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평화누리길(경기도)5구간(성동사거리-반구정-임진강역-율곡습지공원: 헤이리길, 반구정길)
◈ 일 자: 2021. 8. 29. 05시49분~14시27분/ 20~29도(파주기온)
* 출발부터 비(시간당1-2미리)10시까지 비가 오락가락 하다가 그이후 흐림
◈ 위 치: 파주시
◈ 누구와: 나홀로
◈ 경로: 성동사거리-프로방스-오금교-임월교-반구정-임진강역-임진각-화석정-율곡습지공원: 헤이리길, 반구정길)
◈ 거리: 38.22㎞(반구정답사,임진각왕복포함))
◈ 시간: 08시간38분
◈ 교통
- 갈 때: 대곡-금촌(경의선) 가서 택시타고 성동사거리까지 갈려고 했으나, 아내가 성동사가리까지 승용차로태워줌
- 올 때: 율곡습지공원에서 택시타고 문산역까지와서일산으로 복귀할려고했으나, 아내가 승용차를 가지고
율곡수목원 주차장에서 대기.. 승용차타고 복귀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온다. 다음에 답사할까 하다가 마음먹은김에 집에서 아내와 같이 승용차출발
성동사거리 맛고을 정유장앞에 내리고 아내는 일산집으로복귀하고 간단히 답사준비를하고(비가 와 우산도 쓰고)
누리길 아치에 가서 인증사진을 남기고....오늘 비는 10시까지 예보(시간당1미리정도)
**헤이리예술마을(이곳에서 도로따라500~1카로를 가면 헤이리 마을)
국내 최대 규모의 예술마을로, 넓이는 약 49만 5868m²이다.
1998년 창립총회를 시작으로 미술가·음악가·작가·건축가 등 380여 명의 예술·문화인들이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경기도 파주 지역에서 전해져 오는 전래농요인 ‘헤이리 소리’로부터 ‘헤이리’라는 마을 이름이 지어졌다.
수많은 갤러리·박물관·전시관·공연장·소극장·카페·레스토랑·서점·게스트하우스·아트숍과 예술인들의 창작·주거공간이 있다.
모든 건축물은 수십여 명의 국내외 유명 건축가가 만들었으며 산과 구릉·늪·개천 등
주어진 자연환경을 최대한 살려 설계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7코스 헤이리길 아치에서 인증사진도 박아보고...
05시49분에 우산쓰고 답사 시작 ... 비가 생각보다 많이 온다... 길은 좋으니....우산쓰고 가도 될것 같다
유명한 프로방스 입구/주차장
06시 18분 자유로에 접근....약2키로지점
지금부터는 자유로 옆을 따라.... 계속
비는 계속내리고...
우산과 스틱을 교대해서 들고 가고 ....
06시32분 머루랑 다래랑 식당....해바라기가 예쁘게...
여기도 대동리..
07시02분 만우리수문.... 반구정14.8키로, 성동사거리5.3키로 이정목(상하 사진)
07시21분 오금리 들판에 있는 독립 가옥과 백일홍들...
07시39분 낙하리쉼터...약9키로 왔나....
07시44분 청풍명월 캠프장(탄현 산단으로 가는 길목에)
07시57분 금승리(탄헌 산단지역) 약10키로 지점..
여기서 자유로 낙하IC쪽으로 진입...
자유로 낙하IC
자유로 옆 폐 정유소도 지나고...
08시 47분 대명골천교와 내표리 IC및 서울 문산간 고속도로(17번)
09시01분 임월교... 확장공사중
09시17분 당동리 어린이 공원...
09시23분 지금부터 반구정까지 약3키로 미터는 호젓한 산길로....반구정 3.3키로 남았내요
산으로진입... 오솔길...
09시52분 사목리
10시04분 반구정으로 가는 도로... 도로따라..
10시12분 7코스헤이리길이 끝나고 8코스 반구정길 시작되는 아치....자유로지하통로에
황희선생 유적지에 들어가 답사도 하고... 입장료1000원...경로는 무료다
반구정
**반구정 ; [ 伴鷗亭 ]
1983년 9월 19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호로 지정되었다. 1449년(세종 31) 황희(黃喜)가 87세의 나이로 18년간 재임하던 영의정을 사임하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낸 곳이다.
전국 8도의 사림들이 선현을 추모하는 승적(勝蹟)으로 수호하여 내려오던 곳이었는데 6·25전쟁 때 불타버렸다. 그후 황희의 후손들이 복구하였으며, 1967년 6월 옛 모습으로 다시 개축하였다. 문산의 임진강변에 자리하여 앞에는 널찍한 모래톱이 있다. 맑은 날 정자에 오르면 멀리 개성의 송악산을 볼 수 있다.
반구정 옆에는 황희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영당이 있다. 1452년(문종 2) 황희가 89세로 세상을 떠나자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하고, 1455년(세조 1)에 유림들이 그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반구정 옆에 앙지대(仰止臺)와 사당을 짓고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영당은 6·25전쟁 때 전소된 것을 1962년 후손들이 복원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에 전퇴(前退)는 개방되어 있으며, 측벽은 방화벽으로 되어 있는 겹처마의 맞배지붕이다. 기둥머리는 초익공의 공포형식이며, 단청이 단아하다. 내부에는 중앙에 감실을 두고 그 안에 영정을 모셨으며,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반자가 꾸며진 우물천장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묘재 건물
**황희 ; [ 黃喜 ]
조선 초 세종 대의 재상.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여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존경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났다.
1363년 자헌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使) 황군서(黃君瑞)의 아들로 개성(開城)에서 출생했다. 1376년(우왕 2) 음직으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가 138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389년(창왕 1) 문과에 급제, 이듬해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했으나, 태조 이성계의 요청으로 1394년(태조 3) 성균관학관으로 일하게 되었고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도 겸임하였다.
그 후 직예문춘추관(直藝文春秋館)·사헌감찰(司憲監察)·우습유(右拾遺)·경기도도사(京畿道都使)를 역임했다.
1400년(정종 2) 이후 형조·예조·이조·병조 등의 정랑(正郞)을 지냈다. 1402년 부친상을 당해 잠시 사직하였다. 1404년(태종 4)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가 되었다가 이듬해 승정원에서 왕명을 출납하는 지신사(知申事)에 올랐다. 1408년 민무휼(閔無恤) 등의 횡포를 제거하였다. 1409년 이후 형조·대사헌, 병조(1411), 예조(1413), 이조판서(1415)를 역임하였다. 송사(訟事)문제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호조판서로 복귀하였고, 1416년에는 세자 양녕대군의 실행을 옹호하여 파직되었다가 다시 공조판서로 전임 복귀되었다. 이어 평양 판윤을 거쳐, 1418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가 되었다.
1418년에는 양녕대군의 세자 폐출(충녕대군 세자 책봉)을 극력 반대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교하(交河)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고향과 가까운 남원(南原)으로 이배(移配)되었다. 1422년(세종 4) 상왕(태종)의 진노가 풀려 의정부 좌참찬에 기용되었고, 이듬해 예조판서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 구휼을 잘 하였다. 1426년 이조판서·우의정 거쳐 1427년 좌의정에 올랐다. 그해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무고한 사람을 때려서 죽인 사위 '서달'을 방면하여 파면되었다가 한달 뒤 복귀하였다. 1428년에는 박포의 아내와 간통한 혐의를 받았으며 1430년 말(馬) 1000마리를 죽게하여 투옥된 제주 감목관 태석균(太石鈞)의 감형을 사사로이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복직되어 영의정부사에 올랐다.
1449(세종 31)년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18년간 국정을 관리하였다. 그의 업적은 다양하다.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 면제, 국방강화(야인과 왜 방어책), 4군6진 개척, 문물제도의 정비·진흥 등의 업적을 남겼다. 또한 국가의 법이 혼란스러운 것을 수정 보완하여 《경제육전(經濟六典)》을 간행하였다. 태종은 물론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또한,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시문에도 뛰어나 몇 수의 시조 작품도 전해진다. 1452년(문종 2)년에 세종묘(世宗廟)에 배향되었다. 파주의 방촌영당(厖村影堂)에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상주(尙州)의 옥동서원(玉洞書院) 장수의 창계서원(滄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방촌집(厖村集)》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념관안 전시물 몇 컷....
10시40분8코스 반구정길 시작....13키로를 더간다... 임진각 답사하면 약15키로...
11시10분 경의선 철도도 건너고...
11시15분 임진강역... 평화누리길은 여기서우로 가야하나...임진각일대를 답사하고...
수없이 왔지만.. 그래도 다시한번...
버마아웅산순국외교 사절 위령탑
**버마암살폭파사건 ; [ ─暗殺爆破事件 ]
1983년 10월 9일에 발생했으며, 이 사고로 대통령 공식 수행원과 수행 보도진 17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또한 현장에 있던 미얀마인 3명도 사망하였다. 사고 당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묘소에 도착하기 전이어서 위기를
모면했다.
희생된 17명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서석준(徐錫俊), 외무부장관 이범석(李範錫), 상공부장관 김동휘(金東輝), 동자부장관 서상철(徐相喆), 대통령 비서실장 함병춘(咸秉春),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심상우(沈相宇),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 김재익(金在益), 재무부차관 이기욱(李基旭), 주 버마대사 이계철(李啓哲), 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 하동선(河東善), 대통령 주치의 민병석(閔炳奭), 농수산부차관 강인희(姜仁熙), 과학기술처차관 김용한(金容澣), 청와대 공보비서관 이재관(李載寬) 등의 공식 수행원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동아일보 기자 이중현(李重鉉), 경호원 한경희, 정태진 등도 사망하였다.
부상자는 합참의장 이기백(李基百), 공보비서관 최재욱(崔在旭), 외무부 의전국장 최상덕(崔尙德), 한국일보 기자 윤국병(尹國炳), 중앙일보 기자 송진혁(宋鎭赫), 동아일보 기자 최규철(崔圭徹), 연합통신 기자 김기성(金基成), 코리아헤랄드 기자 김기석(金基石), 연합통신 사진부장 최금영(崔琴煐), 문화공보부 직원 임삼택(林三澤)·김상영(金相榮), 경호원 김상태 등이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서남아시아 및 대양주 6개국을 순방중이었으며, 첫 방문지에서의 이같은 사건에 따라 나머지 순방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하였다. 귀국 즉시 열린 비상국무회의에서는 비상경계태세를 결정했으며 10월 13일 희생된 17위에 대한 국민장 거행 후 연일 벌어진 북한만행규탄대회를 고비로 대북보복론까지 대두되었다.
그러나 10월 20일 대통령 특별담화를 통한 대북한 경고와 더불어 자제론이 천명됨으로써 고조되었던 남북한간의 위기국면은 진정되었다. 한편, 미얀마 정부는 사건발생 즉시 5인 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고 암살범 추적수사에 총력을 기울여 10월 11일과 12일 사이에 북한에서 온 강민철과 진 모 등 2명을 체포하고 1명을 사살하였다.
뒤이어 미얀마 정부는 외무장관을 진사조문사절로 파한했으며, 10월 17일 이 사건이 북한의 특수공작원에 의해 저질러진 것임을 공식발표하고, 11월 4일 북한에 대한 외교단절 및 정권승인 취소조처를 취하였다.
이 조처에 따라 미얀마 주재 북한공관원들이 이틀 뒤 미얀마를 떠났으며, 다음날인 11월 7일 일본 정부가 대북한 제재조처를 취했으며 잇따라 미국 등 우방국들의 대북한 제재조처가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 북한은 이 암살사건과 무관함을 강변했으나 11월 22일 미얀마 검찰당국에 체포된 범인들이 죄상을 밝힘으로써 북한에서 전대통령과 수행원들을 살해하기 위해 인민군 장교들로 구성된 암살단을 애국동건호에 탑승, 밀파했다는 사건전모가 공개되었다.
그 뒤 12월 9일 랭군지구 인민법원 제8특별재판부에서 두 테러범에 대해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은 국제여론의 비난 속에 제3세계의 지지기반이 동요되었으며, 우리나라는 남남협력(南南協力)을 내세운 제3세계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는 진척을 보게 되었다. 이후 2007년 4월에 이르러서야 북한과 미얀마의 국교가 재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임진각 상징조행물
경의선 철로와 독개다리(오늘은 자유의 다리가 미개방이라, 독개다리족만다녀온다:경의선철로)
독개다리 입장 ..여기는 경로우대도 없다(입장료 2500원)... 단.국가유공자와 장애인만 무료
오늘 자유의 다리는 미개방으로 2007년 사진 퍼옴
207년도 도라산가는 기차
2007년 도라산역에서(나:산중): 옛날 사진퍼옴
임진각의 평화의종
이곳에서 다시 빽해서 임짐강 역으로...
11시50분 임진강역앞에서 다시 평화누리길 답사 계속진행(임진각답사에35여분 소요)
12시00분에 마정리 쉼터에서 점심(간편식으로)
율곡습지공원이 7키로미터 이정목
12시45분 대전차 장벽지역...
낙석장애물도...
13시09분 맨밧골
운천리 헬기장도 있고..
13시21분 율곡습지공원3.6키로, 임진나루터1.9키로 안내간판
오늘 비포장도로를 처음 만나고...
13시37분 임진리
도도히 흐르는 임진강
**임진강 ; [ 臨津江 ]
강원도 법동군 용포리(룡포리, 龍浦里)의 두류산에서 방원하여 개성시 판문군과 경기도 파주군 사이에서
한강으로 흘러드는 강.
길이 244.00km, 유역면적 8,897.24㎢로서 한강의 제1지류이다.
오른쪽 유역에는 아호비령산맥이 뻗어 있고, 왼쪽유역에는 지류들이 흐른다.
주요 지류는 강원도 고미탄천(古味呑川:114km), 경기도 평안천(平安川:81km)·한탄강(漢灘江:130km) 등이며,
5km 이상의 지류는 250여 개이다.
수상교통의 요지로 6·25전쟁 이전에는 고랑포까지 배가 다녔고, 작은 배는 안협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다.
예로부터 신라·백제·고구려의 국경으로 분쟁이 잦았던 지역인데, 기록에 따르면 삼국시대는 임진강을 칠중하(七重河)라 하였고,
경기도 연천군에 고구려 칠중현(縣)의 치소(治所)인 파주 칠중성(城)이 있었다.
유역 안에는 봉래호, 죽대저수지, 신당저수지, 감둔저수지, 난송(란송)저수지, 송도저수지 등 저수지가 많다.
상류는 전형적인 산지하천으로 강바닥의 경사가 심하고 연안에 충적지가 발달하지 못하였으나 중·하류연안에는 임진강어구평야 등 비교적 넓은 충적평야들이 분포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13시56분 화석정
화석정 정자
**화석정 ; [ 花石亭 ]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坡平面) 율곡리 임진강변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정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1호이다.
1974년 9월 26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되었다.
임진강가 벼랑 위에 자리잡고 있는 정자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겹처마의 초익공(初翼工) 형태로 조선시대 양식을 따른 건물이다.
원래 고려 말 대유학자인 길재(吉再)의 유지(遺址)였던 자리라고 전해지나 자세한 문헌 기록은 없다.
그후 1443년(세종 25) 율곡 이이(李珥)의 5대 조부인 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晨)이 세운 것을 1478년(성종 9) 율곡의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이 보수하고 몽암(夢庵)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숙함의 정자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 때 재상 이덕유(李德裕)의 별장인 평천장(平泉莊: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함)의 기문(記文) 중에 보이는 "花石"을 따서 정자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 후 이이(李珥)가 다시 중수하여 여가가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 그의 학문에 반한 중국의 칙사(勅使) 황홍헌(黃洪憲)이 이곳을 찾아와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왜구의 침공에 대비해 10만양병설을 주장한 이이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은 선조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가던 중 한밤중에 강을 건널 때 이 정자를 태워 불을 밝혔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그후 80여 년간 빈터만 남아 있다가 1673년(현종 14)에 이이의 증손인 이후지(李厚址)·이후방(李厚坊)이 복원하였으나 1950년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다.
현재의 정자는 1966년 경기도 파주시 유림들이 다시 복원하고 1973년 정부가 실시한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단청되고 주위도 정화되었다.
건물의 정면에는 정치가 박정희가 쓴 "花石亭" 현판이 걸려 있으며 내부에는 이이가 8세 때 화석정에서 지었다는 <팔세부시(八歲賦詩)>가 걸려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500년된 느티나무 (보호수)
율곡이이 팔세마음길
**율곡 이이 ; [ 栗谷 李珥 ]
1536년(중종 31년) ~ 1584년(선조 17년)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년)는 퇴계 이황과 함께 16세기를 대표하는 사림(士林)이다. 흔히 퇴계를 영남학파, 율곡을 기호학파의 대표라 하여 경쟁 관계로 여기는데, 이는 퇴계의 영남학파가 동인 정파로, 율곡의 기호학파가 서인 정파로 전환되어 정쟁을 한 데서 생긴 오해이다. 이들은 35년의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성리학에 대한 열정과 공감대 때문에 만나자마자 의기 상통했고, 학문적으로 보완하는 관계였다. 퇴계가 새로운 시대 사상인 성리학을 완벽하게 이해했다면, 율곡은 퇴계가 이룩한 학문적 토대 위에서 성리학을 조선에 토착화한 것이다.
퇴계는 끊임없이 사직소를 올림으로써 훈구 세력에게 저항했다. 그에 비하여 율곡은 개국 200여 년이 경과하면서 말폐 현상이 나타난 조선의 사회 체제를 전면적으로 개혁하려 했다. 그가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퇴계를 비롯한 선학의 학문적 성취와 선조(宣祖)의 후원이 있다. 선학의 학문적 성취는 성리학의 이념을 현실 사회에 구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고, 사가(私家)에서 성장하면서 사림(士林) 출신의 선생에게 배운 선조는 사림(士林)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것이다. 이상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조건이 성숙해 있었던 것이다.
율곡의 일생을 시기에 따라 구분하면 29세까지를 성장기, 30세부터 49세로 사망할 때까지를 사환기(仕宦期)로 파악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파주 율곡습지공원
경기도 파주에 있는 율곡습지공원은 버려져 있던 습지를 주민자치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개발한 생태공원이다.
봄이면 유채꽃이 피고,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피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임진강 인근 평야에 조성된 율곡습지공원은 고향의 정겨운 시골풍경을 떠오르게 한다.
넓은 꽃밭과 습지에 피어있는 연꽃 군락지, 억새, 옛 농기구가 있는 초가집, 높이 솟아 있는 솟대들, 삐뚤빼뚤 재미난 모양의 장승, 물레방아 등이 정감을 자아낸다. 연꽃 군락지에서 시원하게 물을 뿜어내는 분수가 인상적이고, 초가 원두막, 그네 등 곳곳에 쉼터가 있어 쉬어가기 좋다.
매년 열리는 코스모스 축제는 파주를 대표하는 지역축제로 알려졌다. 백만 송이에 이르는 코스모스 꽃밭에서 카메라에 추억을 남기는 관광객들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윷놀이, 투호 등 전통놀이와 먹거리, 각종 공연도 함께 즐길 수 있다.
율곡습지공원은 평화누리길 9코스의 시작점이고, 임진각평화누리공원까지 생태탐방로도 조성되어 있어
도보여행 코스로도 좋다.
[네이버 지식백과]
14시26분 8코스 반구정길을 마치고 제9코스 율곡길 아치에 도착..
14시30분에 율곡1리 버스승하차장에서 걷기를 종료하고. 아내가 율곡수목원 주차장에서 차가지고와 기다리고 있다
이곳으로 오라하니 공사중이라 차를 적성쪽으로만 진행 하라고고해..
주차장까지500여미터를 가서 승요차 타고 일산 집으로 복귀
평화누리길 평지에 아스팔트와 세멘트도로를 걷는것이 보통 힘든것이 아니다
이것으로 7코스 헤이리길과 8코스 반구정길 걷기를 마무리한다.
첫댓글 대단하신 주력이십니다,
저희는 지난 3월에 답사한 구간이였는데, 죽어라 가도 25km를 쩔쩔매면서 지났는데
산죽님은 장장38km를 걸으셨다니
거기에 약8시간30분동안 평균 시간당 4.4km 로 가셨다니 놀랄뿐입니다,
오는 9월12일 부터 저희와 같이 하실건데 너무 심심 하실것 갔습니다
저희는 일간20km전후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참여하시면 쉰다 생각하시고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혼자서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둘레길하다보니 산길보다 더힘더는것 같내요... 빨리 가니까..
지맥길도40여키로 자주 다녔는되...
2추차에 뵙겠습니다.
산중선배님!
댁 근처이신 일산 인접이라 지역이 빠삭하신 모양입니다. 거침없이 발길을 내디디셨네요.
성동에서 반구정 사이에 자유로로 차를 타고 가다보면 우측 산위에 큰 배 모양의 조형물이 있었는데요.
방촌 황희정승 소개도 잘 읽었습니다.
임진강과 개성의 중간쯤 있는 방촌이 고향이었던가 보죠...
황의정승에 대한 평가는 극과극을 오갑니다. 대체적으로 영의정을 오래 하셨고 청백리이시니...
하지만 그 당시 양반의 특권의식이 극에 달한 시대상이라 많은 부작용을 낳은 행적이 눈에 띄네요.
청탁을 했다든가 치정에 얽힌 일이라든가 하는....
반구정 옆 사당이 어떤 용도의 건물인지 시간이 없어 자세히 알아보질 못했는데....
임진강에 황복 요리와 장어요리가 특산품인가보죠. 가까이 장단리가 있으니 장단콩도 유명하구요.
임진강은 과거 다녀오신 기록까지 찾아 자세히 소개해 주셨네요.^^
거기서 조금 더 파주 화석정과 율곡습지까지 진행하셨구요.
반구정과 화석정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설명주셨습니다.^^
율곡선생이 50살도 채 살지 못했네요.
산길은 그나마 올록볼록 엠보싱인데 아스팔트길 38km면 발바닥에 물잡힙니다.
빗길에 평화누리길 한바리 수고 많으셨습니다.^^
발바닥 불나고... 지루한 하루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유유자적 홀로 걸으며 잠겼을 사색은 어떤 내용일까 잠시 상상해봅니다.
응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지맥길도 밤낮으로 혼자 많이 다녀 혼자길을 이골이 났내요
이 구간 자유로변을 따라 이어 가셨네요.
우중에 문산쪽으로 해서 임진각에 이르셨군요.
오래전에 다녀온 임진각의 이모저모를 보니 반갑습니다.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 모습을 대합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오우 많이 걸으셨습니다.
38키로 적은 거리가 아닌데 빨리도 걸으셨네요...
덕분에
사진으로 간접걸음했네요 ㅎㅎㅎ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
감사합니다
즐거운 9월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