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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9. 묵상글 들 ( 부활 3주 월요일-싸움이 없는 행복을 위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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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9.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3주 월요일-싸움이 없는 행복을 위해
"그때에 회당에 속한 사람 몇이 나서서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오늘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회당에 속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그들은 어째서 그렇게 스테파노와 싸우려고 달려들고,
급기야는 그를 죽이기까지 할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 생각에 이들은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유대교 근본주의자일 것입니다.
보편적 진리에 입각지 않고 자기의 신념과 다르면 다 악이라고 규정하고,
악인 이상 싸워 이기려고 하는 자들이며 그래서
죽자사자 싸우려고 덤벼드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스테파노는 싸울 의사가 없고,
그래서 이들은 싸움이 되지 않습니다.
티브이 바둑을 보는 것이 제가 휴식 취하는 방법중 하나인데,
한국과 중국 선수 사이의 바둑 보는 것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동안 한국 선수들이 중국에 조금 밀렸었기 때문이고,
그래서 바둑을 보며 그저 수 싸움의 묘미를 즐기기도 하지만
우리 선수들이 이기기를 바라면서 보기에 그런 것이었습니다.
저의 생각은 이기기를 바라는 것도 욕심이기에
그래서는 안 되고 초월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승부욕이 없어지지 않고 여전히 살아있는 저를 보는 것이 슬픕니다.
아직도 이겨야 기쁜 저이기 때문인데
그런데 이겨야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고,
싸우지 않고 이기지 않고도 행복한 사람이 행복합니다.
사실 승리의 기쁨과 싸움이 없는 행복 중에 우린 어떤 걸 택해야겠습니까?
마음 안에서건 관계 안에서건 싸움이 없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사실 기쁨은 우리 행복의 여러 요소 중의 하나일 뿐이고,
싸워 승리했을 때의 기쁨은 기쁨 중에서도 하급이지요.
그런데 저는 그 하찮은 기쁨에서 행복을 느끼려 들고 있는 것인데
싸워 이겨야 할 것은 오직 악이고 특히 제 안의 죄악 뿐이기에
이제는 더 이상 이 세상 누구와도 싸우고 싶지 않을 뿐 아니라
내 마음에 들기를 바라는 것 때문에 시비도 걸지 않는 저이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악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천상입니다.
그런데도 추구가 아니라 여전히 욕구하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며
욕구가 아니라 추구하는 우리,
승리의 기쁨이 아니라 싸움이 없는 행복을 사는 우리가 되게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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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9.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신부님.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사 중의 하나는 ‘먹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맛 집’을 찾습니다. 맛이 좋은 음식, 몸에 좋은 음식을 찾습니다. 한편, “일용할 양식”마저 없어 죽어가는 이들도 많습니다. 양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양식을 가진 자들이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밥그릇만 키워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오늘 대체 어떤 양식에 허기져 있는가? 그리고 어떤 양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호수를 건너 가파르나움으로 몰려 온 군중은 대체 무엇을 찾아 온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5)
그렇습니다. 군중들은 이미 빵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배고팠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현세적 음식과 자신들의 이익에만 매달릴 뿐, “참된 생명”인 표징을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7)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루를 사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우리 주님”으로부터 얻습니다. 바로 당신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양식’(βροσισ)이란 단어는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곧 마을에서 돌아온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좀 잡수십시오.”라고 하였을 때,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요한 4,3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참된 양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군중들이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하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8)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익숙한 단어인 “하느님의 일”이란 단어를 만납니다. 여기서, ‘일’(εργα)이란 단어는 ‘음식의 소화’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마치 양식은 눈앞에 두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입에 넣고 잘 씹어 삼켜야만 비로소 양식이 되듯,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과 그분의 뜻을 믿고 받아들여 우리 안에서 흡수하고 실행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양식을 소화시키는 일은 그 양식을 믿고 받아먹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진정 이것이야말로 양식을 얻는 ‘하느님의 일’인 것입니다. ‘믿는 일’,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소화시켜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일’안에서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해 나갑니다. 그래서 믿음은 행위가 되고 실현이 됩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요한 6,27)
주님!
당신이 주시는 양식을 눈앞에 두고 바라만 보고 있지 않게 하소서.
입에 넣고서 잘 씹어 삼키게 하소서.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완성하는 것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말씀을 이루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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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9.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무릇 길이 막히면 뚫어야 합니다.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 소통할 수 있는 통로도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솟구쳐서 던지는 질문을 모처럼 받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그런가 하면 독서에서는 백성이 하느님께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던 유다교 당국에 대하여 스테파노가
거침없이 그 길을 뚫으려고 하니까 여지없이 박해를 가하려고 하는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또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또 하느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셨는가 하면,
독서에서는 스테파노가 반대자들로부터 이스라엘의 율법을 거스르고 관습을 뜯어 고치며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거룩한 성전’을 허물 것이라는 고발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라고 말씀하시며,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신 당신을 믿으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최후의 만찬 기사의 배경이 될 이 말씀은 성체성사를 강하게 암시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생명의 양식으로서 예수님을 받아먹는다는 것은
그분처럼 자기 자신을 바치는 참된 제사를 하느님께 직접 바치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소통을 가로막고 있었던 전통적인 유다교와 유다교 제사를 근본적으로
문제시하고 전혀 새로운 형식과 방식으로 백성이 직접 하느님을 섬기도록 가르치는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다교에서는 인신공양 제사를 공공연히 자행하던 우상종교의 영향을 받아
그렇게 야만적인 지경은 벗어났다고 해도 사람 대신 동물을 불태우는 번제로 만족하고 있었으며,
이 제사에 바쳐진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음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희생하여 하느님께 바쳐 드리는 제사를 드림으로써 인격적으로 하느님과 소통한다는 일은
감히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을 하는 일로 구분하여 사회적 신분을 나누고
이로써 인간을 차별하는 관습을 정당화시키고 있었습니다. 제사를 독점하고 율법 지식도
독점한 상태에서 보통 유다인들은 그저 사두가이들이 정해 놓은 규칙대로 번제를 드리고
또 바리사이들이 가르치는 대로 율법을 지키는 데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과 백성이 소통할 수 있는 통로는 꽉 막혀 버린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답답한 상황은 예수 부활에도 불구하고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신앙에 불타 있었던 스테파노는 부제이면서도 곧이곧대로 복음을 선포하고 신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가르치며 교회 바깥의 유다인들에게도 서슴없이 회개하라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기성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고 나서야 가까스로 사도직에 나섰던 데 반해서 스테파노는
제자로서의 과정을 거치지도 않았지만 성령이 충만했던 덕분에 사도들보다
더 용감하게 예수님의 길을 걷고자 하였습니다.
우리는 스테파노를 박해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달라지지 못하고 여전히 고루한 유다교의 모습을 거듭 확인합니다.
조상 대대로 하느님을 믿어 왔다고 해도, 또한 율법을 아는 그 복잡한 지식이 해박하다고 해도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소통 통로가 꽉 막혀 버린 이 사태의 본질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완고한 모습,
즉 진실함도 없고 개방성도 없이 아집과 기득권에 갇혀 있는 영혼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스테파노 부제에게서 보듯이, 인간 존재의 고유성과 위대함은 영혼의 진리에게서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부어주신 영과 소통하는 사람의 혼은 누구나 위대한 가능성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가능성을 이끌어내는 일이 복음선포요 또한 교육인데,
이 가능성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참 모습을 깨닫게 해 주는 일이 특히 신앙 교육입니다.
이는 외부에서 지식을 주입시키는 작업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삶의 주체가 되어야겠다는
자각이 내면에서부터 일어나도록 촉매 작용을 하면서 기다려주는 일입니다.
인격적인 존중과 배려는 그래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사물과 미래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고
진리를 알고자 하는 갈증도 생겨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등에 대해
질문을 하는 변화가 가능해집니다. 지식과 경험 그리고 깨달음에 의한 답변은 이때 해 주면 되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에 의해서 빵의 기적을 체험하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가르침을 들은 유다인들이 그분께 던진 물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예수님께서는 모처럼 군중으로부터 받으신 이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
즉, 하느님의 일이란 예수님의 삶과 가치와 의미를 마치 빵 먹듯이 수용하여
하느님의 기운을 수용하는 일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당신 자신을 바치셨듯이,
우리도 자기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참된 제사를 드리는 일까지가 하느님의 일입니다.
이것이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입니다.
이 진리를 일찌감치 깨달은 아나빔들이 시편에서 이렇게 노래한 바 있었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시편 119,1. 화답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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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9.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 삶의 결정적인 방향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 뵈려고 성경 공부를 하고, 열심히 미사 참례하고, 기도합니다. 그렇게 만나 뵌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병자들을 만나면 그 병을 고쳐 주시고, 죄인을 만나면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만드시고자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다스리는 세상, 곧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자기 삶의 방향으로 정하는 것이 신앙인이 지닐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또한 예수님을 만나 세상과 삶에 대한 새로운 시야가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 삼위일체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사랑의 구조를 가르쳐 주십니다.
사랑은 ‘주고받는 이’, 곧 ‘주는 이는 받는 이를 필요로 하는 구조’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구조로 보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시듯 하느님께서는 인간도 필요하십니다. 오로지 내어 주시고자 전능하시고 완벽하신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필요로 하십니다. 우리는 그토록 귀한 존재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우리 인간도 하느님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서로 필요합니다. 이 사랑의 구조로 이웃을 바라보고, 세상과 자연을 바라볼 때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까지 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받은 사랑을 이제 이웃, 자연, 세상을 향하여 내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이웃과 세상을 위하여 내어 준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해 드린 것이 되어 하느님 나라를 완성해 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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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9.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6,22-29: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힘쓰지 말고
빵의 기적이 있은 다음 날, 당신을 찾아온 군중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26절) 이 말씀은 ‘너희는 영이 아니라 육을 만족시키기 위해 나를 찾는다.’라는 뜻이다. 많은 사람이 현세에서 이익을 얻어 보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고 있다. 교회도 이런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27절)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다른 것을 위해 나를 찾는다. 나를 원해 나를 찾아야 한다.’라는 말씀이다. 즉 당신 자신이 양식이시라는 진리를 암시하신다. 즉 “빵의 기적을 통하여 길이 남아 영혼을 기르는 음식을 찾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즉시 덧없는 음식을 찾고 있다. 너희는 육체 대신 영을 살지게 하는 음식으로 인도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하신다.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27절) 하느님의 모습이신 아드님은 하느님이시다. 이분이 그 양식을 주실 것이다. 이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은총에 의해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새로이 변화한다. 이렇게 우리는 그분 아들과 같은 모습이 되는 은총을 받는다. 빵의 기적 의미는 우리의 참 생명을 위한 표징으로 보여주신 것이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계속 엉뚱한 것을 찾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28절) 하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29절)라고 하셨다.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길이 남을 양식을 얻고자 힘써야 한다. 이 양식을 우리에게 주는 이는 아버지께서 인정하신 아드님이시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며, 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드님을 믿어야 한다. “아버지께서 보내신 이”는 누군가? 아버지께서 인정하신 분이시다. 아버지께서 인정하신 이는 누구인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주시는 사람의 아들이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주님 안에서 자랑으로 여겨야(1코린 1,31 참조) 할 것이다. 믿음으로 우리는 아드님을 닮아가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하느님을 찾는 굶주림을 주셨다. 이것은 세상의 음식이나 현세적인 욕망을 채워주는 그러한 만족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느님이 주시는 영원한 삶을 통해서만 만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현세적인 만족을 넘어 그 이상의 것을, 즉 참된 생명,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더 깊이 알아듣고 실천해 나아가는 삶을 살도록 그리하여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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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9.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타조를 아십니까?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고, 동물원에 가면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타조 농장도 인기라고 하더군요. 타조는 조류이지만 키가 2.4m나 되고, 무게도 155kg 정도 됩니다. 날개는 퇴화하여서 날 수 없지만 달리는 속도가 빨라 시속 90km까지 달릴 수 있습니다. 말의 속도가 60~70km/h이기 때문에, 말보다도 빠른 속도입니다. 여기에 발길질은 얼마나 쎈지 발길질 한 번에 커다란 동물을 단숨에 죽일 수도 있습니다.
빠르고 엄청난 발길질이 있는 타조입니다. 그런데 겁이 많아서 맹수에게 쫓기면 같은 곳만을 뱅뱅 돌다가 모래나 바위틈에 고래를 처박습니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타조 같은 모습을 취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실제로 심리학 용어 중에 ‘타조 콤플렉스’가 있더군요. “나는 못 해. 나 같은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어?”라고 하면서 외부세계를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주장을 못 해서 타조처럼 같은 곳만 맴돌며 그러다가 고개를 처박으며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최악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나만의 장점이 있으며, 할 수 있는 것도 너무 많습니다. 타조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주님 뜻에 맞게 자신의 능력을 세상에 펼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빵의 기적을 본 뒤에 예수님을 쫓아 옵니다. 왜 쫓아 왔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무엇인가를 얻을 생각만 가지고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육체의 양식에만 쏠려 있었습니다. 자신은 능력과 힘이 없으니, 주님께서 알아서 해줘야 한다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것은 그들이 덧없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양식을 추구하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는 주님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자신의 능력을 세상에 펼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명확하게 알려주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주님과 늘 함께하기에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도 갖게 됩니다. 큰 힘을 가지고 계신 주님이 내 편인데 무엇이 두렵고 무엇을 할 수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 대한 믿음은 곧 하느님의 일이라고 하십니다. 그만큼 믿음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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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책임을 다하면 꼭 성공한다(데일 카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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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버리는 은총
도심지에서와 달리 갑곶성지에서는 아주 다양한 동물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는 고라니, 어렸을 때 만화로만 봤던 딱따구리, 며칠 전에는 너구리를 만나서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밖에도 참 많은 동물을 보게 됩니다.
작년 가을, 아침에 성지 마당을 산책하는데 청설모를 만났습니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를 옮겨가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청설모를 보며 언젠가 책에서 봤던 글의 내용이 하나 생각났습니다. 바로 청설모와 다람쥐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청설모와 다람쥐가 가장 좋아하는 식량은 도토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청설모와 다람쥐는 겨울철 식량을 비축하기 위해 땅속 곳곳에 맛있는 도토리를 숨겨 둔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청설모와 다람쥐의 머리가 너무 안 좋아서 숨겨 둔 도토리를 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양이 자그마치 숨겨 둔 도토리의 95%라고 하네요.
이렇게 못 찾은 도토리는 어떻게 될까요? 땅속에서 싹을 틔워 나무가 됩니다. 청설모와 다람쥐의 나쁜 기억력이 나무를 자라게 해서 숲을 이루게 합니다.
기억하지 못함도 이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기억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선 주변 사람이 힘들어집니다. 적당히 잊을 수 있는 것, 이것도 은총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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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9.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자전거로 맨해튼을 다녀왔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자유의 여신상도 보았고, 9.11 기념관도 보았습니다. 센트럴 파크도 지나갔습니다. 자전거 전용도로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런데 자전거 전용도로에는 차가 올 수 없도록 철재로 된 봉이 있었습니다. 자전거는 충분히 지나 갈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눈에는 공간이 너무 좁게 보였습니다. 공간이 좁게 보이니 속도를 줄이게 되고, 속도를 줄이니 균형을 잡기가 어려웠습니다. 봉과 봉 사이를 지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함께 한 신부님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봉을 보지 말고 멀리 앞을 보세요.’ 멀리 앞을 보니 봉과 봉사이의 거리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는 봉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봉을 볼 때는 봉이 문제였는데, 봉을 보지 않으니 봉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신부님의 말이 제게 큰 울림이 되었습니다. ‘멀리 앞만 보세요.'
바둑의 용어 중에 ‘소탐대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수는 눈앞에 있는 것만 봅니다. 고수는 멀리 앞을 봅니다. 고수가 작은 것을 주면 하수는 덥석 눈앞에 있는 것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는 사이에 고수는 넓은 공간을 차지하게 됩니다. 하수는 작은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큰 전투에서는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신앙의 여정에서도 ‘소탐대실’의 예를 볼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금송아지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 뿐이셨습니다. 유다는 세상의 권력과 명예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욕망도, 두려움도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 수 없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것은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은 습관처럼 책상 앞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께 길을 찾아 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아는 학생입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알고 있는 학생입니다. 그런 학생은 공부하라고 말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책상 앞에서 공부를 하기 마련입니다. 그 길만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정답을 먼저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각자의 의견을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신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주체적으로 행동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또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빵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자들이 직접 행동해야만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빵을 배불리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표징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면 빵은 언제든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참된 구원은 지금 당장 배부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나’를 먼저 신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물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커다란 능력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아들이 죽었지만 다시 살아났고, 부활하셨다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 믿음 위에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 믿음이 온갖 박해와 죽음까지도 이겨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여러분이 믿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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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9.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파스카의 삶
- 하늘로부터, 위로부터, 영에서 태어난 삶 -
잠잠해질줄 모르는 코로나 사태와 더불어 기후위기가 현대 탐욕에 바탕한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자본주의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계속된 심판처럼 생각됩니다. 하나뿐인 공동의 집인 지구를 살리기 위한 하느님의 비상 조치인지도 모릅니다. 아직도 인간의 회개가 하느님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은 듯 합니다. 정말 회개가 여전히 미흡할 때는 코로나가 끝나도 더한 재앙을 보내실지 예측 불가합니다.
참으로 늘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끊임없는 회개의 삶, 파스카의 삶이 절실하고 절박합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분리시켜 지옥으로 이끄는 쓰고 나쁜 열정이 있듯이, 악습에서 분리시켜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끄는 좋은 열정이 있습니다. 바로 사부 성 베네딕도의 말씀입니다. 나쁜 탐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탐욕의 청정욕淸淨慾도 있는 것입니다. 한결같고 끊임없는 하느님을 찾는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은 말그대로 좋은 열정, 청정욕입니다.
엊그제와 어제는 참 아름답고 싱그러운 신록의 기쁨, 파스카의 기쁨 가득했던 분위기의 참 좋은 청명한 날이었습니다. 숨쉬는 공기도 향기로워 밥먹지 않아도 배부른 느낌이었습니다. 방문했던 분들에 드린 덕담도 생각납니다.
“아름답게 사시라고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에 아름다운 수도원에 선물 피정 보내주셨네요!”
“참 아름다운 삶의 부부입니다. 4/5는 성인부부가 되셨으니 남은 1/5도 오늘 날씨처럼 아름답게 사세요.”
한 피정자와 장년부부에 대한 덕담德談에 이어 갸륵한 예비 신혼 부부가 고백성사차 들렸기에 보속으로 말씀 처방전과 더불어 세 기도문(행복기도,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성령께 바치는 기도)을 함께 읽게 했고,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기념촬영도 했습니다. 이어 사진과 함께 메시지도 나눴습니다.
-“참 잘 어울리는 멋진 아름다운 부부입니다.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 신부님 말씀 새기며 오늘 맑은 날씨처럼 행복하게 잘 살겠습니다.”
아름다운 신혼 예비부부의 답신이었습니다. 좋은 사람은 희망입니다. 박노해 시인의 ‘다시’란 시가 생각납니다. ‘다시’란 제목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희망한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이런 희망이 되는 참 좋은 사람은 끊임없는 회개로 늘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파스카의 사람입니다. 하느님만을 찾는 참 좋은 열정의, 청정욕의 진리 추구의 사람입니다. 말그대로 끊임없이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영에서 태어나는 사람입니다. 이래야 아래로부터, 땅으로부터, 육에서 태어난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과연 나는 어느쪽인지요? 참 중요한 물음입니다. 요한복음 다음 주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말 그대로 위로부터, 물과 성령으로, 영에서 태어난 사람이 바로 참 자유로운 파스카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희망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끊임없이 우리 모두 위로부터, 영에서 다시 태어나는 파스카의 시간입니다.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기쁨을 사는 파스카의 사람으로 변모시켜줍니다. 오늘 말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사도행전의 스테파노와 적대자들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마치 하늘과 땅, 영과 육의 대조같습니다. 백성가운데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키는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위로부터, 영에서, 하늘로부터 태어난 사람을 상징합니다. 마지막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는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반면 아래로부터, 땅에서, 육에서 태어난 적대자들은 스테파노와 논쟁했지만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합니다.
복음도 같은 맥락입니다. 표징이 아닌 배불리 먹었기에 주님을 찾는 아래로부터, 땅에서, 육에서 태어난 이들의 각성을, 회개를 촉구하는 다음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오늘 복음의 절정이 되는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주님 말씀과 성체를 모시는 우리들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우리의 파스카의 삶에 결정적 답이 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참으로 하늘에서, 위로부터 오신 분, 예수님을 한결같이, 항구히, 충실히 믿는 일이 하느님의 일이며 우리를 파스카의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청해야 할 믿음의 은총입니다. 새삼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파스카의 은총, 파스카의 삶뿐임을 깨닫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근본적 자아초월의 삶은, 내적변화의 삶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좀처럼 변하지 않음을 뜻하는 우스개 말같은 ‘원판 불변의 법칙’이란 말이 생각납니다. 간혹 사람이 변질變質됐다고 말하는데 변질이 아닌 본질本質이 드러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가구처럼 말입니다.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또 배신한다는 말도 있고, 사람은 고쳐쓸수 없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삶만이, 참된 회개의 삶만이, 주님의 은총만이 우리의 본질을 변화시켜 주님을 닮게 한다고 믿습니다. 무수한 성인들의 회심과 회두, 회개의 삶이 생생한 증거입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회개와 파스카 삶을 위해 청해야 할바 샘솟는 좋은 열정, 청정욕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정화淨化하시고 성화聖化하시어 날로 당신을 닮게 하십니다. 화답송의 평범한 말씀이 오늘 말씀을 요약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시편119,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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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9. 부활 제3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람은 음식을 먹지 않으면 살지 못합니다. 무엇을 먹든 먹어야 합니다. 다른 방법으로 영양을 보충할 수 있겠지만 일시적입니다. 단식을 한다고 해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위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양을 보충시켜야 합니다. 음식을 통해서든 다른 방법을 통해서든 영양을 섭취하지 않으면 육체를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먹어야 삽니다. 영양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요한6,2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에 관심을 두어봅니다. 우리에게 그만큼 간절히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분의 간절함에 귀 기울이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고 하시는 말씀은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밥을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말씀 안에 모든 것이 담겨있기 때문에 항상 말씀이 먼저입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삽니다”(마태4,4). 예수님께서는 육적인 양식 그 너머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실천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고 구원을 완성하게 됩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믿음은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지상의 양식도 중요하지만, 천상의 양식이 더 소중한데 그 천상양식을 얻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요한6,29). 결국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동의를 통해서 완성됩니다. 하느님의 선물을 인간이 거부할 수 있으니 신앙은 하느님의 일인 동시에 인간의 일이기도 합니다. 신앙은 나의 생각, 나의 계획,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님만을 찾으려는 ‘버림의 자유’ 안에서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합니다. 남들이 성경에 관해 많이 알고 통성기도를 잘하는 것을 보면 부러워합니다. 특히 전교에 동분서주하는 개신교 신자들을 보면서 열성을 부러워하고 말 잘하는 그들을 보며 주눅이 듭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을 읽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텔레비전 앞에 있는 시간이 훨씬 많습니다. 노력하지 않으면서 거저 얻으려는 마음이 너무 큽니다.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왜 그 말씀을 듣기를 주저하고 실천하기를 두려워합니까? 그야말로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은총은 풍부하지만, 인간의 협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 것에는 눈이 번쩍 뜨이면서도 천상의 영원한 생명에는 굼뜬 우리의 모습을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하느님의 위안은 다른 위로를 찾는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진실한 것이 헛된 것과 영신 적인 것이, 육신 적인 것과 최고의 것이 최저의 것과 혼동되기도 하지만 천상의 것과 지상의 것을 똑같이 맛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천상의 것을 추구하십시오. 지상에 살면서도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우리의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하여 빵을 먹어야 하듯이,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자주 접하고 미사 안에서의 영성체로써 신앙의 건강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성체는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성체보다 더 깊고 완전한 사랑의 일치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습니까?”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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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9. 부활 제3주간. 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 27)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로
오셨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과의
관계이다.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생명의 참된
기쁨이다.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처럼 우리도
실천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삶이다.
영원한 생명은
내어맡기는
십자가의
삶에서
시작한다.
십자가의 삶은
용서의 삶이
되어 우리를
살리는 양식이
된다.
양식이
된다는 것은
이기적인 자아가
깨어지는 참된
사랑이다.
생명을
누리게 하는
참된 양식은
삶 자체를
변화시킨다.
우리의
생활에서
영원한 생명을
만난다.
우리의 생활이
영원한 생명의
선물이다.
영원한 생명의
본질은 허상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 영혼을
제대로 보게한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치우니
영원한 양식이
무엇인지를
보게된다.
주님이시다.
부활이시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의 참맛을
보아야 할
우리들이다.
믿음이란
다름아닌
그 참맛을
맛보는 것이다.
누구를 위한
양식인가?
바로
우리자신을
위한 양식이다.
오늘도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그 양식을 먹고
그 삶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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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9.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 이의 기쁨이 보입니다.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요한 6,25)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냅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고 호수 위를 걷는 기적까지 보여 주신 뒤의 일입니다. 복음서의 설명을 보면 군중은 참으로 열렬히 예수님의 자취를 찾아 뒤쫓아온 것입니다. 그분에게서 무언가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니 시간을 들이고 배삯까지 들여가며 움직였겠지요.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6)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를 잘 아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려 기민하게 움직인 군중의 행위는 "나 일어나 성읍을 돌아다니리라. 거리와 광장마다 돌아다니며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으리라."(아가 3,2) 하던 아가서 신부의 종종걸음과 사뭇 구별됩니다. 그들은 영혼의 갈망으로 예수님을 흠모해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 아니지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예수님이 베푸신 빵이나 치유의 기적은 우선 육신의 결핍을 채워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기적들이 육신뿐 아니라 영혼에까지 은총이 되어 온 존재를 새로워지게 하기 위해서는 표징 너머의 의미를 갈망하고 찾아야 하지요. 예수님은 군중이 육적인 충족으로 얻는 얕은 만족에서 멈추지 말고 더 깊이 들어가 본질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신앙은 밥이나 직업, 명예나 신분 보장을 누리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리는 우리의 신앙은 세상이 걸쳐 놓은 무수한 껍질들을 벗기고 들어가야 도달할 수 있는 '감춰진 보물'이니까요. 현세적 축복이나 기적 때문에 신자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다면, 아직 예수님 인격에 매혹되지 못한 채 껍데기 어디쯤에서 멈춰버린 상태입니다. 신앙의 정수를 맛보지 못한 건 말할 것도 없지요. 예수님께서 가장 안타까워하시는 부분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
믿음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구원자 그리스도로 믿으며, 믿기에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또 믿기에 그분의 사랑과 선함을 닮고자 애쓰는 신앙은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 이전에 하느님의 은총의 초대가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혹 주님을 자기 재물과 신분 유지를 위한 집사 정도로 여긴다면 하느님의 일을 사람의 일로 끌어내려 도구화한 우상숭배, 기복신앙일 뿐이지요. 신앙이 인격신인 예수님과의 사랑과 무관하다면 아직 하느님과 관계 맺지 못한 상태이고, 솔직히 자기 안위를 보장해 준다면 불교건 샤머니즘이건 이단이건 상관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이기심과 탐욕, 야망에 매몰되지 않고 진짜 신앙을 살아가길 바라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바로 그런 사람이 등장합니다.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사도 6,15)
초대 교회의 일곱 부제 중 하나인 스테파노는 적대자들과의 논쟁에서 "지혜와 성령"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최고 의회로 끌려갑니다. 모두가 스테파노를 거짓 고발하며 모함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지요.
죽음의 위협 앞에서 그는 선함을 잃지 않았고 진리를 전하는 데 담대했으며 온갖 악의에 찬 공격에도 평화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세상이 들고 일어나 고발해도 하느님의 일을 하는 이는 영혼의 평정심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믿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하느님보다 앞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영성체송)
스테파노가 누린 평화가 바로 예수님께서 주신 평화입니다. 좋은 게 좋은 거고 자기만 편하고 안전하면 그만인 거짓 평화가 아니라, 세상 이익과 성공에 근거하지 않는 평화, 세상의 우상이 아니라 사랑하는 하느님을 찾아 길을 떠난 이의 평화, 모욕과 죽음 앞에서도 기쁠 수 있는 평화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각자의 삶에서 우리는 누구를 찾아나섰고, 또 무엇을 뒤쫓고 있는지 되짚어 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변 사람은 우리가 보여 주는 대로 믿으니 모를 수 있어도, 주님이 아시고 자신도 알 겁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세상 일로 전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세상 일을 하느님의 일로 만들기 위해 세상 한가운데서 부르심을 받았답니다. 참 신앙인이 되기 위해 주님을 찾아나선 벗님을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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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9.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6,27)
'과연 얼마나 될까?'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단순하게 실천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아멘! 아멘!' 하면서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진짜로 믿는 사람들, 영원한 생명을 진짜로 믿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구체적인 사건이나 상황 앞에서 예수님과 다르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진짜로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들, 썩어 없어질 것들에 대해서는 온 정성을 쏟으면서, 믿는 이들의 궁극적인 희망인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힘쓰지 않는다면, 그는 진짜로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지금 여기에서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사람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썩어 없어질 이 세상 것들을 믿지 않고, 죽음 저 너머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믿고 이를 얻으려고 힘쓰는 사람들입니다.
머리와 입으로는 믿는다고 큰소리치면서,
믿지 않는 사람처럼 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입으로는 "아멘! 아멘!" 하면서 구체적인 사건이나 문제 앞에서는 '아멘이 아니라고' 말하는 비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은총과 능력이 충만하고,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스테파노처럼, 어떠한 상황에서도,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믿는 이의 모습을 드러내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독재와 부정부패와 부정선거에 맞서 싸운 4.19혁명의 6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희생된 민주 열사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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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9.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의 손가락은 이 세상 너머, 영원한 나라에서 누리게 될 불멸의 생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힐링 피정 오신 교우들을 안내하며 차창 밖을 내다보니,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환상적이던 풍경들이 순식간에 뒤바뀌고 있었습니다.
잠시 화려하고 찬란했던 나무들은 속절없이 꽃잎들과 작별하고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니 영원하지 않다는 것, 한결같지 않다는 것,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아쉽고 안타깝지만 이 세상 것들이 지닌 특징입니다. 절정의 나날에 그 화사했던 얼굴들이 며칠 사이에 고개를 떨굽니다.
유한하기 그지없는 세상 것들이 지닌 형상을 바라보며 드는 한 가지 생각은 ‘모든 것이 헛되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입니다.
결국 영원히 시들지 않는 것, 끝까지 청청하게 남아있는 것, 언제나 살아있는 것은 하느님께 속한 것뿐입니다.
오늘도 한치 앞 눈앞의 것들에만 혈안이 되어 아등바등 살아가는 제게 예수님의 권고말씀이 쿵 하고 큰 울림을 건넵니다.
“너희는 썩어 업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복음 6장 27절)
썩어 없어질 양식들이 지닌 공통된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외양이 그럴듯 해보이지만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영원할 것 같지만 실상 잠시 지나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영원성, 지속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추구하는 성찰 없는 성공이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겸손이 사라진 권위가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양심과 지성이 결여된 명예가 썩어 없어질 양식입니다. 정직과 나눔이 없는 부가 썩어없어질 양식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참된 부와 그릇된 부, 진품과 명품, 영원한 보화와 짝퉁을 구분할 수 있는 은총과 식별력을 청해야겠습니다.
빵을 많게 하신 예수님의 기적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한 군중의 태도는 아주 집요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기대치는 점점 더 커져만 갔습니다.
더 엄청난 기적, 더 큰 파워, 더 놀라운 표징...
군중의 그러한 태도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들의 삶은 그만큼 힘겨웠고, 절실했던 것입니다.
오랜 외세의 압제와 무능한 왕권, 부실한 지도자들로 인한 백성의 나날은 언제나 불안하고 곤궁했습니다.
그로 인해 백성의 마음 저변에는 보다 강력한 지도자, 이 비참한 현실을 단번에 바꿔놓을 수 있는 절대 권력자,
초강력 메시아를 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장 오늘, 단 한치 눈 앞의 세상에만 몰두하고 전념한 나머지, 한 차원 너머, 이 세상 너머의 보다 가치있는 세계를 보지 못하는 군중을 책망하십니다.
군중이 집요하게 요구하고 기대한 표징은 외적이고 물리적이며 현실적인 기적이었습니다.
오늘 이 이해못할 현실을 단 한번에 뒤바꿔놓는 기적, 오늘 이 고통스런 병고를 단번에 치유하는 기적,
우리의 끝도없는 다양한 욕구들을 원없이 충족시키는 기적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바라보는 우리 역시 그런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손가락은 이 세상 너머, 영원한 나라에서 누리게 될 불멸의 생명을 가리키고 있는데, 우리의 시선은 언제나 발밑만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고 따르는 근본적이고 최종적인 이유는 현세적인 충족이나 만족을 넘어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여러 기적이나 표징의 최종적인 주체와 목적 역시 하느님 한분 뿐이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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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9.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체가 하느님임을 믿으면 벌어지는 일: 지금처럼 살지 않게 된다
오늘 복음은 5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표징에 이은 성체성사에 관한 긴 요한복음만의 설교내용이 이어지는 첫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온 이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라고 하시며,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양식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분명 우리에게 주님께서 바라시는 뜻일 진데, 예수님은 그 하느님의 일, 곧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성체를 영하면서 그분이 그리스도이시고, 또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믿을까요? 믿지 못합니다.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무리 예수님을 모시고 다녀도 그분이 막상 물 위를 걸어올 때는 겁에 질려 소리를 질렀던 것처럼 실제로는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걸으시며,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라고 하십니다.
내가 영하는 성체가 그리스도이심을 진정 믿으면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여기서, “나다.”라고 하신 말씀은 모세에게 일러주신 하느님의 이름, “나는 나다.”에서의 “나다.”입니다.
부모와 함께 있는 아이도 두려움이 없는데, 하느님과 함께 있는 우리야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성체를 영하면서도 여전히 무언가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그런 것들을 잃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하곤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시며 할 행동은 아닙니다.
실제로 내 안에 하느님을 모시면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자매님은 이런 체험을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분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고아처럼 자랐습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당연히 세상은 두려운 곳이었고 알지도 못하는 신에게 불만을 가지며 살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술과 담배, 그리고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렸습니다.
결혼은 했지만 같은 수준끼리 만나게 되어있는 것이기에 자신보다 더 우울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약을 앞에 놓고 누가 먼저 죽을 것인지 이야기하는 게 대화의 주제였습니다.
자매는 이미 3번이나 시도하여 위세척으로 살아났지만, 여전히 삶을 대면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자녀라도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자녀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많은 빚으로 더는 삶을 버티기 어려웠습니다.
어릴적에 세례는 받았지만 자매님은 성당에 제대로 다닌 적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산에 올라갔다가 밑에 성당이 보여서 찾아갔습니다.
마침 소공동체 모임을 하는 날이었는데 동네 사람의 초대로 엉겁결에 소공동체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소공동체 복음 나눔의 내용이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었습니다.
이 대목을 읽는 중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가엾은 마음’이라는 구절을 읽는 순간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를 만지고 쓰다듬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분은 틀림없이 성경 구절에서 말씀하고 계신 예수님이 틀림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 것입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이후 3년 동안 울었다고 합니다.
3년 동안 아침에 일어나면 베개에 눈물이 흥건했다고 합니다.
처음 받아본 진짜 사랑 때문에 자아가 죽어 눈물로 솟구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을 만나고 눈물을 흘려보지 않았으면 거짓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개신교에서 개종하여 처음 성체를 영한 자매님이 눈물을 흘리며 “저는 지금까지 생명의 말씀이 예수님이라고 여겼는데, 진짜 그분의 살과 피를 이제야 먹고 마시게 되었습니다.
눈물이 나는 내가 이상한 것인지 그냥 영하고 들어가는 기존 신자들이 이상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번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너는 담배를 끊을 것이다……. 이제 끊었다.”
그때까지 20년 넘게 하루 두 갑씩 담배를 피워왔는데 그 순간 딱 끊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끊으려고 수없이 노력했는데도 안 됐는데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로 다시는 냄새도 맡기 싫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성체가 진짜 하느님임을 믿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우리는 실제로 성체가 하느님이라 믿고 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마음으로 성체를 영하기 위해 믿음을 성장시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많이 묵상하고 깨닫고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작은 체험들로 시작하여 성체만 영하면 아무리 큰 풍랑이 와도 이미 정박해 있는 배처럼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흔들리는 이유는 세상 많은 것에 집착하기 때문인데, 그 집착은 내 안에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에 생깁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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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9. 부활 제3주간. 월요일 복음.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우리는 신앙의 유무를 떠나서 행복해야 합니다. 행복을 추구하려는 게 인간의 본능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우리의 영혼에 기본적으로 심어놓으신 디엔에이가 있습니다.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건 우리 천주교에서는 잘 언급하지 않는 부분인데요, 종교를 떠나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종교적인 색채만 가지지 않았을 뿐이지 실제로 보면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기 위해 수련하는 사람들이 외국에는 많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이를 위해 진리로서 인정을 하는 게 아니고 철학적인 원리로 접근합니다. 특히 인도 같은 나라에 가면 이런 걸 추구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한때 개인적인 사정으로 외국계 회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동료 중 몇 사람이 인도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이 이런 걸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상당한 수준에까지 근접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봤을 때 그들은 인간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기본소양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삶의 철학이 이미 사람의 수준을 능가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이런 수준에서는 하느님의 말씀만 들어가면 이들의 정신세계가 거의 성인의 수준까지 도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우리 천주교에서도 신부님들께서 신학교에 다닐 때 철학을 공부하는 목적도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왜 철학을 공부하는지는 분명합니다. 신학은 말 그대로 신에 대한 학문입니다.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학문입니다. 그에 대한 도구로써 사유(생각과 사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옵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고 하십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느님을 마음에 품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세상적인 것을 많이 얻으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게 부를 가져다줄 수가 있고, 그로 인해 많이 가지면 행복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호스피스 봉사를 하신 분들을 잠시 도우면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배운 하나의 사실이 있습니다. 그들이 봉사를 하면서 가진 철학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앞두고 후회를 하는 게 있는데 특히나 한평생 돈돈돈 하면서 재물만 추구하며 돈만 있으면 행복한 줄로 알고, 그것만 추구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토록 그것만 있으면 행복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행복이 아니고 쓰레기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처음엔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와 관련된 일을 약 1년 가까이 봉사를 하게 되었는데, 1년이 지나 그만두었을 때 그게 무슨 말씀인지 알았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교훈이 숨어 있었습니다. 재물은 자기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부분까지는 소중한 보물이 되고 귀중한 것이 되지만, 그것을 초월했을 땐 그게 더 행복하게 해 주는 게 아니고, 오히려 짐이 된다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 않으실 겁니다. 제가 그때 그분들이랑 이런저런 대화를 하면서 나눈 결론이었습니다. 그걸 인생 말년에 와서, 그것도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바라보면서 깨달은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그분들이 하신 말씀이 더더욱 와 닿습니다. 그때 그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신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만약 다시 인생을 산다면,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보다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사는 데 더 인생의 가치를 두고 살겠다고 하셨습니다. 40대 환자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고, 보통 보면 최소 60대 이상인 분들이었고 평균적으로 70대이신 분들이 대다수 그런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도 기억하는 분이 계십니다. 자신의 재산을 자식들에게 상속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조금 특이했습니다. 자신은 돈의 노예처럼 살았지만, 보통 보면 그래도 자식이라도 좀 편하게 살게 하려고 하는 마음에 상속하려는 게 보통의 마음인데도 하지 않은 이유가 아주 놀라웠습니다. 바로 그게 자신이 생각했을 때 ‘쓰레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쓰레기를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놀라운 발상입니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근데 그 쓰레기가 다른 곳으로 가면 더 이상 쓰레기가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신 모양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데 기부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신앙을 가진 분이 아니지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해야 자신의 인생이 더 이상 비참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어느 날 문득 들었다고 했습니다. 근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사실을 자식들에게 말하니, 자식들이 아버지의 생각을 순순히 잘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때 생각한 게 부모도 마지막에는 자신의 삶이 허망한 삶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런 생각을 한 모양인데, 그런 아버지의 뜻을 잘 받아들인 아들도 훌륭한 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 이런 결정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이 아들도 생각해봅니다. 지금에서 봤을 때 비록 그들은 신앙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마음이 원래 하느님이 사람을 창조할 때 심어준 그 디엔에이가 발현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신앙을 가지지 않은 분의 사례이지만 이 사례를 보면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오늘 복음과 같이 묵상을 해보면, 진정으로 행복한 것은 물질에 있지 않다는 교훈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물질을 초월해서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다만, 자기에게 필요한 부분까지만, 그게 자신의 행복을 담보해 줄 수가 있다는 교훈을 주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것을 묵상하게 됩니다. 행복도 어느 선을 넘어가면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불행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사람만이 하늘의 양식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 수가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세상 양식만 추구하며 살다가 가는 허무한 인생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그 선택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 선택의 결과도 자신이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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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9. 부활 제3주간. 월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제1독서 (사도6,8~15)
"그 무렵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백성 가운데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다." (8)
사도행전 6장 1~7절은 초대 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하는 과정 가운데 생겨난 배급(구제)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곱 부제를 선출한 내용과 더불어 그 이후 교회가 더욱 비약적으로 성장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도행전 6장 8~15절은 이때 선출된 자 가운데 한 명인 스테파노 부제의 활동 및 체포 기사를 기록하고 있다.
지금까지 소극적으로 이루어졌던 핍박이 보다 본격화되고, 급기야 최초의 순교자를 내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그 가운데 본절에서는 스테파노 부제가 은총과 능력이 충만하여 큰 '이적'으로 번역된 '테라타'(terata)와 '표징'으로 번역된 '세메이아'(semeia)들을 일으켰다는 내용이 나온다.
본문의 '은총'에 해당하는 '카리토스'(charitos)와 '능력'에 해당하는 '뒤나메오스'(dynameos)는 사도행전 6장 5절의 '믿음과 성령 충만'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여기에서의 '은총'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스테파노 부제의 인자한 성품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사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부터 당시까지 초대 교회에서는 큰 이적과 표징들을 열두 사도만이 행하였다.
그러나 이후로는 열두 사도로부터 안수받은 스테파노와 필리포스 같은 부제들도 이러한 능력을 행하게 되었다(사도 8,13).
하지만 스테파노와 필리포스 부제는 안수받기 전에도 이적과 표징들을 행했을 것이며, 이적과 표징들을 행함으로써 교회 공동체로부터 성령이 충만하다는 증거를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다(사도 6,3).
그러나 본절의 기록이나 필리포스 부제의 행적을 기록한 사도행전 8장의 기록으로 보아서 이들이 사도들로부터 안수받은 이후에 더욱 활발하고 능력있게 이적과 표징을 행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것 역시 초대 교회가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부활 제3주간 월요일
‘너무나 사랑하신’ 그 하느님의 사랑
우리의 구원이 창조의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시작일 뿐입니다.
(요한6,22-29)
22 이튿날, 호수 건너편에 남아 있던 군중은, 그곳에 배가 한 척밖에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를 타고 가지 않으시고 제자들만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배는 교회를 뜻하고, 교회는 하나 입니다. 그런데 그 배(교회)에 예수님이 타시지 않았음을~ 곧 하나의 뜻을 이루시려는 그 예수님의 뜻과 하나 되지 못한 제자들과 자신들의 뜻만을 위해 찾는 사람들의 모습을 성경은 오늘 말씀하시려 합니다.
(요한7,16.21)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한 가지 일을 하였을 뿐인데 너희는 모두 놀라워한다.
=죄인들의 죗값으로 십자가에서 당신의 죽음으로 대신 갚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시어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께 감사의 영광을 드리도록 하는 그 아버지의 뜻, 그 한 가지 일을 하셨을 뿐이다. 하심입니다.
우리 또한 그 예수님의 일-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그 한가지 뿐입니다.
예수님을 먼저 받아들여 분주하게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마르타와 달리 동생 마리아는 그 언니의 일과 상관없이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루가10,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1배드1,21) 여러분은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 주셨습니다.
23 그런데 티베리아스에서 배 몇 척이, 주님께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 빵을 나누어 먹이신 곳에 가까이 와 닿았다. 24 군중은 거기에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그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 배 몇척- 배들, 하느님의 한 가지 일, 그 하나의 뜻인 배(교회)가 아닌 사람의 여러 일로 여러 가지 뜻을 위한 신앙을 찾는 배들(교회)입니다.
가파르나움(나를 위한 고을, 성전)- 하느님의 뜻, 그 길이 아닌 사람의 뜻, 그 길로 나를 위한 신앙을 하려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위해 가파르나움에서 구원, 그 한 가지를 위한 표징을 일으키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표징의 뜻을 깨달으려 하지 않고 자신들의 뜻, 그 사람의 길(일. 뜻)만을 고집했습니다.
(루가10,15) 그래서~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25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 구원의 표징, 그 하느님의 듯, 길을 깨닫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들의 뜻, 길을 위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길, 하느님의 뜻을 죽이는 것입니다.
(필리3,18-19) 18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9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며 그 아버지의 한 가지 일을 하셨을 뿐이다.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대속의 일을 하느님의 뜻으로 먹는 것, 영원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 양식- ‘사람의 아들이 줄 것이다.’ 하셨으니 그 예수님의 말씀을 하늘의 생명으로, 진리로 깨닫는,~ 그렇게 받아 먹으면 됩니다.
28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 말씀을 깨달을 생각은 못하고 ‘무엇을 우리가 해야 합니까?’로 묻습니다.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 죄인(짐승)들의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심.~ 그분의 일, 그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먹는, 믿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루가2,7.12참조)
(요한3,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 우리의 구원을 위한 속죄 제물로 내주심을 보다. 그토록 ‘너무나 사랑하신’ 그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깨닫기 위한 말씀을 묵상하며 그것이 신앙생활 입니다.
마르타 처럼~ 갖가지 시중드는, 지키는 바쁜 행위의 신앙으로는 절대 깨달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인간의 지혜, 지각으로는 절대 깨달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들을 속죄 제물로 내주신 그 대속의 십자가의 사랑을 절절히 깨달아야 우리의 창조 목적인 하느님 나라에서 진실 된 감사로, 그 사랑에 영광 드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 사랑이 구원으로 하늘의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뜻, 지혜, 그 길로 구원에 이르겠다고 하는 것, 저승(지옥)으로 떨어질 가파르나움으로, 썩어 없어질 양식을 구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에페2,8-9) 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9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구원(용서)에 감사드립니다. 아멘. -^ㅇ^-
부활 제3주간 월요일 복음(요한6,22~29)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27)
요한 복음 6장 27절은 오병이어 기적의 진정한 의미가 되는 영생의 양식을 주는 주제가 바로 예수님 자신임을 밝히는 중요한 구절이다.
'~말고 ~하라'로 번역된 '메~알라'(me ~alla; not~but)는 전자는 부정하고, 후자는 긍정함으로써 후자를 강조하는 구분이다.
여기서 먹어도 결국 죽게 될 '썩어 없어질 양식'과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증하시고 인정하신 예수님께서 주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대조하여 후자를 취할 것을 강조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켜서 종종 쓰신 용어인데, 메시야의 동의어로 보는 것이 옳다(다니7,13).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이 양식을 주시는 분으로 선언하신다.
여기서 '줄 것이다'에 해당하는 '도세이'(dosei; will give)는 '디도미'(didomi)의 미래 시제로서, 진행적인 의미와 더불어 받는 자들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 이 양식을 얻기도 하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양식은 인간이 자신의 방식대로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썩어 없어질 양식'과 구별된다.
'디도미'(didomi) 안에 들어 있는 '하사하다'(grant), '수여하다'(bestow)는 의미가 나타내듯이, 이 양식은 하느님에 의해 은총으로만 주어지는 선물인데(에페2,8.9), 인간의 대속을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님과의 관계가 이 선물로 받을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한다.
한편, '인정하셨기 때문이다'에 해당하는 '에스프라기센'(esphragisen; has sealed; has placed his seal of approval)은 '봉인하다', '인을 치다'를 의미하는 '스프랑기조'(sphrangizo)의 부정(不定) 과거 시제이므로, '인을 치셨다'로 번역해야 한다.
70인역(LXX)에서는 히브리어 '하탐'(hatham)을 번역할 때 이 동사를 사용했는데, 구약 시대에 인장을 찍는 것, 곧 인을 치는 것은 왕의 교서(다니6,17.18), 토지 구매 문서(예레32,10), 책(이사29,11), 그밖의 문서들(느헤10,1)을 법적으로 유효하게 했다.
신약에서도 이 동사는 비준하거나 확증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이 유대인들에게는 결코 낯선 말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 말씀을 근거로 그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약속을 인간 예수님이 아니라, 그분을 보내신 하느님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곧 하느님의 자기 계시임을 염두에 두고,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함으로써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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