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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을 권하는 교회를 본 일이 있는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그런 교회를 본 적은 없을 것이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그리스도인들은 본 일이 있는가? 없다고 답하기는 쉽지 않다. 우울증으로 아파하는 그리스도인이 많기 때문이다. 신앙적으로 헌신된 사람들이 모이는 선교단체에도 우울증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고, 예배 시간에 위로와 소망이 설파되는 교회에도 우울증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글을 읽는 분 중에도 우울증 때문에 괴로워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분들에게 ‘교회가 위로를 주기도 하지만 우울증을 권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다. 당신의 우울증이 오롯이 당신만의 잘못은 아니라는 말을 꼭 해주고 싶다. 믿기 어려울 수 있지만 사실이다.
미국에서 진행된 연구가 있다. 이 연구는 듀크 대학교 의학 센터의 해럴드 케니히(Harold G. Koenig) 교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1) 이들은 과거 50년(1962-2011)간 이루어진 우울증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살펴보았다. 444건의 연구를 대상으로 한 양적 조사였는데, 놀랍게도 엄격한 방법론을 적용한 연구 178건 중 67%(119건)에서 종교가 우울증을 유발하거나 심화한다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대체로는 종교가 우울증의 심각도를 낮추는 데 도움을 주지만, 가족이나 건강 등 특정 영역에서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종교가 우울증을 악화시킨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자녀를 잃은 네덜란드 부부 219쌍을 대상으로 진행된 연구에서는,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우울증을 경험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또 1,702명의 노인을 대상으로 진행된 연구에서는, 기도하는 빈도가 높을수록 배우자와 사별한 사람들의 우울증이 증가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런가 하면 미국 로드아일랜드주의 프로비던스에 사는 718명을 대상으로 종교 예배 출석과 우울증의 관계를 연구했더니, 종교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남성이 주요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44% 낮았다. 특히 청소년기부터 계속 예배에 참석한 남성들에 비해 중간에 교회를 떠난 남성들은 우울증 위험이 훨씬 낮았다.
이런 통계들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우울증이 더 심해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대체 왜 그럴까? 미국정신의학협회에서 발행한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5)에서는 우울증 진단 기준을 9가지로 제시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부적절한 죄책감’이다. 나는 이 단어를 보자마자 지난 20년간 사역 현장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부적절한 죄책감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이 정말 많았다. 단적인 예로 어떤 청년은 이성을 좋아하는 일에서 죄책감을 토로했다. “목사님,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의 외모를 보고 좋아하는 저 자신이 싫어요.” 외모가 뛰어난 이성에게 끌리는 당연한 일에 죄책감까지 느끼는 그가 참 안타까웠다. 그 뒤로도 그는 누군가를 좋아할 때마다, 여러 신앙적인 언어들을 사용하여 자기의 당연한 감정을 죄악시하곤 했다.
청소년기 자녀 문제로 상담했던 한 어머니도 생각이 난다. 그분은 사춘기 자녀와 소통하기가 어렵다며 목회자인 내게 상담을 요청했다. 아이가 대화를 거부하고 쌀쌀맞게 반응한다고 괴로워했다. 누구에게나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 대한 그분의 해석은 흔하지 않았다.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목사님, 이 아이를 임신했을 때 제가 태교를 안 하고 직장에 다녔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버렸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순간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분이 가진 죄책감의 깊이에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그분은 왜 임신했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자기 잘못을 찾았던 걸까? 그 이유는 놀랍게도 그분이 얼마 전에 들었던 설교 때문이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는 구절에 대한 설교였는데, 출산과 육아에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자기 꿈을 우선시하는 엄마들을 책망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이 대화를 계기로, 교회가 설교를 통해서든 관습을 통해서든 사람들에게 부적절한 죄책감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이후로 부적절한 죄책감에 대한 감수성을 품고서 목회 현장을 바라보니, 그간 잘 몰랐던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에게 소망과 위로를 주는 좋은 메시지들 이면에 자리 잡은 부적절한 죄책감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대다수 그리스도인은 이면이 있는 줄도 모르고 기쁘고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한다. 하지만, 삶의 어려움을 직면하고 있는 사람들은 죄책감에 눌리기도 하고 우울함에 괴로워하기도 하며, 심한 경우 우울증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런 이들의 편에 서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좋아 보이는 메시지들 이면에 있는 부적절한 죄책감들의 정체를 밝히고, 사람들이 거기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강의를 하게 되었다. 앞으로 이 지면을 통해서 그중 일부를 나누고자 한다. 우울증으로 괴로워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짊어진 무거운 짐을 얼마간이라도 덜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
한 말씀만 하소서
세상에는 위로할 수 있는 사연 못지않게, 감히 위로할 수 없는 사연도 많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배우자가 암에 걸려서 소천하기도 하고, 30대 중반이던 젊은 아버지가 세상에 처음 등장한 전염병 때문에 아내와 어린 자녀들을 두고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이런 일들을 접하면 어떻게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특히 이런 일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나면 그 막막함의 무게는 상상할 수 없이 무거워진다. ‘하나님 왜 그러세요?’라는 질문이 우리를 짓누르기 때문이다.
《한 말씀만 하소서》는 박완서가 아들의 죽음 앞에서 이러한 질문의 무게를 견디며 써낸 일기문이다. 너무나 성실하고 너무나 훌륭한 아들이 천수를 다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작가는 도대체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냐고, 한 말씀만 해보라고 따진다. 그러면서 마치 죽은 사람처럼 지낸다. 삶에 대한 모든 의욕을 잃어버리고 음식조차 먹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와 6·25를 지나 산전수전을 다 겪어내고 살아남은 강인한 한 사람을 무너뜨린 건 ‘하나님 왜 그러세요?’라는 질문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심정에 깊이 공감하고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살면서 겪은 사건의 무게와는 다르지만 나의 삶 속에도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발생하곤 했기 때문이다. 언어화된 질문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원망 섞인 의문이 가슴속에서 해소되지 않은 채 휘몰아쳤던 적이 제법 있었다. 아마 나뿐 아니라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이 질문 앞에서 괴로워하며 답을 찾고 있으리라. 문제는 이 질문에 대한 교회의 대답이다. 질문의 무게에 비해 교회의 대답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볍다. 교회의 전통적인 대답은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잘못이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에게 잘못이 없다면, 이 고통을 초래한 것은 누구란 말인가?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박완서 작가도 그랬다. 이런 고통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에게 분노하면서도, 자기 때문에 남편과 아들 모두 죽었다면서 자신에 대해 더 격렬하게 분노한다.
지금도 고통 속에 울부짖으며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냐고 따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을 것이다. 그에게 하나님의 뜻이 있다며 위로를 시도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방식의 위로를 당장 멈추기 바란다.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걸 모르는 그리스도인이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 있다. 그런 그리스도인은 없다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지식은 신학적 지식이 아니라 선험적 지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교회를 갓 나와서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좋은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 앞에서 이유를 찾는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굳이 알려주지 말자. 그걸 몰라서 ‘왜?’라고 묻는 게 아니다.
하나님을 보호하는 그리스도인
물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는 전능자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의 동기는 틀릴 수 있다. 아마도 그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말이 위로가 될 거라고 믿고 말하는 것일 테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좋겠다. 예후를 장담할 수 없는 중한 병에 걸린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말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불의의 사고로 자녀를 떠나보낸 사람에게는? 이렇게 질문하면 그 말의 진짜 동기가 보인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위로를 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어려움이라면 위로가 되겠지만,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는 어려움이라면 위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우리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말하는 진짜 동기는 ‘위로’가 아닐 수 있다. 어쩌면 진짜 동기는 ‘보호’일지도 모른다. 이 보호의 대상은 아파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물론 자기가 하나님을 보호한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보호자이시지 그 반대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착각하곤 한다. 울면서 고통의 이유를 묻는 사람 앞에서, 우리는 그 사람보다 하나님을 걱정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아픔 앞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무너질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욥의 친구들이 그랬다. 욥의 아픔에 공감하기보다 하나님을 보호하려고 했다. 욥의 고통이 마치 하나님의 선하심을 위협하는 양 두려워하며 자기들이 하나님의 보호자인 것처럼 행동했다. 엘리후의 말에 그런 마음이 잘 드러난다. “만일 네가 총명이 있거든 이것을 들으며 내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정의를 미워하시는 이시라면 어찌 그대를 다스리시겠느냐? 의롭고 전능하신 이를 그대가 정죄하겠느냐?”(욥 34:16-17) 고통스러워하는 욥의 부르짖음을 하나님의 선하심을 위협하는 반역으로 본 것이다. 마치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물론 애써서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공감해주는 교회도 많다. 하지만 그 속마음을 들여다보면, 삶에서 어려움을 당해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을 만날 때 교회가 기대하는 바가 분명히 있다는 게 보인다. 그가 고통스러운 마음을 토로하고 나서 그래도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이야기를 마무리해줄 것을 기대한다. 그 속에서 배운 교훈, 그 사건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의 뜻을 얘기하기를 기대한다. 만약 계속 고통스러운 이야기만 하고 하나님이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면 난처한 분위기가 되기도 한다. 어떻게든 그 이야기를 완화시키거나 매듭지으려고 시도한다. 우리의 착각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보호자이신데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자인 양 착각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고통 속에 울부짖는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보호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 따져도 괜찮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고통받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올 때,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기보다 예수님을 보호하려고 했다. 그들이 예수님께 가는 것을 가로막으려고 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막지 말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아픈 사람들을 기꺼이 만나시고, 그들에게 어디가 왜 아픈지 물어보셨다. 사실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 데 그들의 사연은 필요 없었지만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사연들을 이야기했다. 예수님은 그 사연들을 정말 잘 들어주셨다. 결국 그들의 이야기는 ‘하나님 왜 그러세요?’라는 질문들로 엮인 이야기였다. 예수님은 부정하지 않으시고 그 질문에 동참해주셨다.
한 예로, 나사로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이 오셨다면 자기 오빠가 죽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이 말 속에는 ‘예수님 왜 그러셨어요?’ 혹은 ‘하나님 왜 그러세요?’라는 질문이 있다. 예수님은 그 질문을 부정하지 않으신다. 질문하면서 우는 마리아 앞에서 비통해하시며 함께 우신다. 예수님의 눈물은, 나사로의 죽음을 대하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마음이 그분의 마음과 같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 앞에서 하나님을 보호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당장 나사로를 살리는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가장 먼저 하신 일은 함께 우는 것이었다. 울면서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감히 추측해보면,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왜 그러세요?’라고 함께 물어봐 주셨을 것만 같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질문을 던지셨기 때문이다.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하나님 왜 그러세요?’라고 물어봐주신 분이기에 아마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도 그러셨을 것 같다.
나는 이게 오늘날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어려움으로 아파하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보호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일 말이다. ‘하나님 왜 그러세요?’라는 질문에 굳이 답을 줄 필요는 없다. 그저 그 질문에 동참하면 된다. 예전에 만났던 한 청년과의 대화가 떠오른다. 그는 아버지도 아프고 오빠도 아픈 데다 가정 경제도 어려운 삼중고를 겪고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해 힘들게 일하면서도 순간순간 터지는 아버지와 오빠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그의 어려움은 끝이 없어 보였다. 그때 그는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목사님, 하나님은 왜 이러실까요?’ 순간 책에서 배운 신학적 답변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적절하지 않은 말이라고 판단했다. 답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라 아프다는 호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저 나도 그게 궁금하다고, 하나님께 같이 따져 주겠노라고 대답했다. 그 후 10년이 지나고 나서도 그 청년은 그때 그 말이 정말 위로가 되었노라고 그 시절 얘기를 가끔 꺼낸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분들은 주로 어려운 시절을 겪었던 분들이다. 하지만 어떤 분들은 불편해한다. 하나님께 질문하고 따져주겠다는 말이 불경하게 들린다는 것이다. 뉘앙스 때문에 그럴 수는 있다. 하지만 따진다는 말은 나쁜 말이 아니다. ‘문제가 되는 일에 대해 상대에게 분명한 답을 요구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많은 선지자들 또한 하나님 앞에 따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박국은 비록 이스라엘이 잘못이 있더라도 왜 더 악한 민족들에게 침략을 받아야 하는지 따졌다. 요나는 왜 이스라엘을 핍박했던 악한 민족을 용서해 주시는지 따졌다. 우리 삶에 문제가 있는데 문제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연기하며 살아가는 것이 문제지, 왜 이런 문제가 생긴 건지 분명한 답변을 요구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도, 두려워할 일도 아니다. 그러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했다면 함께 하나님께 따져주겠다고 하자. 그렇게 따지면서 기도하자.
괜찮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만약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어려운 일이 생겼다면 어떻게 할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따지면 된다. 괜찮은 척,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 이상하게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려운 일이 생겨도 의연하고 괜찮아야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있는 듯하다. 나도 그랬고, 내 주변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그래왔다. 정작 믿음의 사람이라는 다윗은 그러지 않았다. 살기 위해서 침을 흘리고 미친 사람인 척 연기도 하고, 요나단에게 투정이라는 투정은 다 부렸다. 아프면 아픈 대로 불안하면 불안한 대로 하나님 앞에서 꾸미지 않고 솔직했다.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다. 우리가 부족하고 아프고 연약하다고 해도 하나님께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니 담대함을 가졌으면 좋겠다. 이해가 안 될 때는 이해가 안 된다고, 힘들 때는 힘들다고 하나님 앞에서 말했으면 좋겠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가 괜찮은 척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하나님 앞에서나 교회 사람들 앞에서 솔직해지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속은 이미 엉망인데도 나도 모르게 괜찮은 척을 하고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이 괴리가 커질수록 우리 마음속은 병들어간다. 도대체 왜 그럴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와 비슷한 모습을 나타내는 표현이 있다. 바로 ‘착한 아이 증후군’이다. 문제가 생기면 모든 걸 내 탓으로 여기거나, 힘든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착한 아이 증후군의 전형적인 증상이다. 힘들어도 괜찮은 척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이와 굉장히 유사하다. 착한 아이 증후군을 겪는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부모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굉장히 예민하기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속마음을 억압하는 경우가 많다. 괜찮은 척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 굉장히 예민하다. 이런 모습을 보면 너무나 안타깝다. 하나님은 사람들 평가에 좌우되는 분이 아니고 스스로를 증명하시는 전능하신 분인데,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너무나 작은 분이 아닌가?
루터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Pecca Fortiter, sed crede fortius.”(용감하게 죄를 지어라, 그러나 용감하게 믿어라)2) 우리에겐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가 연약하거나 아프다고 하나님께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힘들 땐 힘들어하고 아플 땐 아프다고 말해도 문제가 없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나의 아픔과 고통에 솔직해지자.
기적이 없는 세상을 가르쳐주세요
하나님을 보호하기보다 아픈 사람들에게 공감하고, 그들의 질문에 대답을 주려 하기보다 같은 입장이 되어 함께 따져주고, 괜찮은 척하지 말고 아픔과 고통에 솔직해지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특별히 교회와 사역자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다. 우리에게 기적이 없는 세상을 가르쳐주면 좋겠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기적이 일상인 세상을 배운다. 그래서 우리는 만나와 메추라기가 없을 때 고통스러워하고, 치유와 회복이 없을 때 고통스러워한다. 하지만 아무런 기적도 없었던 요셉과 다윗의 삶도 있다. 누군가가 나를 아무 이유 없이 미워하고 모함하고 죽이려고 하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데도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삶이 분명히 있다. 이런 삶이 우리의 삶과 더 가까운 모습이며 이들의 믿음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더 많다. 나는 교회가 이런 내용들을 가르쳐주면 좋겠다. 기적이 없는 세상의 삶이 당연한 거라고, 그럴 수 있다고 가르쳐주면 좋겠다. 교회가 이런 모습으로 고통 속에서 울부짖는 자들의 벗이 되어줄 때, 그들은 ‘왜?’라는 질문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요셉처럼 다윗처럼 느헤미야처럼 기적이 없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 주
1) pmc.ncbi.nlm.nih.gov/articles/PMC3426191
2) Martin Luther, 〈letter no. 424 to Philipp Melanchthon, 1 August 1521〉, WA Br 2, 372쪽.
✽ 수상 소감 ✽
기억에 남는 후배가 있습니다. 그 후배는 누구에게나 따뜻하게 대해주는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울증을 겪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당시의 저는 너무나 무지했기에,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했습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거 아냐?” 그 말을 들은 그 후배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저야말로 ‘우울증 권하는 교회’였던 셈입니다.
복음과상황에서 연재를 공모한다는 소식을 보고 그날이 떠올랐습니다. 다시는 그런 표정을 짓는 사람이 없길 바라면서, 고민해왔던 내용을 이 기회에 정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글을 써보았습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수상작으로 선정되어, 처음에는 그저 놀랍고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부담감과 책임감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우울증 권하는 교회’가 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실감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은 자기가 상처를 주었던 한 굴뚝 청소부 소년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또 다른 굴뚝 청소부 소년들을 도와줍니다. 제 마음도 그렇습니다. 그날의 후배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또 다른 누군가를 돕고 싶은 마음입니다. 우울증 권하는 교회가 되어 버린 자신을 자책하는 분이 있다면, 우울증 권하는 교회를 함께 넘어서자고 손을 내밀고 싶습니다. 그날의 후배처럼 우울증 권하는 교회 때문에 힘들어하는 분이 있다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손을 내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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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괜찮지 않아도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