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의 강원도 전래 신해박해(1791년), 을묘박해(1795년)에 이은 신유박해(1801년)을 겪으면서 서울과 경기도에 밀집하여 살던 교우들이 충청도 · 강원도 등의 산간벽지로 숨어 들어갔는데, 이들 중 경기도의 신태보 베드로가 40여 명의 교우를 이끌고 갖은 고생 끝에 강원도 횡성군 풍수원으로 피난하여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교우촌을 이루게 된다.
이처럼 강원도 지방에 천주교가 전래된 지 80여 년 동안, 상주하는 신부 없이도 교인 수는 소리 없이 늘어 천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888년 서울에서 조선 대목구장 뮈텔(Mutel) 민 주교에 의해 파견된 파리 외방전교회 르 메르(Le Merre, 李類斯)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풍수원이 본당이 되었으니 신태보 베드로의 피난 이후 무려 87년만의 일이었다.
풍수원 성당과 곰실 공소의 성장 당시 풍수원 본당은 춘천, 원주, 화천, 양구, 홍천, 횡성, 평창, 양평 등 12개 군에 걸쳐 29개 공소에 2천여 명의 교우를 관할하게 되었다. 르 메르 신부 후임으로 방인사제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1896년부터 1943년까지 48년 동안이나 2대 풍수원 주임으로 있으면서 교회는 강원도 땅에 깊이 뿌리내렸다.
풍수원의 교세가 점점 늘어감에 따라 이미 1896년 원주 본당 분할을 비롯하여 1920년에는 춘천(죽림동의 전신인 곰실) 본당을, 1948년에는 홍천 물구비(현 양덕원) 본당을 분할 독립시켰다.
풍수원 본당은 경성(서울) 대목구로부터 1939년 4월 25일 춘천 지목구(1955년 9월 20일부터는 대목구, 1962년 3월 10일부터는 교구)가 분할 · 설립되면서 춘천 교구로 편입되었다가, 1965년 3월 22일 원주 교구가 춘천 교구로부터 갈라져 나가면서 이번에는 원주 교구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죽림동 본당의 모체인 춘성군 동내면 고은리 곰실 공소는 1920년에 본당으로 정식 설립되기까지 정규하 신부가 해마다 서너 번씩 찾아가 가정집과 '강당'에 모이곤 하였으나 교우 수가 무려 300명에 이르자 본당 설립과 상주 사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죽림동 본당의 모체인 곰실 공소 우리나라의 신앙 전래가 외국 선교사의 전교 없이, 스스로 신앙 교리를 찾아 그 가르침대로 살게 되면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듯이, 춘천 지역 또한 교회의 정착이 그와 같은 길을 걸었다. 이 경우 역시 천부적인 종교심성을 지닌 한 젊은이의 자발적인 신심과 열정이 훌륭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으니 그 공로자인 청년의 이름은 엄주언 마르티노(말딩)였다.
엄주언(嚴柱彦) 마르티노는 1872년 12월 10일(음) 춘성군 동면 장학리 노루목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착하고 총명하던 그는 열아홉 살이 되던 해인 1891년 우연히 “천주실의”와 “주교요지”를 읽고 감명을 받은 나머지 구도에 나설 것을 결심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893년 늦가을에 그는 맏형과 함께 일곱 식구를 모두 데리고 우리나라 천주교의 발상지인 경기도 광주 천진암을 찾아가 그곳에 움막을 짓고 어렵게 지내면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에는 형과 함께 프랑스인 목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엄주언의 딸 엄 루치아의 증언이나 1894년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중에서 '목' 씨 성을 가진 신부는 없었다). 그렇게 3년간의 광주 생활을 마칠 무렵인 1896년에 나머지 가족도 다 영세한 후 굳은 전교 사명감을 품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학쟁이로 냉대를 받으며 마을에서 쫓겨나 외가의 도움으로 고은리 윗 너브랭이라는 곳에 폐가 한 채를 사서 겨우 정착하였다.
엄주언 일가는 이처럼 친척과 이웃으로부터 따돌림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맨손으로 어렵사리 화전을 일구어 가며 묵묵히 살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주경야독 하며 근검하게 사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이 차츰 감동하여 가르침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윗 너브랭이에서 여러 해 땀 흘린 보람이 있어 살림과 농지를 늘려 아랫 너브랭이로 옮겼다가 다시 곰실 공소로 옮긴 후 조촐한 ‘강당’까지 마련하여 공소 예절을 보게 되자, 물구비 · 춘천 · 화천 · 양구 순으로 공소를 순방하던 정규하 신부가 곰실에서 해마다 40-50명 씩 세례를 줄 정도가 되었다. 곰실 공소 교우들은 엄 회장 지도하에 자선 봉사와 엄하고 독실한 모범적 신앙생활에 전념하면서 마침내 300명 가까운 수로 늘어났다. 1920년에는 제대로 규모를 갖춘 공소를 건립하고 지역을 세 구역으로 나누어 실로 모범적인 신앙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곰실 본당의 춘천 진출 이렇게까지 되는 동안 엄 회장이 풍수원과 서울 명동을 수년간 거듭 방문하면서 상주사제 파견을 간청한 결과 마침내 곰실 공소가 본당으로 설립되면서 1920년 9월 초대 김유룡(金裕龍) 필립보 신부를 모시게 되었다. 활기 넘치는 곰실 공동체는 춘천 시내 진출을 위해 교우 전원이 애련회(愛煉會, 연령을 위한 단체)에 가입하여 가마니짜기, 새끼꼬기, 짚신삼기 등을 통해 몇 해에 걸쳐 푼푼이 애써 모은 돈에 논까지 팔아 약사리(藥師里) 고개 현 죽림동 성당 아래 골롬반 병원 터와 아랫마당 그리고 수녀원 터인 당시 김영식의 대자의 집(약사리 148번지)을 사서 개조하여 1928년 5월부터 춘천 본당의 옛 성당으로 쓰게 되었다.
그 후 4대의 방인사제가 1938년까지 주임을 맡다가 같은 해에 강원도 지역의 사목 책임이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위임되고, 곧이어 라리보(Larribeau, 元) 주교가 맡고 있던 서울(경성) 대목구에서 춘천 지목구가 1939년 4월 25일자로 분할되면서 새 지목구의 초대 지목구장으로 당시 광주 지목구장인 오원 맥폴린(Owen McPolin) 신부가 겸임을 하였으나 임지에 가서 직접 사목활동을 하지 못한 채 얼마 후 춘천 본당 주임으로 있던 퀸란(Quinlan, 具) 신부를 대리로 임명하였다. 퀸란 신부는 1940년 12월 8일 2대 지목구장이 되었다.
1938년 10월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춘천 본당 6대 주임으로 부임한 퀸란 토마스 신부는 부임 직후 약사리 고개 언덕에 있는 도토리 밭을 매입하여 현재의 성당 자리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1950년에 죽림동 본당으로 개명하였다. 골롬반 외방선교회는 춘천 교구를 1994년에 제6대 교구장 장익 요한 주교가 부임하기까지 모두 55년간 사목하였다. 이렇게 자립한 춘천 교구가 1999년 4월 25일에 60주년을 맞았다.
평신도 추념의 날과 곰실 공소 중창(重創) 본당이 춘천으로 옮겨간 후 곰실 본당은 공소로 변경되었고, 1969년 11월 20일 죽림동 본당에서 효자동 본당이 분가한 후에는 효자동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춘천교구는 1998년 11월 11일 성 마르티노 축일에 죽림동 본당의 모체가 된 곰실 공소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던 평신도 엄주언 마르티노 회장을 비롯해 평신도사도직을 모범적으로 수행하며 춘천지역 선교의 초석이 된 평신도들을 기리기 위해 ‘평신도 추념의 날’을 제정하여 매년 기념하고 있다.
2006년 9월 15일, 춘천교구는 곰실 공소가 죽림동 주교좌본당과 춘천교구 자체의 발상지라는 의미를 살려 효자동 본당 관할에서 죽림동 주교좌 관할로 영구히 옮겼다. 그리고 오랜 세월 풍상으로 낡은 곰실 공소 내부를 새롭게 단장하여 2009년 11월 11일 교구장 장익 주교의 주례로 중창 축복식을 가졌다. 이번 중창을 통해 곰실 공소 내부는 제대와 독경대, 성미술품 등을 새로 갖추게 되었다. [출처 : 죽림동 성당 홈페이지,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