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Sparta)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남단에 위치한 스파르타는 한 때 아테네와 대등한 도시 국가였다.
군웅할거의 도시국가 사이에서 지리적인 취약점을 극복하고 생존할 수 있었던 정책이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스파르타식 교육이었다. 엄격하고 통제된 스파르타 사회는
민주적인 그리스를 넘지 못하였다는 식으로 민주주의의 우월성이 곧잘 강조 돼곤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스파르타는 그저 한적한 시골 도시로서 스파르타가 가졌던 딱딱한
이미지는 전혀 느낄 수가 없다.
- 스파르타의 위치-

-스파르타로 가는길-

** 스파르타는 동쪽으로는 파르논(Parnon)산맥, 서쪽으로는 타이예토스 오로스(Taiyetos Oros)산맥이
나란히 벋어내린 계곡에 위치하고 있어 주변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있다.
-스파르타 시가지-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Leonidas)-

** 기원 전 480년 페르시아군 과의 싸움에서 왕은 300명의 정예병사와 함께 테르모필라이(Thermopylae)에서
대군을 맞아 싸우다 전원이 옥쇄한다. 레오니다스의 동상이 스파르타 고대도시 유적으로 향하는 길 가에 서 있다.
2명은 전령으로 심부름을 갔기 때문에 실제 전사자는 298명이라 한다. 동상 뒷편은 축구장이다.
-레오니다스(Λεωνίδας ο Α')-

** 레오니다스란 그리스 어로 사자의 아들이란 의미이다.
-스파르타 고대 도시의 안내판-

-무너져 가는 원형 경기장 축대-

-원형 경기장 주변-

**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아크로 폴리스(Acropolis)-

** 강성했던 도시 국가의 유적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초라한 폐허만이 남아있다.
- 유적지-

** 洋의 동서를 막론하고 승자의 기록만 남는다는 것은 진리인가?
아테네의 적대국으로 철저히 파괴된 채 버려져 그리스의 영토인 현재도 관심에서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대도시 폐허에서 내려다 보이는 스파르타-

** 대부분이 수풀과 올리브 나무로 덮여있는 유적지와 도시 사이에는 올리브 농장이 가로 놓여있다.
-원형극장-

** 원형(原形)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파괴되고 방치된 원형 극장의 계단식 관중석 몇개가 남아있어
극장이란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수풀로 뒤덮히고 남아있는 몇개의 관중석-

-수풀속에 방치된 화려한 조각의 기둥-

** 유적지에서 당시의 영광을 연상케 하는것은 아무것도 없다.
-올리브 나무숲 사이로 보이는 폐허-

** 올리브 나무는 천년을 산다. 100년생 나무도 그리스에서는 젊은 나무로 분류된다.
젊은 나무의 올리브가 좋은 올리브라고 한다. 유적지의 올리브 나무들은 수백년의 수령을 가진것으로 보인다.
-시가지 중앙 광장 남쪽에 있는 작은 동상-

** 위인들의 동상은 광장 중앙에, 그것도 높다랗게 위풍당당하게 서 있게 마련이지만
이 병사의 동상은 광장 남쪽 한편에 조용히 꿇고 있다.
-고뇌하는 전사(戰士)상-

**갑옷과 검(刀)도 없이 투구만을 쓴채 한 손에 방패를 짚고있는 병사는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떨구고 있다.
치열한 전투에 지친듯한 이 모습은 과거 강성했던 스파르타의 마지막을 말해 주는 듯하다.
-병사의 얼굴-

** 이 동상을 바라보는 이들은 이 병사의 표정에서, 어떤 이는 좌절과 공포를, 어떤 이는 굴욕과 분노를,
어떤 이는 의연과 허탈을 읽는다고 한다. 이 동상이 유명한 이유이다.
-병사의 뒷모습 과 표정-


** 병사의 뒷 모습은 곧 주저앉을 것 같은 처절한 느낌을 준다.
미스트라(Mystras)
미스트라는 중세시대의 유적으로 "비잔틴의 폐허" 라고도 불린다. 이 유적은 스파르타에서 5 km 정도 떨어져있다.
이곳은 아주 특이한 유적으로 타이예토스(Taiyetos)산맥의 끝 부분에 튀어나온 표고 600 m의 산 사면에 자리 잡고있는
일종의 교회 마을이다. 미스트라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것은 1989년이다.
-미스트라 찾아 가는길-

** 이 마을은 여행팀이 중식차 들렸던 조용한 길가 마을이다. 호기심에서 잠시 둘러 보다가
역사적인 기념물을 발견하였다. 마을 출구(사진의 오른쪽 승용차 앞)에 작은 동상이 하나 서 있었다.
미스트라에는 후기 비잔틴의 정착지로서13세기 중반인 1262년부터 펠로폰네소스 반도내 비잔틴 제국의,
교회의 교권과 교구가 자리를 잡았고 1348년 부터 1460년 오토만에 의해 점령당하게 될 때까지
모레아(Morea: Despotate of the Morea=비잔틴 시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일컫던 이름)의 수도였다.
-비잔틴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파라이로고스(1404~1453)-

** 미스트라가 멀지않은 마을에 오토만과의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비잔틴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파라이로고스의 동상이 서 있다는것은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닐것이다.
-고지 위의 성채-

-산정에 성채가 보이는 것은 유럽에서 흔한 풍경이지만 여행팀이 가는 길에 무심히 나타난 성채는
여행팀의 목적지였다.
-미스트라 유적지 요도-

** 고대(4 C~6 C) 로마나 그리스의 대도시들은 두개의 주 도로가 도시 중앙에서 교차하여
한쪽 입구에서 반대편 입구로 이어지는 "로마식 시스템(Roman System)" 을 지켜왔으나
이 곳 비잔틴의 성채 도시에서는 엄격하게 그같은 도시계획을 적용하는것이 불가능 하다.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의 전체적인 도시 계획과 프랑크 양식의 성채, 비잔틴양식의 왕궁,
주택과 교회의 건축 그리고 이런 것들에 남아있는 벽화 등은 중세 비잔틴 문화와 일반적인
유럽문화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폐 허 # 1 -

**답사는 위에서 부터 아래로 내려오는것이 편리하다. 상부 후문을 들어서면 폐허의 유적이 펼처진다.
폐허의 담 너머로 비잔틴 양식의 돔과 4각형의 종탑이 보인다. 성 소피아 교회의 지붕 모습이다.
-성 소피아 교회(Sain Sophia)(10)-

** 종탑 밑 그늘에는 무료한 유적 감시인이 서있다.
-교회 내부 프레스코 벽화-

-햇빛이 들어오는 돔-

-산정에 있는 성채(12) 와 산허리에 있는 판타나싸(Pantanassa) 수도원(13)-

-판타나싸 수도원(Monastery of Pantanassa)-

** 미스트라 유적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보인다. 대부분이 폐허이지만 몇몇 교회만은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수도원 출입문-

-수도원 교회 축대 아래의 작은 마당과 부속건물(왼편)-

-수도원 교회-

** 수도원 안의 비잔틴 양식의 이 교회는 사용중인 교회이다.
-교회 내부-

** 여행객은 이 교회에 촟불 한 개를 밝혀놓고 나왔다.
-모넴바시아 문(Monevasia Gate)(7)-

-복원 공사중인 왕궁(8)-

** 이 궁전은 원래 프랑크 족의 기름왕이 만든 것인데 비잔틴 시대에 새로 증축되었다.
-골목길 아취 문-

-미로 같은 골목-

-이골목 저골목-

-3 거 리-

** 아취문으로 들어서면 유적지 서쪽으로 가는 길이고 계단으로 내려가면 정문 쪽이 된다.
-폐 허-

-폐 허-

** 폐허 너머로 성채가 올려다 보인다.
- 기념품 점(20)-

-데미트리오스 교회(Metropolis/Saint Demetrios)(2)-

-에반겔리스트리아(Evangelisrtia)(4)-

-성 데오도리 교회(Sain Theodori)(5)-

** 이 교회는 1262년 직후에 건설되었으며 지붕은 十자 형이고 혼합 양식으로 미스트라 스타일로 불린다.
-교회 내부-

** 내부는 3개의 신랑(身廊: 기둥에 의해 3부분으로 복도가 나뉨)으로 된 바실리카이다.
-교회가 있는거리-

** 사진 왼편에 에반겔리스트리아(Evangelistria)(4) , 앞에는 데오도로이(Theodoroi)(5)교회가
나란히 보인다.
-박물관-

-박물관 내부-

-미스트라를 떠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