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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의 조선 바로읽기①]-사대주의 허상 좇다 열강의 제물
19세기 경제위축과 민란의 물결…독립자주는 허울 국제질서 외면 위기 자초
편집국 기자 | 2016-09-04 08:45
 
   
1910년 8월 29일은 조선이 망한 ‘경술국치일’이다. 한 나라가 망했다는 것은 한반도에서 몇 백 년에 한 번 있었던 희귀한 사건이다. 이 때문에 조선 망국의 역사를 바로 보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 공부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역사교과서를 비롯한 어디에서도 조선왕조가 망한 원인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 이제라도 반성해야 한다. 근대화를 준비하지 않고, 스스로 지킬 사상과 제도를 정비하지 못했던 조선왕조를 제대로 보아야 한다.
지난 8월 29일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조선 망국, 교훈을 얻자’ 세미나에서 발제자로 나선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일본이 중심이 된 새로운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 조선의 독립자주는 허울에 불과했다”며 “국가 주권을 입헌제 형태로 재배치하려는 정치세력의 모든 개혁시도를 탄압했다”고 지적했다. 1863년에 등극하여 44년을 치세한 고종은 조선을 살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미디어펜은 이영훈 교수의 발제문을 상, 하편으로 나누어 게재한다. 아래 글은 발제문 상편이다. [편집자주]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조선왕조의 해체 [상]
1. 19세기 경제의 정체
산림의 황폐

18세기에 걸친 조선왕조의 안정과 번영은 한반도의 인간들이 일찍이 부딪혀 본 적이 없는 도전적 상황을 조성하였다. 급격한 인구증가로 인해 산림이 황폐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인구증가는 난방과 취사를 위한 연료 시목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켰다. 산림을 황폐시킨 또 하나의 요인은 식량의 증산을 위한 산지의 개간이었다. 산지를 개간하여 일군 밭을 가리켜 화전이라 하였다.
18세기의 정상기라는 양반은 화전의 크기에 대해 “50, 60만 결 아래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동세기 전국의 전답은 140만 결 정도였다. 산림이 황폐해짐에 대한 우려와 대책은 정조대(1776∼1800)부터 적지 않게 제기되었다.
1798년 10월 비변사가 왕에게 올리기를 “근래 송정이 날이 갈수록 해이해지는 탓으로 공산이나 사양산이나 할 것 없이 가는 곳마다 헐벗은 곳뿐이니 정말 작은 걱정거리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산림이 헐벗기 시작하는 것은 그보다 이른 18세기 초부터이다. 개항 이후 조선을 찾아 온 외국인들은 이 나라의 산림이 극도로 황폐해 있음에 대해 적지 않은 기술을 남겼다. 그들에게 조선의 황폐한 산림은 이전 방문지인 일본의 푸른 산림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전국의 임상에 대한 최초의 조사는 1910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전국 임야의 32%가 성림지, 42%가 치림지, 26%가 무입목지로 판명되었다. 조선왕조가 산림의 황폐라는 환경위기를 면치 못했던 것은 산림 자원을 관리할 주체와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제도를 창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산림을 사유재산으로 관리하는 주체가 결여된 가운데 산림 자원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증가하자 먼저 베는 사람이 임자가 되는 이른바 ‘공유지의 비극’이 전형적으로 연출되었다.
미곡 생산의 감소
산림의 황폐는 조그만 비에도 흙과 풍화작용을 받은 암반이 사석으로 흘러내려 제언을 메우고 보를 무너뜨리게 했다. 19세기에 걸쳐 수리시설이 파괴되고 기능을 상실해 간 추세에 관해서는 적지 않은 기록이 남아 있다. 1918년의 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300개 제언과 2만 700개 보가 존재하지만, 그 태반은 이용이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그리하여 수리의 편리가 있는 답이 총 154만 정보 가운데 23만 정보에 불과하였다. 또한 산림의 황폐는 잦은 수해를 유발하였다. 토사의 퇴적으로 하상이 높아진 하천은 조그만 비에도 범람하여 주변의 농지를 떠내려 보내거나 모래로 덮는 피해를 안겼다.
19세기에 걸쳐 미곡의 생산량이 감소한 보다 중요한 원인은 토지생산성의 감소에 있었다. 17세기 후반 이래 남부지방의 분포한 양반 신분의 답주, 친족집단, 서원 등이 소유지 답에서 수취한 생산량이나 지대량을 매년 기록한 추수기에서 그러한 추세를 확인할 수 있다. 두락당 벼 지대량은 1680년대 이래 1750년대까지는 15∼20두 수준에 머물다가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1880년대에 이르러서는 6∼7두로까지 낮아져 있었다. 18세기 전반에 비해 1/3에 불과한 수준이다.
여러 추수기에서 관찰된 논농사의 위기적 상황은 다른 자료에서 검출되는 경제 지표들과 수미상응하고 있다. 여러 재화의 가격을 비교한 연구에 의하면, 19세기 이래 쌀의 상대가격은 상승추세였으며, 특히 19세기 중엽 이후가 그러하였다. 이 같은 현상은 쌀이 상대적으로 부족해졌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논의 명목가격을 쌀 가격으로 나눈 실질가격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1만 점 이상의 매매문기를 통해 추적한 연구가 있다. 그에 의하면 논의 실질가격은 19세기 초에는 두락당 벼 6석을 넘었는데 개항 직전에 4석으로까지 떨어졌다. 그것은 논의 생산성이 떨어지자 논의 자산가치가 하락하고, 그에 따라 논의 수요가 감소하였기 때문이다.
 고종은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관찰사 자리는 10~20만냥이었고 수령 자리는 5만냥 이하로 내려가지 않았다. 고종 어진./사진=국립중앙박물관
무역의 동향
1660년대 이후의 경제적 번영과 안정을 가져다 준 일본과의 무역은 18세기에 들어 일본이 주요 수입품인 중국산 견직물과 조선산 인삼을 국산화함에 따라 급격히 위축되어 갔다. 일본은의 수입은 1714년의 1,956관을 정점으로 하여 1751년까지 110관으로 줄었으며, 1752년 10관의 은을 실은 배 1척이 마지막으로 입항한 뒤로는 사실상 두절되었다. 동래의 왜관에서 5일마다 양국의 상인이 만난 사무역 시장은 1722∼1726년에는 74%의 개시율을 보였으나 1844∼1849년에는 24%로 낮아져 있었다.
일본은의 유입이 감소하자 중국과의 무역에 적지 않은 타격이 가해졌다. 조선왕조는 은의 유출을 막기 위해 1720년 책문후시를 봉쇄하였다. 이전 중국으로의 은 유출은 연간 50∼60만 냥에 달하기도 하였다. 이후 대중 무역은 연간 은 7∼8만 냥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은 부족에 따른 대중 무역의 침체를 구한 것은 재배인삼, 곧 가삼이었다.
가삼은 자연산 삼과 달리 장거리 수송에 부패할 수 있어 홍삼으로 가공되었다. 홍삼 수출은 처음에는 사역원의 역관과 한성상인이, 1810년대 이후 개성상인과 의주상인이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공인된 수출 물량은 1797년의 120근에서 1847년 2만 근으로 늘었다. 은을 대신한 홍삼의 출현으로 대중 무역은 19세기에 들어와 번성했다고 보이지만, 그것이 국내의 경제 발전과 시장 확대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인삼의 재배와 홍삼으로의 가공에는 많은 자본이 소요되었으며, 이에 정부의 허가를 받은 소수의 상인만 그 특권을 누렸다. 반면 중국에서 수입된 대량의 견직물은 조선의 잠업과 견직업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조선왕조의 지배자들은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산업정책이나 무역정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장시의 위축
대일 무역의 쇠퇴와 대중 무역의 불균형은 국내시장의 위축을 초래하였다. 그 좋은 증거를 19세기에 걸친 장시의 동향에서 찾을 수 있다. 1770년 1,062기에 달했던 전국의 장시 총수는 1830년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 다만 전라도에서 장시 수가 동기간 216기에서 188기로 적지 않게 감소하였다. 뒤이어 1872년까지는 충청·전라·경상 3개 도의 동향만 알려져 있는데, 도합 614기에서 511기로 17%나 감소하였다.
특히 충청도에서의 감소가 가장 심하여 158기가 105기로까지 감소하였다. 이후에도 장시는 1890년대까지 더욱 감소하거나 정체했으며, 1900년 이후에야 증가 추세로 돌아섰다고 보인다. 남부 3개 도의 장시 총수는 1911년 592기로 회복되었는데, 그럼에도 충청과 경상에서는 1830년의 수준에 미달이었다.
19세기에 걸친 장시의 감소는 내륙에서보다 연안에서 심하였다. 내륙 지방의 장시 수는 안정적이었으며, 오히려 증가하기도 하였다. 연안 지방에서 장시가 더 많이 감소한 것은 해상무역이 쇠퇴하였기 때문이다.
전술한대로 동래의 왜관에서 벌어진 일본과의 사무역 시장은 19세기 전반까지 점점 위축되었으며, 그에 따라 왜관으로 오가는 상선의 수와 화물의 양도 줄어들었다. 전장에서 소개한대로 전라도와 경상도의 연안을 연결한 무역은 전라도의 곡물이 경상도로 건너가고 경상도의 어물이 회항 화물로 실려 오는 구조였다. 19세기에 들어 전라도의 논농사가 후퇴하자 이 같은 구조의 남해무역도 시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국가적 재분배경제의 해체
미곡 생산의 감소와 농촌시장의 위축이 사람들의 생활수준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은 여러 방면에서 다각적으로 관찰되었다. 농촌 임금에 관한 연구는 농업생산성의 하락을 반영하여 일고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1853년 이후 약 50년간 1/3 수준으로 하락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조선왕조가 파악한 인구수는 1814년 790만 3,167구를 정점으로 하여 1861년까지 674만 8,138구로 14.6%나 감소하였다.
모든 경제 지표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1830년대까지 농촌사회의 안정 기조를 떠받친 것은 환곡을 축으로 한 국가적 재분배경제였다. 그 환곡제가 19세기에 들어와 조금씩 해체되어 갔다. 18세기 말 총 1,000만 석에 달했던 환곡은 1862년까지 800만 석으로 줄었다. 그것도 장부상의 수치이지 창고에 실제로 쌓인 것은 그것의 46%에 불과하였다. 장부 상의 수치가 실재와 크게 다른 것은 농업생산이 감소하여 환곡을 상환하지 못한 농가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군현의 수령이나 향리 집단의 기강이 해이해져 환곡을 훔쳐 먹거나 상업자금으로 활용하다가 실패한 것도 다른 한편의 원인이었다.
1840년대가 되면 조선왕조에 의한 경제적 통합에 균열이 발생하고 있음을 알리는 적신호가 여러 군데서 깜빡이고 있었다. 환곡제를 중심으로 한 국가적 재분배경제가 사실상 기능부전에 빠졌기 때문이다. 농촌시장에서 미가는 1830년대까지는 충격을 받더라도 일정의 균형수준으로 회귀하는 정상성을 보였다. 1840년대 이후 미가는 정상성을 상실하고 불안정한 움직임을 보이다가 1850년대 중반부터 급속한 인플레이션의 추세에 접어들었다. 중앙정부가 재정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동전을 자주 대량으로 발생한 것이 그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사진은 일제강점기(1910~1945) 대한제국 황실을 촬영한 것이다. 사진은 고종(高宗)의 둘째 아들이었던 영친왕(榮親王) 이은(李垠)과 그 부인인 이방자(李方子)를 중심으로 고종과 순종(純宗) 내외가 배치되어 있다. 고종은 오른쪽 상단에 위치해 있다./사진=대한민국 역사박물관 현대사아카이브
민란의 물결
조선왕조가 수습하기 힘든 위기에 빠졌음을 알리는 가장 노골적인 징후는 왕조의 지배체제에 대한 농민의 물리적 저항이었다. 가장 심각한 저항의 대상은 환곡제였다. 19세기 중반 환곡의 거의 절반 이상은 회수되지 못하거나 농간으로 없어진 상태였다. 군현의 관리들은 농가에 환곡을 나누어 주지도 않은 채 이자곡의 수납만을 강요하였다. 농민을 괴롭힌 또 하나는 양인 군정에 대한 군포였다.
1750년을 전후하여 상민 신분의 군정은 그 수가 50만 정도였는데, 18세기 말까지 증가 추세였다. 이들은 연간 면포 1필의 군포를 해당 군영에 상납하였다. 군정으로 선발된 것은 주로 하층의 상민들이었다. 그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양반, 향리, 역리, 노비, 합법적 면역자, 불법적 피역자는 군포 부담에서 제외되었다. 예컨대 1788년 경상도 영천군의 경우 호총은 3,283호인데 각종 면역호와 피역호를 제하고 난 상민 호는 500여 호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군정의 총수는 2,783명이나 되었다.
드디어 농민들은 통합의 능력을 상실한 가운데 수탈성만 노골화하는 왕조의 지배체제에 물리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1840년 경상도 경주부의 백성들이 한성에 올라와 대궐 앞에서 환곡제의 폐단에 대해 소청을 제기하였다. 처음에는 소수에 의한 합법적인 청원의 형태로 시작된 농민의 저항은 점차 집단적이며 폭력적인 형태로 바뀌어 갔다. 이윽고 1862년에 이르러선 삼남의 70여 군현에서 수령을 고을 밖으로 축출하고 탐학한 향리를 처형하는 민란이 발생하였다.
대개의 민란은 지방 관아에 난입하여 탐악한 수령을 핍박하여 인부를 탈취하고 고을 밖으로 축출하거나 민원의 대상인 향리와 토호의 집을 파괴하고 살해하는 과정으로 막을 내렸다. 그들은 중앙에서 파견되어 온 관리들의 회유로 해산하였는데, 그것은 농민들의 일반적 인식에 있어서 민란을 야기한 악정이 대개 수령과 이서배의 개인적인 탐악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2. 제국주의의 도래
개항을 둘러싼 국제질서
1840년 이후 한반도의 연안에도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군함과 상선이 자주 출몰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교역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곧바로 철수하였다. 한반도에 제국주의의 물결이 밀려온 것은 1876년 이후였다. 1840년 중국의 문호가 강제로 열린 뒤 36년만의 일이었다. 조선왕조가 동아시아에서 최후의 은둔자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영국과 프랑스 등, 당시 자본주의세계체제의 중심부 국가들이 조선왕조에 대해 큰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를 둘러싼 국제질서에 직접적 이해를 가진 나라는 청과 일본이었다. 청의 조선왕조에 대한 정책은 1880년 일본으로 간 수신사 김홍집이 청의 외교관 황준헌으로부터 얻어온 『조선책략』에 잘 나타나 있다. 거기서 황준헌은 러시아가 17세기 이래 동진을 계속하여 중아시아를 차지하고, 중국으로부터 흑룡강 이동을 얻고, 일본으로부터 사할린을 얻은 다음 드디어 조선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는데, 조선은 아시아의 요충이라 러시아가 조만간 조선으로 밀고 들어올 것이라 하였다.
조선이 이 위급한 상황을 면하기 위해서는 과거 200년 동안 그러했던 것처럼 청을 성의를 다해 섬기고 청은 은혜로서 조선을 보호하여 세계로 하여금 두 나라가 한 집안과 같음을 알게 하는 길 밖에 없다고 황준헌은 주장하였다.
조선왕조의 입장도 이 같은 청의 입장과 다르지 않았다. 조선왕조는 15세기 국초부터 스스로를 중화제국의 일환을 이루는 제후국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명청 교체기에 청과 갈등한 조선왕조는 1637년 청의 군대에 정복되었으며, 이후 240년간 황준헌의 주장대로 청과의 사대관계에 충실하였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성의를 다해 섬김은 천리의 자연스러움과도 같은 것이었다. 조선왕조는 그러한 성리학적 명분론에서 스스로를 청의 번국으로 자처하였다. 이 같은 조선과 청의 도덕주의적 국제관계에 대한 직접적 도전은 또 하나의 이웃인 일본으로부터 제기되었다.
교린외교과 만국공법의 갈등
1858년 미국과의 통상조약을 계기로 구미 제국에 문호를 개방한 일본은 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의 군사적 압력 하에서 식민지화의 위기에 봉착하였다. 1868년의 명치유신은 이 같은 민족적 위기를 헤쳐가기 위해 지방의 유력한 군사세력이 왕정복고를 명분으로 내걸고 중앙의 막부권력을 타도한 일대 정치적 변혁이었다.
1869년 1월 종래 조선왕조와 일본의 교섭 창구였던 대마번이 왕정복고의 정치적 변혁을 알리는 서계를 동래부에 전달하였다. 동래부는 그 서계가 종전과 달리 일본의 군주를 황으로 칭하고, 서계에 찍힌 인장이 조선왕조가 대마번에 지급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에서 그의 접수를 거부하였다.
동년 12월 이번에는 외무성의 관리가 직접 초량의 왜관에 와 왕정복고의 변혁을 알리고 새로운 형식의 외교를 수립할 것을 촉구하는 서계를 전달코자 했지만 역시 거부당하였다. 1872년 일본은 다시 서계의 접수를 시도하였는데, 이번에는 외무성의 관리가 종래와 달리 기선을 타고 오고 양복을 착용한 것이 외교적 분쟁을 야기하였다.
양국의 관계가 악화되자 일본의 세론에서는 정한론이 확산되었다. 1874년 일본은 대만에서 자국 상인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군함을 파견하여 대만을 일시 침공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청의 지배자들은 일본이 조선을 침공할 것을 우려하여 조선이 일본과의 국교 수립을 서두름이 좋다는 의견을 전해 왔다.
그렇지만 1875년 2월 일본정부가 또 한 차례 서계의 접수를 시도하였을 때 조선왕조는 끝내 이를 거부하였다. 그만큼 조선왕조로서는 일본을 바다 속의 오랑캐로 간주해 온 전통적 화이관이 깊은 가운데 전통적 교린 외교의 형식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일본의 정치적 변혁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1875년 9월 일본정부는 군함 운양호를 강화도에 파견하여 무력시위를 감행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선정부는 지난 7년간 교착 상태에 빠진 양국의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교섭에 응하였다. 그 결과 1876년 2월 세칭 강화도조약, 곧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었으며, 뒤이어 8월에는 이의 시행을 위한 조일수호조규부록과 조일무역규칙이 성립하였다.
종래 이들 조약을 불평등조약이라 평가하고 이를 계기로 조선왕조가 반식민지 상태로 빠지게 되었다는 이해가 널리 받아들여져 왔다. 그렇지만 조약문 자체를 세밀히 검토하거나 조약 이후 조선의 대일 정책을 두고 볼 때 그러한 평가는 지나치게 결과론적 해석이라고 여겨진다.
예컨대 조일수교조규 제 1조는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고 하였다. 일본은 이 규정을 통해 조선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을 부정할 의도를 지녔지만, 조선왕조는 중국과의 사대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자주의 나라로 간주해 왔기 때문에 이 조항으로 중국과의 관계에 어떠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종래 조일수교조규를 불평등조약으로 평가해 온 것은 부산 개항장에 일본인의 거류지와 관리관청을 설치하고, 일본 영사가 일본인을 재판하고, 일본인이 4km 이내의 내지를 자유롭게 여행하고, 통상을 행하고, 일본화폐를 사용하고, 미곡을 수출하고, 관세를 면제받는 등, 여러 권리가 허여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권리는 대부분 1609년의 조약에 따라 오랫동안 초량에 설치된 왜관과 그에 주둔한 일본인들에게 부여되어 온 것들이었다. 그만큼 새로운 형식의 조약이라고 하나 다분히 구래 교린외교의 내용을 계승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1876년 개항 이후 조선 말기에서 민란의 물결이 이어진 것은 군현의 수령에 의한 학정과 수탈이 더욱 심해졌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1880년대 이후 본격화한 국왕의 매관매직이 있었다. 수령에 임명된 자들은 그의 짧은 임기 내에 서둘러 투자 자금을 회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사진=문화재청 경복궁(www.royalpalace.go.kr) 홈페이지 제공
종속의 재배치
1882년 7월 조선왕조의 개화정책으로 처우가 열악해진 구식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집권세력의 중심인 왕비 민씨가 도망을 치고 그와 대립한 대원군이 정권을 다시 잡는 정변이 발생하였다. 조선에 개입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청은 자신이 책봉한 국왕이 폭도에 사로잡혀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대를 한성으로 진입시켰다. 대원군은 청에 압송되었으며, 민씨정권은 복구되었다. 고종은 종전과 같이 사대에 충실할 것을 서약하였다. 동년 9월 양국 간에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었다. 이 장정은 조약이라기보다 청의 황제가 번신에게 내리는 명령의 형식을 취하였다.
동 장정에서 청은 몇 가지 중대한 특권을 조선으로부터 취득하였다. 하나는 편무적인 재판권이다. 다음, 중국 상인이 한성에 들어가 점포를 개설할 수 있는 권리가 허용되었다. 그 외에 중국 상인이 내륙으로 들어가 조선 산품을 구매할 권리가 인정되었다. 뒤이어 청은 조선의 외교와 재정을 장악할 목적으로 독일인 멜렌도르프(P. G. von Mollendorff)를 외교·재정고문으로 파송하였으며, 1885년에는 원세개를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로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정에 깊숙이 개입하였다.
조선왕조를 둘러싼 불평등조약체제가 완성되는 것은 1883년 11월 영국과의 조약 체결에서였다. 이 조약에서 영국인은 조선의 내지를 자유롭게 여행하고 어떠한 종류의 물품이든 구매하고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취득하였다. 내지통상권은 이전 청과의 장정에서는 조선 산품의 구매에 한하여 부분적으로 인정된 바 있지만, 이제 외국산 제품의 판매에 이르기까지 포괄적
승인되었다.
이외에 영국은 영국인에 대한 재판권을 부정한 치외법권, 연안 무역·해운권, 개항장에서 주택·공장·창고를 설치할 자유, 조선의 연안 어디서도 영국 군함이 정박하고 선원이 상륙할 자유, 조선이 외국에 부여하는 모든 권리를 영국이 무조건적으로 향유하는 최혜국대우의 권리 등을 취득하였다. 주일 영국공사는 본국 정부에 대해 “우리는 필요한 모든 것을 얻었다”고 보고하였다.
조영조약은 조선을 둘러싼 불평등조약체제의 완성판으로서 이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이 조선과 국교를 수립할 때의 모범이 되었다. 1884년 7월 러시아와의 국교 수립은 일거에 한반도로 둘러싼 국제적 긴장을 고조시켰다. 러시아 역시 영국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연안 어디서도 군함을 정박시키고 선원을 상륙시킬 권리를 얻었다.
조선에는 러시아가 꿈꾸어 온 천혜의 불동항이 즐비하였다. 조선의 국왕은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한반도를 열국쟁패의 전장으로 열어주었다. 나아가 그는 매우 무모하게도 러시아와의 동맹을 추구하였다. 심각해진 청의 간섭을 물리치고 자신의 주권을 보호할 목적에서였다. 그러자 전통적으로 러시아의 남진을 봉쇄해 온 영국의 해군이 거문도를 2년간 점령하여 조선과 러시아의 동맹을 좌절시켰다.
1884년 조선왕조의 개혁파 정치세력이 일으킨 갑신정변은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지향하였지만, 한성에 주재한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하였다. 이후 1894년 청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조선왕조는 청의 집요한 통제와 감독 하에 놓였다. 조선왕조는 1882년 이후에도 이전처럼 청에 조공사행을 파송하였으며, 때때로 청의 칙사가 도착할 때는 타국의 외교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굴욕적인 영접의 예를 거행하였다.
요컨대 조선왕조를 둘러싼 불평등조약체제는 조선이 일본, 미국, 영국 등을 통해 맞아들인 만국공법의 근대적 국제관계와 청의 조선에 대한 전통적인 종주권이 갈등하고 대립하는 가운데 1883년에 이르러 후자가 전자를 통제하고 종속을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성립하였다.
1880년대의 혼돈
중앙정부의 재정은 19세기 내내 적자 기조였다. 개항을 전후하여 청과의 교섭이 빈번해진 것도 재정 악화의 한 가지 원인이었다. 통리기무아문과 같은 새로운 관청을 설치하고, 일본에서 교관을 초빙하여 신식군대를 양성하기 시작한 것도 정부재정을 악화시켰다.
그에 대응하여 국왕 고종은 차관을 도입하거나 매관매직을 행하거나 동전을 발행하는 등의 방책을 강구하였다. 국왕이 매관매직을 행한 것은 성리학적 왕정의 윤리가 중앙정치를 강하게 규제했던 18세기까지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1886년 한국에 도착한 미국의 헐버트 목사에 의하면 모든 관직은 그 가격이 결정되어 있는데, 예컨대 관찰사 자리는 5만 달러 정도라고 하였다.
1882년 재정고문 멜렌도르프는 재정 위기의 타개책으로서 당오전이라는 악화의 발행을 고안하였다. 당오전은 명목가치가 구래의 동전, 곧 당일전에 비해 5배이지만 실질가치는 2배에 불과한 악화였다. 1876년 개항을 전후한 전국의 동전 유통고는 대략 2,000만 냥 전후였다. 그에 비해 1893년 전국의 동전 유통고는 7,000∼8,000만 냥에 달하였다. 주조된 당오전이 중앙정부, 지방정부, 왕실의 재정수입으로 어떻게 분배되었는지, 또 어떤 용도에 지출되어 시중 통화로 유통되기에 이르렀는지에 관해서는 종래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조선왕조의 왕실은 생활자료를 조달하기 위해 한성 시중에 명례궁, 수진궁, 용동궁과 같은 여러 궁방을 설치하였다. 그 가운데 왕비전에 속하면서 궁중의 주방에 각종 식재료를 조달하였던 명례궁의 수입과 지출 실태가 비교적 자세하게 알려져 있다.
1892∼1893년 명례궁의 수입은 연평균 290만 냥이었다. 명례궁의 회계책에 의하면 수입의 출처는 1882년부터 발행되기 시작한 당오전이었다. 한성과 강화도에서 주조된 당오전의 상당 부분은 명례궁의 창고로 현송된 다음 왕실의 생활비로 지출되었다. 조선왕조는 그 마지막 국면인 고종대에 이르러 현저하게 가산제 국가로 변질하였다.
명례궁은 대량의 수입을 주로 궁중에서의 고사와 연회의 비용으로 탕진하였다. 집권세력의 중추인 민비는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궁중에 신당을 짓고 무당을 불러들여 고사와 다례를 행하였다. 『매천야록』과 같은 개인의 기록에서 전하는 민비의 방종한 궁중생활은 한갓 야사가 아니라 그녀가 관장한 명례궁의 지출부를 통해 생생히 입증되고 있다. 명례궁의 지출부에 의하면 1893년 만에도 총 29회의 고사와 다례가 행해졌다. 왕실이 조정의 관료나 외국의 빈객을 대상으로 연회와 음식의 하사도 37회에 달하였다.
1862년 남부지방을 휩쓸었던 민란의 물결은 이후에도 잦아들지 않았다. 1876년의 개항 이후 1894년의 동학농민봉기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크고 작은 민란은 도합 100회에 달하였다. 민란의 물결이 이어진 것은 군현의 수령에 의한 학정과 수탈이 더욱 심해졌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1880년대 이후 본격화한 국왕의 매관매직이 있었다. 수령에 임명된 자들은 그의 짧은 임기 내에 서둘러 투자 자금을 회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같은 시기 한반도를 여행한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 Bishop)은 이 나라가 오직 약탈자와 피약탈자의 두 계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면허받은 흡혈귀’인 양반으로부터 끊임없이 보충되는 관료 계급과 인구의 5분지 4를 차지하는 문자 그대로의 하층민인 평민 계급이라고 하였다.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