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위로와 환대(마 9:35-38)
2024.10.6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순천만 습지 근처에 정채봉 문학관이 있다. “한국의 안데르센”이라고 불리는 정채봉(1946-2001)은 순천 출신으로 동화작가이자 시인이다. 그의 작품 중에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이라는 시(詩)가 있다.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 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정채봉 시인의 어머니는 그가 2살 때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할머니를 엄마처럼 알고 컸다고 한다. 이 시의 끝 부분에서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고 했다. 이 문장에서 그가 왜 그토록 더욱 엄마를 그리워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세상에는 위로와 격려 받고 싶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이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
오늘 설교말씀을 준비하면서, “나는 살아오면서 주로 어느 때 위로를 받았던가?”’를 생각하면서 하나씩 적어 보았다. 누군가에게 칭찬이나 격려의 말을 들었을 때, 힘들 때 누군가를 나를 찾아와 주었을 때, 혼자가 아니라고 느꼈을 때, 감사의 말을 들었을 때, 억울했을 때 끝까지 나를 믿어(지지해)줄 때, 노력을 인정받았을 때(칭찬, 성취감 등), 물질적인 도움을 받았을 때, 내가 다른 사람의 응답의 통로로 쓰임 받았을 때, 환대 받았을 때 등……. 계속 적으면 이 외에도 많을 것이다. 아마 이 시간에 서로 돌아가면서 한 가지씩만 경험을 나누자고 하면 시간이 부족할 것이다.
그런데 지나온 시간들을 깊이 성찰해 볼 때, 본 설교자의 경우에는 이 모든 것들 보다 가장 큰 위로와 격려를 받았던 때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한 마디 음성을 들었을 때였다. 그 음성이 기도 중에 경험했던 특별한 체험일 때도 있었고, 묵상이나 설교를 듣는 중에 성령님이 눈이나 귀를 열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셨던 때도 있었다. 천 길 낭떠러지 같은 삶의 절벽 길에서 들었던 주님의 음성은 그 모든 두려움과 걱정을 한 순간에 날렸다. 나를 짓누르던 암흑과 두려움은 여주동행의 확신과 안정감이 대신했다. 그리고 감사와 찬송이 저절로 터져 나왔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정말 그렇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만큼 큰 위로와 격려가 어디에 있겠는가? 성경말씀 어디를 펴도, 하나님은 늘 두려움에 떠는 자녀들과 일꾼들에게 가장 먼저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렇기에 성경 최대의 약속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나)와 함께 하신다(God with us. Immanuel)”는 약속이다. 우리(나)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절정이 바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어 희생시키시고, 성령님까지 보내주신 것이다. 이것이 사실은 오늘 설교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강조하시는 말씀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의 이시고,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은 위로의 주님이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은 우리 모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함께 아파하신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9장 35절 말씀에 나오는 주님의 사역을 예수님의 3대 사역이라고 말한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Teaching,양육)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Proclaiming, 전도)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Healing, 치유)”(마9:35)
그런데 이렇게 이러한 사역들을 하셨던(또는 가능하게 했던) 예수님의 마음이 36절 말씀에 나온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9:36)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유다광야에서 양에게 목자가 없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 여기서 쓰인 “불쌍히 여기시니(스플랑크니조마이, 긍휼)“의 본래 의미는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뜻한다. 이 말은 영어 단어로는 컴패션(Compassion, 긍휼)이다. 이 단어에서 앞 부분에 붙은 접두어 “컴(Com)”은 ‘함께(Together)’라는 뜻이고, 뒷 부분인 “패션(Passion)”은 ‘고통’이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주님이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라는 말씀은 “함께 고통을 당하셨다”, “함께 아파하셨다”는 뜻이다. 그것도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으로 말이다. 그래서 3대 사역을 하신 것이다.
주님의 이러한 마음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을 향해서도 마찬가지다. 주님은 이 시간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시면서 창자가 끊어질 정도의 아픔을 느끼시면서 “사랑하는 OO야, 나도 너와 함께 아파한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의 의미이다. 현대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고독, 외로움이다. 나는 힘든데, 실컷 울고 싶은데, 그 누구도 같이 아파해주고 같이 힘들어 해주는 사람이 없다. 군중 속의 고독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나는 외톨이고, 나만 힘들고, 나 혼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예수님이 함께 아파하시고, 같이 울고 계셨다. 성령님이 내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해 간구하신다(롬8:26). 이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위로이며 환대다. 사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불쌍히 여겨주시는 곳에서 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다(회복, 기적, 치유, 변화 등, 막1:41, 막6:34,마20:34,눅7;13 등).
그렇다면 이러한 주님의 위로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예수님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지만, 우리도 또한 주님을 향해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겸손한 표현이고, 가장 낮아진 자세다. 성경 도처에서 이런 실례를 발견할 수 있다(마17:18, 눅17:13 등,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위로 받고, 불쌍히 여김 받은 것으로만 끝내지 말고, 또 다른 불쌍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9장 37-38절 말씀을 보라.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 9:35-38)
이 말씀은 자세히 보면, 단순히 일꾼이 없다는 말씀이 아니다(당시에 외식하는 종교인들은 많았음). 이 말씀은 광야에서 방황하며 죽어가는 무리들(영혼, 어린이, 불신자 등)에게 예수님처럼 창자가 끊어질 고통을 느끼면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어줄 일꾼이 없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무리를 보면서, 창자가 끊어질 고통을 가지고, 같이 아파할 사람을 보내달라는 것이다. 이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자가 주님이 찾는 추수할 일꾼이다. 과거나 지금이나 생명의 역사는 바로 이런 긍휼의 마음에서 부터 시작된다.
마지막으로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 있었던 한 이야기를 나누고 설교말씀을 마친다. 무디(D. L. Moody) 부흥사회에 속한 한 목사님이 어느 시골동네에서 부흥회를 하였다. 어느 날 집회가 끝나고 한 소녀가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주님의 은혜를 깊이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상담을 요청했다. 그때 그 목사님은 이사야53장을 여러 번 읽으라고 했다.
그래서 그 소녀는 그 말을 듣고 사무실 문을 나가려다 뒤돌아서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저는 글을 읽을 줄 몰라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주님 저는 배운 게 없어요. 저는 가진 것도 없어요. 그러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제 모습 이대로 받아주세요’라고 울부짖으면서 간구했다. 바로 그 순간에 성령의 불이 그녀에게 강하게 임하기 시작했다. 후에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해밀턴이라는 여류작가가 그 내용을 가사로 쓰고, 생키가 작곡하여 찬송가가 되었다. 그것이 찬송가 214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주님은 우리가 죄악 속에서 고통을 당할 때, 창자가 끊어지는 마음으로 함께 아파하고 우셨다. 지금도 이 순간에도 교회 안팎의 고통하는 양들을 향해서 사랑의 손을 내미신다. 이것이 주님의 위로다.
그러므로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손을 외면하지 말자.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데 있어서 무슨 다른 조건이 필요한가? 단지 주님 앞에서 울부짖던 소녀처럼, 내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 엎드려 울자. “주님, 그 소녀가 바로 접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라고 간구하자. 더 나아가 주님의 심장으로 또 다른 불쌍한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겠다고 기도하자. 이것이 예수님의 위로와 동참하는 것이고, 나를 환대해 주신 주님을 나도 환대해 드리는 모습일 것이다. 위로의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