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필자가 제10대 회장직을 수락하게 된 내 결심을 쓴 글이다. 이제 임기가 겨우 석달 남았다. 내가 이 글을 회장 취임 직후에 바로 밝혔지만 조타실을 책임 맡은 신임 회장의 생각을 알려고 하지 않으니 손발과 호흡을 맞추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나라를 경영하는 일도 그럴 것이다. 이 땅에 민주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20대의 대통령까지 우리 손으로 뽑았지만 우리는 아직도 비민주적인 의식 속에서 역대 대통령을 타도 대상으로 삼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취임하자 마자 타도대상으로 삼고 있다.
"민주주의란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다(노무현)"
문학이란 무지한(=꽉 막혀서 일체의 빛이 들어갈 수 없는, 깨어 있지 못한) 인간의 닫힌 의식 세계에 빛이 들어갈 수 있도록, 인간 스스로가 그 틈을 열고 빛을 받아들이 게 만드는 도구다. 그리고 수필이란 염색된 자기를 자기 손으로 씻어 내고, 참 자기를 찾아가게 하는 위대한 문학이다. (2024.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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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사랑하는 분들에게 드리는 글
나는 수필을 누구에게서 배운 바가 없다. 그러나 수필이 뭔가를 확실하게 정신이 번쩍 들도록 내게 깨우쳐 주신 분은 있다. 그분은 내게 스승을 자처한 바가 없지만 나는 내 스스로 그분을 내 마음 속의 문학 스승으로 삼는다. 우연히 문단에 발을 들였다. 사회생활로 탁해질 대로 탁해진 마음이 순수문학의 세계에 얼굴을 내민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이겠나. 회사까지 찾아와서 원고 달라고 하신분이 내 고교 은사이신 도광의 시인님이시다. 불가능하다며 고사에 또 고사 했다. 선생님은 나에게 글을 쓰면 “부활”한다고 했다.
“부활” 그 두 단어가 또 나를 쇠망치로 때렸다. 청년 시절에 신이 있는지 확인해야겠다고 참으로 열심히 성경을 읽고 교회를 다녔다. 내가 보지 못한 신을 “살아계시는 하나님이다”고 남들 앞에 이야기 하는 것은 사기라는 생각이 들어서 신이 있는지 확인해야겠다고 교회 생활에 열성을 보였을 뿐인데, 그 열성 때문에 세례를 받게 되었다. 세례 받으라고 해서 받겠다고 했을 뿐인데 세례식 중에 목사님께서 내 머리에 손을 얹고 물었다.
“부활을 믿습니까?”
내 마음 속에서는 “아뇨!”라는 대답이 울리고 있었지만 그 엄숙한 순간에 내가 “아니요” 라고 말하면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 그 정도는 아는 수준의 인격은 갖춘지라 내 지혜가 거짓 신앙고백을 하게 만든 것이다. 나는 마음에도 없는 “예”라는 답변을 했다. 그날이 군대 시절인 1976년 12월 23일이다. 군을 제대하고 잘 다니던 직장을 사표내고 신을 확인하러 다녔다. 신은 내 간절함에도 당신의 모습을 내게 나타내지 않았다. 이게 신의 게시인가? 저게 신의 소리인가? 헛된 망상을 하며 신학교 까지 다녔다. 학생회장도 했다. 열성 전도도 했다. 한 3년 쯤 그렇게 헤매다가 신을 만나지 못한 나는 그 방황을 종결짓고 먹고 사는 길로 돌아 왔다. “부활”도 종교도 그렇게 나에게서 멀어졌다.
선생님으로 인해 잊고 있었던 부활이 다시 가슴을 때렸지만 이미 식어버린 내 마음에 불을 지피지는 못했다. 선생님의 강권 때문에 억지춘향으로 글을 썼다. 읽어 줄 사람이 없으니 일주일에 한편씩 도광의 선생님께 글을 써서 우편으로 보냈다. 이메일 이런 것 안하시니 우편으로 보낸 것이다. 적당하게 꾸미면 훌륭한 신자처럼 행세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나를 선생님은 “정혜옥” 선생님께로 보냈다. 원고뭉치를 들고 찾아 가라고 강요 아닌 강요를 했다. 내 고집에 찾아 갈 리가 없다는 것을 꿰뚫어 보신 어른이 가만히 계실리가 없었다. 득달을 견딜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원고 뭉치를 들고 대명동 마당 넓은 집으로 찾아 갔다. 첫 질문이 “사회적 지위도 있는 분이 뭐 때문에 문학을 하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부활도 모르면서 아는 것처럼 신앙고백한 과거를 후회하고 있는 지라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했다. “도광의 선생님 성화 때문”이라고 답했다. 들고 간 원고를 쭉 읽어보신 선생님께서 한마디로 “문학성”이 없다고 하시고는 원고를 돌려주었다.
“문학성이 없다”
“문학성이 없다”
종소리처럼 또 마음을 울려왔다. 오기가 생겼다. 이렇게 쓰면 문학성이 있는 글이냐? 저렇게 쓰면 문학성이 있는 글이냐? 그래도 내가 고교시절에 소설책 속에 파묻혀 지냈고 현대문학을 도광의 시인에게서 배웠는데 내 글에 문학성이 없다니 “이렇게 쓰면 문학성이 있습니까? 저렇게 쓰면 문학성이 있습니까?” 하는 오기로 거의 일주일에 한편씩 글을 써서 정혜옥 선생님께 보냈다.(당연히 우편으로). 나는 그때 선생님께서 수필가협회 초대 회장이신 것도 몰랐다. 한 1백편 쯤 보냈을까하던 어느 토요일 오후에 선생님께서 “붉은 찔레”를 찾으러 가자고 하셨다. 가야산 까지 차를 타고 갔다. 내가 바보등신이 아니니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지 궁금해서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 냥 연기하며 가야산 까지 갔다.(할일이 없어서 간 게 아니고 피차 속마음을 감추고 간 것임^^) 유전자 변형이 아닌 자연산으로 붉은 찔레가 있을 리가 없다. 하얀 찔레 한 포기를 캐고 별 말 없이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지만 나는 또 붉은 찔레가 뭔지를 찾아내려고 끙끙 거렸다.
부활 ⇒ 문학성 ⇒ 붉은 찔레
그렇게 혼자서 끙끙대던 나를 스승이신 도광의 시인께서 다시 불러내었다. 원대동 어느 대폿집에서 둘이 마주 했다. (술 한 잔 하자며 불러내었지만 술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정도는 아는 수준은 되었음). 당신의 시집에서 “경편기차”라는 단어를 그저 손가락으로 짚어 보이셨다. 나는 그날 술에 취해 집에 돌아와서 비로소 문리가 터지게 되었다. 추억을 새로운 의미로 부활시켜 내는 것이 문학의 첫걸음이라는 가르침이었다. 나는 그날의 기쁨을 글로 남겨 놓았다. 그리고 많은 글을 썼다.
정혜옥 선생님은 손수 나를 데리고 시민회관에 곁방살이 하던 대구문협에 가서 회원으로 입회 시켜주셨다. 수필가협회에도 같이 가서 넣어주셨다. 그날 선생님께서 도반으로 나에게 허장옥 선생을 불러내어서 인사를 시켜 주셨다. 그냥 인사만 한 것이지만 나는 대번에 선생님 마음을 알았다. 바른 문심을 나눌 훌륭한 도반이 왜 필요한지를 무언으로 알려 주신 것이다. 그 후 내가 습작한 모든 글은 지원 선생님 메일로 날아갔다. 일체 한 마디도 내 작품에 평가를 하시지 않았다. 수필의 전범이 될 만한 많은 책들을 보내 주셨다. 그리고 얼마 후 정혜옥 선생님은 수필가협회 이사를 맡으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문학정신 수준이 미달이다 싶으면 단호하게 배척하시는 분이시고 야박하다 싶을 정도로 글 외에는 그 어떤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 분이다. 수필가협회 이사라는 사람이 수필집 한권 안낸 게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서 원고를 묶어서 들고 갔다.
첫 페이지에 저자 소개를 화려하게 적어 갔다. 내가 그동안 사회 생활한 이력이었다. 책을 낼때는 응당 그렇게 하는 줄로 알았다. 내 면전에서 아무 말씀 없이 검은 색 싸인펜으로 싹 곱표를 치시고는 "<문학예술> <에세이 21>로 등단, 대구수필가협회 회원, 대구문협회원. 수필집 <꼴찌로 달리기>가 있다." 요것만 남겨 놓으셨다. 내용은 보시지도 않고 돌려 주셨다. 별다른 말씀도 없으셨다. 등골이 오싹하였다. 냉면 한 그릇 대접하고 정신을 차리고 돌아 왔다. ( <문학예술> <에세이 21> 두 군데 잡지에 등단한 사연은 이렇다. 앞의 등단은 도광의 은사님 빽으로 등단한 기분이 들어서 내 자의로 새로운 글을 써서 <에세이 21>에 보내어서 내게 문재(文才)가 있는지 스스로 확인 한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문단에 발을 들이는 후배님들을 위해서다. 문학 외의 것으로 문학세계를 어지럽히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런 행동을 본 받으려는 후배 문인들이 대거 등장하면 문학은 빛을 잃는다. 문학세계는 인간의 마음을 저 밑바닥까지 성찰하는 빛의 세계다. 자기 성찰이 있고 나서 세상을 성찰하는 것이다. 자아성찰이 덜되면 겉멋에 취해서 자기도취에 빠진다. 자기도취에 빠지면 자기 기만적인 사이비 인간이 되니 절대로 겉멋에 취하지 말기를 바란다.(지원 선생은 우스개로 말한다. 내가 청년 때인 그때 종교인으로 빠졌으면 희대의 사기꾼이 되었을 것이란다.^^ 성찰이 덜된 인간들이 다들 그렇게 타락하는지라 100% 맞는 말씀이다.)
문학의 세계는 그가 국회의원이든 장관이든 대기업의 회장이든 스님이든 신부든 목사든 자아성찰이 부족하면 부족한 그대로 진솔해져야 하는 세계이지, 사회적 권세로 위장, 치장하는 세계가 아니다. "예면 예하고 아니면 아니오 해야" 하는, "지지이지지 부지이 부지 해야"하는 순수의 세계라는 뜻이다. 나는 문학을 이해하고 새롭게 눈이 열려서 부활을 이해하고 세계 대문호가 남긴 글들을 이해하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부디 상에 연연하지 말고, 주변의 입방아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이 사람은 어떻고 저 사람은 저떻고 하며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짐짓 부족한 척 애교를 떨려고도 하지 말고, 오직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서 아름다운 글 , 심금을 울리는 글을 쓰시길, 문학의 길을 걷는 도반들에게 권고 할 뿐이다.(무소 뿔 처럼 그렇게 가라)
수필가협회 회장직을 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많은 고민을 했다. 내가 또 회장 직을 감투로 여길 듯해서이다. 직이 없으면 글쓰기에 전념하고 직을 맡아서는 선한 청지기의 의무를 다 할 뿐이다. 나는 도광의, 정혜옥 두 분을 나의 문학스승으로 삼고, 허창옥 선생을 도반으로 삼아서, 여기까지 왔다. 이 말은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내 속에 만 숨겨 두었던 신앙고백 같은 말이다. 수필가협회 회장의 대임을 맡았으니, 모든 회원님들께서 아름다운 글, 심금을 울리는 글을 쓰는 데 작은 보탬이라도 되도록 노력하겠다. 부족한 사람을 도와서 협회 일을 맡아 주신 제 10대 집행부 임원님들께도 부탁드린다. 세상의 권위를 다 내려놓고 오직 문학을 위해서 봉사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우리가 가는 길은 정임표 위하는 길이 아니라 문학을 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나는 문학을 이해하고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나왔다. 빅톨 위고를 좋아하고 헤르만 헷세를 좋아 한다.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는” 산유화에 시선이 머문 소월의 마음까지 이해하고 그를 좋아한다.
문학은 종교보다 위대하다.
2022. 12. 11 새벽에
수필가 정임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