427년(세종 9) 풀려났다. 유배생활중의 학행이 높이 드러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주부(主簿)에 천거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2세 무렵부터 변계량(卞季良)·권근(權近) 등에게 수학하여 일찍부터 문명이 높았다. 특히 유배생활중에는 유배지 영천의 명승지에 ‘泰齋’라는 서재를 짓고 당시에 유배 또는 은둔생활을 하던 이안유(李安柔)·조상치(曺尙治) 등 문사들과 학문적인 교분을 맺고, 주변의 자제들에게 학문을 전수하여, 이보흠(李甫欽) 등의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즉, 정몽주(鄭夢周)·권근·변계량을 잇는 영남성리학의 학통을 후대에 계승, 발전시키는 구실을 담당한 것이다. 원주에서 생활하던 동안 서거정(徐居正)·한명회(韓明澮)·권람(權覽)·강효문(康孝文) 등 문하생을 길러내었으며, 특히 시학(詩學)에 뛰어났다. 경현원(景賢院)과 영천 송곡서원(松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태재집》이 있다. 참고문헌 筆苑雜記, 新增東國輿地勝覽, 國朝人物考. 〈李根 | ||||
형제(兄弟) |
누나 류급(柳汲) 문화인 부정(副正) | ||||
형제(兄弟) |
형(兄) 이곡(李谷) 대호군(大護軍) 배(配) 강양이씨(江陽李氏) 사예(司藝) 이양명(李陽明)의 여(女) | ||||
형제(兄弟) |
형(兄) 이지(李土+至) 자(字) 자안(自安) 관(官) 한성소윤(漢城少尹) 증(贈)자헌대부(資憲大夫) 좌찬성(左贊成) 수(壽) 63세 서거정(徐居正) 찬(撰) 비명(碑銘) 있음 배(配) 정부인(貞夫人) 광주정씨(光州鄭氏) 장령(掌令) 정지당(鄭之唐)의 여(女) <국조 문과 방목> 정지당(鄭之唐) 태종(太宗)5년(1405년), 식년시(式年試) 을과3(乙科3) >>> 인적사항 생년(生年) 자(字) 호(號) 본관(本貫) 광주(光州)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정귀진(鄭龜晋) 생부(生父) 조부(祖父) 정윤부(鄭允孚) 증조부(曾祖父) 정신호(鄭臣扈) 외조부(外祖父) 정리(鄭釐) 처부(妻父) 박가흥(朴可興)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주부(主簿) 품계(品階) 관직(官職) 장령&(掌令&) | ||||
형제(兄弟) |
형(兄) 이비(李土+卑) 관(官) 무과(武科) 동지중추(同知中樞)원사(院事) 배(配) 정부인(貞夫人) 파평윤씨(坡平尹氏) 군수(郡守) 윤환(尹煥)의 여(女) 조부(祖父) 윤규(尹珪) 관(官) 보문제학(寶文提學) 증(贈)영의정(領議政) 윤규(尹珪) 1365(공민왕14)∼1414(태종14) 고려·조선의 문신. 판도 판서(版圖判書) 승례(承禮)의 아들. 1383년(우왕 9)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1390년(공양왕 2)에 우정언(右正言)이 되고, 그 후 예조 정랑(禮曹正郞)·내서사인(內書舍人)·형조 좌참의(刑曹左參議) 등을 지냈다. 1409년(태종 9) 병조 참의(兵曹參議)·우부대언(右副大言)을 역임, 뒤에 좌부대언(左副代言)·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지내고, 1413년(태종13) 경승부윤(敬承府尹)이 되었다. 예서(隸書)와 초서(草書)에 능해 항상 상서사(尙瑞司)의 벼슬을 겸임했으며, 태종과 같은 해에 급제하여 태종 즉위 후 후대를 받았다. 증조(曾祖) 윤승예(尹承禮) 관(官) 판도(版圖)판서(判書) 증(贈)영의정(領議政) 윤승례 尹承禮 생몰년 미상 고려시대의 문신으로 교하면 당하리에 묘가 있다. 본관은 坡平, 영평군 陟의 다섯째 아들이다. 봉익대부에 오르고 정3품직인 판도판서를 지냈다. 이후 고려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려는 충신들은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히거나 두문동 72현처럼 절조를 지켰다. 이때 파평산에 들어가 吉再 등과 함께 고려를 그리워하면서 노후를 보냈다고 전한다.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후에 손녀인 번의 딸이 세조비 貞熹王后로 책봉됨에 따라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또한 손자인 공간공 炯이 좌익공신에 책훈되어 순충보조공신에 추증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그 후손들 중에서 많은 고관대작과 학자가 배출되어 집안이 크게 번창하였다. 시호는 文忠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중앙일보사, 「姓氏의 고향」. 1989; 尹永鎬, 「坡平尹氏歷史要覽」, 1990. 배(配) 정부인(貞夫人) 고창오씨(高敞吳氏) 교위(校尉) 오천(吳泉)의 여(女) | ||||
형제(兄弟) |
제(弟) 이지(李지) 자(字) 승경(升卿) 호(號) 사암(思菴) 관(官) 승문원참교(承文院參校) <국조 문과 방목> 이지(李지) 세조(世祖)3년(1457년), 별시(別試) 정과2(丁科2) >>> 인적사항 생년(生年) 1420년, 경자 자(字) 승경(升卿) 호(號) 본관(本貫) 고성(固城)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이원(李原) 생부(生父) 조부(祖父) 이강(李岡) 증조부(曾祖父) 이암(李<암0x690E>) 외조부(外祖父) 최정지(崔丁智) 처부(妻父) 정보(鄭保) 자(子) 이륙(李陸)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판관(判官) 품계(品階) 관직(官職) 사간&(司諫&) 배(配) 증(贈) 정부인(貞夫人) 연일정씨(延日鄭氏) 감찰(監察) 정보(鄭保)의 여(女) 정보(鄭保)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영일(迎日). 호는 운곡(雲谷). 몽주(夢周)의 손자로, 종성(宗城)의 아들이다. 학문이 뛰어나 세종의 총애를 받았고, 한때 예안현감으로 나갔다가 감찰이 되었다. 일찍이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친교를 맺고 학문을 논하기도 하였다. 1456년(세조 2) 6월에 단종복위사건이 일어나자, 인척 되는 한명회(韓明澮)에게 사육신의 무죄를 주장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자 천추의 악인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한명회가 그해 12월 그를 난언죄(亂言罪)로 고발하여 죽음을 받게 하였으나, 세조는 그가 고려 충신 정몽주의 손자임을 감안하여 죄질을 한 등급 감하여 연일(延日)에 유배시켰다. 그뒤 단성으로 이배되었다가 간사한 무리들의 참소로 그곳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1699년(숙종 25) 지경연사(知經筵事) 이유(李濡)의 상소로 신원(伸寃),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용인의 충렬서원(忠烈書院)에 제향되었으나 대원군 때 서원이 헐렸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肅宗實錄, 國朝人物考. 〈李在範〉 조부(祖父) 정종성(鄭宗誠) 관(官) 이조(吏曹)참의(參議) 증조(曾祖) 정몽주(鄭夢周) 문충공(文忠公) 성명 정몽주 한자 鄭夢周 시대 1337-1392 자는 달가(達可),호는 포은(圃隱), 관향은 영일(迎日), 임고면 우행동에서 운관(云瓘)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세때 진사(進士)가 되었고, 24세에 문관에 올라 공민왕(恭愍王)때에 성균관 학감(學監)이 되어 학문에 진력,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본 받아 조상을 모셨고, 또 안으로 5부학당(五部學堂)을 세워 후진을 가르치며, 밖으로 향교를 베풀어 유학을 크게 진흥하여 성리학(性理學)의 기초를 세웠다. 명(明)나라와 일본(日本)에 사신으로 갔었으며 내정, 외교, 교육 등에 공적이 많았는데 넘어지는 여조(麗朝)를 떠 받들다가 이방원(李芳遠)에 보낸 조영규(趙英珪)등에 의하여 선지교(善地橋:善竹橋)에서 피살되었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문집 포은집이 있으며 그의 굳은 충성을 읊은 시조 단심가(丹心歌) 1수가 전한다.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외조(外祖) 박등(朴登) 본(本) 밀양(密陽) 관(官) 병마사(兵馬使) 배(配) 증(贈) 정부인(貞夫人) 의령남씨(宜寧南氏) 직제학(直提學) 남이찬(南李璨)의 여(女) 조부(祖父) 남적(南績) 관(官) 부사(府使) 증조(曾祖) 남을경(南乙敬) 관(官) 좌찬성(左贊成) 외조(外祖) 이중만(李仲만) 관(官) 부사(府使) | ||||
형제(兄弟) |
제(弟) 윤삼산(尹三山) 파평인(坡平人) 첨지(僉知) 조선의 문신. 호는 수옹(壽翁), 좌의정 호(壕)의 아버지. 명종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고, 문장·글씨·죽화(竹畵)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로 알려졌다. | ||||
형제(兄弟) |
제(弟) 이굉식(李宏植) 현감(縣監) 자(字)는 번보(蕃甫)요, 본관은 전의이니, 문의공(文義公) 언충(彦?)의 후손(後孫)이다. 세종(世宗)때에 구례현감을 지냈고, 효행(孝行)이 특히 뛰어났다. 이조(吏曹)판서(判書)를 추증했다. 온양군지(조선환여승람)에 기록된 인물 | ||||
형제(兄弟) |
제(弟) 권람(權擥) 좌의정(左議政) 1416(태종16)∼1465(세조11) 조선의 문신. 자는 正卿(정경), 호는 所閑堂(소요당), 贊成事(찬성사) 近(근)의 손자, 贊成(찬성) 제(제)의 아들. 1450년(문종 즉위) 式年文科(식년문과)에 장원, 監察(감찰)을 거쳐 이듬해 校理(교리)로서 「歷代兵要(역대병요)」를 함께 편찬하던 首陽大君(수양대군:세조)과 뜻이 통하여 그의 참모가 된 뒤 楊汀(양정) 등 무장을 포섭했다.1453년(단종 1) 金宗瑞(김종서) 등을 제거하는 癸酉靖難(계유정난) 때에 앞장서서 靖難功臣(정난공신) 1등으로 右副承旨(우부승지)에 특진,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吏曹 參判(이조참판)에 발탁되었다.이어 佐翼功臣(좌익공신) 1등으로 藝文館 大提學(예문관대제학)이 되고 吉昌君(길창군)에 봉해졌다. 1458년(세조 4) 修撰官(수찬관)으로 「國朝寶鑑(국조보감)」을 편찬하고 右贊成(우찬성)에 승진, 1459년 좌찬성·우의정을 거쳐 1462년 좌의정에 올라 이듬해 府院君(부원군)으로 進封(진봉)되었다. 활을 잘 쏘고 문장에도 뛰어났다. 世祖廟(세조묘)에 配享(배향), 시호는 翼平(익평). <국조 문과 방목> 권람(權擥) More Info. 문종(文宗)0년(1450년), 식년시(式年試) 을과1(乙科1) >>> 인적사항 생년(生年) 1416년, 병신 자(字) 정경(正卿) 호(號) 소한,지재(所閑,止齋)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익평,정난공신/길창부원군(翼平,靖難功臣/吉昌府院君) >>> 가족사항 부(父) 권제(權<제0x71E4>) 생부(生父) 조부(祖父) 권근(權近) 증조부(曾祖父) 권희(權僖) 외조부(外祖父) 이준(李儁) 처부(妻父) 이원(李原)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진의부위(進義副尉) 품계(品階) 관직(官職) 좌의정%(左議政%) | ||||
형제(兄弟) |
제(弟) 황종형(黃從兄) 장수인 선공부정(繕工副正) | ||||
문헌(文獻) |
1. 창녕군(昌寧郡) 남지읍(南旨邑) 이증(李增) 고성이씨(固城李氏)로 영산현감(靈山縣監)을 지내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된 이증(李增, 1419년~1480년) 선생과 정부인(貞夫人) 경주이씨의 묘제(墓祭)를 지내기 위한 재사로 1600년경 건립되었다. 재사 이름은 '수다재(水多齋)'이다.
2. 경상도지(慶尙道誌) 권지(卷之) 육(六) 누대승람(樓臺勝覽) 부(附) 제영(題詠) 안동(安東) ● 임청각(臨淸閣) 재(在) 동(東) 정상동 고성(固城) 이증(李增) 자(字) 자겸(子謙) 고성(固城)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의 생가(生家)
3. 이증(李增) 임청각(臨淸閣) (寶物 제 182호) 임청각은 중종14년(1519년)에 지었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살림집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유구한 역사를 지닌 안동 시 법흥동의 고성이씨 종택(宗宅)이다. 세칭 99칸 이라는 이 집은 안채. 중채. 사랑채. 사당. 행랑채는 물론 아담한 별당(君子亭)과 정원까지 조성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이다. 임진왜란(1592년) 때는 명(明)나라 군대가 주둔 하였는데 이때 일부가 소실되어 난(亂)이 끝난 후 1626년 복구하였다. 1763년 4월 4일에 당시 臨淸閣의 주인이던 허주(李宗岳1726-1773)공이 그린 그림이 남아있어 옛날의 윤곽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일제강점기 중앙선철도 부설 때 독립운동가의 소굴이라 하여 전체가 없어질 번하다가 일부 부속건물이 철거당하고 마당으로 철로가 지나가는 수난을 당하였다. 그러고도 이렇게 남았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1950년 6, 25를 전후하여서는 안동철도국 노무자 집단 주택으로 사용되어 훼손됨이 심했는데 안동철도국이 영주로 옮겨진 후 1975년 해체복원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집의 연혁은 세종 때 좌상을 지낸 용헌공(李原)의 여섯 째 아들(李增)이 영산현감(李增) 지냈는데 단종(端宗)이 세조에게 손위(遜位)함에 벼슬을 버리고 안동으로 낙향하여 이곳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자리 잡으므로 입향조(入鄕祖)가 되었고, 그의 셋째 아들인 이명(李?)또한 의흥 현감을 지내다가 일찍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지은 별당 형 건물이다. 임청각 이라는 당호는 귀거래사(歸去來辭) 구절 중 “ 동쪽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애서 지를 짓는다.” (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는 시구(詩句)에서. (臨)자와 청(淸)자를 취한 것이다.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지에 이하면 “ 임청각 은 귀래정(歸來亭) 영호루(映湖樓)함께 고을 안의 명승이다. “. 라고 기록되어 있다. 임청각은 영남산 기슭의 비탈진 경사면을 이용하여 계단식으로 기단을 쌓아 안채. 중채. 사랑채. 행랑채. 등의 건물을 배치하여 어느 방에서나 오전 오후 언제나 햇빛이 들도록 채광효과를 높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적 집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좌측에 정침(正寢)이 있고 우 측에는 담장을 사이에 두고 군자정이 위치한다. 군자정 바로 옆에는 방형(方形)의 연못이 있고 연못 언덕위에는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정침 마당에는 바닥이 보이는 한길가량 되는 우물이 있는데 흙으로 된 바닥이 아니고 청석(靑石)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오는 것으로 보아 예사로운 우물이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바위위에 집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각동사이에는 크고 작은 5개의 마당을 두어 공간의 활용도를 높였고 단충이면서도 이층구조로 설계되어 위쪽으로는 다락이나 다용도실로 이용하였다. 임청각에 딸린 별당 형 정자인 군자정은 사대부가의 별당 형 정자건축의 전형을 보여주는 정자(丁字)형 건물로 대청에 올라서면 천정에 단청을 한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1767년 허주공이 대대적으로 중수를 하고 중수기를 남겼는데 이에 의하면 칠대조가 단청을 하였고 병인년이라고 하였으니 이때가 임진왜란 후인 1626년이다. 벽에는 聾巖(李賢輔) 高苔軒(高敬命) 松崗(趙士秀) 白沙(尹暄) 의 시판이 걸려 있다. 특히 고경명은 전라도 장흥인 으로 당시 임청각 주인(李復元)과는 사돈(長子 高從厚가 李復元의 사위)이 되니 오늘날 입으로 영호남 차별해소 운운(云云)하는 것과 한번 비교해 볼 문제이며 불행이도 다음해 발발한 임진왜란 때 삼부자(霽峯 高敬命 ?峯 高從厚 鶴峯 高仁厚)가 순국(殉國)하였다. 정자 옆에 연지(蓮池)를 조성하여 군자를 표상하는 연꽃을 심었다. 연못에 핀 연꽃을 바라보면서 군자로서의 심성을 닦고자 하였다. 정자 옆 방지(方池)를 지나면 정면 3칸 축면 2칸 크기의 사당이 언덕위에 자리 잡고 있다. 사당에는 원래 4대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그 옆에는 불천위를 모시는 별묘(別廟)가 있었으나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1858-1932)선생이 한일합방이 되자, 나라가 없어졌는데 사당(祠堂)만 지킬 수 없다하여 독립운동을 위하여 만주로 떠날 때 위패를 모두 장주(藏主) 하여 현재 봉안된 신위가 없다. 집을 짓는 데 있어 그 평면구성을 일. 월. 길(日 月 吉) 등의 글자를 취해 지으면 좋다고 하는데 임청각의 평면구성을 보면 일(日)자. 월(月)자 또는 그 합형(合刑)인 용(用)자형으로 되어 있다. 이 일(日) 형과 월(月)형, 용자 형은 하늘의 일월을 지상으로 불러서, 천지의 정기를 화합시켜 생기(生氣)를 받으려는 의미를 가진다고 전해오고 있다. 팔작지붕은 한 마리의 새가 날개 짓 하는 형상을 한 것이다. 그동안 이 집에 소장되었던 유물과 문적들은 주인 따라 임청각과 선영을 오르내리다가 석주 선생에서부터 주손(胄孫) 3대가 독립운동가로 서훈(敍勳)을 받은 독립투사의 집으로 이로 주손 4대가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희생된 후 주인 잃은 유물들이 수십 년간 지키는 이 없는 선영(안동 시 와룡 면 도곡리 ; 현재 수몰지역이 되었음)서실에서 분실 혹은 훼손되다가 유족이 철이 들 무렵에 안동 땜 건설이 진행되어 문집종류는 1973년에 고려대학교중앙도서관에 기증 되어 있으며 남은 고문서와 유물. 간찰들은 1990년대에 한국학 중앙연구원에 기탁되어 영구히 보존되고 있다. 임청각 우물 방에는 세 명의 정승이 태어난다는 속설이 있으나 본 손은 없다. 그러나 나라가 암울(暗鬱)한 일제강점기 그 방에서 국가원수인 임시정부 국무령을 역임한 石洲 李相龍 선생과 아들(東邱 李濬衡) 손자(小破 李炳華) 등 9명의 애국지사가 태어났다. * 일제의 영향아래 간섭을 받던 시기(1895-1910)와 직접 지배를 받던 시기(1910-1945)가 50년이나 되었고 광복을 맞은 지도 60년이 넘었으나 이 집의 곳곳에는 항일투쟁의 상흔(傷痕)이 너무 깊게 파여 있다. 소유권(건물 대지 임야)이 갈기갈기 찢어져 회복되지 않고 있으며 임청각 대지를 가로지른 중앙선철로 등 아직도 일제강점기에서 치유되기도 전에 세계정세는 백 년 전의 재판(再版)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이 집은 앞으로 대한민국과 함께 영구히 보존되어 후세에 길이 전해지기를 기대한다. | ||||
기타(其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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