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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
그리스도의 말씀(골3장16)
성경본문|골로새서 3:16
16.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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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박조준목사
지난 시간에는 그리스도의 평강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서 생각 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라“ 고 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그 당시 거짓선생들은 사람이 만든 유전과 종교적인 규율과 인간의 철학을 골로새에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의 가르침을 애써 끼워 맞추려 했지만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 나님의 말씀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에 구원을 가져온 것은 거짓 선생들의 교훈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 진리의 말씀이었습니다.
이미 골로새 1장 5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우리를 지켜 주며 우리에게 힘을 더해 줍니다.
베드로전서 1장 22-23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 너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여기 거한다고 하는 말은 평안하게 느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을 경험한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 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큰 가치를 가져다주는 영적인 보화가 말씀 속에 얼마나 풍성히 담겨있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바울이 그리스도인 개개인들을 위해서만 써보낸 편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전체 교회 그리고 교회의 모든 지체들을 향하여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 늘 주신 말씀에 “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이 교회의 각 지체에 풍성히 거할 때, 교회 안의 성도의 교제가 아름답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 교회의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이 약화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성도들 사이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오락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풍성히 거하고 있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 아닙니까?
왜요? 우리는 세상의 다른 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암송하기 위해 시간을 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을 받으라고 하면 목청을 높여서 아멘 하면서도 복 받을 일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것이 오늘 우리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시편 1편을 보세요. 복 있는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의 평범한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도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일을 다 당합니다.
복 있는 사람도 이 세상에 살면서 고통을 겪어야 하며 실패를 맛보아야 합니다.
복 있는 사람도 각종 질병에 시달려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고통을 당하지 않거나, 실패하는 일이 전혀 없다거나, 질병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복 있는 사람도 하나의 인간으로서 역시 약한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복 있는 사람도 자칫하면 시험에 빠지고 죄에 물들기 쉽습니다.
세상에 약점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그는 하나의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먼저 소극적인 방면으로 복있 는 사람의 생활에서 피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도 피해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피한다는 말이 너무 소극적으로 들릴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지마는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하나의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피해야 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여러분, 시험에는 장사가 따로 없습니다.
낚시질을 해 보면 미끼 옆에 뱅뱅 도는 고기가 있습니다.
삼키지는 않고 물었다 놨다 하며 입질을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런 고기는 얼마 안있어 낚시에 걸리고 맙니다.
위험한 곳은 아예 피하는 게 제일 좋습니다.
시험에 들 수 있는 기회를 갖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불경건한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피하라고 성경은 가르쳐 줍니다.
검은 숯을 만지면 나도 모르게 손에 검은 숯가루가 묻게 되어 있습니다.
먼지 구덩이에 들어가 면 아무리 조심하노라고 해도 먼지가 묻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먼지가 제일 많은 나라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입니다.
서울에서는 셔츠를 하루만 입어도 목에 자국이 납니다.
먼지가 많으니까 어쩔 수가 없습니다.
먼지 묻지 않으려면 먼지 없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복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아야 합니다.
죄인들은 쾌락을 위해 생활합니다.
그런데 복 있는 사람은 세상적인 것을 즐거워하지 아니합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적인 것은 그들의 구미에 결코 새로운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족의 근원은 세상에서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입맛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만족의 원천을 세상에서, 죄악된 길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거기에 만족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4장을 읽어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 일행이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가다가 대낮에 예수님은 우물가에 앉아 계시고 제자들은 점심준 비를 위해서 수가성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침 미모의 여인 하나가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남들이 다니지 아니하는데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서 다니는 여자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의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물을 좀 줄 수 없습니까?“
그 때 물을 좀 달라는 낯선 사람을 보니 유대인이란 말입니다.
‘보아하니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이 때 예수님은 당신이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당신더러 물 좀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다면 당신이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리고 그가 생수를 당신에게 주었을 것이요“ 했습니다.
여자가 하는 말이 ‘당신은 물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습니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야곱보다도 큽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는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오”
이때 이 사마리아 여인의 입장이 달라졌습니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때 예수님은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서 당신 남편을 불러오시오”.
“왜요?” 이 여인은 죄인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가 하는 말이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른 하시는 말씀이 “당신이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소. 당신은 남편이 다섯이 있었지만 지금 있는 자도 당신 남편이 아니니까 당신 말이 참되오”
이 때 이 사마리아 여인은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 회개하고 죄인의 길에서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녀가 과거에 찾아다니던 것, 세상 것을 완전히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합니다.
뿐만 아니라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욕됨을 들었을 때 의분을 금치 못합니다.
전에 소년 다윗은 그 나이 비록 어리고 전쟁의 경험이 없었지마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덤벼드는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볼 때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골리앗을 쳐 물리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복받은 사람은 어디서 즐거움을 얻습니까?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즐거움을 얻습니다.
사람은 즐거움과 기쁨이 있어야 살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공허한 상태로 놓여있지 아니합니다.
좋은 것으로 채워지지 아니하면 이 마음은 허탈감에 절망적인 것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마음은 악이 떠나면 선이 차지하고, 선이 쫓겨나면 반드시 악이 차지하는 것입니다.
물은 쉴새 없이 흐르지 아니하면 곧 썩어 냄새가 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말 가치 있는 것, 기뻐할 수 있는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간순간 참된 즐거움이 없을 때, 삶의 아름다움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의 원천은 세상이나 육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37편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주 안에서 즐거워하라 그러면 주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시리라”
복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요한 1서 5장 2-3절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동기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말씀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얼마나 즐거워합니까?
세상에 한눈팔고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흥미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는 것을 진단하려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나?하는 것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별로 흥미가 없습니다.
어떤 책에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여섯 가지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로, 이 말씀은 오래된 것이기 때문에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오래된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소위 골동품을 수집하는 사람들은 오래된 가구, 오래된 그릇, 오래된 책, 오래된 동전, 오래된 우표, 오래된 옷, 오래된 그림, 오래된 악기, 심지어 오래된 자동차, 등등 오래된 것 일수록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 그것을 좋아합니다.
여러분, 성경만큼 오래된 책도 없습니다.
둘째로, 이 말씀은 공평하기 때문에 기쁨을 누립니다.
여기 기록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까?
계급도 차별도 없는 공평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인 양심입니다.
사람의 양심이 귀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달라지고 왜곡되고 마비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양심은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언제나 이 말씀에 비추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지혜를 줍니다.
다른 말로 이 말씀은 지혜의 책입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삶의 지혜에 대한 최고봉을 발견하게 되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 정치하는 사람이 정치를 바로 하게 되며, 예술가가 영감을 얻으며, 과학자는 우주의 신비를 체험하며, 가정에서 행복의 비결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 이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즐거움이 있습니다.
소설은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서 읽을 수도 있고, 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틀림이 없기 때문에, 진리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고 여기에서 기쁨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이 말씀 자체에 맛이 있기 때문에 즐거워합니다.
시편에 보아도 이 말씀은 꿀과 꿀송이보다 더 맛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맛을 들이면요 이것 이상 맛있는게 없습니다.
세상의 어느 소설이 아무리 재미있다 해도, 연애소설을 밤을 새워가며 읽어도, 두 번 읽으면 다시 읽을 필요가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한번 읽을 때보다 두번 읽을 때 더 맛이 납니다.
열번 읽으면 더 맛이 납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험이기 때문에, 설명은 할 수가 없습니다.
왜 교회에서 여러분에게 성경을 통독할 것을 권장합니까?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맛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맛을 보아야 알기 때문에 그 맛을 함께 나누고자 함에서입니다.
여섯째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 믿는 사람은 말할 것 없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도 많이 읽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에게 그 어느 책보다도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얼마나 기쁨을 맛보십니까?
만일 그저 의무적으로 읽는다면 이 말씀의 핵심을 놓쳐 버리고 말 것이고, 거기서 유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복 받은 사람은 무엇에 시간을 보냅니까?
복 있는 사람은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읽는 것은 소가 풀을 뜯어먹는 것과 같고, 묵상하는 것은 풀을 뜯어먹은 소가 되새김질을 하여 소화시키고 영양분을 흡수하는 것과 같습니다.
단순히 읽는 것만 가지고는 우리에게 별로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깊이 묵상하며 소화시켜야 합니다.
먹기는 먹었는데 소화시키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게 되면 자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젖어있게 되고, 어떤 시험이 우리에게 닥쳐도 말씀의 검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할 때도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하면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언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서 마귀가 도전한다 하여도 말씀의 검을 차고 있는 사람은 승리하게 될 줄 믿습니다.
야고보서 1장 22절 이하에 보면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 되 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 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고 했습니다.
묵상하는 사람은 말하자면 율법, 하나님의 말씀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 그 말씀대로 살려고 힘쓰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에도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 고 했습니다.
어떤 축복을 받습니까?
우리 삶에 대한 축복을 받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을 나무에다 비유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받은 사람은 말라 죽어가는 나무가 아니라 생기가 넘치는 싱싱한 나무입니다.
시냇가에 뿌리 박은 나무와도 같습니다.
삶의 근거가 생명수가 되시는 그리스도와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그 안에, 그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생활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는다”고 했습 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했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가뭄이 드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래도 비가 자주 오는 곳이기 때문에 들에도 산에도 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매우 건조한 곳입니다. 비가 별로 내리지 않는 곳입니다.
더구나 더운 지방이기 때문에 선인장 같은 것 외에는 잘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나 요단 강가에만은 나무가 사철 푸르게 자라고 있습니다.
강물 줄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삶의 근거를 두고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이 좀 잘 되면 좋아하고 교만해지고 하지만, 조금만 어려워지면 죽는다고 야단합니다.
날씨에 따라 삽니다.
맑으면 기뻐하고 흐리면 슬퍼합니다.
사막지대에는 풀이 누렇게 말라 있습니다.
그러나 비가 내리면 파랗게 살아납니다.
그 나 강가에 있는 나무는 언제나 푸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삶의 근거를 두고 있는 사람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고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합니다.
그 행사가 다 형통합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복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복 받은 사람은 그 마음에 안정이 있습니다.
시냇가에 뿌리를 깊이 박은 나무는 웬만해서는 흔들리지 아니합니다.
세상에 근거를 두고 사는 사람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했습니다.
바람이 없을 때는 무엇이 좀 있는 것 같다가도 바람이 불면 다 날아가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는 사람은 변함이 없습니다.
흔들리지 아니합니다.
날아가지 않습니다.
영원합니다.
그리고 복있는 사람은 계속 성장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위로 자라고 옆으로 퍼지고 가지가 뻗습니다.
시편 92편에도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했습니다.
이런 나무는 “늙어도 결실 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했습니다.
주의 말씀 안에 거하는 자는 그 행사가 다 형통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나 내 마음대로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간증한 대로 하나님의 사랑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사랑입니다.
요셉이 얼마나 어려운 일을 많이 당했습니까?
억울한 일, 고생스러운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결국에는 선한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어려운 일 당한다고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늘 햇빛뿐이면 사막을 이룬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가끔 비도 주시고, 바람도 불게 하십니다.
햇빛이 쪼이는 아름다운 날도, 구름 낀 날도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하는 사람은 그 행사가 다 형통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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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