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1896~1948)은 누구인가.
수원 태생으로,
한국 여성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문필가로 재능
있는 예술가였으며, 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가요
신여성이었다.
혼외정사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질곡 많은 삶을
살다 사회의 따가운 시선 속에, 행려병자로 일생
을 마친 그녀를 기념하는 ‘나혜석 거리’가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효원 공원 인근에 조성되었다.
1896년 수원에서 출생한 나혜석은 1913년 진명
여자 보통고등학교를 최우등 졸업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으로 일본 동경 여자 미술학교에
입학한다.
유학시절 우리나라 여성 최초 소설 〈경희〉 를 발
표했으며, 1919년 3.1 독립운동 참가에 이어 벌
어진 이화학당 학생 만세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5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친오빠 소개로 만난 변호사 김우영과 1920
년 서울 정동 예배당(현 서울 정동교회)에서 결혼식
을 올리고 이듬해에는, 남녀불문 조선 여성 최초로
서울 경성 일보 ‘내청각’ 에서 유화 개인전을 연다.
이즈음 여성 최초의 시 〈인형의 집〉을 발표한다.
인형의 가(家)
나혜석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기뻐 하 듯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 되도다
노라를 놓아라
최후로 순수하게
엄밀히 막아 논
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남편과 자식들에게 대한
의무같이
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사명의 길로 밟아서
사람이 되고저
노라를 놓아라
최후로 순수하게
엄밀히 막아 논
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진정 사람을 제하고는
내 몸이 값없는 것을
내 이제 깨도다
노라를 놓아라
최후로 순수하게
엄밀히 막아 논
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나는 안다 억제할 수 없는
내 마음에서
온통을 다 헐어 맛보이는
아아 사랑하는 소녀들아
나를 보아
정성으로 몸을 바쳐다오
맑은 유혹 횡행할지나
다른 날, 폭풍우 뒤에
사람은 너와 나
노라를 놓아라
최후로 순수하게
엄밀히 막아 논
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 주게
부모가 짝 지어 주면 얼굴도 모른 채 결혼을 하던 시기 아닌가.
1920년대로선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사유의 소유자였으니 신여성이
라고 칭하는 이유다.
1926년 아이들을 친정에 맡기고 여성 최초로 남편과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난다.
유럽 여행 도중 파리에서 만난 최린(독립 운동가 33인 중 한 명)과의 혼외
정사가 결국 그녀의 이혼으로 이어졌다.
미술을 공부하러 떠난 인생 최고의 시간이 그녀의 인생을 역전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로 생활을 이어가지만 병환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
해지고 형편도 넉넉하지 않아 1948년 시립 자제원에서 일생을 마칠 때까
지 불행한 말년을 겪는다.
보수적 사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내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녀가 남긴 생각과
그림과 언행은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여성의 삶으
로 전해지고 있다.
나혜석의 세속적인 삶은 파멸일망정 자기시대를
정직하게 살다간 예술가라고 볼 수 있다.
나혜석의 아버지는, 조선말의 시기임에도 아들딸
을 차별하지 않고 교육을 시켰는데, 공부와 미술을
잘해 졸업할 때는 수석까지 차지해서 당시 신문에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여학생이 많지 않아 흔치 않은 때 였는데를 감안
하면 나혜석이 얼마나 재원이었나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나혜석은 오빠들이 공부하고 있는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가 조선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서양화를 배
워 최초의 서양화가의 길을 시작한다.
동인지 활동을 하며 “가부장 제도에서 인정을 받
으려면 여성도 실력을 쌓아야 한다” 는 주장의 글
도 썼다.
나혜석의 소설 〈경희〉 는 한국 최초의 페미니즘(여
성의 권리 및 기회의 평등을 핵심으로 하는 여러 가지
형태의 사회적. 정치적 운동과 이론들을 아우르는 용
어) 문학으로 춘원 이광수의 〈무정〉보 다도 인기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현모양처는
이상을 정할 것도,
반드시 가져야 할 바도 아니다.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부덕(婦德)을 장려한 것이다.」
1914년 12월호 〈학지광〉에 밝힌 내용이다.
나혜석은 첫사랑 최승구를 만나 약혼하지만 폐병
에 걸려 25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다시 유학길에 올라 짧은 기간 춘원 이광수와도
사귀었지만 유부남이었기 때문에 오빠가 심하게
반대를 하였다.
그 후 1919년 3.1운동에서 체포되어 나혜석을 위
해 변호해 주던 김우영과 풀려난 후 네 가지 조건
을 걸고 결혼을 승낙한다.
1. 평생 사랑할 것
2. 그림을 방해 말 것
3. 시어머니와 따로 살 것
4. 첫 애인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
당시에는 파격적으로 청첩장도 신문광고를 통해
돌렸다.
김우영은 모든 것을 받아들였고, 실제로 신혼여행
을 첫사랑의 묘지가 있는 전남 고흥으로 가서 묘비
도 세워주었다.
그리고
1920년대 남편과의 유럽 여행은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에게 큰 성장의 시간이 되었지만, 한편으로
시련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법률 공부를 위해 베를린으로 가는 남편이 친구 최
린에게 나혜석을 부탁했는데, 그만 바람을 피게 된
것이다.
최린은 3.1 운동에서 천주교 대표로 참가했던 인물
인데, 나혜석과 불륜은 한인 사회에서 소문으로 번
지며 1930년에 이혼을 한다.
그리하여
최초의 서양화가인 나혜석은 불륜의 상징처럼 되고
말았다.
울분에 찬 나혜석은 1934년 잡지 ‘삼천리’에 한국
근대사에 전무후무한 〈이혼 고백서〉를 발표하며 가
부장제를 거세게 비판했다.
(중략)
조선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고,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이외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남녀의 불평등이 강요되는 사회에서 여성에게
만 정조를 강요하는 이중성에 대한 불합리에 강
한 불만을 가졌다.
엘리트 나혜석의 여성해방론은 당시 가부장적
사회제도와 남성중심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이혼과 사회적 냉대는 나혜석의 말년을 매우 힘
들게 했다.
1937년 41세 때,
수덕사(충남 예산)에 있는 친구 일엽스님을 찾아
가 만공스님에게 스님 될 것을 청했으나 “당신은
중이 될 사람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거절하는 바
람에 그 아래 ‘수덕여관’ 에서 그림을 그리기도하
고 가르치기도 하면서 3년을 묵었다.
1940년대에 청운양로원(서울 인왕산 소재)에 있
다가 정신이상까지 온 후, 자식을 본다며 탈출하
여 길거리를 헤매는 행려가 되었는데, 길 가던 사
람이 발견하여 서울 시립 자재원(현, 용산구청 자리
) 에 입원했지만, 결국 무연고자 병동에서 생을 마
감해야 했다.
나혜석 거리
나이 30대까지만 해도 조선 최초의 서양화가 나
혜석으로 엘리트 인생을 살았으나 말년은 버려진
채 절규처럼 살아간 것이다.
지나친 인생으로 세상의 비난을 받게 되었지만,
최초의 페미니즘은 시대를 앞서간 여성으로 기억
되기에 충분하리라.
“여자도 사람이외다” 라고 외쳐 우리나라 여성
운동의 씨앗이 되기도 했던 그녀가 천륜에서까지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
나혜석은 20세기 초 문필가이자 한국 최초 서양
화가였지만, 여자이기 전에 인간이었고 천재 예술
가였다.
언제나 시대를 앞서가는 자가 있으니 그것은 외
로운 투쟁이다.
나혜석은 2000년 2월 정부 문화관광부에서 ‘문
화 인물’로 선정했다.
“비극은 가장 비극적 결말일 때
패배가 아닌 승리” 라고 니체가
말했듯이 세속적인 삶은 파멸
이었을망정 자기시대를 정직하게
살다간 예술가로서 인간으로서의
나혜석은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
첫댓글 자주지나면서보는나혜석....자세히알려주셔서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무심코 지나시는 분들이 많지요.
좀 관심을 갖고 보면 다르게 보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