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계단에 앉아있었다.
붉은 조명이 싸구려 카펫을 덮은 계단을 내리쬐고 있었다. 그곳은 시종일관 텁텁한 냄새가 났다. 할머니의 여관은 신기한 곳이 많았지만 나와 동생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면 아버지와 엄마가 언짢은 기색을 한다. 그러니까 나는 늘 얌전히 카운터 안쪽 보이지 않는 곳에 앉아 책만 줄곧 읽곤 했다.
책을 읽다가 갑자기 지루해서 불현듯 계단을 올라가다 보니 할머니가 있었다. 계단에 앉은 할머니는 뿌연 담배연기 속에 파묻혀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희미해진 연기 속에서 먼 곳을 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할머니는 그제야 당혹스러운 눈빛을 하곤 손을 휘저어 연기를 흐트러뜨렸다.
벌떡 일어나 내 손에 무언가 꼭 쥐여준 할머니는 "할아버지한테 말하면 안 된다."라고 말하곤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허둥지둥 계단을 내려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다가 손을 펴보니 눈에 보석이 박힌 앵무새 모양의 금빛 라이터가 있었다. 라이터의 몸체는 도자기 문양처럼 화려하게 꽃이 그려져 있었다. 앵무새 머리를 뒤로 젖히자 찰칵하고 불이 올랐다.
나는 그것을 주머니에 넣었다.
집에 와서는 서랍 속 보물상자 안에 넣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가끔 열어 찰칵 불을 댕겨보던 그 라이터는 아무리봐도 반짝반짝 보석같았다. 어른들이 흔히 쓰는 투명하고 기름이 찰랑이는 것이 보이는 라이터랑은 달랐다.
이건 할머니의 보물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가끔 라이터를 꺼내 찰칵거리며 구경했다.
할머니가 여관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던 순간에도 라이터는 그 상자 속에 아무도 모르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즈음 나는 라이터의 존재를 잊고 지냈다. 끝내 할머니가 그 라이터를 아까워했는지 묻지 못했다. 얼마나 당황했으면 아이에게 라이터를 쥐여줬는지도.
나는 어른들이 우리에게 '할머니는 자다가 갑자기 돌아가셨다'라고 한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할머니는 그렇게 간단히 돌아가실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그 죽음과 관련된 것은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이후 나이가 많이 들어 엄마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던 순간까지도. (사실 내 남동생은 아직도 '진실'은 모른다.)
애초에 그녀는 우리의 친할머니도 아니었다.
할아버지와 재혼했을 뿐인 그녀의 존재가 우리의 '친할머니'라는 것조차 어른들의 간단한 거짓말이었다. 어른들은 늘 그런식의 거짓말을 한다. 진실인 듯 포장된 가벼운 거짓말을.
어쩌다보니 그 당시 어른들만큼 나이를 먹은 나는 혼자 담뱃불에 불을 붙이다가 문득 피가 통하지도 않은 귀찮은 손녀와 담배 연기를 사이에서 눈이 마주쳤을 때 소스라치게 놀랐을 그녀의 심정만을 겨우 돌이켜 볼 따름이다.
또는 어느 날 오후 그 여관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심정을.
#scene 2
"개미를 거미에게 먹이로 줬어요."
"왜 그랬니."
"거미가 배고플까 봐요."
"개미가 죽지 않아도 됐는데 갑자기 죽게 되었겠구나."
"그렇지만 거미도 배가 고프면 죽잖아요."
"정말 거미가 배가 고플까 봐 걱정했니?"
"네. 거미가 굶고 있을까 봐 걱정했어요."
"그래. 그렇지만 거미에게 밥을 주는 건 하느님에게 맡기고 개미의 목숨도 살려주자."
"네."
사실이 아니다.
나는 거미의 굶주림 따위에 관심은 없었다. 굴 같은 곳에 터널같이 쳐진 거미줄 위에 큰 개미를 잡아다가 던져 넣는다. 허우적거리는 개미가 흔드는 거미줄이 곧 거미에게 전달이 된다.
심장을 졸이며 기다린다. 쿵쿵. 내 심장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곧 시커먼 다리가 아주 빠르게 후다닥 나온다.
다리만 보였는데 개미가 매달렸던 곳엔 아무것도 없다. 그 신속한 잔혹성에 매료된다.
와, 방금 전까지 살아있었는데 죽었어. 저 개미가 방금 바닥을 기고 있었는데 이젠 없어. 쟤 세상이 이렇게 끝장났네. 내가 직접 하는 것보다 거미에게 시키는 게 더 재밌잖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성당에 가서 신부님께 말했다.
"거미가 배가 고플 거예요."
순진한 아이의 눈을 하고 잔혹성에 두근거리는 마음이 들릴까 두려워하며 나는 그렇게 거짓을 고했다. 단순하고 새빨간 거짓말.
#scene 3
죽으면 끝인데 알게 뭐람.
앞에 앉은 연인이 다음 생에도 만나고 싶은지 물었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다.
드디어 나에게 영원한 평온이 올 텐데 다음에 다시 태어나라는 끔찍한 전제까지 붙여가며 로맨틱한 답변을 바라는 거야? 너는 정말 나를 모르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구나.
그렇지만 늘 옳은 대답이란 존재하는 법이다. 나는 겨우 입술에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그럼. 다음 생에도 꼬옥 만날 거야.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는데 당연한거 아니야?"
연인은 만족한 듯 내 품에 얼굴을 파묻고 나는 내 차가운 마음이 진심인지, 달큼하고 옳은 말이 진심인지 여부를 가리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 노력을 통해 거짓은 겨우 진실이 되려고 껍데기를 뒤집어쓴다.
#scene 4
영원하다는 말은 거짓이라고 생각해. 과격한 생각인 것 알아.
내겐 아무것도 없어.
너무 많은 껍질을 뒤집어썼어. 나는 이 가면과 저 껍질을 이어붙여 그때그때 '옳은 대답'을 할 줄 알도록 키워졌고, 그 '옳은 대답'들이 나를 만들어내지. 언제든 허물어질 수 있는 모습이야.
모래로 쌓은 성이고, 먼지로 짠 카펫처럼 내 모습은 안개같더라.
도무지 내 모습이 잡히질 않는데 어떻게 내가 영원이라는 개념이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겠어. 내 안에는 아무것도 없단다. 늘 아무것도 없었고 내겐 껍질 뿐이었단다. 그렇게 영원은 멀어지고 영원을 필요로 하는 개념들이 다 허상이되더라.
그렇게 영원은 내게 거짓이 되었다.
현실 속 내 눈에 보이는 진실만을 진실이라고 믿었는데, 내 눈 앞엔 아무것도 없더라.
진실이 뭐가 있기나 하더냐.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 거짓은 그토록 너절하게 널려있더라.
물론 가장 너절한 거짓은 나 자신이란다.
#scene 5
옥상에서 뛰어내린 할머니를 떠올린다. 할머니의 라이터를 떠올린다.
거미에게 개미를 주곤 신부님께 죄인지 물었던 날도 떠올린다.
다음 생도 함께인지 물어본 사랑스럽던 연인의 모습과 피로함을 숨기며 대답하던 내 미소를 떠올린다.
무엇 하나 단단한 부분이 없는 거짓투성이 껍질을 뒤집어쓴 내 모습도 떠올린다.
눈을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