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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적으로 죄를 범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자
요한일서1장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2장
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22.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3장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4장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5장
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서론
오늘날 일부 교회 안에 죄를 범 할 수밖에 없지만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거짓 복음이 널리 퍼져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본문의 말씀 1장 8절과 10절 등을 잘못 해석하여 잘못 적용 하는데 큰 영향이 있다고 할 것이다.
필자가 수년간 죄, 속죄에 관해서 연구한 결론은 일부 현대교회 안에는 “죄를 이길 수 있으므로 자유가 있다”는 진짜 복음과 “죄를 이길 수 없어서 죄의 종일 수밖에 없다”는 가짜 복음 두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기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가짜 복음의 실체에 대해서 논하여 보고자 한다.
본론
상기 본문의 말씀 가운데 거짓말에 대해서 요약하면
★범죄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자(진리를 행하라)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
(범죄하면 속죄하라<발닦음>)
★범죄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자.(계명을 지키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는 적그리스도이며 적그리스도는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자로 인격적인 관계를 부인하는자(하나님과 인 격적인 관계를 맺어라)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거짓말하는자(형제를 사랑하라)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
(아들을 믿으면 자기 안에 증거가 있다)라고 할 수 있는데
글 가운데 5:1의 대비를 이루고 있는 두가지 핵심은 “범죄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자,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거짓말 하는자” 이다.
말 장난도 아니고 모순 아닌가?
자칫 잘못하면 모순에 빠질 수 있는, 영원한 미궁, 딜레마에 빠질 수 있는 실타레가 얽힌 것 같이 어려운 이 말씀을 풀어서 해석해야만 행 할 수 있는 것이다.
TV 뉴스에서 최근 사퇴한 이탈리아 총리는 장기간 집권하는 동안 방송국을 장악하여 여야의 정책에 대해서 보도 할 때 처음 여당, 두번째 야당 세 번째 여당이 마지막 하는 식으로 하면 대개 여당의 정책들이 옳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는 시청자 심리를 이용하여 장기간 집권 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는 그러한 기술을 활용하여 국민들의 마음을 장악했다고 앵커가 한 말이 기억나지만 상기 본문의 말씀에도 그와 같은 흐름이 있다.
주제가 “Do not forsake me, oh my darling”으로 유명한 서부활극 “하이눈”에서 주인공 게리쿠퍼는 악당들과 4대1의 결투를 벌이지만 여기 요한일서 전체에서는 반대로 거짓말하는 자가 6번 나오는데 5번은 긍정적인 것이고 1번만 부정적인 것으로 5대1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요한일서를 압축하면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짓말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부정적인 것으로 긍정적인 것을 강조하였다. 그림에서 보색관계의 색을 같이 배열하였을 경우 그 차이가 강조되어 실제보다 두드러지게 보이는 현상 또는 효과를 보색대비(補色對比)라 하는데 본문에 그와 같은 기법이 있는 것이다.
처음-진리를 행하라
두 번째-범죄하면 속죄(발닦음)하라
세번째-계명을 지켜라
네 번째-인격적인 하나님을 시인하고 관계를 맺어라
다섯 번째-형제를 사랑하라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믿어라 등으로
문장을 배치하여 범죄하는 것보다는 범죄하지 않는 것을, 하지 못하는 것보다 하는 것을 강조하였으며 특별히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강조하였다.
2장22절의 말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것은 사람의 格으로 오신, 人格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격적인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은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딤전3:16)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것은 인격적인 관계를 시인하는 것이며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냥 단순히 예수님은 육체로 오신 것이라고 교리적으로 사변적으로 처리 해두고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우리자신에게 적용시키 못하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을 때 비로서 거듭남(중생, 새신분)으로 천국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거짓말을 집어 넣어서 문장을 구성한 방식을 분석하면 은총과 죄사함의 특권에 대한 남용을 막기 위한 것으로 죄짓는 것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로서(사랑은 인격적인 관계에서만 발생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계명을 지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긍적적인 것이 부정적인 것을 5:1로 우겨싸는 TV기술과 같은 방식이다.
요한일서의 전체적인 흐름은 “우리가 죄가 없다, 또는 우리가 범죄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릇된 주장임을 강조하면서도, 죄가 기독교인의 생활 속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심어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요한이 죄 문제를 다루는 중요한 목적은 독자들을 범죄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일이다. 죄는 결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특징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죄가 두드러지는 생활은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이라고 할 수 없다.” 라고 FF브루스는 주석에서 논하고 있다.
1장8절의 말씀은 죄와 전혀 관계가 없다. 죄를 전혀 범하지 않는다는 영지주의자들이 범한 오류를 지적한 말씀이다. 요한 당시의 영지주의자들과 오늘날의 일부 이단들은 그들 안에 죄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으며 그들이 죄가 없기 때문에 죄가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에 결코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1장 10절의 말씀은 습관적인 범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습관적으로 범죄하지 아니하였다하면 거짓말 하는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습관적이지는 않지만 범죄 할수 있는 것을 부인하는자들,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필요 없다고 하는 자들은 거짓말하는 자라는 뜻이다.
이 말씀은 습관적으로 범죄하지 아니하였다하면 거짓말하는 자란 의미가 아니다.
3장6절과 9절의 말씀도 습관적으로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습관적으로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습관적인 범죄란 것은 “매주마다” “주기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범하는 범죄의 고착화를 말하는 것이며 매주 마다 주기적으로 습관적으로 죄를 범한다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주 마다 교회에 와서 주여 지난 일주일 동안도 세상에 나가서 살면서 죄를 범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은 죄의 습관화 고착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와같은 다람쥐 쳇바퀴가 습관적으로 범죄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 습관적인 범죄란 말인가? 그러한 것이 죄의 종이 아니고 무엇이 죄의 종이란 말인가? 그들은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에 매주 주기적으로 습관적으로 그러한 기도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부교회의 목사, 장로들이 1:10절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이 말씀을 인간은 끊임없이 죄를 범 할 수밖에 없는 죄의 종이라고 傳家의 寶刀처럼 사용하는데 그것은 습관적인 죄의 종의 기도인 것이다.
엘리스는 “인간이란 자기 자신에게 계속적으로 소리없이 이야기하는 언어를 가진 피조물이라고 결론지었다”고 게리콜린스는 “마음탐구”에서 논하였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긍정적인 것이든지 부정적인 것이든지 자기가 자기자신에게 암시를 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끊임없는 죄의 고백을 강요하는 곳에서는 부정적 집단암시, 타인암시에 빠져서 무의식 세계에서 조차라도 계속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습관적인 죄인, 죄의 종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죄의 고백을 강요하는 자들은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때나 1장 10절의 이 말씀을 들이대면서 보아라 범죄하지 아니하였다하면 거짓말 하는자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면서 아무 때나 언제 어디서나 죄의 고백을 강요하는 것이다.
필자가 예전에 어린시절 다니던 교회에서 장로님들 기도 가운데 “주여 지난 일주일 동안도 세상에 나가 살면서 육신이 약하여 범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의 참회기도를 매주일마다 되풀이 하였었다.
거기서 거듭난 자라도 매일같이, 매주, 습관적으로 죄를 범 할 수밖에 없는 죄의 종이라는 것을 배운 것이다. 오류를 진리로 잘못 알고서---
필자는 한때 극심한 죄책감에 빠져 있다가 진리를 깨닫고 죄책감에서 벋어나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거듭남이란 습관적으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 동안은 짓지도 않은 죄를 회개하느라고 얼마나 많이 시간과 인생을 낭비하였던가! 개인적 변화는 죄의 세력과의 전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중생한 자에게 필요한 것은 거듭되는 불필요한 중생(목욕은 단 한번 하는 것=요13장, 한번 천국시민은 영원한 천국시민이다)의 반복이 아니라 범한 죄의 깨우침을 받을 때(레위기4장) 속죄(한번 목욕한자는 발밖에 닦을 필요가 없는니라 -요13장)가 필요하다는 깨달음이었다. 그후부터는 죄의 용서를 구하는 속죄(발닦음)도 때때로 있었지만 그보다는 죄의 파워, 죄성과의 싸움을 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로마서 7장의 말씀은 필자로 하여금 죄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하였으며 진리를 깨닫게 하였으며 성령과 동행하면서 죄로부터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한 말씀이었다.
S신대에 다닐적 학교에서 심령부흥회가 있었는데 누군가 부흥회의 본질은 회중 가운데 죄의식과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가 구원과 풍성한 생명을 약속하는 것이라고 하였지만 그때도 감성적인, 인위적인 죄의 고백을 강요하였었다. 당시의 부흥회는 강대상을 치면서(북을치는 곳도 있었으며, 어떤 교회들은 일년내내 예배자체를 거반 그런식으로 드리는 곳도 있었다) 크게 소리를 치면서 울면서 통성으로 죄를 회개하자고 하면서 죄의 고백을 강요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그러한 행사는 말씀을 통한 변화보다 순간적인 감성적인 뒤집기(뒤집어 주시옵소서!)이다. 물론 필자는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과 박수치는 것을 개인적으로는 좋아하지 않지만 반대하지는 않는다. 아뭏튼 그들은 반성직자들인 신학생들에도 말씀을 통한 변화보다 감성적이며 인위적인 순간적인 변화를 원하는 분위기로 집회를 이끌었다. 그들은 거듭난자와 거듭나지 못한자들을 구별하지 않았다. 그것은 혼돈자체였었다. 그러한 것은 거듭나지 못한자, 미성숙한자와 성숙한자들을 대하는 바른 방식이 아닌 것이다.
하루살이를 살리기 위해서 약대(성숙한자)를 삼키면 안되는 것이다. 빈대를 잡기위해서 집을 모두 태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다음은 이상훈박사의 설교집에서
성직자는 영적지도자입니다. 그에게는 초보적으로 죄의 용서가 이미 과거 의 경험입니다. 그의 현재는 영적 성숙을 걷는 과정이므로 하나님과의 평화가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죄의 죄책이 없습니다. -이상-
필자는 당시 하나님과의 화평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영적 초보자로 다루는 그곳을 벋어나서 학교에 시정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그들의 답변이 바로 요한일서 1장 8절과 10절의 말씀이었다.(그것은 거기에 적용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필자는 휴학계를 내고 속죄에 관해서 연구에 들어갔었다. 그리고 군대에서 휴가 나왔을 때 S장로님을 찾아가서 장로님 주일마다 죄를 범할 수 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것은 잘못된 것 아닙니까? 질의를 하였는데 장로님 답변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지! 그것이 전부였었다. 그것은 복학하여 스스로 해결하라는 뜻이었는지? 불분명하였다. 필자는 복학하지 않고 혼자 독학하면서 인천지역의 수십개 교회를 다니면서 속죄에 대해서 연구하며 방황하다가 15년 전쯤 J 교회에 정착하였으며 자칭 아마추어 조직신학자로서 오늘에 까지 이르렀다.
필자가 깨달은 결론은 거듭난 성도들도 범죄할 때 죄에 빠질 때가 있지만 죄의 고백이란 죄를 범한 것을 깨달을 때 하는 것이지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때나 남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짓지도 않은 죄를 범죄하였다고 고백하는 것은 진리를 모독하는 것이다.
왜 그들은 그와같은 행태를 강요하는가? 닐앤더슨은 그의 책 “자유함”에서 그릇된 죄책이란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때 경험하는 죄책감이다. 흔히 목회자들은 사람들을 죄책을 통해 통제 하고자 하는 강력한 유혹에 직면한다고 하였는데 그러한 면도 있지만 또다른 이유는 그들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격적인 하나님이 무엇인가? 아인슈타인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우주의 원리로서 규칙적인 신으로 이해했지 인격적인 하나님은 부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인격적인 하나님은 어떤 면에서 우리 육신의 부모와 똑같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우리육신의 부모와 같이 똑같이 대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실질적 관계이다.
인간관계에서도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서 매일 아침 문안(전화) 인사드릴 때 불초소자 용서하십시요를 끊임없이 하는가? 부모는 정신나갔다고 할 것이다. 인격적인 하나님이란 인간이 하나님을 육신의 부모처럼 편안히 인격적인 관계로 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말이다.
조물주이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과 대화하시고 그의 의견을 존중해 주시는 하나님,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앞두고 의인 50부터 시작하여 50,45,40,30,20,10에 이르기 까지 6(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수)번씩이나
의인 10명이 있으면 멸하지 않겠다고 피조물의 요구를 들어주신 하나님!
여호수아와 히스기야 등 피조물의 요구를 들어주시기 위해서 태양을 멈추고 우주의 질서 법칙도 변경 수정하신 하나님,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며 그의 인격,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세워주신 예수님, 이 모든 것들이 피조물의 품격, 즉 인격을 존중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 이해하심 아닌가? 피조물을 신뢰하시고(믿어주시고) 피조물과 계약(언약)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신약성서에서 기독교의 사랑을 말로 나타내는 데는 아가페(약120회사용)와 아가펜(130회이상사용) 이외의 말을 사용하지 아니한다고 말한다면 잘못이라고 윌리암 바클레이는 말했다.
밀접한 친밀한 서로 신뢰하는 관계에서는 필레오(필레이)가 사용되고 있는데
♥하나님 아버지의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φιλεῖ =loves>-요5:20),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믿는)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πεφιλήκατε =have loved>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πεπιστεύκατε =have believed>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φιλεῖ =loves>이라 -요16:27,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삼상2:30)
♥인간이 예수님께 가져야만 하는 친밀하고 밀접한 깊이가 있는 참사랑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φιλεῖ =love>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고전16:22)등에 필레오가 사용되고 있다.
φιλεῖ=φιλἐω 필레오(애정하다.사랑하다)의 3인칭, 단수, 현재, 직설
πεφιλήκατε=φιλἐω필레오(애정하다,사랑하다)의 2인칭,복수,완료,직설,능동
흔히 아가페, 필레오, 에로스에서 아가페적인 사랑만이 최고인 것 같이 알고있지만 아가페적인 사랑은 애정이 없는 원수라도 사랑하는 폭넓은 차원에서의 사랑이고[{ ex-예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으나 그들을 신뢰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마음(情)을 주지는 않으셨다, 그들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자신을 의탁<ἐπίστευεν =did entrust>하지 아니하셨다.-요2장,
반면 나사로가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신 것은 그에게 情을 주셨기 때문인 것이다. 현실세계에서도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유행가가 있듯이 사랑은 잘해야지 잘못하면 자기를 납치한 납치범을 변태적으로 사랑( 情이 轉移되어 상호 의존감과 밀착감이 발생하는 병리적인 사랑) 하게 되는 스톡홀름증후군
(Stockholm syndrome) 등에 빠지거나 매저키스트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에도 차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초코파이의 상징인 情, 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생명의 근원이기에--}]
愛情이 있는 친밀하고 밀접한 가까운 관계간의 깊이가 있는 사랑은 필레오적인 사랑으로 요한복음21장 예수님과 베드로와의 사랑의 고백이다.
서로 신뢰하는 깊이가 있는 사랑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첫 번째,두번째 부르신 아가파스(ἀγαπᾷς) 보다는 세번째로 부르신 필레이스(φιλεῖς)인 것이다.
베드로를 세 번째 필레이스로 부르신 것의 참 이유는 베드로와 밀접한 서로 신뢰하는 인격적인 뜨거운, 따사로운 애정적인 사랑의 관계임을 확인하신 것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으며 또한 어떤 학자들은 베드로가 심오한 사랑이 있다고 감히 말할 용기가 없어서 단지 좋아한다고 고백하였기 때문에 베드로의 차원으로 내려오셨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으나 필자는 후자 보다전자에 무게를 두고싶다.
15절 ἀγαπᾷς(아가파스,agapas=love you) με(메,me=me)?
네가 나를 아가페(사랑,충성)하느냐?
16절 ἀγαπᾷς(아가파스,agapas=love you) με(메,me=me)?
네가 나를 아가페(사랑,충성)하느냐?
17절 φιλεῖς(필레이스,phileis=have you affection for) με(메,me=me)?
네가 나를 필레오(애정,사랑)하느냐?
⊙15절 16절 17절의 답변에서 베드로는 3번 모두
φιλῶ(필로, philō=I have affection for) σε(세,se=you)
“나는 당신을 필레오(애정,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였다.
ἀγαπᾷς = ἀγαπἀω(사랑하다)의 2인칭, 단수, 현재, 직설
φιλεῖς = φιλἐω(애정하다,사랑하다)의 2인칭, 단수, 현재, 직설
φιλῶ = φιλἐω(애정하다,사랑하다)의 1인칭, 단수, 현재, 직설과 가정
σε = σὺ (너, 당신, you)의 목적격, 단수
아가페=지적이며 의지적인 충성적인 차거운 사랑, 싫어도 할 수 있는 사랑.
필레오=감정적이며 애정적인 뜨거운(따사로운)사랑, 좋아하는 사랑.
나의 형 요나단, 형 생각에 나의 마음이 아프오. 형이 나를 그렇게도 아껴 주더니, 나를 끔찍이 아껴 주던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도 더 진한 것이었소.-삼하1:26
요나단 나의 형이여! 내가 심히 슬퍼함은---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 이는 내게 정(情)을 주었음이요.(수년전 상영하였던 영화의 대사에서)
그러므로 하나님과 밀접한 애정이 있는 사랑의 관계를 맺고자하는 성도는 아가페적인 사랑도 훼손시키면 안되겠지만 필레오적인 서로 신뢰 할 수 있는 깊이가 있는 뜨거운 사랑, 좋아하는 사랑으로 충만해야 할 것이다.(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스바냐3:17)
필자 교회의 나목사님과 김진홍목사님에게는 자유와 편안함이 있다. 그분들의 설교,기도 등에 그것이 배어있다. 그것은 두분 모두 성도들을 영적으로 성숙한자로, 인격적으로 대해 주시기 때문이다. 장성한자로, 인격적으로 성도들을 대해 주신다는 점, 이점이 두분의 가장 훌륭한 점이라 할 것이다.
프로이드 이후 어린이들도 비로소 인격적인 대우를 받게 되었다고 하지만 인격적인 것이란? 속된말로 하면 동물이나 기계처럼 취급받는 것이 아닌 사람대접, 성인대접을 받는 것이다. 그것은 한 개인의 고유한 인격체로서 대우를 받는 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이란 사랑 할 수 있는 존재이므로 인격적인 것이란?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서 온전케 된자(요일2:5)로 성숙한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됨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둠의 자식들이 세상일에 대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말씀하셨지만 영화 'LOVE STORY'에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는게 아니에요(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 )란 대사가 있다.
인간적인 것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굉장히 좋은 영감을 주는 대사이다.
사랑하는 관계에서도 때때로 미안하다고 말해야 될 때도 있지만 이 대사에서 얻을 수 있는 커다란 교훈이 있다.
첫째는 이것을 신앙의 차원에서 풀이한다면 죄는 말로만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서도 고백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겠다. 행위가 없는 입으로만 하는 고백과 참회는 고백도 참회도 아닌 것이다.
인간적으로도 어둠의 자식들 세계에서도 미안하다는 반성보다는 사랑하라(순수한 사랑의 동기에서 나온 사랑의 행동)에 더 비중을 두라는 뜻이다.
두번째로는 사랑하는 관계에서는 서로 간 죄책감으로 상대를 구속해서도 안되고 죄책감으로 스스로를 구속 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죄책감을 갖고 상대를 사랑하는 사랑은 진실한 순수한 사랑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죄책감으로 차게되면 순수한 뜨거운 사랑의 열정이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며 사랑충만과 사랑을 통한 기쁨 충만을 손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 생활 속에서도 상대방이 죄책(미안함)을 느끼도록 만들어 상대로 하여금 자신을 기쁘게 해주고 싶도록 만드는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닐 것이다. 상대에게 쌀쌀하게 말을 하거나 비난하는 것 등이 그러한 마음의 동기, 심리 등에서 나오는 것일 것이다.
미안한 마음이란 죄책감이 있는 마음이다. 죄책감을 갖고 하는 사랑은 죄의 보상차원에서 하는 사랑으로 순수한 사랑이 아니다.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값을 보상하는 차원에서 사랑한다면 그것은 갚을 수도 없는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값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값없이 공짜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값을 거래하는 것이 아닌 보상차원이 아닌 순수한 사랑이 사랑의 질과 깊이가 있는 사랑이라 할 것이다.
또한 사랑 안에 죄채감이 있다면 죄책감은 독립적으로 되는 것을 방해한다. 그것은 개인이 자기자신이 되지못하게 하는 사슬이며 족쇄인 것이다.
미국의 교육정책위원회에서 교육의 첫째 목표는 자기실현(自己實現)이라고 하는데 철학과 신앙을 비롯한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 안에서 자기자신(자유)되게 하는데 있는 것일 것이다.(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로서 사랑하는 신인합일을 하기 위해서이다.) 사랑하는 관계는 서로 간 자기자신으로 있으면서 자유 안에서 사랑하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억지가 아닌 자의적인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이 진짜 순수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세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이와같은 사랑이 필요한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이 되어야지만 참으로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22절 거짓말 하는자는 적그리스도라고 하였는데 적그리스도는 4:2-3절과 요한2서 1:7절에서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은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누리는 인격적인 관계를 파괴하는 자들이다.
개에게도 犬格이 있다지만 인간에게는 人格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육체)이 되어<요한1장>, 人格이 되시어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사변적(思辨的)교리로 끝나는 인식이 아니라 하나님님과 인격적 관계를 갖고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맺는 관계로서의 인식이 있을 때 참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영생은 참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γινώσκωσιν= they should know-요17:3)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단지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가진 자로서 안다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이며 실제적인 것으로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으면서 알아 갈 때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2:4절의 말씀처럼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는 것이다(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벧전1:8)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은 학문적이거나 이론적 또는 사변적인 인식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인식임을 말한다.
말씀을 학문적으로 사변적으로 이론적으로 알고만 있으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만나가 썩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말씀을 나의 삶에 실전적으로 적용할 때 말씀에서 젖뿐만이 아니라 버터와 꿀이 나오는 것이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은 인격적인 관계를 부인하는 자들이란 말씀이다.
그러므로 인격적인 관계를 부인하고 방해하는 자들은 적그리스도이며 거짓말하는 자들인 것이다.
그리스도 께서 육체로 오신 것의 핵심, 인격적인 것의 핵심은 교제를 가능케하는 산보증이 되시기 위함이며 교제를 야기시키는 중요 수단이기 때문이다.
습관적으로 죄를 범하고 습관적인 죄를 범할 수 밖에 없다고 가르치는 자들은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줄로 함같이 죄악을 끄는 자들이다. 악을 선하다(습관적으로 범죄하는 것을 선하다)선을 악하다(습관적인 죄에서 벋어나라하는 자들을 정죄)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는 자들이다.(이사야5장)
"또 무거운 짐(죄의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마태23:4)
교인들에게 습관적인 죄의 고백을 강요하는 목사들 본인들은 정작 죄를 습관적으로 고백하지 않는데 그것은 비현실적, 비합리적, 비상식적인 행할 수 없는 그들만의 이론(구약시대 같았으면 온 세상의 동물은 속죄제물로 씨를 말렸을 것이다)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바로 위선의 실체로 외식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초보적인 믿음의 고착상태에서 결코 믿음의 진보가 없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지 못하고(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저울에 달려 부족한 상태) 히브리서 6장 죽은행실을 회개하는 것을 되풀이하지 말라는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거듭된 죽은행실을 회개하며 되풀이하는 영적초보자의 고착상태로성전 문앞에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남도 못 들어가게 막고 있는 것이다.
만약 거듭난 성도가 범죄하고 나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한 죄를 깨달아서 속죄하고(발닦음)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다면 (레위기4:13-14) 그것은 하나님께서도 용서해 주신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자기자신도 자기 자신을 용서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신을 용서해주신 것을 믿는 믿음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 용서가 아닌 것이다. 용서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만 참다운 속죄(발닦음)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자기 자신을 용서 하기로 하였다면 그것은 자기자신의 의지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능동적으로 선택(결단,결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자신의 잘못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속죄하는 것은 다시는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자기자신의 결심인 것이며 동시에 믿음의 고백인 것이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매주 똑같은 결심과 믿음(신뢰)을 되풀이 한다면 인간관계에서도 상대를 모독하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의지박약자들의 상투적 넉두리로 판단 할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어찌 그러한 잘못을 계속 되풀이 하고도 깨달음이 없단 말인가? 신뢰를 깨는 아주 매우나쁜 행태인 것이다.
필자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그러한 부류의 자들은 대체적으로 인간은 마음으로 범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대로 그들은 겉으로 보이는 큰죄는 잘 범하지 않는다. 그리고 겉모양은 거룩한 것같이 보인다. 성서에서는 그러한 자들을 가리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정하는 자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도 그러한 자들을 가리켜 겉은 깨끗하나 속은 더러운 회칠한 무덤 같다고 하셨는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현대의 세례요한이다. 회개하라!
요즈음 행함을 강조하는 운동이 있는 것 같은 분위기인데 행함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인 것이다. 아무리 행해도 마음이 범죄하면 그것은 행하지 않는 것만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은 이미 사단이 점령한 곳이므로 오히려 싸움이 없는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나는 순간부터 치열한 마음의 싸움이 시작되어 영적 전쟁터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롬7:14-8:4)
마음의 변화가 없는 것은 거듭남이 아니다.
단 한번하는 목욕(중생), 즉 메타노이아(μετανοία)의 근본적 의미는 마음의 변화라는 뜻이다.
거듭남이란 마음이 변화를 받아 새롭게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롬12:2)
“진정한 거듭남이란 內的 마음의 革命(revolution) 인 것이다”.
내적 마음의 혁명이란 자신 속에서 발견한 죄악으로부터 돌아설 힘을 갖게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거듭남이다.
우리는 마음으로도 계속해서 범죄하는 죄인이 결단코 아니다. 우리는 때때로 마음으로 범죄 할 때가 있으며 어떤 때는 마음으로는 범죄하지 않으면서도 행동으로 범죄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습관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죄성에 대한 고백, 부르짖음과 때때로 범죄했을 때 속죄(발닦음)가 필요한 것이지 습관적으로 주기적으로 범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습관적인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현실적이 아니다. 그들의 이론일 뿐인 것이다. 그러한 자들이 과연 그들이 잠자리에 들 때마다 매일같이 하나님 오늘도 범죄하였고 잘못된 하루를 살았습니다. 라면서 참회의 기도를 하는가? 자신의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기 바란다.
현실적, 실제적으로도 필자의 경우는 죄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보다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내속에 거하는 죄와 맞서 싸우면서 때때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기도 하며 하나님께 죄(죄의 소욕,죄의 충동,유혹등등)를 고백하며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는 것이지 판에 박은듯한 용서만을 구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과거의 죄, 즉 영적 전자과로 모두 용서받은 죄인인 것이다. 또한 미래에도 죄를 범할 수 있는 죄인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모두 필요한 자들인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본문은 범죄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거짓말하는 자란 뜻이지 하루 24시간 쉬지않고 언젠 어느 때라도 물으면 죄를 범했습니다, 라고 답변, 고백해야만 되는 죄의 종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쉬지않고 끝없이 습관적으로 하는 자아비판, 자기비판, 구약시대에도 그러한 것은 없었으며 이단으로 전락한 카톨릭 조차도 그러한 것은 없었는데 오늘날 일부 개신교 안에 들어온 극심한 혼란의 행태, 포도원(교회)에 침입한 작은 여우인 것이다. 前無後無한 것으로 빨리 그치기를 바란다.
그들은 레위기를 폐하였다. 레위기를 올바르게 이해하였다면 아마도 그러한 행태들을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천지는 없어지더라도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 왜 실감나게 느껴지고 인식되는지, 이러한 것들을 바라보면 더욱 더 강하게 피부에 와 닿으며 레위기의 말씀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 속죄하라(발닦음)”등의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 말씀인줄 알 수 있는 것이다. 속죄에 대한 교본(지침)인 것이다.
그러한 자들에게 레위기를 철저히 공부하기를 강력히 권유하는 바이다.
요한계시록의 환란기는 먼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며 지금이 바로 환란기이다. 또한 남은자들은 구약시대에도 있었고 초대교회, 중세교회 현대교회인 지금도 있는 것이다.
환란기인 현재 습관적인 죄를 벋어나서 죄를 이길 수 있다는 현대의 엘리야와 죄인이기 때문에 습관적인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죄의 종일 수밖에 없다는 현대의 바알, 맘몬들과의 싸움이 지금 이 순간에도 있는 것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필자가 수년간 죄, 속죄에 관해서 연구한 결론은 현대 교회안에는 죄를 이길 수 있다는 진짜 복음과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가짜 복음 두 부류가 있다는 것이다.
죄를 이길 수 있다는 복음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되는 복음으로 계명의 울타리 안에서 자유와 평강과 기쁨이 있는 복음이며 죄를 이기지 못한다는 가짜 복음은 끝없는 용서를 구하는 다람뒤 쳇바퀴의 엉터리 복음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없기 때문에 인본주의 신앙이 되어 현대의 바알,맘몬으로 끝나는 것이다.
일부교회에서 그토록 그들이 부르짖는 "할 수 있다(can do)"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이 과연 죄를 이기려고 부르짖는가? 죄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인가? 참복음은 "죄를 이길 수 있다!" 는 것인데 반해 그들이 구하는 것은 죄를 이길 수 없다 하면서 그 자리에 복음대신 바알과 맘몬 영적 바벨탑들이 대신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 개혁을 위해서 아무리 긍정적,적극적 자기계발적인 것을 비판해도 문제의 근본핵심을 모르면 엉뚱한 곳에 화살을 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죄를 이길 수 있는 복음은 기독자 완전(히6장)이 있는 복음이다.
完全(완전할 完 온전全)은 완전무결한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려고 애쓰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 세상에 완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완전자체를 구하는 것은 완전이 아니라 완전주의인 것이다. 완전이란 目標를 향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 하나님의 명령에 全心全力으로 忠誠하는 것이 완전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자는 자기자신에게 죄없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완전한 자는 자기자신이 의롭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완전한 자는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않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자는 단지 죄를 범할 수 있는 성도이지,
습관적으로 죄를 범할 수 밖에 없는 죄의 종이라고 결단코 하지 않는다.
<완전은 과정을 내포한 완전 그러기 때문에 정지가 없다>.
<有極而有遠=극에 달할 수록 길은 멀다>
누군가 우리 마음의 결정체가 되는 지,정,의는 혼에 속한 것이지만 양심은 영에 속한 것이라고 하였다.
히브리서 5장 14절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자, 의의 말씀을 경험한 자란 새롭게 태어난 영과 양심이 지,정,의의 혼합인 마음을 사용하여 선악을 구별 할 수 있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6장은 기독자 완전장이다. 그리스도 도의 초보인 죽은행실을 회개하는 것을 되풀이 하지말라(1절)는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 행했던 모든 잘못되고 거짓된 행위들을 되풀이 하지 않는 경지에 까지 “믿음의 진보를 나타내라.” “열매를 보여라.”는 말씀이다.
기독자 완전은 마음속일지라도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벧후2:22)”하는 말씀처럼 내적 내면의 세계가, 마음이 죄의 구덩이에서 헤메는 것이 아니다.
완전은 모든 외적 죄로부터 뿐만 아니라 내적 죄로부터도 구원함을 받는 것이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갖는 것이다(디전1;19)
완전은 내적 죄로부터의 깨끗함을 받는 것이며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자이다(디전3:9)
완전은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는 것이다.(요한일서3:21)
완전, 참복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며 죽은행실을 버리게 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두나미스인 것이다(히9;14)
결론
누군가 “교회는 죄를 추방하기 위하여 있으나 죄인들로 가득차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오나 그들을 회심시키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
그 이유 중 큰 것 중 하나가 오늘날 일부교회의 목사들이 본문 1장10절의 말씀을 傳家의 寶刀처럼 엉뚱하게 휘두르기 때문인 것이다.
거짓말하는 자는 죄와 전혀 관계가 없다. 죄를 전혀 범하지 않는다. 고 하는자 이지만 또한 습관적으로 죄를 범하는 자이며 말씀을 가지지 못한 자이기 때문에 진리에 서지 못하여 행하지 못하는 자이며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자이며 하나님과 서로 신뢰하고 의탁하는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 자이며 형제를 미워하는자이며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습관적으로 죄를 범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자이며 습관적으로 죄를 범 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은 가짜복음이다.
본문의 흐름을 분석, 정리하면 우리가 죄가 없다. 또는 우리가 범죄하지 않았다 고 주장하는 것이 거짓임을 주장하면서도 오히려 반대로 범죄가 거듭난자의 생활 가운데 습관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은총과 죄사함의 특권에 대한 남용을 막고 있다. 또한 죄짓는 것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로서 사랑함으로 계명을 지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1: 6절 진리를 행하되, 1:10절 범죄하면 속죄(발닦음)하고,
2: 4절 계명을 지키고, 2:22절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로 사랑하고,
4:20절 형제를 사랑하고, 5:10절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거짓말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
요한 16: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필레오)하고<πεφιλήκατε =have loved>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πεπιστεύκατε =have believed>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필레오)<φιλεῖ =loves>이라
email:kmc2710@hanmail.net 2011년 12월 3일 s.park (kalits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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