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竹嶺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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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嶺路는 단양과 풍기 사이를 넘나드는 國道로서 확장되어 있다. 그러나 옛 길은 산허리를 깍아 넓혀진 지금의 아스팔트길이 아니라 輔國寺址가 있는 계곡쪽의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의 양지말-기동-소야-버드밭을 지나는 계곡길을 따라 죽령을 넘어서 풍기읍의 속칭 ‘시맥골’을 지나 喜方寺驛이 있는 水鐵洞과 昌樂洞에 이르는 小路이다. 현 국도는 지형에 따라 산허리를 끼고 돌아 구불구불한데 中央線 鐵路는 죽령의 舊道 밑에 터널을 뚫어 곧바로 관통하고 있다.
죽령은 阿達羅王 5년(158)에 개통된 것으로《三國史記》에 처음 나타나며 그 2년 전에는 계립령이 개통되었다.註 021 그런데 신라에서는 소백산맥쪽으로 진출하기 30여 년 전에 이미 嶺東의 동해안을 따라 북진하였다.《三國史記》에 의하면 祗摩王 14년(125) 정월에 靺鞨註 022이 新羅北境에 쳐들어와 官吏와 백성을 죽이고 노략하더니 7월은 또 大嶺柵을 음습하기 위하여 泥河를 지나오므로 百濟에 구원을 청한 사실이 있고,註 023 逸聖王 4년(137) 2월에는 靺鞨이 塞에 들어와 長嶺의 五柵을 불질러 同王 7년(140) 2월에 長嶺에 木柵을 세워 靺鞨을 방비하였다.註 024 여기서 大嶺은 강릉 서쪽의 大關嶺으로, 長嶺은 강원도 방면의 어느 곳으로 각각 추정되고 있다.註 025 따라서 신라는 동해안을 따라 北上하여 A.D 1세기 초에는 강원도지역에 세력을 미치었고 1세기 중엽에는 소백산맥의 계립령과 죽령을 개통하여 북방진출의 거점을 확보하였다. 이때 竹嶺以北은 百濟의 세력권에 있었다고 보여지며 그 경계는 대략 자연지세에 따라 죽령과 계립령을 잇는 선이 되었을 것이다. 竹嶺以北이 백제의 영역이었다는 사료의 기록은 없으나 祗摩王 14년(125)에 靺鞨이 新羅北境의 大嶺(大關嶺)을 습격하였을 때 백제가 즉시 군사를 파견해 구원해 준 일이나, 단양의 赤城에서 百濟系의 토기가 출토되고 있는 점,註 026 또는 백제의 積石塚이 제원군의 여러 지역에서 발굴조사된 점으로 보아註 027 충주·제원·단양의 남한강 상류지역이 백제의 세력권 안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세기 중엽에 소백산맥을 경계로 신라와 백제가 대치한 이후 6세기 중엽의 眞興王代까지 무려 400년 간이나 이 지역의 역사변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三國史記》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신라는 眞興王 12년(551)에 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하였다.註 028 이 때 竹嶺以外 高峴以內의 10郡을 攻取하였는데 여기서 10郡이 정확히 어느 지역인지 알 수는 없으나 眞興王 12년에 신라군이 죽령을 넘었을 때는 죽령이북은 이미 고구려의 영역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면 언제부터 고구려 세력이 남한강 상류의 충주·단양지역에 미쳤을까. 그것은《三國史記》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廣開土王陵碑文의 永樂 6년(396)조에 고구려가 공취한 백제의 58城 가운데 하나인 阿旦城을 단양군 영춘면의 溫達城으로 비정하는 설註 029을 따르면 고구려가 백제의 한강상류지역을 차지한 것은 廣開土王 6년(396)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4년후인 同王 10년(400)의 庚子年 出兵 이후 고구려의 정치적 영향력과 영토는 신라지역과 낙동강 하류 일대까지 깊숙히 미치었다.註 030 《三國史記》〈地理志〉를 비롯한 각종 地理書에 신라의 영역이었던 죽령 이남의 榮豊·安東·盈德·蔚珍 등지에 고구려의 지명이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고구려가 소백산맥을 넘어 경상북도 지역에 정치적·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한 시기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말내지는 6세기 초라는 견해註 031와 고구려의 영토는 죽령·조령일대로부터 南陽灣을 연결하는 선까지였다고 하는 설이 있다.註 032 그러나 고구려의 죽령 이남 진출은 고구려의 지명이나 順興의 壁畵 古墳 등 考古學·美術史 자료에 의해서도 분명해 보이며 그 시기는 광개토왕 10년(400)의 출병 때로 짐작된다. 그리고 이때의 중요한 군사로는 죽령이 될 수밖에 없다. 고구려군이 남하한 길은 忠州-淸風-丹陽-永春에 이르는 남한강 줄기였고 단양에서 죽령을 넘어 영주지역의 洛東江을 따라 신라지역으로 진출하였다고 생각할 때 소백산맥의 여러 嶺路 중에서 고구려와 신라의 교통로는 竹嶺路가 가장 중요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6세기 중엽에 이르면 다시 신라가 죽령을 넘어 漢江流域으로 진출한다.《三國史記》眞興王 12년조에 왕이 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략하여 10개의 郡을 탈취하였다는 내용이 보이며, 列傳 居柒夫조에는 眞興王 12년에 居柒夫 등 8장군에게 명하여 百濟와 더불어 高句麗를 침공하였는데 백제인은 먼저 平壤(北漢山城)을 격파하고 居柒夫 등은 乘勝하여 “竹嶺以外高峴以內十郡”을 취하였다고 좀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10郡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주장이 있으나 신라세력이 죽령을 넘었음은 분명하므로 단양은 늦어도 眞興王 12년(551)에 고구려에서 신라의 영역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단양이 신라에 속하게 된 시기는 위의 ‘竹嶺以外’의 표현만으로 단정지을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이미 그 이전부터 신라는 地方經略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동해안 지역은 일찍부터 북진을 서둘러 智證王 6년(505)에 悉直州(三陟)을 설치하고 異斯夫를 군주로 삼았으며 智證王 13년(512)에는 역시 伊飡 異斯夫가 何瑟羅州(江陵)의 군주가 되어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다. 또한 내륙지방에 있어서도 신라는 백제·고구려세력을 구축하여 法興王 12년(525)에 大阿飡 伊登으로 沙伐州(尙州)의 군주로 삼아 일찍부터 管山(沃川)·西原(淸州)·母山(鎭川)지방으로 출진하고 眞興王 11년(550)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道薩城(天安)·金峴城(全義)을 빼앗았으며, 이듬해에는 國王이 친히 娘城(淸州)에 巡守하여 國原(忠州)에 있던 于勒을 불러 河臨宮에서 加耶琴을 연주케 할 정도로 拓境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청주·충주와 연접되어 있는 단양이 眞興王 12년까지 고구려 세력 밑에 머물러 있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註 033
정확한 연대는 앞으로도 연구가 계속되겠지만 6세기 중엽에는 단양지역이 신라영역으로 완전히 귀속되었다. 죽령은 이제 後鎭이 되었고 단양의 赤城과 함께 城柵 등 군사시설을 견고히 하면서 북진의 거점으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라세력은 계속 북상하여 眞興王 18년(557)에는 國原(忠州)을 小京으로 삼고 新州(廣州)를 폐하고 北漢山州를 두었으며, 同王 29년(568)에는 北漢山州를 폐하여 南川州(利川), 比列忽州(安邊)를 폐하여 達忽州(高城)를 둔 것으로 보아 대체로 신라세력은 서울 근교의 한강유역과 江原道 高城까지 미치어 고구려와 공방전을 벌인 듯하다. 그러나 고구려에서는 失地回復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여 嬰陽王 1년(590)에 溫達이 이끄는 군사가 阿旦城 아래에 이르렀다가 溫達의 전사로 실패한 일이 있다.《三國史記》溫達傳에 보면 陽岡王(嬰陽王)이 즉위하자 溫達은 신라에 빼앗긴 漢北의 땅을 되찾기 위해 자신에게 군사를 줄 것을 요청하여 왕으로부터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떠나면서 溫達은 鷄立嶺과 竹嶺以北의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서하였지만 신라군과 阿旦城 아래서 싸우다가 화살을 맞고 노상에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註 034 阿旦城의 위치는 서울의 廣壯津 北岸에 있는 阿旦城(峨嵯山城)으로 비정하는 설이 있었으나註 035 丹陽의 永春이 본래 高句麗의 乙阿旦縣이었음을 주목하여 永春의 古治所 내지는 鎭城이라 할 수 있는 溫達城을 阿旦城 즉 乙阿旦城으로 추징하는 설註 036이 제기된 이후 廣開土王碑文의 永樂 6년조에 왕이 親征하여 공취한 58城 가운데 하나인 阿旦城과 광개토왕 사후 守墓家로 差出된 ‘新來韓穢’ 31城 가운데 하나인 阿旦城이 바로 溫達城이라는 주장註 037이 나와 매우 설득력을 갖고 있다. 필자도 아단성을 온달성으로 비정하는 설에 동의하는 바이며, 溫達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한강상류의 永春地域에까지 일시적으로 세력을 떨치었던 시기는 嬰陽王 1년(590) 무렵의 6세기 말로 생각한다. 즉 眞興王 12년(551)에 신라가 죽령 이북의 10郡을 빼앗고 丹陽新羅赤城碑를 세운지 40여 년 후이다. 그런데 이 때 고구려군은 阿旦城(溫達城)의 탈환에 실패한 것으로 보아 竹嶺以南의 회복 역시 이루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신라 善德王 11년(642)에 金春秋가 고구려에 군사를 청하러 사신으로 갔을 때 고구려왕(寶藏王)이 죽령은 본시 우리 지역이니 만일 竹嶺西北의 땅을 돌려 주면 원병을 보내겠다고 한 말이나 金春秋가 이를 듣지 않아 감금당하였을 때 金庾信이 1만의 결사대를 거느리고 한강을 지나 고구려 남쪽 경계에 들어 갔다는《三國史記》의 기록으로註 038 보아 더욱 분명하다. 또한《三國史記》의 金庾信 列傳에 보면 金春秋가 고구려에 갔을 때 고구려왕이 麻木峴(竊立嶺)과 竹嶺은 본래 우리나라 땅이니 돌려주지 않으면 돌아 갈 수 없다고 위협하기도 하였다.註 039
따라서 죽령은 신라측에서 阿達羅王 5년(158)에 처음 개통한 이후 백제와의 경계가 되었으며 廣開土王의 南征으로 同王 6년(396)에 永春의 阿旦城(溫達城)이 고구려의 영역이 되면서 고구려와의 접경지대가 되었다. 그러나 4년 후인 同王 10년(400)의 庚子年 출병으로 죽령 이남의 榮豊·安東·盈德·蔚珍 등지에 고구려 세력이 미치면서 죽령은 고구려측에 속하여 신라로 통하는 교통로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6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眞興王의 북진으로 죽령은 다시 신라에 속하였는데 그 시기는 죽령 이북의 10郡을 공취한 眞興王 12년(551)이나 그보다 약간 이른 시기였을 것이다. 그것은 순흥지역에 신라의 벽화고분이 法興王 25년(535) 무렵에 축조된 것으로 보아서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는 죽령에 대한 사료의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지리적인 여건상 남북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로서 문물의 유통과 人馬의 통행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안동지방에서 서울·開城으로 통하는 길로서 죽령을 경유한 사실이《高麗史》에서 간혹 보이며註 040 군사적으로도 역시 중시되어 고려태조 王建이 後百濟의 甄萱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일 때인 태조 11년(928) 8월에는 甄萱 휘하의 장군 官昕가 烏於谷에 군사를 주둔시키는 바람에 竹嶺路가 막히었던 일註 041과 禑王 8년(1382) 3월에 倭가 寧越·禮安·榮州·順興·甫州(醴泉)·安東에 이르더니 4월에는 드디어 竹嶺을 넘어 丹陽郡에 침입한 사실註 042 등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壬辰倭亂을 겪으면서는 鳥嶺·火峴과 함께 竹嶺의 전략적 중요성이 자주 강조된 바 있으며 오늘날에도 철로와 국도가 통과하는 교통상의 요지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