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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594
11월29일 [대림 제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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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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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CXHEq7xAAUo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6071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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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이 대림시기, 우리도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지만 주님께서는 더 간절히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유달리 힘겹고 답답했던 한 해가 저물고 우리는 또 다시 대림시기의 출발점에 서있습니다. 저녁식탁에서 한 형제가 이제 대림 시기를 시작하는데, 공동체 차원에서 뭔가 절제하고 보속하기 위한 계획을 세워야하지 않냐고 제안을 했습니다.
갑자기 다들 알쏭달쏭해졌습니다.
“뭐지? 대림시기에도 그랬었나? 아닌 것 같은데, 맞나?”
물론 교회 역사 안에 그런 흔적이 있었습니다. 중세기 교회 때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대림절 동안 사순절 못지 않게 속죄와 단식, 금육과 고행을 실천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단죄와 심판을 위한 날이 될 것이라 믿었기에, 대림절 동안 참회와 속죄가 강조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분위기가 살짝 바뀌었습니다. 대림시기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동시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기쁨의 시기입니다.
어찌 보면 대림시기는 한 달간 지속되는 단기 영성학교입니다. 이 기간 동안 교회는 신자들에게 희망에 찬 기다림의 자세를 가르쳐 줍니다.
물론 대림절 동안 육화강생의 신비와 구세주 하느님의 지극한 겸손에 깊이 감사하며, 걸맞는 성찰과 준비도 필요합니다.
대림시기 동안의 성경 말씀을 통해 지속적으로 강조될 회개와 보속에로의 초대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대림 시기에 더 강조되어야 할 측면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강생하신 놀라운 사건 앞에 경탄하고 기뻐하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이라는 은혜로운 대축제를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하는 시기가 곧 대림시기인 것입니다.
또한 대림시기는 말 마디 그대로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관건은 ‘무엇을 기다릴 것인가?’ ‘어떻게 기다릴 것인가?’입니다.
대림절을 시작하면서 한번 묵상해봤습니다. 가장 간절하게, 또 절박하게 누군가를, 또는 무엇인가를 기다렸던 때는 언제였던가?
잠깐 동안 유학생활을 할 때의 기억도 끔찍합니다. 외국어, 그까짓것, 일단 나가면 적당히 되겠지, 생각했었는데, 생각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어학연수 시절, 하늘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만 봐도, 저게 KAL기인가, 저거 타고 그만 돌아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열 두 번이었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얼마나 팍팍하던지, 빨리 논문 끝내고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꽤 오래 전, 갑작스런 발병으로 한밤중에 응급실 신세를 진 적이 있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조여 오는 죽음의 공포에 떨며 혼미한 가운데서도 뭔가 신속한 조치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런 제 간절한 기대와는 달리 전혀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듯한 새파란 ‘왕초보’ 의사들만 번갈아가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제대로 된 진료를 받기 위해서는 아침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저는 점점 증폭되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발 빨리 아침이 와라. 제대로 진료할 수 있는 의사 선생님, 제발 빨리 출근 좀 하세요!”
또 다시 도래한 이 은총의 대림시기, 우리가 지닌 ‘기다림’의 질은 어떻습니까? 강도나 수준은 어떻습니까? 이 대림시기, 우리는 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보다 열렬히, 보다 순도 높게 주님을 기다릴 일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그저 하릴없이 시간만 죽이는 일이 절대 아니겠지요. 기다린다는 것, 무료하게 시간을 때우는 것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간절히 기도한다는 것, 최선을 다해 주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운다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나 자신 안에 있는 깊은 내면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 중지되었던 주님과의 영적 여정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하겠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자기중심적 삶을 탈피한다는 것, 내 지난 삶에 대한 대대적인 성찰과 쇄신작업을 시작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대림시기, 우리도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지만 주님께서는 더 간절히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에 대해 아주 구체적인 행동강령을 지침으로 내려주셨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르코 복음 13장 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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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간의 끝에서 하느님께서 시작하십니다. 내가 죽을 때 하느님이 살아나십니다!>
운전 중에 들은 복음 성가 가사가 제 가슴을 크게 치더군요.
“인간의 끝에서 하느님께서 시작하십니다. 내가 죽을 때 하느님이 살아나십니다. 내가 맥없이 허물어질 때 하느님이 움직이십니다. 내가 산산조각 날때 하느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인간의 실패 후에 하느님 자비와 은총이 펼쳐집니다. 인간이 지나가고 하느님이 나타나십니다.”
오늘 전례력으로 연중시기 마지막 날을 맞이하며, 지난 한해를 돌아보니, 올해도 어김없이 고통과 상처 투성이의 삶, 실패와 좌절의 연속인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깊은 상처 그 틈 사이로 크신 주님의 자비가 흘러 들어왔음을 실감합니다.
한해의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는 각별한 당부의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고 계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루카 복음 21장 34절)
돌아보니 참으로 많은 시간들을 헛되고 의미없이 보냈습니다. 내 인생 여정에서 앞으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금쪽 같은 시간들을 흥청망청 놀고 먹고 마시는데 소모했습니다. 모든 것 하느님 자비하신 손길에 맡겨드리지 못하고 부끄럽게도 오랜 시간 근심하고 걱정했습니다. 곰곰히 성찰해보니 놀고 먹고 마시는 일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우리의 시야를 좁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멀리 내다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한 치 앞만 내다보게 되니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게 만듭니다.
지금부터라도 바오로 사도의 권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로마서 13장 12~14절)
남아있는 시간들, 남아있는 인생을 주님 권고에 따라 살아가야겠습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복음 21장 36절)
깨어있음은 언제나 기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란 깨어있는 상태로 하느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일정 시간은 잠을 자야 하는 인간이기에 항상 깨어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 하루의 많은 시간을 생업에 몰두해야 하는게 우리네 삶입니다. 그러나 잠드는 순간, 잠자는 순간조차도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고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깨어있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일할 때 역시 주님께서 내 옆에서 나를 지켜보시고 나를 도와주신다고 생각하고 일을 하면 그 역시 깨어있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결국 깨어 기도함을 통해 우리는 주님 재림의 날에도 굳건하고 기쁘게 서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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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영혼의 배고픔을 느끼면 깨어있는 것입니다>
(묵상 동명상)
https://youtu.be/EKOv-kQvuz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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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대림절은 오시는 예수님을 잘 알아보고 받아들이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기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깨어있는 시간인데, 마르코 복음 사가는 이 깨어있음을 ‘일’과 연결합니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있으라고 분부한다. 그러니 깨어있어라.”
기도하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십니다. 그러니 기도하는 사람이 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들에게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신다고 하십니다. 이 각자에게 할 일은 각자의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렇다고 모든 일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하되 꼭 필요한 일을 해야 합니다. 왜 해야 하는지 모르고 하면 모든 일이 헛수고가 됩니다.
어떤 동물 농장 주인이 있었습니다. 캥거루를 잡아 와 1m 높이로 울타리를 치고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캥거루가 밖으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주인은 이번엔 2m로 울타리 높이를 올렸습니다. 그런데도 다음 날 캥거루는 밖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주인은 3m로 높였습니다. 그래도 캥거루가 나와 있었습니다. 농장 주인은 캥거루를 자신이 키울 수 없음을 알고 놓아주었습니다. 캥거루는 유유히 숲속 친구들에게 갔습니다. 다른 동물들이 캥거루의 이야기를 듣고 놀랐습니다.
“너 높이 뛰기를 정말 잘하는구나!”
“아냐, 그 농장 주인이 울타리를 치고는 문을 계속 잠그지 않았어!”
우리는 일의 목적을 명확히 알고 내가 하는 일이 헛수고나 낭비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정확한 목적을 모르면 이 어리석은 농장 주인처럼 고생만 하고 남는 것이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일의 명확한 목적은 무엇일까요? 자아실현 등의 고상한 목적을 댈 수도 있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일의 원초적인 목적은 ‘생존’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생존하기 위해 일을 합니다. 일하지 않고 생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가끔은 일도 안 하고 생존하려는 마음을 품습니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무엇의 생존을 위해서 일하느냐입니다. 그저 육체를 생존시키는 것이 일의 목적이라면 나중에 큰일 납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생존을 동시에 신경 써야 하는 존재입니다.
저는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생각이 납니다. 노인은 커다란 물고기를 잡기 위해 며칠 동안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고 그 물고기와 사투를 벌입니다. 결국은 그 물고기를 잡았지만, 너무 커서 배에 실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배 옆에 매어두고 돌아오는데 결국 상어 떼에게 다 뜯어먹히고 맙니다.
이는 사람이 육체적인 생존에만 치중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쓰고 헤밍웨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엽총으로 자살을 합니다. 자신이 이뤄놓은 모든 명성, 가족, 자녀들, 재산 등은 자신의 배를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물론 육체의 배는 채워주었지만, 영혼의 배는 채울 수 없었습니다. 영혼은 마치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와 같았습니다.
육체의 생존을 위해서 일해야 하지만, 영혼의 생존도 신경 써야 합니다. 영혼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영혼도 양식이 필요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떠한 것도 음식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영혼의 양식은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가 사랑과 기쁨과 평화이니까, 사람이 미워지고 우울해지고 걱정과 근심이 많아지고 초조해지고 두려움이 많아진다면 이것이 배가 고프다는 신호입니다. 이 신호를 무시하고 일하지 않으면 육체의 배를 불리는 것은 아무 소용없게 됩니다. 어차피 영혼과 육체는 하나로 묶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육체보다도 영혼의 생존입니다. 영혼이 살아있으면 육체는 부활할 수 있지만, 영혼이 죽으면 다 죽는 것입니다.
복역 기간이 6개월 남은 죄수가 있었습니다. 지루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창틀 사이로 사마귀 한 마리가 날아들었습니다. 사마귀는 죄수에게 즐거움을 선사했습니다. 춤을 추라고 했더니 춤까지 잘 추는 것이었습니다. 죄수는 사마귀를 잘 훈련하면 밖에 나가서 큰돈을 벌 수 있으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훈련을 잘 시켰고 드디어 출소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나가자마자 배가 고파서 맛있는 음식점에 들어갔습니다. 돈은 없었지만, 음식을 먹고 주인에게 사마귀 춤을 보여주면 음식값을 받지 않으리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맛있게 음식을 잘 먹고 가방에서 사마귀를 꺼내 탁자에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사장을 불러 사마귀를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깜짝 놀란 사장은 손바닥으로 사마귀를 내리친 다음 연신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배만 불리다가는 상황파악이 안 되고 더 중요한 영혼을 잃게 됩니다. 육체를 지나치게 신경 쓰면 영혼은 배를 곯게 됩니다. 더 중요한 영혼의 생존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영과 육은 반대입니다. 사람은 육체만 배부르면 영혼도 배부른 줄 압니다. 그러나 그 반대라는 것을 잊습니다.
그래서 감정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마음 안에서 판단이나 미운 마음, 불안과 초조, 걱정과 두려움의 마음이 일 때는 분명 영혼이 배고픈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영혼의 양식을 주러 오시는 예수님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오시는 예수님을 알아보려면 영과 육은 반대이고 영혼의 양식을 채우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혼의 상태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은 영혼의 양식을 주러 오시는 예수님을 이번 성탄 때도 알아보지 못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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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대림이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의 모든 기다림의 시간을 말한다. 넓은 의미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 순간까지를 대림 시기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대림을 잘 준비한다는 것은, 그분의 진리에, 그분의 초대에, 그분의 부르심에 그리고 매 순간 그분의 메시지에 대한 완전한 개방을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대림은 우리 신앙의 본질적인 구성요소이다.
오늘 전례에서 대림의 의미가 잘 표현되고 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 구원의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즉 하느님이 개입하시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구원될 수 없으며, 더구나 그 스스로는 구원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63,16-17; 64,1 참조) 여기서 이스라엘은 회개하여 마음의 치유를 받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의 불충실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임재는 변화를 일으키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오심은 구원을 위한 것이다. 구원적 도래라고 할 수 있다. 성탄을 잘 준비하는 의미가 이것이다. 우리가 성탄에 다시 태어나지 못하면,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는 표지가 되고 말 것이다.
복음: 마르 13,33-37: 조심해서 항상 깨어있어라.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기 전,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13,32)라고 하시고, ‘깨어있음’으로 초대하신다. 즉 깨어있음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항상 준비하고 있을 수 있다. 오늘 복음이 강조하는 것은 무엇보다 ‘깨어있어야 할’ 의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 ‘깨어있음’의 개념은 세 번(33.35.37절)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고, ‘문지기에게는 깨어있으라고 분부한’(34절) 데서 한 번 더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마태 25,14-30의 ‘달란트의 비유’와 루카 19,12-27의 ‘금화의 비유’에서 더 발전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더 예리하게 기다림의 분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집주인의 돌아옴은 불확정적이어서 갑작스레 들이닥치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네 번에 걸쳐 깨어 기다림을 상기시킨다. 그때가 저녁, 한밤중, 닭이 울 때, 이른 아침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님의 오심의 이러한 불확실성에 근거한 ‘깨어 기다림’은 모든 신자에게 정신을 차려 깨어있어야 할 책임성 있는 태도를 가르쳐 터득게 한다.
책임 있게 깨어 기다리는 것은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미래를 꿈꾸는 묵시적 열광이라든지 현실에 대한 무감각이나 도피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진정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우리 자신을 개방하고 받아들여 실천하는 삶을 의미한다. 그래서 언제라도 들이닥칠 수 있는 주인에게 문을 열어줄 수 있는 깨어있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삶이어야 함을 말해 준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도래에 대한 주제를 다시 취하여 삶의 모든 순간에 확대하여 적용하고 있다. 주님께서 실제로 오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오심을 항상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순간순간이 그분께 대한 신뢰와 사랑을 드리는 만남의 시간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의 선물들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으로 주님의 심판 날을 맞이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은총의 빛 안에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광된 왕국에서 결합해줄 그 친교는(1코린 1,9 참조)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즉 매일 매일 계속해서 작은 ‘도래’, ‘임재’가 선행되지 않으면 그 ‘위대한 마지막 도래’는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다.
주님을 맞이하는 것은 어느 때고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결정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정적인 만남을 잘하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순간순간의 삶을 통하여 자신을 죽이는 삶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그 순간마다 주님을 만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 만남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항상 깨어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순간순간의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을 때, 우리는 결정적인 만남, 우리의 죽음 혹은 주님의 재림도 기쁘게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계속 살 수 있도록 깨어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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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무부처장) 신부님]
대림 시기는 말 그대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때입니다. 대림 시기의 정점은 예수님의 탄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서들이 전하는 것처럼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옛 계약과 새 계약의 분기점이 되고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의 예언대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시어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대림 시기에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면서 그분의 구원 업적을 기억하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따라서 대림 시기는 예수님께서 이미 세상에 오신 것을 통하여 다시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영광 속에 다시 오시는 날은 종말입니다. 처음과 마지막이 맞닿아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한 해의 마지막에 종말에 관한 말씀을 들었고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웠습니다. 한 해의 시작에 듣게 되는 말씀도 이와 비슷합니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기다림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정해지지 않은, 언제까지인지 알 수 없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면서 해마다 그 기쁨을 맛보아야 합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이 두려움을 없애는 기쁨이 된 것처럼 오늘 우리도 다시 오실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그분을 기다립니다. 이것이 대림 시기의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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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대림 - 기다림>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마르 13,33-37)
기다림은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오신다는 것을 믿으니까 기다립니다. (믿음이 부족하면 조금 기다리다가 포기하고, 믿음이 없으면 기다리지 않습니다.) 루카복음에 나오는 ‘시메온’ 예언자는 믿음으로 기다린 사람의 좋은 예입니다.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루카 2,25-26) 성령께서는 시메온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뵐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언제인지에 관해서는 ‘죽기 전에’ 라고 막연한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래도 시메온은 메시아를 뵙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믿었고, 믿었으니까 평생 기다렸고, 마침내 아기 예수님을 뵈었을 때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29-30) <예수님 말씀에서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그때가 언제인지는 말할 수 없지만, 그때는 반드시 오기 때문에 깨어서 기다려라.”라는 뜻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오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희망’입니다. 주님을 뵙기를 원하고 희망하니까 기다립니다. (원하지 않고 희망하지도 않는 사람은 기다리는 척만 하거나 기다리지 않습니다.) 주님을 뵙기를 원하고 희망하는 우리의 심정은 다음 시편에 나타나 있는 심정과 같습니다.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을 찾습니다.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합니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이 당신을 애타게 그립니다."(시편 63,2) 주님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사람만이 주님이 오시기를 애타게 기다립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시간이 사람들의 생각보다 길어질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를 버리고 떠나신 일이 아니라 존재 방식이 바뀐 일이고, 승천하신 예수님은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또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뵙기를 원하고 있고,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기다림은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고,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니까 ‘사랑으로’ 기다립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1코린 13,4)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신앙생활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참고 견딥니다. (만일에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기다리지 않거나 억지로 기다릴 것입니다. 그리고 힘든 일을 만났을 때 참고 견디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 실천’은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기본자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서로 지니고 있는 사랑과 다른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도, 여러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처럼 주님께서 더욱 자라게 하시고 충만하게 하시며, 여러분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시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재림하실 때, 여러분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1테살 3,12-13) <예수님 말씀에서,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라는 말씀은, 승천하시기 전에 지시하신 ‘사랑의 계명’과 ‘복음 선포 임무’를 가리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두 말씀을 하나로 합해서,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곧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고, 사랑 실천은 복음 선포로써 완성된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기다림은 ‘기쁨’입니다. 우리는 혼날까봐 무서워서 깨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주님을 뵙게 되는 것이 기뻐서 ‘기쁨으로’ 깨어 기다립니다. 주님을 그리워하고 그분을 애타게 보고 싶어 해서 깨어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림 자체가 ‘기쁜 일’이 됩니다. (신앙생활 자체가 ‘기쁜 일’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기다림은 ‘기쁜 일’이 아니라 ‘괴로운 일’이 되어버립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에 사랑과 기쁨이 없다면, 신앙생활은 아주 괴로운 중노동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라는 말씀은, 겉으로만 보면, “갑자기 돌아온 주인에게 혼나는 일이 없도록 깨어 있어라.”라는 말씀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아니고, “주인이 언제 돌아오든지 간에 사랑과 기쁨으로 기다리고 있어라.”라는 뜻입니다. ‘잠자는 모습’은 믿음, 희망, 사랑, 기쁨이 없는 모습입니다. ‘깨어 기다리는 모습’은 믿음, 희망, 사랑, 기쁨으로 가득 차서 주님이 어서 빨리 오시기를 바라는 모습입니다.>
기다림은 적극적으로 주님을 ‘마중 나가는 일’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또 사랑하는 주님을 만나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동구 밖으로 나가서 주님을 기다립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소극적으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모습은 사랑도 기쁨도 없는 모습입니다.) 적극적으로 주님을 마중 나가는 일은 바로 ‘능동적인 회개’입니다. ‘기다림’과 ‘회개’는 사실상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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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11월 1일부터 ‘서머타임’이 해제 되었습니다. 시간이 1시간 앞당겨졌습니다. 미국에 있는 독특한 제도입니다. 모두가 같이 약속을 하니 시간이 당겨진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내년 3월 14일이면 서머타임이 시작되고 시간은 한 시간 뒤로 돌아갑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변함없이 흘러가지만 의미의 시간은 앞당길 수도 있고, 뒤로 돌릴 수도 있습니다. 제게도 의미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 시간은 그저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저의 삶에 영향을 주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8월 23일은 제가 사제서품을 받은 날입니다. 내년은 서품 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모든 사제들에게 서품기념일은 각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9월 29일은 저의 축일입니다. 제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한 가브리엘 천사처럼 저도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려고 합니다. 5월 5일은 아버님의 기일이고, 9월 10일은 어머니의 기일입니다. 저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사랑에 감사드리고,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기도합니다. 시간과 공간에 역사와 신화를 만들어가는 인간은 누구나 의미의 시간을 가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의미의 시간을 가지고 계신지요?
미국에 서머타임이 있다면 교회에는 ‘구원의 시간’이 있습니다. 이는 물리적인 시간과 의미의 시간과는 다른 가치의 시간입니다. 구원의 시간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 수 있고,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은 ‘구원의 시간’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 시간에 충실해야 합니다. 구원의 시간은 두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하나는 오늘부터 지내는 대림시기와 성탄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음을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도록 영적으로 깨어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순시기와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와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교회는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주어지는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갈 것을 다짐합니다. 예수님을 배반했던 제자들을 생각하며 우리들 또한 주님의 사랑을 배반하였음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시간입니다.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음을 신앙의 신비로 고백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시간’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물리적인 시간에서 깨어 있음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의미의 시간에서 깨어 있음은 좋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매일 규칙적으로 일어나고,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것이 사회의 질서를 이루는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명예, 재물, 권력은 이런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기 때문입니다. 원칙을 지키는 사람은 시련과 고통이 찾아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소중한 것을 먼저 하는 사람은 시간에 묻혀있는 보물을 찾는 사람과 같습니다. 끝을 생각하며 시작하는 사람은 같은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습니다. 효과를 극대화하는 사람은 북극에서도 냉장고를 팔 수 있습니다. 사막에서도 겨울옷을 팔 수 있습니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찾는 사람은 존경을 받습니다. 먼저 이해하고 이해시키는 사람은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자기 자신을 돌보는 사람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건강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은 대부분 물리적인 시간에도 충실했습니다. 의미의 시간에도 충실했습니다. 신앙인들도 이런 시간을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의 눈에 게으르게 보인다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늘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예수님께서 깨어 있으라고 하시는 것은 물리적인 시간을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의미의 시간을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시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시간에 충실하기 위해서 4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말씀입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구원의 시간에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지상 최대의 힘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언제나 기도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감사하십시오.”
셋째는 시대의 징표입니다. 허리가 아픈데 다리를 주무르면 별 효과가 없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서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습니다. 교황님의 문헌을 자주 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신문과 방송을 가까이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넷째는 실천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실천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
우리는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지금 해야 할 일도 많고, 세상도 많이 변하였는데 왜 우리는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려고 할까요? 왜 아직 오지 않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려고 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지만 영원한 세상을 꿈꾸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깨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눈을 뜨고 있는 것이 깨어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과 의식이 깨어있어야 합니다. 원망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은 깨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고, 탐욕을 부리고, 남을 속이는 사람은 깨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비록 눈은 뜨고 있지만 영혼은 죽어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름을 준비하고 등불을 켜는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름은 친절, 인내, 나눔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랑, 희망, 믿음의 등불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깨어있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들이 ‘회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며 생각과 의식이 깨어있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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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깨어 지키게 하소서>
마르코 13,33-37 (깨어 있어라)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깨어 지키게 하소서>
끝 모를 먼 길을
떠나시는 당신께서
보잘것없는 제게 맡기신
당신의 빈자리를
어찌 채울 수 있을까마는
당신께서 계시지 않아
누군가는 아파하고
누군가는 쓰러지고
누군가는 버려지고
그러다가 마침내
빈자리 남긴 당신을
누군가 원망하지는 않을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아무리 하여도 끝내
채울 수 없는
당신의 빈자리를
아무도 느끼지 못하도록
안간힘을 다하여
채우고 또 채워
당신께서 다시 오시는 날
당신께서 비우셨던 자리를
당신마저 느끼실 수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감히 꿈꾸며
당신의 빈자리에
온전히 머물러
깨어 지키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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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임재정 안젤로 신부님]
<기다림>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11월의 끝자락 매일 미사 중 복음 말씀을 들을 때면 종말과 새로운 시작이 떨어져 있지 않고 하나임을 느낍니다.
특히 이천 년 전 이미 오신 아기 예수님이 아니라 영광중에 '다시 오실' (재림, 市臨) 예수님을 먼저 기다리며 교회의 새로운 해가 시작한다는 점에서 종말과 영원한 생명이 맞닿아 있음을 실감합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 종말은 단순한 끝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종말과 새로운 삶의 시작인 예수님을 우리는 지금 어떻게 기다리고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누군가를 기다릴 때의 모습을 살펴보면 크게 '부정', '무관심', '긍정' 이라는 세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부정적인 기다림'은 기다리는 대상이 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다리는 대상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또는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 다가올 때 우리는 부정적인 기다림을 경험합니다.
두 번째는 '무관심한 기다림'입니다. 대상이 오든지 말든지 별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실제로 무관심한 기다림은 기다림이라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긍정적인 기다림'은 기다리는 대상이 아직 오지 않았음에도 늘 기대감과 희망에 부풀어 있습니다. 또 대상이 빨리 오기만을 애 타게 기다립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들의 모습도 이 세 가지 중 하나의 모습이지 않을까요? 신자들이라면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릴 때 부정적인 기다림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매년 돌아오는 성탄 안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속에 ‘또 그냥 지나가는 성탄이겠지' 라며 조그마한 무관심이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기다림의 모습은 설렘과 기대를 품은 희망 가득한 모습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전례력의 시작인 오늘 “깨어 지켜라” 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 자리한 무관심하고 잠들어 있는 마음들을 치우고 기대와 희망으로 우리에게 오실 하느님을 기다릴 수 있도록 초대합니다.
무관심하게 잠들어 있는 기다림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믿음', '희망', '사랑' 의 자세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다릴 때 성탄의 기쁨과 은총은 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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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현문권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깨어 있어라”
오늘 복음에 '깨어 있으라'라는 단어가 많이 보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중요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① 먼저 '깨어 있다는 것은 영적인 식별과 준비를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마르 13,33-37) 주님의 재림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때가 언제 올지 모르기에 신앙인들은 늘 올바른 판단과 영적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② 마태오 복음 26장 38절은 십자가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고통이 드러나는 구절입니다.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깨어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기도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③ 악으로부터 오는 유혹과 영적 투쟁에서 승리하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도 깨어 있어야 합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태 26,41)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 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1베드 5,8)
④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을 위해서도 깨어 있음이 필요합니다. “깨어 있으십시오. 믿음 안에 굳게 서 있으십시오. 용기를 내십시오. 힘을 내십시오.”(1코린 16,13)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콜로 4,2) “여러분은 늘 성령 안에서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 그렇게 할수 있도록 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깨어 있으십시오."(에페 6,18)
⑤ 마지막으로, 깨어 있음은 사목적으로 신자들을 잘 돌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 교회를 떠나기 직전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합니다.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 있으십시오.”(사도 20,31)
대림 시기는 주님의 성탄과 재림을 깨어 기다리고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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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운 바오로 신부님]
<대림, 새색시가 새신랑을 맞이하듯이….>
또다시 기다림의 때, 대림 시기가 다가왔습니다. 대림절을 맞이하면서, ‘나는 가장 절박하게 누군가를, 또는 무엇인가를 기다렸던 때는 언제였던가?’를 생각해 봅니다.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오는 이즈음에 제 마음은 더욱 착잡합니다. 왜냐하면 한 해를 마무리할 시기가 되면 어쩔 수 없이 밀려서 새해를 맞이한 것 같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세상 걱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한다면, 주인님이 오실 것을 대비하는 종의 마음으로 대림절과 새해를 맞이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입니다. 그러니 걱정을 내려놓고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계속된 박해와 환란으로 인하여 대단히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들로 하여금 그 고통을 이겨내도록 한 것은 구세주 주님께서 곧 재림하실 것이리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곧 재림하실 것이며, 재림하신 주님께서는 자신들이 당한 고통의 대가를 낱낱이 갚아주시리라는 믿음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주었습니다.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첫 주일, “항상 조심해서 깨어 있어라.”하셨는데, ‘나는 무엇에 깨어 있어야 하는가?’를 묵상해 봅니다.
먼저, 깨어 있는 자세로 사제 수품 때의 첫 마음을 확인하고 새롭게 다짐해 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제 삶의 전부임’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기도에서와 같이 ‘아버지의 뜻이 내 삶 안에서 가장 먼저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자세’가 깨어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2천 년 전에 이미 오셨고, 우리는 이미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매일 주님을 새롭게 만납니다. 그러니 우리와 주님의 만남도, 마치 새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는 새색시처럼, 그런 설렘으로 준비해야겠습니다.
우리와 주님의 새로운 만남을 위해, 아직 아니 만난 사람처럼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깨어 있지 않으면 하느님 아버지의 뜻보다는 내 뜻을 내세우게 됩니다. 우리가 믿고 희망하는 것은, 바로 내 뜻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으로 옮아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갖추게 되었고, 어떤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어야겠습니다.”(코린토 1서 1장 5절~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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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부(神父)는 되어가는 것이다.”
어느 책에서 읽은, 지금은 주님 곁으로 가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말씀입니다. 자신이 되고 싶은 순간을 이루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처럼 착각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럴까요? 신부(神父)가 되었다고 모든 것을 다 완성한 것이 아니고, 또 결혼했다고 모든 것을 다 이룬 것도 아닙니다.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도 내 삶의 완성을 이룬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안에서 숨 쉬며 살아가고 있는 이상 우리는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실망하고, 절망과 좌절 속에서 힘들어하는 것은 이 ‘되어가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망, 절망, 좌절도 ‘되어가는’ 과정 일부인데, 이를 인정하지 않기에 삶을 포기하려는 마음마저 갖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 되어가는 나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희망이 보입니다. 지금의 부족한 신앙도 괜찮습니다. 되어가는 중이니까요.
지금 어렵고 힘든 일들도 괜찮습니다. 역시 되어가는 중이니까요…. 되어가는 자신을 인정해야 되어가는 남도 인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역시 희망이 있으며, 그래서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되어가는 것입니다.
오늘은 대림 제1주일입니다.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한다고 하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복음은 우리의 마지막 때에 대해 묵상하도록 합니다.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실 주님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늘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 절망과 좌절 속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절대로 깨어 있지 못합니다.
단순히 잠을 자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뜨고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영혼이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있는 상태가 됩니다. 따라서 오늘의 말씀은 어떤 순간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곧, ‘우리 모두는 되어가는 것’임을 인정하는 마음입니다.이사야 예언자는 “예로부터 당신 이름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위치는 구원자로서 우리를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로 되어갈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인도하심에 적극적으로 따를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때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성실하신 하느님을 통해 당신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거룩한 친교를 맺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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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생활>
세계적인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점심을 먹기 위해 한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안에서 음식을 나르던 소년이 셰익스피어를 보면서 계속 싱글벙글 웃었습니다.
“너는 무엇이 그렇게 좋아서 웃느냐고 묻자, “이 식당에서 음식 나르게 된 것이 감사해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셰익스피어 같은 귀한 분을 대접할 수 있게 된 것이 감사하다는 것이었지요. 사실 그렇게 감사할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늘 감사할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에 대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기쁜 일이 있어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둘째, 기쁜 일 있을 때만 감사하는 사람,
셋째, 역경 중에서도 여전히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면 감사할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문제는 감사할 마음을 가지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충분히 감사할 조건에서도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때의 삶은 무미건조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는 절대로 마음에만 담아두지 말고, 반드시 겉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표현될 때 비로소 기쁨과 행복이 함께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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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구원을 기다립니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우리를 구원해줄 주님을 기다리지만 실은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우리가 문을 열어주기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이 시간 기다림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나길 바랍니다.
먼저 대림절에 관해 간략히 살펴보면, 대림절은 우리의 구세주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성탄 전 4주간을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자로 오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한편으로는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대림초가 4개 꽂혀 있습니다. 4개는 4주간을 뜻하지만 본래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세주, 메시아가 오심을 기다린 세월이 약4,000년이 됩니다.
그 4,000년을 4주간으로 상징화해서 네 개의 초에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또한, 네 개의 초는 예수님께서 동서남북 온 세상의 구세주이심을 의미합니다. 초를 장식하기 위해서 둥글게 만들기도 하는데, 바로 온 우주를 상징합니다.
그래서‘대림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탕을 녹색으로 꾸미는 것은 생명의 푸르름을 나타냅니다. 또한, 색깔을 보면 어두운 자색으로 시작해서 점점 밝은색으로 불이 밝혀지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시는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마음도 맑고 또 밝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맑고 밝아진다는 것은 우리의 허물을 벗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초의 색깔과 제의 색깔이 자색인데 자색은 바로 회개와 보속의 의미를 담은 색깔입니다. 그것은 화려한 츄리를 장식하고 구유를 준비하는 것보다도 몸과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에 들도록 목욕재계하는 것이 소중하다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기다림에 걸맞은 준비가 필요한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죄를 고백하며 거룩함을 회복해야 하는데 사랑이 많으면 죄가 큽니다. 죄가 없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베풀지 못한 죄, 봉사하면서 자만한 잘못,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남을 미워한 죄,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성당에는 열심히 하면서 가족에게 소홀한 잘못, 내 잣대로 남을 판단하고 단죄한 잘못....
이사야예언자의 표현을 인용하면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이사 64,7) 우리는 하느님이 작품입니다. 주 하느님의 작품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무도 하느님의 은총을 놓쳐 버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히브12,14-15).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성탄을 준비하는 기초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외침에는‘저희가 회개할 테니 저희에게 오십시오.
저희가 당신이 늘 함께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십시오’ 하는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가정에 어떤 귀한 손님이 오신다면 청소를 하고 음식을 만들기도 하며 준비할 것입니다. 기다림이 간절하면 그 기다림의 여정에 따르는 모든 수고는 기쁨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 더욱 예수님을 기다린다면 기다림이 간절한 만큼 준비에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일상 안에서 손님을 모시려 할 때에 청소를 하고, 음식을 준비하고 부산을 떠는데 예수님을 모시길 원하면서 그만한 준비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늘 깨어 있어라”(마르 13,37).고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영적인 깨어있음을 말합니다.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부끄러워 숨었을 때 “너 어디 있느냐”(창세3,9) 찾아 나서시던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하고자 모세를 선택하신 분이 하느님이시고(출애 3장 참조),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출애 13,22)으로 이끄시며 물도 주시고(출애 15,22-27)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부르게 먹게 하신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여인이 자기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이사 49,15).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묵시록에는“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3,20).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깨어있을 때 우리를 위한 주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알게 되면 우리의 처신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를 찾으시는 하느님을 뵐 수 없습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결국 주님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깨어있으십시오. 깨어있다는 것은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으며 그것을 왜 하고 있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받는 작품으로 무엇을 하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경계하는 마음을 늘 지녀야 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철저히 단호하게 거부되어야 합니다. 내가 너보다 더 낫다는 마음으로 거들먹거리거나 자만자족하는 태도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 하느님의 눈으로 이웃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가운데 기쁨을 간직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사랑이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하느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인 만큼 사랑할 기회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지금부터 후회할 일을 줄여야 하겠습니다.
믿는 이들은 과거에 매이지 않습니다. 지난 일은 하느님의 자비에 맡깁니다. 그렇다고 현세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만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약속된 천상의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앞날을 보고 전진하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현재를 모른 체하면서 미래 속에서만 산다면 비현실적인 세상에 산다는 뜻입니다.
현재는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기에 지금은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주님의 마음에 들도록 활용해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동경 없이 현재에만 집착하여 산다는 것은 아무런 발전도 없이 어중간한 상태에서 평범하게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신앙에는 어중간은 없습니다. 양다리도 없습니다. 천상을 희망하는 만큼 선물로 주어진 오늘에 충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기보다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성경 안에서 당신의 말씀을 열어주기를 기다리십니다. 감실 안에서 조배 하는 이들을 기다리시고 기도하는 이들을 보고 싶어 하시며,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기다리십니다. 고해소 안에서 큰 자비와 사랑으로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주님을 외롭게 해 드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거룩함으로, 깨어있음으로 주님을 만나는 한 주간을 기대합니다. “주님, 제가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창세 49,1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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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깨어 있어라>
-사랑, 기도, 희망, 기쁨, 감사-
오늘부터 전례력으로 새해의 첫날인 대림 제1주일입니다. 11월 위령성월의 끝자락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대림의 기쁨이 우리 마음을 환히 밝힙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가 전하는 예수님 종말설교의 마지막 부분으로 흡사 예수님의 유언과도 같습니다.
“깨어 있어라!”
오늘 강론의 주제입니다. 제가 대천사 축일 9.29일 대형 교통사고를 통해서도 깨닫는 첫째 진리가 ‘깨어 있어라’였습니다. “깨어 있어라”는 말씀과 더불어,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예수님 공생애가 시작됐을 때 설교 말씀 주제가 떠오릅니다. “회개하여라”, “깨어 있어라”는 이 두 말씀은 우리 믿는 이들이 평생 지니고 살아야 할 말씀입니다.
살아있음과 죽어있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30년전 강론에 인용했던,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생생한 말마디가 있습니다. ‘나이 30에 죽어 70에 묻힌다’는 말마디입니다. 40년동안은 살았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깨어 있음’이 바로 살아있음과 죽어있음의 판단 잣대입니다. 진정 깨어 있을 때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 살아 있는 자는, 깨어 있는 자는 몇이나 될까요? 자기를 잊고 무지의 어둔 상태에서 잠든 상태로 죽어 사는 자들도 많을 것입니다. 이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평생 살았어도 이것 저것 다 빼면 참으로 환히 깨어 살았던 시간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깨어 참 나를 살 때 참 기쁨이요 행복일 것입니다. 생각없이 운동장 트랙을 30바퀴도나 60바퀴 도나 90바퀴 도나 무슨 차이가 있을런지요. 즉 잠든 상태로 죽어 사는 햇수가 많다한 들 주님의 눈에 무슨 가치가 있을런지요. 깨어 있는 삶과 함께 가는 영적 성장과 성숙의 삶이 아니라면 그 인생 참 허무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영적전쟁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영적승리도 ‘깨어 있기’에 있음을 봅니니다. 구체적으로 ‘치매와의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도 ‘깨어 있기’의 영적훈련은 얼마나 중요한지요. 참으로 깨어 있을 때 깨끗한 마음의 순수요 이어지는 깨달음의 은총입니다. 깨어있음-깨끗한 마음-깨달음, 깨자 돌림의 말마디가 하나로 연결됨을 봅니다. 어떻게 하면 은총의 대림시기 오시는 주님을 모시고 깨어 살 수 있을런지요? 그 방법을 알려 드립니다.
첫째, 깨어 있음은 사랑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깨어 있습니다. 기다리는 대상인 사랑하는 주님이 있기에 깨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음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이 없으면 애당초 깨어 있음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사랑할 대상인 주님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깨어 있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기에 이렇게 졸지 않고 깨어 집중하여 미사를 봉헌합니다. 오늘 복음의 집주인을 주님으로 바꿔 인용합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주님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그 누구보다 우리를 사랑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수록 깨어 있음의 농도도 깊어질 것입니다. 비단 믿는 우리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평생과제가 깨어 있음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주님 사랑의 절정은 끝기도 찬미가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잠자는 중에도 주님을 사랑하는 영혼은 깨어 있습니다.
-“우리는 잠을 자도 주님과 함께/꿈에도 당신만을 뵙게 하소서
언제나 한결같이 당신영광을/새는날 밝아올제 찬미하리이다.”-
둘째, 깨어 있음은 기도입니다.
주님을 사랑할 때 저절로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 비로소 영혼은 깨어 살아납니다. 깨어 있음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아 살아있다 하나 무지의 죽어있는 영혼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삶과 기도는 함께 갑니다.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이고 기도가 없는 삶은 공허합니다. 참으로 기도할 때 깨어 있는 충만한 삶입니다.
바로 그 기도의 모범이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이사야의 회개의 기도가 구구절절 심금을 올립니다. 얼마나 주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인지 부럽기 조차 합니다. 참으로 깨어 있는 영혼에 깨어 있는 삶의 예언자 이사야입니다.
“저희는 죄를 지었고 당신께서는 진노하셨습니다. 저희는 나뭇잎처럼 시들어, 저희의 죄악이 바람처럼 저희를 휩쓸어 갔습니다.---그러나 주님, 당신은 저희 아버지십니다.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
기도의 궁극 목표도 깨어 있음에 있습니다. 깨어 있음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부단한 영적훈련, 기도의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바로 우리가 평생 매일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의 영적훈련이 깨어 있는 삶을 가능하게 해 줍니다. 이뿐 아니 성구의 만트라를 반복하여 끊임없이 바치는 명상기도, 비움기도, 반추기도, 묵상기도 등의 영적수행도 깨어 살기에 큰 도움이 됩니다.
셋째, 깨어 있음은 희망입니다.
희망이 깨어 있게 합니다. 주님을 희망하면 할수록 더욱 깨어 있게 됩니다. 깨어 있음이 바로 희망입니다. 희망이 없으면 애당초 깨어 있는 삶도 불가능합니다. 주님을 희망하기에, 주님을 기다리기에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집주인을 기다리는 종에게 집주인이 바로 희망의 대상입니다. 우리 또한 구체적으로 오시는 희망의 주님을 기다리기에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가짜 희망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궁극의 희망은 주님뿐입니다.
주님을 희망하기에 이사야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주님, 당신만이 저희 아버지시고, 예로부터 당신 이름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시편의 권고도 생각납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희망을 하느님께 두어라.”
바오로 사도의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희망은 얼마나 확고부동한지요.
“그분께서는 또한 여러분을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
이런 하느님께 ‘희망의 닻’을 내려 놓을 때 우리는 구원의 하느님께 인도됩니다. 참으로 이런 희망이 생생할수록 깨어 있게 되고, 깨어 있을 때 밤하늘의 별처럼 떠오르는 ‘희망의 별’입니다. 이런 희망으로 이미 구원받은 우리들입니다.
넷째, 깨어 있음은 기쁨입니다.
깨어 있음이 빛이요 기쁨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 깨어 날 때 저절로 피어나는 기쁨의 꽃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기쁨이 우리를 깨어 있게 합니다. 이런 깨어 있음에 저절로 따라 오는 기쁨이야 말로 주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이런 깨어 있음과 기쁨의 선물을 주님이 아니시면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지요.
아무리 모든 것 다 지녔어도 이런 기쁨이 없으면 가난뱅이요 불행한 사람입니다. 아침 성무일도 다음 두 후렴은 얼마나 우리를 기쁨으로 깨어 마음 설레게 했는지요.
“그날에 모든 산에서 단 것이 방울져 내리고, 언덕들에서 젖과 꿀이 흐르리라. 알렐루야.”
“들이여, 주님 앞에서 흥겹게 우쭐거리고, 숲을 이룬 나무들도 손뼉을 쳐라. 주께서 오시어 영원히 다스리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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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새해가 밝았습니다. 우리는 올해, 미사 안에서 나해의 말씀들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이 누구이시며 우리가 누구인지 기초부터 짚어 주십니다. 그 안에는 각자의 신원에 맞는 본분 또한 들어 있지요.
먼저 제1독서에서는 아버지시며 구원자이신 주님께 간구하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주님, 당신만이 저희 아버지시고, 예로부터 당신 이름은 '우리 구원자'이십니다."(이사 63,16)
예언자는 백성을 대신해 주님을 부릅니다. 아버지시고 구원자이신 분. 예언자는 이 신원 앞에서 주님이 꼼짝하실 수 없다는 걸 압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에게서 멀어지면 그들이 뉘우치고 다시 돌아오도록 애타게 타이르며 부르셨지요. 한 번 속지 두 번 속나 싶지만, 아버지시고 구원자이신 하느님은 번번이 속아주시며 백성과의 관계를 회복하려 애쓰십니다.
"주님, 당신은 저희 아버지십니다.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이사 64,7)
예언자는 백성의 온갖 악행과 배반의 고통이 아직 가시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이름을 걸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십사 애원합니다. 우리가 진흙과 같이 미약하고 덧없는 존재임을 아시는 당신께서 눈을 돌려 다시 백성을 돌보아달라고요. 염치없지만 피조물이고 미물인 우리가 기댈 곳은 주님의 자비뿐이니까요.
제2독서에서는 부르심의 목적을 듣습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1코린 1,8-9)
우리는 하느님께 불성실하지만 그분은 우리에게 성실하십니다. 하느님은 말 많고 탈 많은 우리를 부르시어 당신의 백성,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아드님을 내어주셨지요.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분을 받아 모시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룹니다. 이 뜨겁고 친밀한 사랑의 일치를 누리라고 하느님은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복음의 말씀은 우리 신원에 걸맞는 실천을 요구하십니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마르 13,34)
하느님은 주인이시고 우리는 종입니다. 종은 주인을 기다리며 제게 맡겨진 일을 하는 존재지요. 종이 무언가를 할 권리가 있다면 그건 주인에게서 받은 권한일 때입니다.
"깨어 있어라."(마르 13,35)
종은 주인이 곁에 있건, 부재 중이건 주인이 맡긴 바를 성실히 수행합니다. 기다림도 그 중 하나지요. 기다림은 깨어 있음을 전제합니다. 그런데 이 "깨어 있음"이 물리적으로 잠들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문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깨어 있음"은 우리가 신원에 맞게 존재하며, 그 신원에 요구되는 본분을 수행하는 상태입니다. 하느님도 아버지시고 구원자이신 당신다움을 늘 깨어 간직하고 계시지요. "보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께서는 졸지도 않으시고 잠들지도 않으신다."(시펀 121,4)는 시편 저자의 고백처럼 그분은 우리를 보살피시느라 언제나 깨어 계십니다.
"깨어 있어라."
우리가 우리다움을 간직하는 것이 곧 깨어 있음일 것입니다. 그분의 작품인 피조물이고 종이며 자녀이고 신부인 우리의 신원에 걸맞게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갈망하는 것이 곧 우리의 깨어 있음입니다. 주님과 우리가 자신다움을 간직하고 서로를 향해 깨어 있으면 그 안에서 친교가 이루어지고 일치로 나아갑니다. "사랑"이 우리 모두의 권한이고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당신께 제 영혼을 들어 올리나이다."(입당송)
사랑하는 벗님! 우선 우리가 건강히 살아 숨쉬며 새해를 맞이할 수 있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지난 한 해의 부족함과 무질서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올해는 벅찬 감사와 기쁨을 담아 우리다움을 성실히 살아가는 한 해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 영혼을 들어 올려 주님을 향하고 찬양과 사랑을 바치는, 깨어 있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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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 첫날입니다. 오늘부터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청색 대림환과 자색의 대림초가 기다림과 봉헌의 색동옷을 입었습니다. 올해 새해의 덕담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마르 13,33)
“대림”은 “Aventus”(도착)이라는 단어의 번역입니다. 곧 ‘도착’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사실, 모든 역사는 대림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모든 시간이 대림이었으며, 마찬가지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시간도 모두 대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온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늘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림”은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도 감동적인 사건인 메시아의 도착을 알리는 성탄을 반향하고 있지만, 우리를 과거의 사건에만 머물게 하지는 않습니다. 대림은 항상 계속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총괄하여 항상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히브 13,8)
이 “대림시기”의 제일 큰 주제는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인생은 기다림이 있어 아름답습니다.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소중함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열망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열망하고 기다립니다. 오늘도 우리는 사랑하는 임을, 소중한 임을, 주인이신 임을 열망하여 기다립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은 참으로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 기다림의 열망을 아주 강렬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 당신 앞에서 산들이 뒤흔들리리다.”(이사 63,19)
참으로 강렬한 기다림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개입이 야기 시킬 놀라움이요 경이로움입니다. 하느님은 역사를 그저 스쳐 지나서 통과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를 새롭게 변형시키기 위해 역사 안에 임하십니다. 곧 당신의 구원계획에 우리를 참여시키기 위해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인간역사 안에 개입하셔야 할 필연적인 이유를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이기 때문이요, 당신은 주님, 저희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이사 64,7 참조)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기다림을 더 명백하게 삶의 모든 순간에 확대 적용합니다. 곧 “그분의 오심”을 “항상 기다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순간순간이 그분께 대한 신뢰와 사랑을 드리는 만남의 시간이 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말씀과 성사를 통하여, 우리의 삶 안에 임재한 주님을 열절하게 영접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단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깨어 지켜라”(마르 13,33), “깨어 있어라”(마르 13,35.36)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깨어났습니다. 주님의 오심과 더불어 깨어난 영혼들입니다. 곧 “깨어남”은 주님으로부터 선사되었습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깨어있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선사받은 은총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깨어있음”은 이미 오신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합니다. 곧 면전에서에서 깨어있는 것이요, 인격적인 대면입니다. 그런데, 사실 깨어있기 위해서는 먼저 깨어나야 하고, 깨어나려면 먼저 깨부수어야만 합니다. 곧 우리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야 하고, 습관을 깨야 합니다. 이미 몸에 익은 타성을 깨야 하고, 안주와 편함을 깨야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기 자신을 깨부수어야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보다 먼저 깨부수어져 쪼개지고 나누어져 우리를 기다리는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깨어있음”은 우리를 기다리시는 바로 그분을 만나는 일입니다. 진정 그분께서는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현전하신 그분의 면전에서 자신을 개방하고, 바로 그분이 주님이심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사랑과 생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깨어있음의 표시는 무엇일까? 또 무엇을 통해서 우리는 깨어있음을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잠을 자든, 일을 하든, 기도를 하든, 대화를 하든, 주님께 지향을 두는 일입니다. 그 무엇을 하든 주님을 향하여 하게 되면 깨어있는 일이 됩니다. 그것은 곧 “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야말로 깨어있음의 표시가 됩니다. 늘 기도하면, 늘 깨어있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병행구절인 루카복음에서는 말합니다.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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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깨어 있어라.”(마르 13,35)
주님!
깨어 있게 하소서. 깨어 기다리게 하소서.
고대하고 희망하게 하소서. 희망하고 준비하게 하소서.
더 이상은 잠들지 않게 하소서. 졸지도 않게 하소서
헛 군데 눈 돌리지도 말게 하소서. 언제나 임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빛의 갑옷을 입고, 빛 속을 걷게 하소서. 동행하시는 당신께 깨어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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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깨어 있어라.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마르13,35.36)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함께하기를 빌면서 새해 인사드립니다.
대림시기는 두 개의 기다림을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첫 번째 기다림은 오늘부터 12월16일까지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재림'이고, 두 번째 기다림은 12월 17일부터 24일까지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강생(성탄)'입니다.
대림시기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처럼 '깨어 있는 시기'이며, 내면에 쌓여 있는 허물들을 깨끗이 씻어내는, 곧 '속죄하고 보속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오시는 그리스도를 기쁘게 맞이하는 시기'입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2021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맞아, 오늘부터 내년 11월 27일까지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으로 선포합니다.
희년의 주제는 "당신이 천주교인이오?"인데, 이는 김대건 신부님께서 옥중 취조 때 받으셨던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신부님은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순교하셨습니다.
이 희년의 주제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던져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천주교인이오?"라는 물음에 나도 김대건 신부님처럼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몸과 삶으로 천주교인이라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요즘 다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 19가 교회의 중요한 특징이요 정체성인 사제직과 예언자직과 왕직의 사명마저 흔들고 있습니다. 격리와 비대면이라는 현실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이 매우 혼란스럽고 힘든 시간이지만, 이 시간이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간에 오히려 우리의 본질인 십자가 사랑을 더 바라보고, 말씀을 더 가까이하면서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복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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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PIndFyfhdjU&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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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깨어 있어라."(마르 13, 37)
새 해를
시작하는
대림의
첫날이다.
가고 오는 것이
인생사의
이치(理致)다.
준비와
기다림 속에서
맞이하게 되는
설레임의
여정이다.
깨어 있음은
가슴 뛰는
기쁨의
설레임이다.
간절히 기다리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이 살아있는
우리들의
행복이다.
우리의 삶과
기다림은
분리될 수 없다.
삶이 기다림이고
기다림이 삶이다.
기쁘게 준비하고
기쁘게 기다리는
사랑의 삶이다.
사랑이란
사랑의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집중이다.
이와같이
대림(待臨)은
하느님과 우리의
두근거리는
최고의 사랑이다.
기다리며
정화되고
기다리며
깨닫게되는
기다림의 신비이다.
서두르는 것이
아니라
겸손해지는
마음의 여정이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간절한
마음말이다.
그래서
깨어있음은
하느님을 향한
활짝 열린
사랑이다.
깨어있음이
무너진 관계를
바로 세운다.
자기 자리에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깨어있는 삶이다.
더 따뜻하고
더 진실되고
더 소중한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깨어있음의 정신은
제대로 볼 수 있고
힘겨운 이 시간까지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더 높은
사랑이다.
이 대림시기가
더 높은 사랑을
향하고 실천하는
은총의 시간이길
기도드린다.
깨어있음의
여정은
다름아닌
다채롭게 펼쳐질
사랑의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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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달력은 왜 11월 부터시작할까?>
-가톨릭신문
일상을 사는 우리는 통상 1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지내고 있죠. 그러나 가톨릭 교회 달력의 시작은 11월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성탄, 곧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리기 시작하는 때를 한 해의 시작으로 삼습니다. 보통 중요한 손님이 집에 찾아오면 미리 집 안을 청소하고 여러 준비를 해두죠?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예수님 오심을 앞두고 ‘기다림’과 ‘준비’의 시간을 갖지요. 그래서 이 시기를대림 시기라고 부릅니다. 대림 시기는 전통적으로 4주간으로 지내오고 있어요. 예수님의 성탄, 즉 크리스마스가 12월 25일이고, 여기서부터 주일 네 개를 거꾸로 빼면 보통 11월 말쯤이 됩니다. 올해는 11월 29일이 그 날이 됩니다. 그래서대림 제1주일이라고 부르지요. 교회력은 이렇게대림 제1주일에 시작한답니다. 대림 시기에 대해 더 알아볼까요?
● 6세기 이후 기쁨의 의미가 더해져
대림(待臨)은 한자 그대로 ‘오기를 기다린다’는 의미입니다. 영어로는 ‘Advent’라고 하는데 ‘도착’을 뜻하는 라틴어 ‘Adventus’(아드벤투스)에서 유래했죠.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한 요한 세례자는 구세주께서 곧 오실 것을 알리며 회개를 촉구하고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기도 했어요.
대림을 지내는 풍습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그 시기가 정확하지는 않아요. 다만 4세기 말쯤 스페인과 갈리아(프랑스 남부) 지방에서 성탄을 앞두고 6주간 참회의 기간을 지냈다는 데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죠. 하지만 당시의대림은 ‘금욕’의 성격만 지녔다고 합니다. 6세기 이후 그레고리오 교황이 전례로 정하면서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기쁨’의 의미가 더해졌습니다.
● 예수님 오심을 대비한 회개와 희망의 시기
교황청은 대림 시기 의미에 더욱 정확한 지침을 전하고 있어요. 1970년 개정한 「로마 미사 경본」에 수록된 ‘전례력과 축일표에 관한 일반 지침’을 통해 “대림 시기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들 사이에 오신 것을 기억하는 성탄의 대축일을 준비하는 시기요, 동시에 그와 같은 기억을 통하여 마지막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도록 영혼이 인도되는 시기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림 시기의 마지막 제4주는 구세주 오심에 대비한 ‘회개’의 마음과 더불어 예수 탄생을 기뻐할 ‘희망’의 마음을 함께 지니는 시기입니다. 연말이면 우리가 한해를 돌아보고 반성하며 새해를 기쁘게 맞을 준비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 제대초와 제의 색도 바뀌어
대림 시기에는 보랏빛 대림초가 제대 앞을 장식합니다.
사철나무 위에 장식된 대림초는 매주 촛불을 하나씩 늘려가며 구세주가 얼마나 가까이 오고 계시는지 알려 줍니다. 대림초는 보라색 4개 혹은 보라색 3개와 장미색 1개, 또는 흰색 4개로만 사용할 수 있어요.
가장 짙은 색부터 불을 밝히면 돼요. 초 4개를 모두 켜게 되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곧 임박했음을 알 수 있겠죠!
이때는 사제의 제의 색깔도 바뀌어요. 사제는 대림 시기 회개와 속죄를 뜻하는 보라(자주)색 제의를 입습니다. 주님 오심을 합당하게 준비하려면 회개와 절제하는 자세가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이 시기엔 제대 또한 화려함을 없애죠.대림 시기에는 제대를 대림환으로만 비교적 단출하게 장식하고, 미사 중 대영광송도 하지 않는 게 특징이에요. 오르간 등 악기의 단독 연주도 금하고, 혼인성사가 있어도 화려함을 피하죠.
하지만 사제들은 대림 제3주일이 되면 기쁨을 나타내는 장미색 제의를 착용해요. 전례 내용에 따라 주님께서 오실 날이 머지않았음을 기뻐하기 위해서입니다.
● 대림 시기 중남미 지역의 축제 ‘라스 포사다스’
라스 포사다스(Las Posadas)는 스페인과 멕시코, 과테말라, 미국 남서부 지역에서 대림 시기에 지내는 중요한 축제 중 하나예요. 12월 16일부터 예수 탄생 전야인 12월 24일까지 9일간 열리는 성대한 전야제죠. 포사다스(Posadas)는 스페인어로 ‘숙박’을 뜻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를 낳고자 신성한 장소를 찾아가는 과정을 축제 안에 묘사하며 그 의미를 드높이는 데 목적이 있어요.
축제는 마리아와 요셉 역할을 맡은 두 주인공과 뒤따르는 행렬이 여인숙을 향해 출발하는 장면으로 시작해요. 마리아와 요셉이 도착하면 집 주인은 노래를 부르며 맞이하고, 집 안에서는 모두 같이 무릎을 꿇고 예수 탄생 기도를 드리죠. 나귀를 탄 마리아 뒤로 천사와 목동들이 함께 따르는 모습까지 재현하면 축제가 더욱 풍성해지겠죠? 이 기간에는 아이들과 함께 사탕과 과일을 나눠 먹는 풍습도 있어서 어른부터 아이까지 온 동네 사람들이 예수 탄생을 함께 기다리고 축하할 수 있어요.
● 교회력이 지닌 의미
사람들은 세상사의 온갖 중요한 일들을 보통 1년을 단위로 해서 기념하지요. 마찬가지로 교회는 구원의 역사를 1년을 주기로 해서 기념한답니다. 이것을 교회력 또는 전례력이라고 불러요. 교회력은 구원 역사의 중심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대림 시기부터 시작하지요. 그래서 대림→성탄→사순→부활→성령 강림→연중 시기로 이어집니다. 연중 시기의 마지막이 지난 주에 기념한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한 해 전례력을 통해 지나간 신앙 유산을 돌아보고 현재를 경험하며 내일에 대한 희망을 다지지요. 미사 중 거행되는 말씀 전례는 3년주기(가ㆍ나ㆍ다해)로 편찬돼 다양한 성경 속 의미를 복음과 강론을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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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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