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로(宋綺老)
1830년(순조 30)∼1898년(고종 3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중호(仲皓), 호는 송석(松石).
아버지 송윤희(宋潤熙)와 어머니 광산김씨(光山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864년(고종 1) 음사(蔭仕)로 휘릉참봉(徽陵參奉)이 되었으며, 이후 전생서부봉사(典牲暑副奉事)‧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 한성돈녕(漢城敦寧)‧종묘서령(宗廟署令) 등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평강현감(平康縣監)과 의령현감(宜寧縣監), 김제군수(金提郡守)를 지냈다. 그 외 1885년(고종 22) 광주목사(光州牧使)를 거쳐 서흥부사(瑞興府使)를 제수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공주판관(公州判官)에 제수되었다가 1887년(고종 24)에 진주목사(晉州牧使)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에도 계속 외직을 맡아, 장흥부사(長興府使)와 순창군수(淳昌郡守)‧옥천군수(沃川郡守)를 지냈다.
1889년(고종 26) 연안부사(延安府使)가 되었다가, 2년 뒤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올랐다. 얼마 후 다시 부호군(副護軍)이 되었으며, 합천군수(陜川郡守)로 자리를 옮겼다. 1892년(고종 29) 거창부사(居昌府使)로 임명되었다가 다시금 공조참의에 제수되었다.
그 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대전 회덕(懷德)으로 돌아왔다.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유성에서 문석봉(文錫鳳)이 의병(義兵)을 일으켰는데, 이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기도 했다.
1898년(광무 2) 2월 26일 사망하였다. 내신협판(內新協辦)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송석집(松石集)』 5책(冊)이 전한다.
암각문 2에 새겨진 도곡 송종운이 송기로의 아들이다. 송종운과 함께 암각기문 2에 새겨진 다암 위영복의 문집인 『다암유고』 부록에 ‘四一居士(宋綺老)爲茶嵒斯文書屬焉’라는 글이 있어, 장흥부사로 왔던 송기로, 그의 아들인 송종운, 그리고 다암 위영복이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송기로(1830[순조 30]∼1898[고종 35])는 조선후기의 문신이며 문집으로 『송석집(松石集)』 5책이 있다.
다암 위영복과 송기로 부사의 아들 송종운
- 암각문 2. 同遊 / 茶嵒居士 魏榮馥 / 道谷居士 宋鍾雲 / 癸未 四月 來遊
계미년 4월에 다암거사 위영복과 도곡거사 송종운이 함께 유람한 내용이다. 다암 위영복(1832~1884)은 천관사 사적지인 『지제지』를 편찬한 존재 위백규(1727∼1798)의 문집을 편찬한 인물이다. 위영복의 활동 연대로 보면 기문상의 계미년은 1883년(고종 20)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위영복과 송종운이 함께 천관사를 올랐음을 알 수 있다.
위영복의 자는 방서(芳瑞), 호는 다암(茶嵒)이며 문집으로 『다암선생문집』이 있다. 4권 1책으로 1995년 한국역대문집총서 1475집으로 경인문화사에서 영인본이 간행된 바 있다. 권 1 시에 ‘與琴陽尹進士(包叔)遊九龍峯’, ‘與春川李進士(奎鳳)登天冠山’등 천관산과 구룡봉 제목의 시가 있다. 권 4 부록에 ‘四一居士(宋綺老)爲茶嵒斯文書屬焉’, 제문에 ‘桂洞護喪所 宋鍾雲(道谷)’가 있어 송종운이 위영복의 제문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송종운(宋鍾雲)의 자는 찬오(燦五), 호는 도곡(道谷), 본관은 은진, 장흥부사를 지낸 송기로의 아들이며 생원 송강로(宋絳老)에 입양되었다. 문집으로 『도곡집(道谷集)』 6권 3책이 있다. 규장각에 소장(奎 15602-v.1-3)되어 있다. 송종운의 생몰년이 일부 자료(http://e-kyujanggak. snu.ac.kr)에서는 1792∼1825년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재고를 요한다. 간지로만 계산을 했다면 오히려 1852∼1885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