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쥬신제국사43-용성국 석탈해 칸>
龍城國(용성국)의 昔脫解 汗(석탈해 칸)
☯ 산동반도 잔류 해상(海商)동이족, 진시황 내륙이주정책 피해 대동강으로
서기전 21년~20년. 중국의 산동 반도(山東半島)는 유사 이래 4천 년 이상 우리 대동이민족(大東夷民族)의 생활 터전으로, 중국인들은 발 한 번 밟아보지 못한 우리의 오랜 영토였었다. 황해(黃海)를 끼고 있는 이 지역은 치우 천황 이래 청구(靑丘)라는 이름으로 동이 열국들이 차지하고 있었으나, 전국시대(戰國時代) 때 관중(管仲)의 책략으로 그만 내국[래국(萊國)]이 망하면서 황금 같은 우리 영토를 중화족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 후 중원의 패자 진시황(秦始皇)이 한족(漢族)에 대한 동이족의 지배권을 영원히 저지할 목적으로 한족[중화족]과 동이족(東夷族)의 영토를 구분 짓는 영원한 국경선인 만리장성을 쌓았다. 그러고서도 불안하여 장성 이남의 동이세력을 철저히 사방으로 분산시켰으니, 특히 청구의 땅 산동 반도의 피해는 막심하였다.
※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아 동이족으로부터 중화 독립을 원했으므로, 이 지상(地上)에 영원한 국경선인 만리장성이 존재하는 한, 장성 너머 만주(滿洲) 땅을 언젠가는 그 주인인 동이의 후손들에게 되돌려줘야 하며, 그 영유권을 계속 주장해서는 안 된다.
당시, 내국[래국(萊國)]의 엣 땅은 제(齊)나라가 점령하고 있었지만. 산동 반도의 동북부에는 전통적으로 황해의 제해권을 독점하고 해상무역을 장악한 동이족 상인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서 무라[마을]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었다.
※무라[모라(牟羅),모루(牟婁)]: 마을이라는 뜻으로 우리 민족의 분국(分國)인 일본(日本)에서는 지금도 마을을 무라[むら: 촌(村)]라고 부른다.
언어 속에 역사의 증언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들 무라[모라(牟羅)]의 상인들은 일찍부터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서 항해술, 조선술이 발달하였다. 또, 각지로부터 배원 익힌 공업술(工業術), 특히 야철술(冶鐵術)이 높은 수준으로 발달하여 각종 선진 무기들과 철기 생황용품을 제조, 수출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보아 경제적으로 아주 부유한 상인집단을 이루었다.
그러나 나라를 중국에 빼앗기고, 또 진시항의 명에 따라 제나라 병사들이 무라인들을 내륙지방으로 분산, 강제 이주시키자. 물을 떠나 살 수 없는 그들은 급히 배를 타고 황해를 도해(渡海)하여 지금의 대동강(大同江) 하류, 즉 용강군(龍岡郡) 지역에 자리 잡고 용성국(龍城國)을 세웠다.
《산동반도에서 대동강 유역으로의 이동해 세운 용성국》
☯ 용성국의 군장, 타래칸 석탈해
무라인들에게는 두가지 중요한 관직이 있었으니, 그 하나는 외지인(外地人)들이 좋아하는 철기 제품을 생산하는 야철술의 명인(名人)이고, 또 하나는 해상무역을 위하여 먼 뱃길을 떠날 때 풍랑으로부터의 생명의 안전을 빌어주는 용왕(龍王)이라 불리던 무당(巫堂)이 그것이다.
무라[모라(牟羅)]인들은 야장(冶匠)에 무(巫)를 겸한 자를 뽑아 최고 통치자로 삼고, 그 군장(君長)을 타르한 혹은 타래 칸[탈해한(脫解汗)]이라 불렀다.
용성국에는 8개의 무라가 있어, 각 무라의 대표자를 성골(聖骨)이라 하고, 8품 성골[팔품성골(八品聖骨)]의 군장회의를 통하여 그들의 타래 칸을 뽑는 제도를 갖고 있었다.
서기 24년. 용성국의 마지막 칸[한(汗)]인 함달파(含達婆)칸[한(汗)]이 죽자, 8품성골회의는 왕의 아들인 약관 17세의 젊은 청년을 용성국 큰무라[건모라(建牟羅)의 주인으로 뽑으니, 그가 바로 석타래칸[석탈해(昔脫解)한(汗)]이다.
그러나 석타래 칸이 왕위에 오른 지 채 한 달도 되기 전에 전란에 휘말리게 되었으니..., 그것은 서쪽의 새 강국 외백제(外百濟)의 출현으로 불안을 느낀 낙랑(樂浪)이 남펴라를 공격하여 허약하게 명맥을 유지하던 말쥬신의 숨통을 끊어 버린 후, 용성국마저 정복하기 위하여 쳐들어 왔던 것이다.
상인 집단인 용성국은 소수의 병력만 보유하였으므로, 고도의 무장을 갖추고 침입해 오는 낙랑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석타래 칸은 출항 대기 중이던 20여 척의 선박에 백성들을 싣고 용성국을 탈출했다. 그리하여 황해를 남하하여 남해안을 돌아 새로이 정착할 땅을 찾아 구야 지역까지 오게 된 것이다.
《낙랑의 용성국 침입과 석타래칸 일행의 탈출》
☯ 앞서 구야에서 만난 용성국 석탈해칸과 뇌실청예 장군의 대화
♬(말풍선)
“오칸 동맹국을 위하여 이 구야의 땅이 꼭 필요하다는 장군의 뜻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내일 아침 내가 이곳을 떠나겠소이다.” (석탈해)
↔
“고맙소. 타래칸, 서로 피를 흘리지 않고 이 구야를 양보 받는 대신 내가 좋은 곳을 안내하리다. 하하하!” (뇌실청예)
뇌실청예(腦室靑裔: 김수로왕(金首露王))와 석타래칸[석탈해한(昔脫解汗)] 두 영웅은 밤을 새워 서로의 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말풍선)
“다행히도 그대들은 많은 배를 갖고 있으니, 이곳에서 동쪽 해안을 따라 조금 더 가면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아돌포[아진포(阿珍浦)]에 도착할 것이오, 그곳에 상륙하여 서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알천(閼川)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지고 넓어 한 나라를 세우기에 훌륭한 곳입니다. 더구나 몇몇 촌장들만 있을 뿐, 그 주인[왕(王)]이 없으니 타래 칸에겐 아주 알맞은 곳으로 생각되오.” (뇌실청예)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를 원했던 타래 칸과 뇌실청예는 이렇게 하여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고 날이 밝자 타래 칸과 그의 무라 집단은 20여 척의 배를 타고 아돌포로 향하여 떠났다.
타래 칸 집단의 엄청난 선단(船團)을 목격한 뇌실청예는 경탄하였다. 그 때 받은 강렬한 인상으로 후일 그의 가야(加耶)세력이 역시 대 선단을 꾸며 왜국(倭國)정벌에 나서게 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이 때 타래 칸과 김수로왕은 서로 구야(拘耶)의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갖은 지혜를 다 동원하여 싸웠는데, 김수로왕이 승리하여 그 땅의 주인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석탈해의 감포 정착 이서국 세움과 뇌실청예의 구야한국 세움
다음날 아침, 타래 칸과 그의 대 선단이 아돌포[아진포(阿珍浦)]에 도착하니 기곳이 바도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되어 있는 계림의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으로 지금의 감포(甘浦)이다.
타래 칸은 갯가에서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할머니의 안내를 받아 곧 알천에 도착하여 가지고 간 많은 황금(黃金)으로 선주민들을 달래고, 그곳에 성책을 쌓아 자리를 잡았다. 타래 칸 집단은 이곳을 중심으로 작업장을 짓고 철제 물품을 생산하여 국제 무역업에 열중하니 백성들의 생활은 항상 풍족하였다.
타래 칸은 알천에 이서국(伊西國)을 세우고, 그 서울을 큰무라[건모라(健牟羅)]라 불렀다. 무라[모라(牟羅)]는 그들 집단의 마을이라는 뜻의 용성국(龍城國)말로서 그들이 황해를 건너기 전, 즉 옛 청구 땅[산동반도(山東半島)]에 있을 때부터 사용하던 말이다. 후에 이 말은 그들 상인 집단의 진출지로 퍼져가니, 일본인들은 지금도 마을[촌(村)]을 무라[むら]라 한다.♣
한편, 구야 평야를 평정한 뇌실청예 장군도 5칸동맹국[오한동맹국(五汗同盟國)]과 나란히 하는 구야한국(拘耶汗國)을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김수로(金首露)왕이시다. 때는 서기 24년이었다. ♣
※ 김수로의 수로(首露)는 상위자(上位者)라는 뜻의 고대어를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다. 따라서 수로(首露)는 고유명사가 아니고, 그 사람의 지위{계급}를 말하는 것임을 기억해 두기 바란다.
《미오야마국 5칸국, 김수로의 구야한국, 석탈해의 건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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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4.28 편집
一鼓 김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