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종교들이 인류 역사에 출현했다 사라졌으며, 오늘날까지 존속한 종교들도 편안히 살아남지만은 않았다. 처음 발흥할 시기에는 기존 종교나 국가의 견제를 받았으며, 이후에도 타 종교와 대립하는 등 자신들의 종교를 지키기 위해 때로는 목숨까지 걸어야 했던 경우가 빈번했다. 종교들은 이러한 죽음을 ‘순교’라 부르며 이상적인 신앙의 자세로 여겼고, 순교자의 업적을 칭송하고 기렸다.
일반적으로 순교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행위로 생각되지만, 어떤 종교들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순교가 권장되었다. 심지어 순교의 고통과 죽음을 갈망하는 지경에 이른 종교도 있었다. 종교에서 순교를 이렇게까지 권장하는 데에는 순교 본래의 의미 외 여러 이유들이 있었다. 이번『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여러 종교들의 순교 사례를 살펴보며, 그 이유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마니교는 3세기경 페르시아(現이란)에서 마니(Mani)가 창시한 종교로, 그리스도교와 조로아스터교, 불교 등을 융합한 새로운 종교였다.<자료1> 마니교는 선과 악, 빛과 어둠이 근본적으로 대립하고 있다는 이원론적 교리를 가졌으며, 금욕주의적이고 전쟁과 살육을 부정했다. 마니는 자신이 아담에서 시작하여 아브라함, 붓다, 조로아스터, 예수로 이어져 내려온 예언자들의 마지막 계승자라고 칭했고, 기존 종교들은 후대 신봉자들에 의해 가르침이 타락되고 잘못되었다며 자신이 완전한 가르침 그대로 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마니는 본인의 교리도 왜곡되지 않도록 직접 경전을 집필했고, 이를 여러 언어로 번역해 포교하며 특정 민족만이 아닌 세계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보편적인 종교를 창설하려 했다.
그러나 276년, 조로아스터교가 국교였던 페르시아의 왕 바흐람 1세는 마니교가 국교를 해치는 사악한 종교라 판단해 마니에 사형을 선고한다. 마니는 26일간의 악형 끝에 제자들에게 최후의 메시지를 남기고 순교했다. 제자들은 그 26일을 ‘빛을 비추는 자의 고통’ 또는 ‘마니의 수난’이라 불렀으며, 마니가 십자가형으로 처형됐다고 묘사했다. 제자와 신도들은 슬픔을 딛고 마니의 가르침에 따라 더욱 열심히 포교하여, 그 무렵 마니교는 놀라운 속도로 전파되어 세계 4대 종교의 반열에 오를 만큼 성장했다.
마니교의 확산과 성공은 다른 종교에게는 위협으로 여겨졌으며, 그리스도교,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 불교 문화권에서 크게 박해를 받았다. 291년에는 페르시아 제국 바흐람 2세에 의해 박해가 일어나 사도 시신(Sisin)을 비롯한 많은 마니교도들이 학살당하였다. 296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마니교의 지도자들과 주동자들을 최고의 형벌에 처하여 그들의 혐오스러운 경전들과 함께 화형에 처할 것을 명한다.”는 칙령을 발표했고, 그 결과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에서 많은 마니교 순교자가 발생했다. 또 381년 그리스도교인들은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마니교도의 시민권을 박탈할 것을 요구하였고, 테오도시우스는 382년, 마니교의 사제 혹은 승려들을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칙령이 발표된 얼마 후인 386년, 본래 열렬한 마니교도였던 그리스도교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9년간 심취해있던 마니교를 버리고 그리스도교로 개종을 결심했고, 이듬해 세례를 받았다. 이후 그는 앞장서서 마니교를 비판하는 인물이 되었다.
5세기 무렵 마니교는 그리스도교로부터 이단으로 판정되었고, 그리스도교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서양에서는 6세기경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박해를 피해 동쪽으로 세력을 옮겨 포교했지만 중국에서도 박해를 받으면서 14세기 무렵에는 완전히 소멸되기에 이른다. 순교도 마다않던 신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000여 년에 걸친 그들의 역사가 소멸되어 버린 데는 마니교가 세속 권력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참수할 때 목 가운데서 흰 우유가 한 마장이나 솟구치니,
이때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땅이 흔들렸다.’
이것은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묘사한 이차돈 순교비의 기록이다.<자료2> 이차돈의 순교는 527년, 신라에 불교를 공인하는 계기가 된 사건으로서, 이차돈이 불교를 일으키고자 본보기로서 자신을 처형할 것을 법흥왕에게 청했고, 그를 처형하자 위와 같은 기현상이 일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순교라고 표현하기에 이차돈 순교 사건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보통은 종교를 박해하는 자가 순교자를 처형한다. 하지만 법흥왕은 이차돈을 처형한 바로 그해에 마치 순교 사건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불교를 공인했기 때문이다. 지난 2005년 방영된 KBS 역사 다큐멘터리『역사스페셜』에 의하면, 그 의문의 해답은「삼국유사」와「해동고승전」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법흥왕은 절을 지어 불교를 일으키려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히고 있었고, 이때 법흥왕의 비서이자 당숙 관계였던 이차돈이 왕의 마음을 헤아리고 순교를 자청했다. 즉 이차돈의 순교는 법흥왕의 불교 탄압에 맞선 죽음이 아니라, 왕과의 밀약에 의한 정치적 결단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왜 순교라는 목숨을 희생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일까?
당대의 신라 사회는 일국의 왕이 절 하나도 마음대로 짓지 못할 만큼 귀족의 힘이 막강했다. 법흥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싶어 했고, 당시 우리나라에 전해진 중국 북위 불교의 ‘왕즉불’, ‘왕이 곧 부처’라는 사상은 왕권 강화를 뒷받침할 수 있는 유용한 지배 이데올로기였다. 법흥왕은 이 불교사상을 수용함으로써 막강한 귀족세력을 해체하고 왕권 강화를 모색하려 했던 것이다. 법흥왕이 이차돈과 모의한 바, 법흥왕은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측근인 이차돈을 왕명을 사칭해 절을 지으려 한다는 죄목으로 과감히 처형하기로 한다. 이러한 이차돈의 순교는 불교를 일으키려는 법흥왕의 의중과 더불어 왕을 능멸하는 자의 최후가 어떤가를 보여 줌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KBS에서는 이를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재위:306~337년)의 그리스도교 공인에 비유하였다. 당시 로마는 4인 공동 황제 체제였는데, 나머지 황제들을 제거하고 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되고 싶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당시 수많던 그리스도교인들의 지지가 필요했다. 이에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그리스도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는데, 이는 왕권 강화를 위해 종교를 공인했다는 점에서 법흥왕의 불교 공인과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이차돈이 모종의 이유로 순교를 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렇다면 이차돈이 순교할 당시 일어난 기현상은 사실일까? 제작진의 조사 결과 땅이 흔들리고, 피 대신 우유가 솟구치고, 꽃비가 내리는 내용까지 이와 유사한 기적들을 여러 불교 경전의 유명한 성인들의 숭배담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자료3>이에 대해 서울대 국사학과 남동신 교수는 “후대 신라 불교도들 입장에서 이차돈은 위인으로 간주되었고 이차돈을 영웅시하기 위해 불교 유명 성인들의 순교담을 끌어온 것”이라 설명했고, 제작진은 흰 우유가 솟고 꽃비가 내리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잘린 목에서 우유가 쏟아져 나온 순교 성인의 이야기는 가톨릭에도 있다. 중세 시대에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고, 영향을 끼친 성인전기이자 신앙서인「황금 전설(The Golden Legend, 1260년경)」에 의하면 사도 바울이나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타리나가 그러했다.
“그가 목 베인 자리에서는 한 줄기 우윳빛 액체가 흘러나와, 군인의 옷을 적셨고 그다음에 피가 솟아 나왔다. 하늘에서는 거대한 빛이 비추었고, 성인(바울)의 시신에서는 지극히 감미로운 향기가 풍겨 나왔다”
“성녀(카타리나)의 목을 자르니 피 대신 우유가 쏟아져나왔다.<자료4> 천사가 시신을 가져다 그곳으로부터 20일이 걸리는 곳인 시나이산으로 옮겼다. 기름이 그녀의 뼈에서 쉬지 않고 흘러나왔는데 사지가 약한 사람을 모두 정상적으로 고쳐
주었다.” – 야코부스著「황금 전설」中
이러한 순교 전설은 설교나 전례 의식 중에 낭독되었다. 교황 젤라시오 1세(재위:492~496년)는 미사 중 순교자를 기념하는 관습을 전파시켰고, 501년에 열린 카르타고 공의회에서는 제단 위나 아래에 성인이 남긴 성유물을 설치해야 한다고 정해졌으며, 이 결정은 오늘날까지 지켜지고 있다. 순교자의 고난과 순교행위를 기억하기 위해 성인 축제도 정기적으로 열렸는데, 축제는 순교자의 수난문을 낭독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순교 전설은 공공장소에서 낭독되거나 연극으로 꾸며지기도 했으며, 책보다는 입에서 입으로 널리 전달되었다. 또 순교 장면을 그리거나, 조각하거나,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에 새겨넣는 등 시각적인 예술 매체로도 전파되었다.<자료5> 순교 전설에 등장하는 감각적 은유와 생생한 그림은 신자들이 온몸으로 순교자가 당한 고통을 느낄 수 있게 했고, 순교 전설을 들은 신자들은 순교자의 고통과 죽음을 기리고 그를 본받아 순교를 갈망하게 되었다.
첫댓글 재미있게 봤습니다
잘보고가요
순교가 맞는건지 궁금하네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