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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것과 좋아 보이는 것 7:1~10
1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5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6 우매한 자들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7 탐욕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하느니라
8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9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10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
사단에 속음:엣날지향적 / 오늘을 주신 하나님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 7:11~14
11 지혜는 유산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이 되도다
12 지혜의 그늘 아래에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니라
13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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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고, 우매자의 노래보다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낫습니다. 탐욕과 뇌물이 지혜자를 망하게 합니다.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병행하게 하셔서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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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더 나은 선택, 더 나은 인생은 지혜, 즉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고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싶은 것입니다.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은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고 스스로 생각하여 지혜를 선택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장래 일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장래 일을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온갖 불안과 해로운 탐욕으로 우리 인생을 망쳐간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더 나은 인생은 하나님 진리의 말씀에서 책망을 받고 참된 지혜를 선택해서 더 나은 인생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좋은 이름, 초상집,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 끝까지 견디는 인내 같은 말들이 더 나은 선택을 설명하는 이미지들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유명해지기보다는 좋은 이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을 선택하고, 세상의 헛된 즐거움보다 인생에 대한 깊은 묵상으로 나아가며 헛된 칭찬에 마음을 빼앗기기보다 어려워도 끝까지 견디는 지혜로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곤고한 날은 생각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죽는 날, 초상집, 슬픔, 책망, 끝이라는 용어들이 사용된 것입니다. 곤고한 날의 유익은 그것이 우리를 더 깊은 신앙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는 것을 옳게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더 나은 선택으로 하루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채우시는 복된 날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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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도서 7장: 좋은 이름, 죽는 날, 초상집에 가는 것이 그 반대보다 낫다고 말하며 사람의 끝이 이와 같다고 말한다.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모든 일을 살펴보니 의로움에도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악행에도 장수하는 악인이 있다고 말한다. 깨달은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 들을 낸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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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14절, 지혜로운 자의 선택
솔로몬은 본문을 통하여 지금까지 알아 왔던 전통적인 개념을 역전시키고 있습니다. 누구나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생명보다 죽음이 더 낫다는 논리입니다. 지혜의 사람인 솔로몬은, 세상 사람들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의 개념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15절-29절, 인간과 다른 하나님의 판단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선과 악은 그 기준과 경계선이 분명하지 않다고 솔로몬은 언급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를 사람의 기준과 지혜로는 분명하게 구별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선과 악을 분명하게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치 판단은 인간의 기준과 분명히 다릅니다.
전도서 7장의 매일 성경 큐티 새벽 설교 주제
1절-14절, 겸손한 지혜
명예나 재물, 죽음과 출생, 슬픔과 웃음, 초상집과 잔칫집, 그리고 책망과 노래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일은 쉽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그 구분과 결과에 대해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분쟁과 다툼이 일어나고 서로에 대한 비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인생 속에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들이 뒤섞여서 일어나도록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모든 것을 통제하거나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인생이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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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14 지혜로운 사람은 더 나은 것을 택합니다.
말씀요약: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고,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며
웃음이 슬픔보다 나으며, 지혜자의 책망을 들음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 보다 낫다.
탐학과 뇌물이 망하게 하고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나으며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낫다.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아야 한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말씀하신다.
묵상: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말씀하시던 내용과는 사뭇다르다.
솔로몬은 잠언 3,000을 말했고 1,005편의 노래를 지었다고 (왕상4:32) 했는데
오늘 말씀은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다 주옥 같은 지혜의 말씀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다.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고 말씀하신다.(1)
명예가 재물이나 물질 보다 낫다는 말씀으로 이해가 된다.
나는 정직한 B학점보다 비겁한 A학점을 원했던 인간이다.
그러나 이제는 물질의 풍요보다 값진 향수보다 명예를 선택하기로 결단한다.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 보다 낫다고 하신다.(1)
태어나는 것보다 죽는 것이 오히려 낫다. 염세주의적인 고백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죽음 뒤에 있는 영원한 소망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지혜자의 통찰
진정한 지혜는 죽음을 소망스럽게 바라보는 죽음 뒤에 남을 아름다운 명예를 선택하고
죽음 이후의 영원한 세계에 소망을 두는 것이 지혜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 보다 낫다고 하신다.(2)
왜 그럴까? 잔치집에 가서 허무하게 쾌락을 즐기는 것 보다
초상집에 가서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상고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슬픔이 웃음 보다 났다.(3) 대단한 역설로 들려진다.
세상 사람들은 웃음이 슬픔 보다 낫다고 하나 지혜자는 반대이다.
왜 그럴까?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근심함으로 새로운 것을 깨달을 수 있고 마음을 바로 잡기 때문이다.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 보다 낫다고 하신다.(5)
지혜자의 진심 어린 충고가 들을 당시에는 기분을 나쁘게 할지 몰라도
결국에는 지혜로운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 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진심어린 충고를 듣지 않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참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성경이 이렇게 유머스러운 책인 줄 미처 몰랐다.
우매자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 타는 소리와 같다(6)
가시나무는 요란한 소리만 내고 금방 불이 붙었다가 타 버려서 실제 솥을 가열하지 못한다.
어리석은 자의 웃음 소리가 이처럼 금방 지나가 버리게 된다는 말씀이다.
탐학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만들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한다(7)
탐욕은 지혜로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고 억압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을 미치게 한다.
뇌물은 사람의 마음을 부패하게 한다.
판단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받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모습이다.
거절하지 못할 선물이 뇌물로 올 때 참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낫다.(8)
마무리를 잘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다.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낫다.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9) 내가 명심해야 할 말이다.
나는 권위자에게는 화를 잘 내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러나 가장 사랑해야하는 가족과 자녀들에게는 버럭 화를 낼 때가 있다.
버럭 화를 내고 나도 놀라고 자녀도 아내도 놀랐다.
느닷없이 버럭 화를 내기 때문이다. 아주 못된 습관이다. 꼭 고치자. 아멘.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14) 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두가지를 병행해서 주시기 때문이다.(14)
하나님께서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함께 허락하신다는 말씀이다.
일이 잘 될 때 기뻐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기뻐하되 교만하지는 말고 즐거워하되 나태해 지지는 말아야 한다.
곤고한 날, 일이 잘 안 풀릴 때에는 생각하라고 하신다. 연구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앞 날을 알 수 없게 하기 위하여 행복도 주시고 고난도 주시는데
곤고한 날에는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도록 생각하고 연구하자.
하나님 아버지
꾸중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고 잔소리를 들으면 짜증이 납니다.
힘든 일이 생기면 불평도 나오고 어려운 일이 생겨도 원망을 합니다.
기분이 상하고 짜증이 나고 불평이 나오고 분노가 치밀 때에도
급한 마음으로 화를 내지 않도록 성령님 나를 다스려 주옵소서.
형통함과 곤고함을 균형있게 허락하시는 하나님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인생의 어두운 터널 속에서도
터널을 잘 통과 하는 지혜와 용기와 담대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좋은 것을 선택 할 수 있는 지혜로운 자 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지혜의 근본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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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날과 출생하는 날, 초상집과 잔칫집, 슬픔과 웃음 등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보다 피하고 싶은 일이 오히려 더 나은 것이다. 지혜가 주는 유익을 누리기 위해서 반드시 피해야 할 것이 있다. 악을 행하고 악한 감정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모든 날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우리에게 허락하셨다.
7: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임에도 자신이 인생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주 망각한다. 일이 잘 풀리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더욱 쉽게 이 사실을 잊고 산다. 그러나 초상집에 가면,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한 줌의 흙으로 변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때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지 않을 사람은 없다. 인생의 종착지가 어디인지를 생각할 때 사람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방향을 교정할 수 있다. 칭찬 듣는 것을 싫어하고 책망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혜 자의 책망을 들을 수 있어야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지혜를 따라 산다는 것은 마음에 일어나는 감정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분노, 탐욕, 교만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주장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우리를 우매하게 만들 뿐이다.
고대 마케도니아 인들은 사람이 날 때는 울고, 죽을 때는 춤을 추었다고 한다. 각각 인생의 허무함이 시작되고 끝나는 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은 장례식장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좋다고 한다. 사람이 미리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유익하기 때문이다. 부모와 친구의 죽음을 통해 인생의 의미와 자기의 실존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죽음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단지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외면하고 살고 있을 뿐이다. 죽음에 대한 바른 자세가 필요하다. 죽음은 내가 유한한 존재임을 인정하게 하고, 죽음 이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며 살게 한다. 죽음은 단지 ‘끝’이 아니다. 믿는 자에게는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출발’이 된다. 그렇기에 더욱 진지하게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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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14절)
❝더 나은 지혜를 선택하는 삶❞
❚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신뢰하는 삶이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 어떻게 해야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습니까?
➲ 죽음과 고난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1~4절).
‘좋은 이름’ 즉, 사람의 명예나 명성은 그 사람의 죽음 뒤에서 계속 될 수 있는 것이기에 좋은 향기를 내는 기름보다 더 낫다고 말합니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고,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은 이유는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명심(1~2절)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적당한 근심은 오히려 마음에 유익을 줍니다(3절).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고,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잔칫집에 가 있습니다(4절,새번역). 인생의 종착지가 어디인지를 깨닫게 될 때, 더 나은 삶을 위해 방향을 조정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살아있는 내 자신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삶의 유한함을 깨달아 날마다 더욱 의미 있는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아끼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죽음은 육신의 장막을 벗고 하늘의 새 장막을 얻는 순간(고후 5:1)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참된 믿음 안에서 그날을 소망하며 철저하게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죽음 이후에 대해 때로는 진지하게 생각하여 죽음과 고난을 통해 더 나은 인생의 여정을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지혜를 따름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5~12절).
다른 사람에게서 책망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혜자의 책망은 기분이 상하게 할 수 있지만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고 반성하도록 해서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가게 합니다(5절). 어리석은 자의 웃음은 화력은 강하지 않으면서 소리만 요란해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그들의 웃음이 바로 삶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소리라는 의미(6절)입니다. 탐욕과 뇌물은 지혜로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고,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7절).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나은 이유는 참는 마음이 필요(8절)하기 때문입니다. 급하게 화를 내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분노는 어리석은 사람의 품에 머물기 때문(9절)입니다. 지혜가 아름답고 유익이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지혜가 그 사람의 목숨을 살려 주기 때문(11~12절)입니다.
세상의 탐심과 탐욕은 필요 이상으로 갖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고, 뇌물등을 통해 욕심을 채우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 내 인생에 궁극적인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혜를 따라 살아갈 때, 많은 유익을 얻게 됩니다. 재물이 인생의 어려움으로부터 어느 정도는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지혜도 내 인생을 보호하여 줍니다. 그러나 지혜가 재물보다 더 나은 것은 지혜는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즉, 영생을 가르쳐 주는 지혜를 따르는 삶이어야 합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을 얻도록 하는 지혜의 근본이 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더 많이 알아야 하며, 더욱 열심히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의 문제 앞에서 불평하는 태도를 보이지 말고, 영생의 길로 이끄는 지혜를 따름으로 더 나은 인생의 여정을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겸손한 순종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13~14절).
인생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인정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구부려 놓으신 것을 그 어느 누구라도 펼 수 없습니다. 아울러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재앙의 날에는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이는 고난이나 슬픔의 일을 만났을 때 단순히 슬퍼하거나 낙담할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일어난 원인을 생각하여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이 모든 날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기에 사람들은 자기 미래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갑작스럽게 슬픔의 일과 기쁨의 일을 함께 주심을 통해서 내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며 이러한 한계를 경험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내 자신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이 굽은 듯이 보이는 인생 앞에서 불만이나 불평 그리고 원망을 가질 수 있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모두 허락하실 수 있으신 분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러므로 겸손해야 합니다. 앞으로 내 인생에 어떤 날이 펼쳐질지 결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신실하시며 내 자신과 함께하시는 분이심을 확신합니다. 그러한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하고 어떤 상황 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겸손한 순종의 삶을 살아가므로 더 나은 인생의 여정을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삶의 유한함을 인정하여 시간을 아끼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소중히 하며, 믿음 안에서 소망중에 지혜를 간구하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신뢰하고,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므로 행복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전 7:1~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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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자와 우매자(7:1~7)
언제 어디서든 인생의 끝을 기억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태도입니다. 지혜자는 탐심으로 많은
소유를 얻는 것보다 ‘좋은 이름’, 즉 아름다운 인격에 따르는 명예를 가치 있게 여깁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잔칫집이 아니라 초상집에 있습니다. 잔칫집에 가서 허무하게 쾌락을 즐기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서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상고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미련한 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은 까닭은, 지혜자의 진심 어린 충고가 듣는 당시에는 기분을 상하게 해도
결국에는 미련한 길을 버리고 지혜로운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탐욕을 물리치고,
판단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받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모습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의 것을 추구하지 말고 하늘의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 묵상 질문: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 적용 질문: 인생에 끝이 있음을 아는 사람으로서 오늘 선택해야 할 ‘더 나은 것’은 무엇인가요?
지혜자의 삶(7:8~14)
참된 지혜는 생활 속에서 빛을 발합니다. 지혜자는 일의 끝을 아름답게 마감하고, 성급하게 노를 발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연연해 옛날이 오늘보다 낫다고 불평하는 대신, 현재의 삶에 충실하며 미래를 향해 진취적으로 나아갑니다.
지혜의 유익은 마치 한 사람의 유업이나 재산과 같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가치입니다.
지혜는 그것을 지닌 사람을 살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함께 주셔서 장래 일을 예측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것을 알기에 지혜자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만을 신뢰합니다.
- 묵상 질문: 하나님이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함께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 적용 질문: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에 각각 어떤 태도를 보이며 무엇을 생각하나요?
오늘의 기도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인생의 어둠 앞에서 인생의 본질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겸허해지는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기쁜 날이나 힘겨운 날이나 한결같으신 주님 앞에 저 또한 변함없는 사랑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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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1~14절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병행하게 하십니다. 삶을 지킬 수 있을 만큼 형통을 주시고,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곤고함을 주십니다. 그래서 넘어지지 않고 걸어갈 수 있을 만큼 두 일을 병행하게 하십니다. 해 아래 인생이 자만하지 않고 겸손히 하나님만 경외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유산보다 값진, 햇빛보다 밝은 참 지혜는 그것을 인정하는 겸손입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6절
명예와 재물, 죽음과 출생, 슬픔과 웃음, 초상집과 잔칫집, 책망과 노래의 실타래가 서로 교차하고 뒤엉켜 있습니다. 삶이 그만큼 간단하지 않고 가볍지 않다는 뜻일 것입니다. 산 자는 인생의 참다운 실재를 잘 보여주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하며, 이는 해 아래 삶이 전부인 자와 정반대인 선택입니다. 인생에 끝이 있음을 안다면, 오늘 내가 선택해야 할 ‘더 나은 것’은 무엇입니까?
5,6절
지혜자의 책망은 어리석음을 몰아내지만, 우매자의 노래는 어리석음을 부추깁니다. 겸손히 자기 한계를 인정하고 교만하지 않는 마음이 지혜의 출발입니다. 어떤 의도로 내 잘못을 지적하든지 달게 듣고 앙심을 품지 맙시다. 듣기에 좋은 칭찬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7절
탐욕과 뇌물은 지혜의 장애물입니다. 그것은 지혜로운 자를 어리석게 하고 그의 눈을 어둡게 하며, 그의 마음을 파괴합니다. 뇌물의 힘은 막강해서 거절하기란 매우 힘들고, 그것을 받고서 불의에 가담하지 않기란 더욱 힘듭니다. 그래서 더욱 결연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8~10절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습니다. 이것은 결과에 따라 과정마저 판단 받는 결과론적 사고를 옹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는 마음’에 비추어보면, 인생길 고비마다 조금씩 진전하는 모습의 아름다움을 높이 사기 위한 것입니다. 조급히 결과를 만들어내려다 일을 그르치기보다 인내하는 마음의 근력으로, 과거에 천착하지 않고,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기 위한 것입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조각하고, 지금껏 걸어온 인생길도 조망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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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7:14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신다 한다
기뻐하고 곤고한 날들을.
우리에게 우연이란 없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7:12
하나님께서 이 모든 만사를 이끌고 계심을 인정해 드릴때
그때가 가장 지혜로운 순간일 것이다.
그분은 굽게도 하시고 곧게도 하시고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모두 주시는 분이시다.
제 아무리 지혜로운 인간도 이 아래서 살 뿐 하늘 위 하나님의 생각을 알 길이 없다는 이 사실을
인정하는 삶이 신앙인의 삶일 것이다.
그분의 통치와 주권을 인정하는 자.
그럴려면 내가 할 수 있다는 이 건방을 꺽어야 한다.
내가 잘났다는 교만도 꺽어야 한다
교사수련회 갔을때 준이가 말했던 것 처럼
어깨 힘을 빼야 하는 것이다.
그분의 통치를 인정한다면 저절로 목소리 낮아지고 눈에 힘 빠지고 어깨 힘 빠질 것이다.
억지로 힘을 빼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그분의 주권을 인정해 드린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잠잠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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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십시다.
만일 누구든지 믿음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절대로 곤고(困苦)한 날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되겠습니까?
아마 믿음은 있지만... 아주 교만한 믿음의 사람.. 제 잘난 믿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앞에는.. 믿음이 있어도.. 종종 곤고(困苦)한 날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길로 인도하든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가기만 하면(살전 5:16-18)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되리라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더 오늘의 말씀을 되새겨 봅시다.
"형통(亨通)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困苦)한 날에는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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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길 (전도서 7:1-14)
1. 죽음과 명예 (1-4절)
전도서 기자가 잠언의 형식을 통해 지혜와 어리석음에 대해 조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특히 전도자가 강조했던 내용은 ‘죽음을 통해 인생에 대한 지혜’를 찾는 일입니다. 인간이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임을 인식할 때, 유익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은 죽는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권면합니다. 죽음은 외면하거나 부인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직면해야 할 대상이라는 말씀이지요. 죽음을 성찰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지혜의 길은 죽음을 성찰하면서 그 빛 아래에서 인생을 이해하는 일이라고 제시합니다.
그러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인 우리 인간에게 중요한 일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명예’는 죽은 후에 우리가 남길 수 있는 ‘이름, 평판, 기억’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죽은 후에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어떤 평판을 남길 것인지를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전도서 기자는 ‘평판이 값비싼 기름보다 더 낫다’고 말씀합니다. 당시에 향유는 여러 가지 쓰임새가 있었습니다. 치료제이기도 하고, 향수의 역할도 했습니다. 그래서 값비싼 향유는 소중한 가치를 가진 것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 향유보다 더 중요한 것이 ‘명예’라는 말씀입니다.
2. 책망이 주는 유익(5-6절)
전도자는 지혜의 길을 또 제시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일입니다. 5절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더 낫다.” 여기, ‘어리석은 사람의 노래’라는 것은 사람들의 칭송이나 칭찬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주변의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고 칭송을 얻는 것에 만 의미를 두는 사람들이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더 낫다고 전도자는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책망을 받아 스스로를 새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은 들을 때 마음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귀에 듣기 좋은 말을 들으려고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책망을 통해서 사람들은 지혜를 얻고, 보다 나은 삶을 결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책망하는 소리를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것이 지혜의 길입니다.
3. 재물이 주는 해로움 (7절)
전도자는 지혜의 길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합니다. 7절 “탐욕이 지혜로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고, 뇌물은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한다.” 탐욕이 지혜로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든다고 가르칩니다. 탐욕이 지혜의 길에서 가장 강력한 방해물이라는 의미이지요. 사람이 죽을 때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사람들이 망각하는 이유는 탐욕 때문입니다. 탐욕이 우리의 눈을 가리고, 그래서 탐욕은 사람을 어리석게 만듭니다.
4. 인내가 주는 유익 (8-9절)
전도자는 제시하는 지혜의 길, 그 중에 하나는 ‘인내’입니다. 8-9절 “일은 시작할 때보다 끝낼 때가 더 좋다. 마음은 자만할 때보다 참을 때가 더 낫다. 급하게 화내지 말아라. 분노는 어리석은 사람의 품에 머무는 것이다.” ‘참을 때가 더 낫다, 화내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참고 화를 다스리는’ 일은 시간이 걸리고 겸손과 절제가 필요한 일이지만, 그런 인내를 가진 사람들이 지혜를 얻게 됩니다. 반면 참지 못하고 마음에 있는 분노와 화를 쏟아 붓는 사람들은 결국 후회할 일을 만들게 됩니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5. 지혜가 주는 유익 (10-12절)
이렇게 전도자는 지혜를 강조하면서, 그 지혜가 주는 유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지혜는 유산을 받는 것만큼 좋은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지혜의 덕을 우리가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지혜가 그 사람의 목숨을 살려주기도 한다고 강조합니다.
6. 지혜의 원천 (13-14절)
전도자는 지혜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바로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13-14절 “하나님이 구부려 놓은 것을 누가 펼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는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좋은 때도 있고 어려운 때도 있습니다. 좋은 때도 있고 나쁜 때도 있습니다. 그 모든 일을 우리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그렇게 섭리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사람은 삶을 제 마음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주어진 상황에서 지혜를 선택하는 사람들입니다. 좋을 때 기뻐하고 어려울 때는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주어진 삶의 모습에서 가장 지혜로운 반응을 찾아가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지혜를 찾아야 합니다. 지혜를 얻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특히 죽음을 성찰하면서, 인생을 새롭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지혜가 주는 유익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생을 가장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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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선택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한다.
전도자는 죽는 날이 낫다고 하였다.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복된 것이다.
초상집에 가서 함께 하는 것이 또한 낫다고 하였다.
누구나 가는 그 마지막 길에서 삶의 방향을 배울 수 있다.
고난을 겪어야 성장한다는 말도 있다.
고통을 당한 자가 고통 당한 자를 위로할 수 있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먼저 할 일인가를 매 순간 잘 선택할 필요가 있다.
진실한 책망은 사랑의 결과다.
비난이 아니라 더 나음을 위한 책망이다.
책망을 잘 듣고 깨달아 돌이키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매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웃지 말아야 할 자리에서 웃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탐욕도 버려야 할 요소다.
탐심에서 오는 죄악이 크다.
탐욕 때문에 뇌물에 쉽게 넘어갈 수도 있다.
급한 마음으로 실수할 때도 많다.
노를 쉽게 발해서도 안 된다.
지나간 일에 집착해서도 안 될 것이다.
다 우매자의 소행이다.
지혜자는 현실을 직시하고 감사하는 자다.
주어진 오늘에 감사하는 자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인정하는 자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모든 것이 가능하신 분이시다.
날을 주장하신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다스리신다.
인간이 다 헤아려 알 수 없는 분이시다.
역사를 다스리신다.
형통함도 곤고함도 주시는 분이시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음이 얼마나 복되고 감사한 일인가?
세상에는 헛된 신을 따르는 자들이 많다.
그들에게는 자기만족이 있을지 몰라도 참 생명이 없다.
영생이 주어지지 않는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생의 대열에 합류하게 하신 은혜가 감사할 뿐이다.
하나님 안에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자신을 뒤돌아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심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기뻐하며 살 수 있어야겠다.
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주 안에 사는 오늘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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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칫집보다 초상집에서 얻을 수 있는 큰 지혜가 무얼까 생각해 보니 죽음을 위로하는 자리에는 관계적인 삶을 돌아보게 되었어요. 모두의 삶은 유한하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정신차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게 최선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칭찬과 인정을 바라며 작은 소리에도 시달리고 흐느적거리지만 결국 나를 변화하게 하고 단단하게 하는 건 지혜자의 책망이에요. 책망을 들을 때, 혹은 과거를 돌아보고 원인을 분석하기 보다는 완전하지 않은 나를 견뎌보며 성실함으로 결과를 만들어가고 싶어요.
오늘 말씀을 읽으니 그동안 제가 후회로 인해서 많이 고통하고 원인을 찾느라 꾸준히 해내지 못한 것 같아요. 다시 그것을 돌아보고 분석하기 보다는 죽음 너머를 바라보며 삶의 과정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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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자가 일관되게 말하는 전도서의 논조는 해 아래서 하는 모든 것이 유익이 없고,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헛되며, 다만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점이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초상집이 잔칫집보다 낫다는 말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잔칫집에 가는 것이 해 아래 인생의 헛됨을 깨닫게 하는 초상집에 가는 것보다 낫지 못하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항상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해 아래 사는 인생들에게는 형통한 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곤고한 날이 많기에 영원히 행복할 것 같이 웃고 떠들고 즐기는 자는 스스로를 속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의 거의 대부분은 우리가 먹고 마시고 즐기는 중에 발견하기보다 곤고한 일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때 얻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해 아래 인생에게 초상과 잔치를 병행하게 하신 이유는 장래 일을 헤아려 알 수 없는 인간의 유한함과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갭을 알아서 그분을 경외하게 하려 함이다.
내 인생에 기대하는 것과 다르게 흘러가는 일들이 항시 일어난다. 당연히 될 줄 알았던 일조차 좌절될 때 일단 낙심이 되지만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기도하게 된다. 하나님이 뜻하신 길이 내가 생각한 길이 아닐 수 있고, 내가 틀릴 수 있기에 하나님의 인도가 무엇인지 잠잠히 기대하고 기다리게 된다.
형통이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모든 일이 흘러갈 때 사용하는 표현이 아니라 지금까지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신 일들을 돌아보고 감사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고, 보디발의 집에서 오해를 받아서 감옥에 갇힐 때에도 성경은 요셉을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형통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만 그리 쓰지 않았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아는 자는 형통한 자이다. 해 아래 사는 동안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그늘 아래 있는 쉬는 자가 복되다. 지혜로운 자는 힘들 때나 즐거울 때나 항상 하나님의 그늘 아래 사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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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이 헛되다고 선언했던 전도자는 슬픔과 고난이 사람을 유익하게 한다고 조언합니다.
- 죽음과 명예를 연결하며, 전도자는 생을 끝내는 날에 명예를 남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 하나님은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병행하게 하십니다.
-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습니다.
- 온유한 마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조각하고, 지금껏 걸어온 인생길도 조망해 봅시다.
영한매일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