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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이 이사야 53장을 읽지 않는 이유 사53:1-12
유대인들이 이사야 53장을 읽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수난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씀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사53:5)” 특히 이 말씀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바로 성경을 가장 잘 아는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메시야의 약속을 가장 오래동안 기다린 민족이기도 한 저들은 메시야에 대한 약속을 수천 년동안 지켜온 민족인데 이 유대인이 이사야 53장만은 읽지 않는다면 놀랍지 않습니까? 유대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여 정해진 순서대로 선지서를 읽는데 이사야서도 당연히 읽지만 이사야 52장을 12절까지 읽고 멈춘 다음 54장1절부터 읽는다면 이게 말이 됩니까? 몰라서 넘긴 것이 아닙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이 장이 누구에 대한 예언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토라 다음으로 가장 권위 있는 탈무드에도, 이 장을 메시야와 연결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가장 오래된 아람어 번역본에는 “나의 종 메시야”라는 단어를 직접 써넣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바로 그 메시야에 대한 기록인 줄 알면서 읽지 않는 겁니다. 이사야 53장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다시 읽으면 이 말씀안에 박혀 있는 히브리어 단어 하나하나가, 유대인이 이 장을 피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한 단어가 풀릴 때마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그 십자가가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1947년, 사해 근처 동굴에서 발견한 사해사본에서 살아난 단어 하나를 만나게 됐습니다. 수천 년 동안 사라져 있던 그 한마디 앞에서, 이 장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 첫 열정의 첫 걸음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왜 이사야 53장을 읽지 않을까?
첫 번째 :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런데 이 구절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읽으면,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 전혀 다른 무게가 느껴집니다. 먼저 그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봐야 합니다.
(사53:2-3)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라고 번역한 이 부분 히브리어 원문은 “이쉬 마코보트”인데 직역하면 “고통의 사람”이라는 것인데 이 표현이 고통을 겪은 사람이 아니라 고통 자체가 정체성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질고를 아는 자”에서 “아는”이라는 히브리어는 “야다”로 창세기 4장1절에서 “아담이 하와를 알았더니”라고 할 때 쓴 바로 그 단어로 체험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종은 고통에 대해 아는 분이 아니라 고통 안에 사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이 두 단어만으로도 유대인들에게 이 장은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는 로마를 무너뜨릴 정복자였으며 왕관을 쓴 영웅이었는데 이사야가 그리는 메시아는 고통 자체가 이름인 분으로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것과 정반대입니다. 그런데 진짜 무거운 것은 5절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찔림"에 대한 히브리어 원문은 “할랄” 할랄은 “찔리다”가 아니라 “꿰뚤리다”입니다. 전쟁터에서 창이 몸을 관통하는 것, 칼이 한쪽에서 들어가 반대편으로 나오는 것이 할랄인데 긁히거나 상한 것이 아닌 온몸이 꿰뚫린 겁니다. 그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19:34). 창이 옆구리를 관통한 것이 할랄입니다. 우리가 찔림이라고 가볍게 읽어왔던 그 단어 안에 십자가 위에서 창이 몸을 관통하는 장면이 들어 있었던 겁니다. 찔림이 아니라 꿰뚫리심이었습니다. 그 다음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상함” 히브리어 원문은 “다카”의 뜻은 “으깨지다”입니다. 상한 것이 아니라 가루가 된 것입니다. 올리브를 돌 위에 놓고 무거운 돌로 눌러서 기름을 짜내듯이 완전히 으깨진 것이 다카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에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셨던 곳이 겟세마네로 히브리어“갓 쉬마님” 기름 짜는 틀입니다. 이사야가 700년 전에 기록한 “다카” 으깨지신 곳의 이름이 “겟세마네” 기름 짜는 틀 같은 그림입니다. 이사야가 그린 그 그림이 700년 뒤 예루살렘 감람산에서 그대로 펼쳐진 겁니다.
(눅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올리브가 기름틀에서 으깨지듯이 그 피땀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구절을 너무 익숙하게 읽어 왔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런데 이 한절의 히브리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찔림”과 “상함”이 아니라 꿰뚫리심이었고 으깨지심이었습니다. 유대인이 이 장을 왜 피하는지 이제 조금 보이기 시작하시지 않습니까? 이 구절을 히브리어로 읽는 순간, 꿰뚫리고 으깨지신 고통 받는 종의 얼굴이 너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유대인들이 거부한 바로 예수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하니 피하는 겁니다. 여러분, 혹시 이 “찔림”이라는 단어를 읽으면서도 그 안에 창이 관통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 말씀을 알고 있었지만 이 말씀의 무게는 모르고 있었다면 우리도 유대인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그”에서 “우리”로 바뀌는 장면입니다.
이사야 53장 3절부터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그는 멸시를 받았고 그는 사람들에게 버림받았고 그는 간고를 많이 겪었고 그에게서 사람들이 얼굴을 가렸고 전부 “그”입니다. 읽는 사람입장에서는 남의 이야기로 나와는 상관없는 불쌍한 한 사람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런데 4절에서 갑자기 “우리”로 바뀌어 집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보이십니까? 우리의 질고, 우리의 슬픔, 갑자기 “우리”가 등장합니다. 3절까지는 “그”의 이야기였는데 4절부터는 “우리의” 이야기가 됩니다. 이 한 단어가 바뀌는 순간 이 예언의 화살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그분의 질고가 우리의 질고였고 그분이 당하신 슬픔이 우리의 슬픔이였고 앞에서 보았던 그 꿰뚫리심, 그 으깨지심이 전부 우리의 허물때문이었고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4절 뒷부분은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하다 하였노라“ 이 문장이 말하는 것은 이 고통받는 종을 사람들이 오해했다는 겁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고통받는 것은 저 사람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 벌을 받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이 이 장을 대하는 태도였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서 그들은 생각하기를 저 사람은 신성모독죄를 범했으므로 신성모독자가 마땅한 벌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 판단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분 고난은 그분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 이었습니다. 보는 사람의 판단과 실제 일어나고 있는 ”그“와 ”우리“의 이야기는 6절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사53:6)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러분, 이 구절은 ”우리는“으로 시작하고 ”우리 모두의“로 끝납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이 절의 첫 단어가 ”쿨라누“입니다. ”우리 모두의“라는 이 절의 마지막 단어도 ”클라누“입니다. 같은 단어로 시작하고 같은 단어로 끝납니다. 그런데 시작의 ”쿨라누“와 끝의 ”쿨라누“사이에 담긴 내용이 완전히 다릅니다. 시작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이것이 진단입니다. 우리 모두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각기 제 길로 갔다. 길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끝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것이 처방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죄를 한 분에게 담당시키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한 절안에 인류의 문제와 하나님의 답이 다 들어 있습니다. 진단과 처방이 같은 단어 ”쿨라누“안에서 시작되고 끝납니다. 우리 모두가 저지른 허물과 우리 모두의 죄를 그분에게 담당시키셨다는 것이 유대인에게 왜 불편한지 아시겠습니까? 이 구절을 읽는 순간 ”그“에 대한 이야기일 때는 남의 일이었는데 우리의 허물 우리 모두의 죄악이라고 하는 순간, ”우리“라는 단어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 장을 읽는 모든 사람이 ”우리“에 포함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양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이 말씀 앞에서 예외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도 이 ”우리“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혹시 이 구절을 읽으면서도 이 말씀이 나를 향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놓치셨던 적은 없으십니까? 유대인만 이 장을 건너뛴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우리의“라는 그 한 단어를 건너뛰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죄악을 담당하신 그분은 그 무게 앞에서 억울하다고 소리치셨을까요? 왜 나냐고 항변하셨을까요?
세 번째 :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사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여러분,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소는 소리를 지르는데 비해 양은 도수장에 끌려가면서도 울부짖지 않고 저항하지 않고 잠잠합니다. 이것이 이사야가 그린 고통받는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예언이 700년 뒤에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보시겠습니까? 때는 유월절 전날 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체포되셨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가셨습니다.
(마26:59-60) 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되 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라.
처음부터 죽이기로 작정해 놓은 재판이었는데 증인들의 증거가 서로 맞지 않았던 상황에서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억울하면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증인들의 말이 서로 다르지 않습니까?” 한 마디라도 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마27:12-14)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증거를 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여러분, 로마 총독 빌리도는 유대 땅의 최고 권력자로 수많은 재판을 주관해온 사람입니다. 죄수들이 살려달라고 억울하다고 소리치는 것을 질릴 만큼 봐 온 그런 총독이 크게 놀라워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왜 놀랐겠습니까? 거짓 증인들의 모함 앞에서 대제사장들의 고발 앞에서 로마 총독의 심문 앞에서 예수님은 한마디도 입을 여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사야가 700년 전에 기록한 그대로입니다.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여러분, 예수님은 말을 못하신 것이 아니라 하지 않으신 겁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분입니다. 한 마디로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신 분이신 그분이 입을 닫으신 겁니다. 왜요?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려고 스스로 침묵하신 겁니다. 억울해서 소리칠 수 있었는데 우리를 위해 입을 닫기로 작정하신 겁니다. 이것이 유대인이 이 장을 피하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사53:8-9)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8절은 이 종이 부당한 재판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는 예언인데 예수님의 재판과 십자가 처형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9절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이 한 절 안에 모순이 있습니다. 악인과 함께 죽고 부자와 함께 묻힌다. 이 두가지가 어떻게 동시에 가능합니까? 700년 동안 아무도 이 구절을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 두 가지가 정확히 하루 안에 일어납니다.
(막15: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그의 좌편에 있더라.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두 강도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마27:57-60) 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하거늘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묻어두고 큰 돌을 무덤 문에 놓고 가니라.
여러분 예수님은 악인들과 함께 죽으시고, 부자와 함께 묻히셨습니다. 700년 전에 쓰인 이 한절의 모순이 단 하루만에 해결된 겁니다. 금요일 오후에 악인들 사이에서 돌아가시고 금요일 저녁에 부자의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이것을 누가 계획할 수 있겠습니까? 죽은 사람은 자기가 어디에 묻힐지 결정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계획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 구절을 읽으면서 “악인들과 함께”“부자와 함께”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까? 모순되어 보이니까 대충 넘어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모순 안에 700년 전부터 설계된 하나님의 손길이 들어 있었던 겁니다. 유대인이 이 장을 피하는 이유가 하나씩 쌓이고 있습니다. 원어가 너무 선명하고, 대명사가 나를 가리키고, 침묵이 너무 정확하고, 모순이 하루만에 풀려집니다. 이쯤되면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일까? 이것 우연이 아니라 처음부터 정해졌던 주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네 번째 : 끝이 아니라 가운데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았습니다. 거짓재판에 세웠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사람들이 눈에는 이것이 종교자들이 시기였고 로마의 정치였고 군중의 광기였는데 이사야 53장 10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여러분, 이 한줄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원하사” 이 고난을 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아서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이 인간의 범죄였는데 이사야는 이 모든 것 뒤에 하나님의 뜻이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설계하신 구원의 계획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놀라운 구조가 하나 드러납니다. 사실 이사야 53장은 1절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52장 13절에서 이미 시작됩니다. 이사야 52장 13절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는 것은 영광입니다. 이 예언의 첫 문장이 영광으로 시작하는데 바로 14절에서 갑자기 모습이 바뀝니다.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상하셨다는 겁니다. 영광에서 고난으로 급격히 변화됩니다. 그리고 53장 전체가 이 고난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그 모든 것, 꿰뚫리심, 으깨지심, 침묵, 악인들 사이의 죽음 그런데 53장 마지막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다시 영광입니다. 여러분 보이십니까? 52장13절 영광 53장 중반 고난, 53장 12절 다시 영광. 영광으로 시작해서, 고난을 지나서 영광으로 끝납니다. 이것이 이사야가 설계해 놓은 구조입니다. 고난이 끝이 아니라 두 영광사이에 고난이 끼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 영광을 내려놓고 고난의 한가운데로 들어오셨고 다시 영광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이사야가 그린 그림 그대로입니다. 영광에서 내려와 고난을 지나 다시 영광으로 그런데 여러분, 10절에는 단어보다 더 놀라운 것이 숨어 있습니다.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속건제물 히브리어 원문은 “아샴”입니다. 아샴 이 단어가 보통 단어가 아닙니다. 아샴은 레위기 5장과 6장에 나오는 제사 전문 용어로 다른 제사와 구별되는 특별한 제사입니다. 속죄제는 죄를 지었으니 죄를 용서해 달라고 드리는 제사인데 속건죄, 아샴은 배상하는 제사입니다. 레위기 6장5절. “그 본래 물건에 1/5을 더하여 돌려보낼 것이니.” 1/5을 더하여 20%를 더 갚으라는 겁니다. 빼앗은 것에 20%를 더 얹어서 돌려줘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이십니까? 이사야는 고통받는 종의 죽음을 아샴이라고 부른 겁니다. 단순히 죄를 용서받는 제사가 아니라, 빼앗긴 것을 넘치게 돌려받는 제사라고 이것은 빚을 갚는 것이 아니라 빚보다 더 많은 것을 돌려받는 것입니다. 은혜가 빚을 메꾸는 것이라면, 원래 상태로 돌아가면 제로가 됩니다. 그런데 아샴은 제로가 아닙니다. 제로에서 20%가 더 넘칩니다. 원래보다 더 풍성해지는 겁니다. 여러분, 이 원리를 바울이 로마서 5장 20절에서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더욱 넘쳤다. 원래 상태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넘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진리의 씨앗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바로 여기 이사야 53장 10절의 ”아샴“이라는 한 단어 안에 이미 심어져 있었던 겁니다. 700년 전 이사야가 심어놓은 씨앗을, 바울이 꽃피운 겁니다. 그리고 11절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의롭게 하며“ 히브리어 원문은 ”짜다크“입니다. 법정에서 판사가 무죄를 선언하는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죄인을 의인이라고 선포하는 것, 아샴으로 빚을 넘치게 갚으시고, 짜다크로 우리를 의롭다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샴이 말하는 것은 용서를 넘어서는 겁니다. 아샴은 용서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빼앗긴 보다 더 많이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죄가 망가뜨린 것보다 은혜가 더 넘치게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이 이 장을 피하는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이 고난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계획의 결과가 단순한 용서가 아니라 넘치는 회복이었다는 것. 이것을 인정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이 누구인지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10절에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하나 더 있습니다. 같은 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씨를 보게 된다. 후손을 본다는 겁니다. 날이 길 것이라 한다. 오래 사실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8절에서 분명히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졌다“고 했습니다. 죽으셨다는 겁니다. 죽은 분이 어떻게 후손을 보고 오래 사느냐? 이 모순을 2700년 동안 아무도 풀지 못했는데 1947년 사해 근처 한 동굴에서 사라졌던 단어 하나가 되살아났습니다.
다섯 번째 : 사라졌던 한 단어 8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가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끊어짐” 히브리어 원문은 “니그자르”입니다. , 산 자의 땅에서 완전히 제거된 것. 이것은 죽음입니다. 분명히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10절에서 이사야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후손을 본다는 겁니다. 날이 길 것이라 한다. 오래 사실 것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8절에서 분명히 끊어졌다고 산 자의 땅에서 제거되었다고 했는데 10절에서 “후손을 보고 오래 사실 것이다”라고 합니다. 같은 장 안에서 두 절 차이로 정반대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후손을 볼 수 있습니까? 죽은 사람이 오래 살 수 있습니까? 2700년 동안 이 모순앞에서 유대인 학자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았는데 1947년,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사해 근처 사막에서 베두인 목동 소년이 잃어버린 염소를 찾고 있었을 때 절벽에 동굴이 하나 보였습니다. 혹시 염소가 들어갔을까 싶어 돌을 던졌더니 무언가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소년이 동굴안으로 들어가니 오래된 토기 항아리 안에 가죽 두루마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해사본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이 이 두루마리를 동굴 속 항아리에 숨겨 놓은 것이었습니다. 2000년 동안 사막 동굴안에서 잠들어 있었던 이 두루마리를 열었을 때 그 안에 이사야서가 들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 된 이사야서 사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약 125년 전에 필사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여러분, 학자들이 이 사본을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히브리어 성경과 비교했습니다. 수천년 동안 손으로 베껴 쓰며 전해져 온 텍스트가 놀랍도록 정확하게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53장 11절에서, 아주 작은 차이 하나가 발견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히브리어 성경 53장 11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보고” 히브리어로 “이르에” 볼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보는지가 빠져 있습니다. 그냥 “볼 것이다”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사해사본에는 한 단어가 “오르”빛이 더 있었습니다. “그가 빛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여러분, ”빛을 보다“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관용구입니다. 이것은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욥기에서 태어나기 전에 죽은 아이를 ”빛을 보지 못한 자“라고 표현합니다. 빛을 본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8절에서 ”끊어졌다“고 죽으셨다고 했는데 11절에서 빛을 보리라”고 했습니다. 살아 계실 것이라는 겁니다.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시는 것, 부활입니다. 이사야는 부활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는데 “끊어졌다”와 “빛을 보리라” 사이에 부활을 기록해 놓은 겁니다. 그리고 이 “빛”이라는 단어가 수천년 필사 과정에서 사라졌는데 사라진 줄도 몰랐습니다. 2700년 동안 학자들이 “죽은 사람이 어떻게 후손을 보느냐”며 풀리지 않는 모순이라고 했던 바로 그 수수께끼의 열쇠가 사막 동굴 속 항아리 안에 잠들어 있었던 겁니다. 1947년에 목동 소년이 염소를 찾으려고 던진 돌 하나가 성경의 수수께끼를 풀어버린 겁니다. 사라졌던 한 단어가 2000년 만에 다시 빛을 본 겁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여러분, 우리 삶에도 사라진 것 같은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수십년 읽었는데 마음에 닿지 않았던 구절, 외우고는 있는데 경험하지는 못했던 약속 “이 말씀이 정말” 살아 있는 말씀인가?” 의심이 들었던 적이 없으십니까? 사해사본의 “빛”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동굴 속에서 하나님의 때가 되니까 목동의 돌 하나로 되살아났습니다. 여러분의 그 말씀도 하나님의 때가 되면 생각하지 못한 순간에 그 말씀이 빛으로 다시 떠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히브리어 한 단어가 열릴 때마다 십자가가 보이고 침묵이 예언대로 성취되고, 고난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부활까지 원문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 앞에서 유대인은 어떻게 했을까요?
여섯 번째 : 메시야라 쓰고 고난을 지웠습니다.
히브리어를 읽으면 십자가가 보이고, 침묵이 성취되고, 고난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부활까지 원문에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것을 모를 수 있었겠습니까? 알고 있었습니다.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한 겁니다. 그 과정을 보시면 마음이 더 아파지실 겁니다. 유대교에서 토라 다음으로 가장 권위있는 문헌이 탈무드입니다. 수백년에 걸쳐 유대 랍비들이 토론하고 기록한 방대한 문헌인 이 탈무드에 이사야 53장에 대한 토론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탈무드 산헤드린 98b입니다. 랍비들이 메시야의 이름에 대해 토론합니다. “메시야의 이름이 무엇이냐?” 여러 답이 나오는데 그 중 한 대답이 이렇습니다. “아픈 자” 또는 “문둥병 학자” 왜 이런 이름을 붙였겠습니까? 그 근거로 제시한 말씀이 바로 이사야 53장 4절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탈무드가 이사야 53장을 인용하면서 이 본문이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라고 기록한 겁니다. 탈무드는 기독교 문헌이 아니라 유대교의 핵심 문헌입니다. 유대교 안에서 유대인 랍비들이 이 장이 메시야에 대한 것이라고 인정한 것인데 더 놀라운 것은 타르굼입니다. 타르굼은 고대 유대인들이 히브리어를 잘 모르는 회중을 위해 회당에서 읽어주던 번역본이었습니다. 이 타르굼이 이사야 52장 13절을 어떻게 번역했는지 보시겠습니까? 히브리어 원문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타르굼은 이것을 “보라 나의 종 메시야가 형통하리니” 원문에 없는 단어인 메시야를 넣었습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 번역자가 스스로 판단해서 “이것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다”라고 확인하며 써넣은 겁니다. 여러분 여기까지 보면 유대인들도 이 장이 메시야에 대한 것이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그 다음이 놀랍습니다. 같은 타르굼이, 53장으로 넘어가면서 이상한 일을 합니다. 고난당하는 부분이 나오면 메시야가 고난받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가 적에게 고난을 주는 것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원문에는 “그가 상함을 받았다”고 되어 있는데, 타르굼에서는 “그가 나라들을 물리쳤다”로 바뀌어 있습니다. 메시야라고 써놓고 고난은 지운 겁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고난당하는 메시야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정복자였습니다. 로마를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강력한 왕이었는데 이사야 53장이 그리는 메시야는 꿰뚫리고, 으깨지고, 침묵하고, 악인들 사이에서 죽는 분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겁니다. 메시야인 줄은 알겠는데 이런 메시야는 원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메시야라는 단어는 남겨두고 고난이라는 내용만 지웠습니다. 여러분, 이 장면이 안타깝지 않습니까? 자기가 원하는 부분만 남기고, 원하지 않는 부분은 지웠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릅니다. 11세기 유럽에서 십자군 전쟁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십자군이 지나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이 학살당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유대인들이 죽어나갔습니다. 이 시대에 유대교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주석가가 라쉬라는 랍비는 이사야 53장의 해석을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이 고통받는 종은 메시야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다.” 이스라엘이 이방나라들 사이에서 고통받는 것을 묘사한 것이라고 해석한 겁니다. 라쉬 이전까지 유대교의 주류 해석은 메시야 해석이었는데 라쉬 이후에 민족 해석이 주류가 됐습니다. 왜 바뀌었겠습니까? 십자군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유대인을 죽이고 있는 상황에서 “이사야 53장의 고통받는 종이 예수그리스도”라는 해석을 받아 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자기 민족을 학살하는 자들의 메시야를 인정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해가 됩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6절을 다시 보십시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와 “그”가 분명히 구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고, “그”가 담당했습니다. 만약 고통받는 종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의 죄를 담당했다는 말이 됩니다. 자기가 자기 죄를 담당한다? 그것은 대속이 아닙니다. 대신 죽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그”는 다른 존재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그”가 대신 짊어진 겁니다. 이것이 이 구절의 구조입니다. 이것은 민족전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 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500년 뒤인 16세기 랍비 모쉐 알쉬흐가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리 랍비들은 한 목소리로 이 본문이 메시야 왕에 대한 것이라고 확인하고 동의합니다. 라쉬 이후 50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메시야 해석이 원래의 전통이었다고 인정한 겁니다. 알고 있었습니다. 탈무드에도 기록했습니다. 타르굼에도 써넣었습니다. 그런데 고난은 지웠고 해석을 바꿨습니다. 500년이 지나서도 원래 해석이 맞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돌아가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 같으십니까?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외우고도 있는데 그 말씀 중에 내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만 살짝 넘기지 않습니까? 내가 원하는 방식의 하나님만 믿고, 내가 불편한 부분은 덮어두지 않습니까? 타르굼의 번역자가 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메시야라고 써넣고, 내가 원하지 않는 부분은 지운 겁니다. 우리도 혹시 그렇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은혜의 말씀을 받아들이면서 회개의 말씀은 넘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축복의 약속은 붙들면서 십자가의 부르심은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유대인이 이 장을 건너뛰는 여섯 번째 이유이고 동시에 우리 자신을 향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2700년 동안 이 장을 넘기고, 지우고, 바꾸고, 피해 왔다면 이 장을 제대로 읽은 사람은 정말 없었을까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일곱 번째 : 이 장을 넘기지 않은 사람, 이 장을 피하지 않은 사람, 이 장을 읽다가 멈춰선 사람을 그려 보시겠습니까?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광야길 위에 마차 한 대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관리가 예루살렘까지 예배를 드리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에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 1500km가 넘는 그 먼 길을 무엇 때문에 왔겠습니까? 이스라엘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서 수개월 걸려서 온 겁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길인데 이 사람이 마차안에서 이사야 53장 7절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떨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바로 유대인들이 건너뛰는 바로 그 장을 읽는 중입니다. 회당에서 읽지 않는 바로 그 장입니다. 2700년 동안 넘기고, 지우고, 바꾸고, 피해 온 바로 그 장입니다. 그런데 이 에디오피아 사람은 건너뛰지 않았고 읽고 있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알 수 없었습니다. 이 고통받는 종이 누구인지 이 침묵하는 양이 누구인지 이 끊어진 생명이 누구의 것인지? 바로 그때였습니다. 성령께서 빌립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마차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나님이 빌립을 보내십니다. 빌립이 마차 가까이 다가갔을 때 안에서 이사야 53장을 소리내어 읽고 있었습니다. 빌립이 물었습니다. “읽는 것을 깨닫느냐?” 내시가 대답했습니다.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여러분 이 대화가 마음에 닿으시지 않습니까? 이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서 1500km를 왔습니다. 성경을 읽고 있는데 깨닫지 못합니다. 빌립이 마차에 올라탔습니다. 내시가 물었습니다. ”선지자가 이 말을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여러분, 이 질문이 바로 이사야 53장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었습니다. 2700년 동안 유대인들이 피해 온 질문, 탈무드에도 토론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던 질문, 타르굼에서 메시야로 써넣고 고난은 지워버렸던 바로 그 질문, 라쉬가 답을 바꿔버렸던 바로 그 질문, ”이 고통 받는 종이 누구입니까?“ 사막 한가운데 마차 안에서 이 질문이 다시 터진 겁니다. 빌립이 이 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건너 뛴 이사야 53장을 빌립은 건너뛰지 않았습니다. 이 장에서 시작했고 이 장 안에서 예수님을 보여주었습니다. 꿰뚫리신 그분, 으깨지신 그분, 입을 열지 않으신 그분,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그분, 끊어졌다가 빛을 보신 그분, 이사야가 700년 전에 그린 그 모든 그림이 예수그리스도라는 한 이름안에서 하나가 된 겁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을 보십시오. 길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내시가 말했습니다.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침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여러분, 사막 한가운데입니다. 마차 하나 두루마리 하나 물웅덩이 하나 그리고 두 사람,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53장을 읽다가 그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물이 보이자 “내가 침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고 말합니다. 이 한 장을 읽고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빌립이 물에서 올라왔을 때 이 사람의 삶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이 장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열어 온 이사야 53장 히브리어 원문을 한 단어씩 열어보았습니다. 할랄, 다카, 쿨라누, 아샴, 니그자르, 오르 이 단어들이 하나씩 열릴 때마다, 유대인이 왜 이 장을 피할 수 밖에 없는지 그 이유가 보였습니다. 너무 선명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장을 읽으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처음 만난 에디오피아 내시처럼 “내가 침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사야 53장 앞에서 멈추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찔림”이라고 가볍게 읽어 왔던 그 한 단어가 꿰뚫리심이셨다는 알게 하셨습니다. “상함”이라고 지나쳤던 그 한 단어가 으깨지심이었다는 보여주셨습니다. “그의 이야기”인 줄 알았던 이 말씀이 “우리의 이야기”인 것을 깨닫게 하여 주셨습니다. 입을 열 수 있으셨는데 열지 않으셨고 침묵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스스로 잠잠하셨습니다. 주님은 영광에서 내려오셔서 고난을 지나 다시 영광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아샴의 약속대로, 빼앗긴 것 보다 더 넘치게 채워 주셨습니다. 용서만이 아니라 회복까지, 회복만이 아니라 넘치는 은혜까지 부어 주셨습니다. 2000년 동안 사막 동굴 속에 감추어 두셨던 “빛”이라는 한 단어를 되살려 주셨습니다. 죽으셨지만 다시 사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며 우리의 소망입니다. 주님, 우리도 타르굼의 번역자처럼 원하는 부분만 붙들고 불편한 부분은 넘겨왔습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회개합니다. 에디오피아 내시처럼 이 말씀안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고백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셨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립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셨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습니다. 이 메시야에 대한 고백이 오늘로 끝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