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석태 (19~20) 삶의 터전이 곧 전도 현장이자 우리의 새로운 예배당
[역경의 열매] 김석태 (19) 은퇴 후에도 계속 이어진 압구정 한복판 노방 전도
김용현2026. 2. 27. 03:07
여생 편안히 즐기라는 권유 있었지만
신앙인으로 복음 전할 사명 남아있어
아내와 함께 휴대용 마이크 들고나와
나의 설교와 아내의 찬양 번갈아 진행
김석태(오른쪽) 사관과 부인 임정선 사관이 2005년 12월 1일 구세군 사관학교 성탄축하회에서 나란히 앉아 찬양을 부르고 있다. 구세군 제공
1991년 사령관직에서 은퇴한 뒤 우리 부부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15평 남짓한 전셋집에 거처를 마련했다. 현역 사관으로서 행정을 돌보고 교단을 이끄는 공식적인 임무는 모두 끝이 났다. 매일같이 울리던 전화벨도, 결재해야 할 서류도 사라진 고요한 일상이었다. 평생을 쉴 틈 없이 달려왔으니 이제는 여생을 편안히 즐기라는 권유도 있었다. 하지만 구세군 사관의 군복을 벗었다고 해서 신앙인으로서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까지 은퇴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밥이나 먹으며 소일거리로 남은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다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성경에서 찾았다. 이사야 62장 10절의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이 올 길을 닦으라 큰 길을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치를 들라”는 말씀이었다. 구세군의 창립자 윌리엄 부스는 1865년 영국 런던의 번듯한 예배당을 떠나, 빈민과 술주정뱅이들이 거리를 헤매는 런던 동부의 빈민가 빈터에서 천막을 치고 복음을 전했다. 구세군의 출발점은 닫힌 성전 안이 아니라 잃어버린 영혼들이 오가는 척박한 길거리였다.
나는 아내 임정선 사관과 함께 휴대용 마이크와 소형 앰프를 챙겨 집을 나섰다. 우리가 향한 곳은 집 인근의 강남 압구정동 거리였다. 1990년대 초반 압구정은 세속적이고 화려한 소비와 유행의 중심지였고 복음이 가장 절실히 필요한 현장이었다. 은퇴한 우리는 화려한 상점들이 늘어선 아스팔트 길 한복판에 섰다. 불신자들을 향한 가로 전도, 이른바 우리 부부만의 ‘천장 없는 교회’가 그곳에 세워졌다.
거리 전도의 현장은 생각만큼 녹록지 않았다. 현역 시절 사관학교 교장과 교관을 지내며 단련된 나의 기질은 거리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나는 마이크를 쥐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회개와 구원의 메시지를 외쳤다. 나의 설교에 사람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바쁘게 걷던 행인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길을 돌아갔고 인근 상점의 상인들은 장사에 방해가 된다며 시끄럽다고 항의했다. 종종 경찰이 출동해 소음을 줄여달라며 제지를 당하는 소동도 벌어졌다.
그럴 때면 내 곁에 선 동역자인 임 사관이 조용히 나섰다. 음악을 전공한 아내가 마이크를 건네받아 부드럽고 맑은 목소리로 찬양을 부르기 시작하면 거리의 공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온화한 부인의 목소리와 찬양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의 설교와 아내의 찬양이 길거리에서 번갈아 이어졌다. 부부가 동등하게 사역을 감당하는 구세군 고유의 ‘동부인’ 제도가 거리 전도 현장에서 실천되고 있었다.
교회는 예배당 안에서 신자들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곳이 아니다. 복음을 들고 세상의 한가운데, 불신자들이 생활하는 삶의 현장으로 직접 들어가야 한다. 현역의 자리를 떠나 다시 길거리로 나선 우리 부부의 노방 전도는 은퇴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정리=김용현 기자 face@kmib.co.kr
[역경의 열매] 김석태 (20) 삶의 터전이 곧 전도 현장이자 우리의 새로운 예배당
김용현2026. 3. 2. 03:06
사령관으로서 임무는 내려놓았지만
구세군의 임무는 내려놓을 수 없어
시골, 요양원 등 사는 곳 바뀌어도
아내와 함께 복음과 찬양으로 전도
김석태(오른쪽 두 번째) 사관이 1990년 7월 독일에서 열린 구세군 브라스 밴드의 거리 전도에 참여한 모습. 구세군 제공
1991년 은퇴 후 거리로 나선 것은 그저 남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우리 부부는 은퇴 직후부터 서로 다짐했다. “우리가 교단에서 주는 은퇴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으니, 마땅히 밥값은 해야 한다.” 사령관으로서 행정 업무는 내려놓았지만 영혼을 구원하는 구세군 사관의 진짜 임무는 죽을 때까지 끝날 수 없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시작한 길거리 전도는 우리가 사는 곳이 바뀔 때마다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복잡한 도심을 떠나 강원도 철원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는 5일마다 서는 시골 장터가 전도 현장이었다. 장날이면 마이크와 소형 앰프를 챙겨 장터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구세군 군복을 입은 노부부가 마이크를 잡으니 처음에는 장터 사람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장날마다 어김없이 나타나 전도지를 나누고 아내가 찬양을 부르자 차츰 동네 사람들도 마음을 열고 우리 목소리를 들었다.
시간이 지나 나이가 더 들자 우리는 경기도 과천에 있는 구세군 승리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요양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전도하는 장소도 요양원 근처로 바뀌었다. 마침 근처에 관악산 등산로 입구가 있었다. 주말이면 등산객이 몰려드는 그 길목이 우리의 새로운 예배당이었다. 매주 주일마다 우리는 산 입구에 서서 땀 흘려 산에 오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러던 어느 주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관악산 입구에서 전도하고 있는데 아내 임정선 사관이 산길에서 크게 넘어졌다. 다리뼈가 부러지는 심각한 부상이었다. 고통스러워하는 아내를 부축해 황급히 근처 병원 응급실로 갔다. 곧바로 수술이 결정됐고 나는 수술실 밖에서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런데 그 병원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만났다. 아내의 수술을 맡은 의사가 우리 부부를 먼저 알아본 것이다. 그는 주일마다 관악산 입구에서 전도하는 우리 부부를 평소 유심히 지켜보던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그냥 병원에만 있는 의사가 아니었다. 휴가 때면 쉬지 않고 자기 돈을 들여 병원이 없는 오지나 불신자 마을로 의료 선교를 떠나는 신실한 사람이었다.
구세군 창립자 윌리엄 부스는 “영혼을 찾아가라, 그리고 가장 악한 자를 찾아가라”고 했다. 교회 건물 안에 가만히 앉아 사람들이 오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길거리로 직접 들어가라는 뜻이다.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외치는 일은 가끔 허공에 소리치는 것처럼 막막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관악산에서 만난 의사를 보며 깨달았다. 우리가 길 위에서 뿌린 씨앗이 헛되지 않았다. 아내가 다친 사고는 불운처럼 보였지만, 그 속에는 길거리에서 헌신하는 동역자를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숨어 있었다. 압구정 거리에서, 철원 오일장에서, 그리고 관악산 등산로에서 마이크를 잡았던 은퇴 후의 시간은 그렇게 예상치 못한 열매를 맺으며 우리 부부의 남은 삶을 이끌어갔다.
정리=김용현 기자 face@kmib.co.kr
https://v.daum.net/v/202603020306447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