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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란
첫새벽 붓을 세워 어둠 한끝 잡아챈다 단전에 힘을 모아 고개 불끈 세워 들 때 한 획씩 삐쳐 올린 선, 반가좌로 품고 있다
여명의 속삭임이다, 꽃대의 문 열리고 정화수 물을 긷는 여인의 가쁜 숨소리 멈춰 선 시간 사이로 비사祕史가 깨어난다
온몸에 초록 감고 바다 건너 마주한 우리 미쳐 뛰는 눈보라가 허공을 칼질해도 눈가엔 그윽한 향기 발묵하듯 퍼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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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서는 바다
1. 수만 구멍 숨을 죽인 와온 해변 갈대밭 끝 짱뚱어 노려보던 흰 구름도 흘러간 뒤 사뿐히 노랑부리저어새 갯벌에 진을 친다
2. 끓는 노을 한 입 물고 삿자리 누운 아버지 어장에 든 새를 쫓듯 훠이 훠이 손 흔들다 마른 혀 연방 축이며 먼 허공만 응시한다
3. 쓰나미 또 몰려오나, 허기진 섬과 섬에 날선 칼끝 곧추세워 노려보는 저 왜구들 왜바람 푸른 촉 앞에 난바다가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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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한 뼘 담장 밑에 장미꽃을 심어놓고
가끔씩 물을 주며 몇 달을 다독인다
장미가 웃는다는 말 은유인 줄 알았다
이파리 생채기에도 잠 못 들고 뒤척여도
꽃이 말을 한다는 것 믿지 않고 살았는데
이제는 화사한 낯을 내 어깨에 기댄다
혼자 입술 깨물며 울기까지 한다는 건
은밀한 관계인가, 영문 모를 연인이여
더 이상 감당키 어려워
못들은 처!
모르는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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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섬 목각
차가운 물안개가 밀려왔다 밀려갈 때 날선 칼끝 에인 자리 요철이 뚜렷하다 파도가 피운 꽃송이 뚝뚝 지는 동백섬에
새벽까지 홀로 앉은 포구의 낡은 벤치 어둑서니 눈길마저 맺혔다 흩날리고 한 발도 꿈쩍할 수 없는 일망무제 저 단애
꽃비린내 몸살 앓는 움푹 팬 가슴 한켠 꽃 대신 불을 밝힌 가로등이 들어앉고 붉게 핀 여명 바다로 첫 배가 출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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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이 질 때
사풋 달뜬 볕과 대지 사통하는 돌담 아래 환하게 웃기만 하던 꽃잎들이 떨어진다 우윳빛 치맛자락에 이슬 담뿍 받아 안고
마른 풀 다시 서는 새삼스레 낯선 시간 햇살의 화냥기를 저도 몰래 받았는지 마당가 순결한 봄이 멍 자국을 덮고 있다
살랑대는 바람결에 하늘빛 더 짙은 날은 허울뿐인 언약들이 희부옇게 흩날리고 얼룩진 과거를 씻는 초록파도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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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 못
완강한 벽을 두고 미당기는 힘의 균형
이물감 떨쳐내듯 살과 살을 섞을 때
비로소 풀리는 빗장 새살 쑥쑥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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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화가
빛과 선의 구족화가, 입도 발도 화필畫筆 드네 바람의 손짓 따라 화구를 등에 진 채 지상의 쓸쓸한 숲속, 길 떠나는 보헤미안
하늘샘에 고인 이슬 더듬이로 핥아먹고 돌담 벽, 한 땀 한 땀 끌고 가는 긴 화폭 쉼 없는 오체투지로 하루를 접고 펴며
햇살에 되비춰오는 투명한 저 붓놀림 꽃피는 화판 가득 삐친 획 길이 될 때 비로소 풍경에 드는 한 생이 오롯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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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엽苞葉
초록빛 블라우스 마지막 단추를 푼다 잎새 사이 하얀 나비 수줍은 눈빛 앞에 꿀벌이 산딸기나무 붕붕 돌다 돌아간다
세상을 바꿀 듯이 창궐하는 바이러스 거짓말처럼 봄은 가고 계절이 아프다 누군가 혼잣말을 하며 돌아앉은 숲속에
하늘이 흔들리고 산자락이 출렁이고 다가선 명지바람 온 몸을 감싸 안는다 아무 일, 아무 일 없다는 듯 봄은 다시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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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위의 식사
연초록 움이 돋는 공원 한편 산책로에 환절기 코끝 찡한 흙냄새가 스멀댄다 덩달아 길고양이들 송곳니를 세운다
고수레 흘려가며 세모 네모 씹는 소리 국물 없이 반찬 없이 꾸역꾸역 목이 메어 허기에 주려진 눈빛 설움까지 한 입 문다
먼 도시 골목 따라 깨금발로 넘는 길에 앙가슴 안쪽으로 돌을 쪼아 탑 앉히듯 맨발에 닳아진 족문 지도 다시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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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레기 어죽
명치끝 고인 울음 물소리로 차오른다 물안개가 덮고 있는 서러운 척추마디 족대 속 물길 거슬러 낯선 강을 세운다
안개 걷힌 강물 밖에 불티가 흩날린다 얼기설기 모닥불에 솥 하나 걸어놓고 천렵의 제단을 찾는 다래끼 속 숨탄것들
둔치에서 숨 고르던 애호박 풋고추도 펄펄 끓는 물속으로 자맥질을 시도한다 덩달아 구름 한 덩이 고명으로 앉히고,
작아도 아린 마늘 속속들이 스며들고 맹물 같은 가슴에도 한소끔 뜸이 들 때 어죽에 쌓인 하루가 국수처럼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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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자꽃 아다지오
수런대는 소문들이 가지에 걸려 운다 파장 긴 오후 햇살 방충망을 넘나들고 황혼녘 새 한 마리가 창밖을 기웃댄다
바람의 기억들이 몸속으로 스며들 때 허공중에 떠나가는 지난 여름 발자국들 풀빛을 머금은 향이 가을을 손짓한다
해묵은 설렘처럼, 풋풋한 약속처럼 잎사귀 쭈뼛쭈뼛 꼭꼭 여민 계절 앞에 고단한 여정의 멍울 순백으로 표백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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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 맛
흰 봉투 들고 가서 방명록을 적고 나면 검은 양복 사람들이 눈물 없는 곡을 한다 허공에 파도가 일 듯 하늘이 흔들린다
자꾸만 눈물샘을 자극하는 향불연기 까닭 모를 납덩이가 목구멍에 걸릴 때 거나한 종이컵 속에 저승 맛이 배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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쏙의 습격
선재도 검은 펄에 섬과 섬 잇는 길목 갑옷을 등에 업고 바지락이 길을 낸다 쏙 쏙 쏙 골 진 등허리 물방울 번지는 날
마파람 해무 물고 뭍에 저리 부서져도 들불같이, 깃발 같이 숨죽인 저 되놈 배 떼 지어 아버지 바다 저인망을 내리고
성난 파도 먼발치서 갯고랑 다 내주고 경계 없는 지하 셋방 햇살 이운 창문 너머 해종일 죽지 휜 등대 가쁜 숨을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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