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조선시대사] 답사보고서 –창덕궁- 20110164 역사학과 엄은지
목차
Ⅰ.들어가며
Ⅱ.창덕궁
Ⅲ.나오며
Ⅰ.들어가며
서울에 있는 조선시대 유적이라면 으레 법궁(法宮)인 경복궁을 포함하여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등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궁궐 방문은 역사학과 학생이라면 가장 기본적인 답사코스인데, 나는 경복궁 외에 다른 궁궐을 제대로 답사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창덕궁을 답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나라의 사극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가장 많아서 사극매니아인 나로서는 그동안 궁궐을 가보지 않았음에도 친숙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실제로 방문한다고 해서 감흥이 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예상 외로 매체에서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 아깝지 않은 시간이었다.
Ⅱ.창덕궁
종로 3가역에서 내려 대로를 따라 걷다 보면 창덕궁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인다. 멀리서 봐도 경복궁이 불탄 이후 법궁 역할을 했던 창덕궁의 위엄이 느껴진다. 베르사이유 궁전에 답사 갔을 때 처음 궁전 대문을 멀찍이서 봤던 것과 같은 감동을 받을 수 있었다.
창덕궁은 1405년(태종 5년) 10월 조선 제 3대왕인 태종의 명에 따라 離宮으로서 지어졌다. 궁이 완성되기 이레 전에 왕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개성에서 한양으로 다시 도읍을 옮겼다. 이미 한양에는 태조가 지은 경복궁이 있었지만 태종은 경복궁에 들어가는 것을 꺼려 이궁을 새로 짓고 그곳을 자신의 거처로 삼았던 것이다.
창덕궁이 들어선 응봉 아래는 언덕이 많고 골짜기가 발달해 궁궐이 들어설 만큼 넓고 평탄한 곳이 아니었다. 뒤로는 응봉으로 이어지는 경사지가 펼쳐지고 양옆은 언덕과 골짜기 사이로 물길이 몇 갈래를 이뤄 흘러내리며 남쪽은 종묘를 사이에 두고 큰 언덕이 가로막고 있었다. 이 사이에 동서 방향으로 약간의 평지를 이용해서 궁의 주요 건물들이 배치되었다.
창덕궁은 이궁으로 시작했지만 역대 왕들은 이곳에서 자주 머무르며 정사를 보고 나라의 큰 행사를 치렀다. 이에 따라 건물을 늘리고 비좁은 정전을 크게 지으면서 확장을 거듭했다. 그런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건물이 모두 불에 타고 말았다. 광해군은 정궁(正宮)인 경복궁 복구 준비를 포기하고 창덕궁을 다시 지었는데 왜 정궁을 두고 창덕궁을 복구하기로 결정했는지에 대해서는 그 이유가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 못했지만 창덕궁의 공사 규모가 작아서 다시 짓기가 수월했다는 점 말고도, 경복궁 터가 풍수상으로 좋지 않다는 조선 초기 풍수 전문가들의 견해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창덕궁은 복구된 뒤 260여 년 동안 조선왕조의 정궁으로서 그 역할을 다했다. 나라의 크고 작은 행사와 외국 사신의 접대, 왕실의 기념할 만한 온갖 일들이 창덕궁에서 벌어졌다. 창덕궁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던 창경궁은 창덕궁의 비좁은 공간을 해결해주는 보조 역할을 맡았다.
창덕궁이 다른 궁궐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점은 오래된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궁궐만큼이나 나무들도 조화롭게 자리하고 있어 관람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이는 창덕궁은 1405년부터 왕조가 끝나는 1910년까지 505년동안 궁궐로 쓰였던 만큼 다른 궁궐보다 훨씬 고목나무가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현재 창덕궁의 고목나무는 느티나무 32그루, 회화나무 15그루, 주목 10그루, 향나무 3그루, 은행나무와 측백나무 및 밤나무가 각각 2그루, 갈참나무, 굴참나무, 매화나무, 다래나무가 각각 1그루로 모두 70그루에 이른다. 이는 대체로 둘레 한 아름 이상, 나이 300년 이상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위 사진의 다리는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 들어가면 바로 나오는 다리 금천교이다. 창덕궁의 명당수, 즉 금천(禁川)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돈화문 오른쪽까지 와서 궐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이 어구(御溝)물가에는 화강석 6∼7단을 가지런하게 쌓은 축대를 설치하였고, 여기에 금천교를 설치하여 궐내로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며, 궁궐의 위엄을 보여주는 상징적 조각상과 아름다운 문양, 견고하고 장중한 축조 기술 등이 돋보이는 이중 홍예교로서 역사적, 예술적, 건축적 가치가 뛰어나다. 금천교 아래를 관찰하니 물이 거의 흐르지 않았다.
아래 사진의 문은 인정전의 입구인 인정문이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이다. ‘인정(仁政)’은 ‘어진정치’라는 뜻이며, 인정전은 창덕궁의 법전(法殿)이 된다. 법전은 왕의 즉위식을 비롯하여 결혼식, 세자책봉식 그리고 문무백관의 하례식 등 공식적인 국가 행사 때의 중요한 건물이다.
광해군 때 중건된 이후 순조 3년(1803)에 일어난 화재로 인한 재건, 그리고 철종 8년(1857년)에 보수공사이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인정전의 넓은 마당은 조회가 있었던 뜰이란 뜻으로 조정(朝廷)이라고 부른다. 삼도 좌우에 늘어선 품계석은 문무백관의 위치를 나타내는 표시로 문무관으로 각각 18품계를 새겼다. 그러나 정(正)4품부터는 종(從)을 함께 포함시켰으므로 정1품에서 시작하여 정9품으로 끝나며 각각 동, 서로 12개씩 있다. 정조 때 조정의 위계질서가 문란해졌다고하여 신하의 품계에 따른 비석을 세우게 된 것인데, 3품 이상을 당상관(堂上官)이라하고, 3품 이하를 당하관(堂下官)이라 한다.
아래 사진은 인정전의 모습이다. 정전으로서 건물이 주는 위엄과, 정조때 만들어졌다는 품계비가 가지런하게 정렬된 것이 인상적이었다. 돌로 된 바닥은 약간 울퉁불퉁하다고 느껴졌는데 이는 왕과 신하들이 신고다니는 가죽신을 배려해서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고 하는, 예전에 책에서 봤던 글이 문득 생각났다.
위 사진은 인정전의 내부를 찍은 것인데. 천장에 달려있는 조명과 노란색의 아름다운 커튼이 인상적이었다. 근대에 설치한 것을 보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답사를 다녀와서 찾아보니, 한말에 내부시설 일부를 개조하고 전등을 가설하였다고 한다. 내부 바닥은 본래 전(磚)이 깔려 있었던 것을 서양식의 쪽나무로 바꾸었으며, 창도 내부에 서양식의 들어서 여는 창을 내고 커튼을 드리운 것이다. 또한, 궁내에 전기를 공급하는 시설을 갖추어 여러 개의 전등을 가설하였다. 이들 새로운 시설은 황실을 상징하는 노란색으로 장식하였다.
창덕궁 답사 초반부터 시선을 잡아끄는 아름다운 건물이 있었는데, ‘희정당’이라는 곳이었다.
이렇게 앞으로 툭 튀어나온 곳이 아름답게 꾸며졌고, 그 아래로 돌로 만든 길이 있었는데 이는 주차하기 편하도록 만든 것이었다는 점이 놀라웠다.
희정당은 본래 침전으로 사용하다가, 조선 후기부터 임금님의 집무실로 사용하였다. 건물을 지은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연산군 2년(1496)에 숭문당이라는 건물이 소실되어 이를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희정당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몇 차례의 화재로 다시 지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불에 탄 것을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다 1920년에 지은 것이다.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시대에 왕의 사무실과 외국 사신 등을 접대하는 곳으로 사용하면서 한식과 서양식이 어우러진 건물로, 시대의 변천사를 엿볼 수 있는 건축이라 할 수 있다.
Ⅲ.나오며
답사를 통해 본 창덕궁은 경복궁처럼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주위 자연 환경에 어울리도록 그대로 따라 지어져서 자연스러운 멋을 풍기는 궁궐이었다. 일반적으로 친숙하게 알려진 경복궁보다 창덕궁에서 조선의 왕족과 대신들은 더욱 오랫동안 지냈다는 사실때문인지 더욱 애착이 가는 곳이다. 다만 일제에 의해 강제로 헐어지고 본래 모습을 무시한 채로 개축된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것을 직접 확인하니 아픈 역사가 느껴져서 안타까웠다. 굳이 들어가지 말라는 곳에 들어가서 문화재에 앉아서 수다떨고 있는 관광객들도 눈에 띄었는데 좀더 문화채 관리를 철저히 해야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복원하느라 공사판이 된 곳도 있었는데, 정부기관의 치적 때문에 형식적으로 복원하기보다는 지금 남아있는 건축물이라도 잘 관리하는 것이 더 도리에 맞지 않을까. 우리나라 문화재 복원에 대해서 많은 국민들이 불신감을 갖고 있는게 현실이다. 비록 우리나라가 선진국 반열에는 들지 못하지만 문화재 관리에 있어서만큼은 선진국 반열에 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던 답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