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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6]
“결과를 아는 선택”
세상에는 다양한 직업군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생의 결말은 두 갈래로 나뉩니다.
그것이 6절에 등장합니다.
시편 1: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길이 있답니다.
그 길은 의인들이 걷는 길입니다.
반대로 망하는 길도 있습니다.
이 길은 악인들이 걷는 길입니다.
두 갈래의 길 중에
어느 길을 걷고 싶으십니까?
당연히 망하지 않는 길,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길 아닙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그 길을 걸을 수 있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1편을 떠올릴 때
‘복 있는 사람’이 먼저 생각나죠.
여기서 ‘복 있는 사람’은
히브리어로 “아쉬레이 하이쉬”라고 합니다.
이 말은 ‘축복들이
그 사람에게 있다’는 의미죠.
특히 ‘복’이란 단어는
“똑바른 길로 나아가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은
‘똑바른 길로 나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똑바른 길로 가는 자가
복 있는 사람이요, 형통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복들이 임하는 사람’의
특징은 뭐가 있을까요?
우리 함께 본문 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시편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먼저는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악인’이란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죄를 짓는 자를 의미합니다.
‘꾀’는 영어 성경에
‘advice’, ‘plan’, ‘counsel’로
번역되었습니다.
즉, 악인의 꾀를 따르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벗어나는 조언과
계획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악인들은 말씀보단
인간적인 욕심과 의지를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얻을 수 없는 건
없다고까지 하죠.
얼마 전 다른 교회 성도님을 만났습니다.
이분이 예전에 일하던 곳에
어떤 항아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밥솥 크기만 한 항아리인데 특별할 건 없었어요.
그런데 이게 자그마치
200만원이나 했다는 겁니다.
그것도 10년 전에 말입니다.
왜 이렇게 비싼지 물었더니
이 항아리를 만든 분이 굉장히 유명하고
실력이 있어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특히 이 항아리에 소원을 넣으면
그게 이뤄진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볼 땐 말도 안 되는 것 같죠?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말에
너무 쉽게 넘어갑니다.
예전에 「시크릿」이라는 책이
한창 유행했었습니다.
이 책의 핵심은
‘내가 원하면 우주의 기운을 끌어다 쓸 수 있다’
입니다.
이 책을 읽은 어떤 할아버지가
지하철을 탔답니다.
때마침 자리가 없었어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앉아있는 사람 앞에 서서
작지만 다 모두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고 해요.
“지금 자리가 난다.
내 앞에 있는 남자가 일어난다.
내 앞에 있는 남자가 일어나서
나는 그곳에 앉는다.”
옆에서 보던 사람들이 킥킥 거렸다고 해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정말 진지했어요.
바로 그때 앉아있던 중년 남자가
할아버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곤 두 눈을 감고 작지만
다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끝까지 자리에 앉아서 간다.
나는 절대 일어날 일이 없다.
나는 끝까지 앉아서 간다.”
두 남자의 이야기를 라디오로 듣다가
배꼽이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이렇게 거짓된 말로
우리를 속입니다.
특히 잘못된 물질주의,
세속적 성공과 쾌락주의 등이
우리 영혼을 망가뜨리죠.
그 속에는 인본주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 정반대인
신본주의를 외칩니다.
‘내 계획과 달라도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믿고 순종한다’는 거죠.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니다.
성경에는 시간과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 단어를 씁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입니다.
‘크로노스’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입니다.
반면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때를 의미합니다.
모두가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 속에서
‘카이로스’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복 있는 사람’이 그러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3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편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여기서 ‘철을 따라’란 말이 중요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사시사철 열매를 맺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나무는 철에 맞춰서 열매를 맺습니다.
분명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인데
아직 열매가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이죠.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아직 아무런 열매가 없다고 실망합니다.
옆에 있는 동료는 승진하는데,
나는 여전히 제자리일 때 더 그렇죠.
같이 사업을 시작했는데
누구는 연 매출이 몇 억씩 오르는데,
우리는 빚만 늘어가면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분명히 같이 놀았던 친군데,
나보다 성적이 좋으면 괜히 위축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며
푸념하기에 이르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겐 카이로스의 때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귀는 이걸 보지 못하게
우리의 눈과 귀를 막습니다.
그래서 두려움과 걱정 속에 살아가게 하죠.
나중엔 불평과 불만까지 터지며
하나님께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민수기 13장에 등장합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10명이
“우린 못들어가”라며 악평합니다.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과 걱정에 휩싸입니다.
곧이어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죠.
끝내 하나님께 원망합니다.
“이럴 거면 왜 우리를 이 광야로 데려왔습니까?
차라리 애굽에서 노예 생활 할 때가 좋았습니다!”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치던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죠.
민수기 14장 27, 28절입니다.
민수기 14:27,28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결국 하나님은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20세 이상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광야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악인들의 꾀에 따라가지 마십시오.
그들과 함께 걷지 마십시오.
누구나 인생에서 답이 없는 것 같은
문제를 만납니다.
그때 아무나 찾아가 조언을 구하면
문제가 더 커집니다.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 앞에 먼저 엎드리십시오.
그리고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며
주의 뜻을 구하십시오.
두 번째로 기억할 것은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말은 ‘목표물에 맞추지 못한 자’,
‘과녁을 벗어난 자’를 말합니다.
앞서 ‘악인’은 삶의 태도에서 문제가 있었다면,
‘죄인’은 삶의 목표와 방향이 잘못된 거죠.
영어로 ‘죄’는 ‘sin’입니다.
여기서 ‘i’는 ‘나’를 의미하는 ‘I’와 같습니다.
쉽게 말해 내가 인생의 중심이 되는 것,
그것이 죄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아야 합니다.
죄인들의 특징이 바로 이것이죠.
스스로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합니다.
성경은 ‘교만’을 특별히 경계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으면,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경고합니다.
안타깝게도 잘 나가다가 중간에 교만 때문에
무너진 인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대표적인 인물로 사울 왕이 그렇죠.
그는 분열된 이스라엘을 하나로 만든
인물입니다.
처음에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어요.
사람들이 모두 그를 왕으로 삼으려 할 때
숨어있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점점 하나님을
멀리하기에 이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완전히 진멸하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쟁에서 이긴 후에
좋은 것들을 숨겨 둡니다.
사무엘 선지자에게 모두 발각되자,
그가 어떻게 했을까요?
당연히 회개하고 돌이켜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어요.
오히려 백성들이 보고 있으니 잘해달라며
사무엘에게 아부를 떱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먼저 제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진짜 목사가 맞니?”
설교를 마치고
가끔 “은혜 받았다”는 소리를 들으면
솔직히 기분이 좋습니다.
설교 영상 조회수가 높으면
괜히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다음 카페에 올라간
설교문의 조회수에도 신경이 쓰입니다.
이게 솔직한 제 모습이더라고요.
그래서 회개했습니다.
주님만이 저의 왕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내’가 주인이 되면 인생이 망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주인이 되면
생명을 살립니다.
지금으로부터 1-2세기 전만 하더라도
‘편도 선교사’가 많았습니다.
이들 중에 ‘밀른’이라는 선교사님이 계셨어요.
그는 남태평양의 뉴헤브리디스 제도라는 곳에
파송 받아 떠났습니다.
이전까지 그곳에 파송되었던 선교사님들은
모두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현지인들의
강력한 반기독교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선교사님들은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바로 이런 곳에 밀른 선교사님이
그곳에 갔습니다.
그가 처음 이곳에 방문하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렇게 편도 선교사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처음에는 박해도 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날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곳에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핍박을 받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서 자신을 책임져 주실 것을 믿었죠.
그렇게 그는 35년을 이곳에서 살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죽고 난 뒤 현지인들은
그의 묘비명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가 왔을 때 빛이 없었다.
그가 떠났을 때 어둠이 없었다.’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저는 우리의 삶이 이렇게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오기 전까지 빛이 없던
가정과 직장, 그리고 학교가
나 한 사람 때문에
어둠이 사라지는 일이 일어나길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죄인의 길에 서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인되시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렇게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죄인들의 특징 3가지에 보면
동사가 3개 등장합니다.
따르다(walk with),
서다(stand),
앉다(sit)입니다.
이것은 죄의 점진성을 나타냅니다.
처음에 죄는 따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것을 쫓다보면
어느새 죄의 자리에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조금 후에 털썩 주저 앉아 버리죠.
그러므로 처음부터 죄가 유혹할 때
따르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깨어 있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 함께 본문 2절을 읽겠습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여기서 율법은 좁은 의미로
토라(모세 오경)만 해당합니다.
그러나 넓게는 하나님의 계시 말씀인
성경을 의미합니다.
오늘 시편 저자는
그 말씀을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즐거워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페츠’입니다.
이 말은 ‘마음이 온통 한 곳에 쏠려 있다’는
의미죠.
다시 말해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 마음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이 쏠려계십니까?
우리는 그러지 않을 때가 많아요.
어제 봤던 드라마의 다음 편이 어떨지,
오늘은 점심에 뭘 먹을지,
예배 끝나고 뭐할지에만
마음이 쏠려 있진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행복한 인생이 되고 싶으십니까?
그러러면 말씀에 마음을
올인하시기 바랍니다.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이 노래가
‘앉으나 서나 말씀 생각’으로
바뀌길 축복합니다.
또한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단순히 깨닫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성경에 대한 이해를
지식적으로 쌓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 문학을 읽는 것처럼 읽고 끝나선
절대 안 됩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느끼고 결단한 내용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능동적인 순종을 말합니다.
100여년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목회자요 저술가로 사역했던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영성 사역자로 굉장히 유명하신 분입니다.
그가 이런 말씀을 남겼습니다.
“말씀 앞에 홀로 서는 시간을 가질 때
주님이 우리 삶의 모든 것 되시는
복을 경험하게 된다.”
말씀 묵상이 왜 중요한지 다들 아시겠죠?
큐티를 아시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날마다 말씀으로 하루를 열어가십시오.
그게 힘드시면 하루 한 구절 말씀을
암송하셔도 좋습니다.
요즘은 유튜브를 통해서도
말씀을 들을 수 있어요.
듣다보면 분명히 힘이 되는
구절들이 있으실 겁니다.
그걸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붙여 놓으십시오.
특별히 손으로 쓰면
기억에 더 오래 남는다고 해요.
자기 전에도 말씀으로
하루를 마무리 하십시오.
우리는 말씀을 통해
우리 삶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복 있는 사람은
죄와 악을 따르지도,
서서 구경하지도,
앉아 있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동시에 그는 말씀을 묵상하며 즐거워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어떤 축복이 따를까요?
본문 3절을 읽겠습니다.
시편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항상 신선한 물을 공급받습니다.
그래서 잎사귀가 푸르르고 열매도 맺죠.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내린 사람도
이러합니다.
시냇가에 흐르는 물처럼
말씀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은혜의 물줄기가
영적인 갈증을 해결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철을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철을 따라’ 열매가 맺힙니다.
우리도 때때로
어려움과 고난, 시련을 만납니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은
고난의 시간 속에서도 열매를 맺습니다.
무엇보다 형통의 축복이 있습니다.
형통한다고 해서
물질의 축복을 많이 받는 것만
의미하진 않습니다.
로또를 샀는데 1등이 되거나
공부를 별로 안했는데
좋은 대학에 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형통함은
우리의 영혼이 평안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자에겐
주님의 인도하심이라는
형통의 복이 임합니다.
반면 악인은
바람의 나는 겨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바람이 불면 ‘휙’하고
날아가 버립니다.
안정이나 평안과는 거리감이 있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고
망하는 길로 접어듭니다.
말씀을 준비하고 집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런데 제 눈앞에
비닐봉지 하나가 날아갔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악인은 저 비닐봉지와 같구나’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람에 아주 쉽게 날아간 겁니다.
아무리 구찌나 에르마스가 찍힌
비닐이라 하더라도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으면
바람에 날아갑니다.
반면, 겉은 초라하고 검은 비닐 같아도
그 안에 묵직한 벽돌이 들어있으면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날아가지 않아요.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의 차이가
이와 같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그 안에
은혜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악인은 은혜의 ‘은’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시련의 바람이 불면
휙하고 날아가버립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견딜 수 없게 되죠.
얼마 전 어느 영상을 보았습니다.
강남에 사는 학부모였습니다.
그곳에는 학구열이 엄청나답니다.
그래서 아이들 교육비로
수백 만원은 우습게 쓴다고 해요.
왜 이렇게 하는 걸까요?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가게 하려는
부모의 노력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좋은 대학에 가는 것만이
행복한 인생일까요?
그렇게 좋은 대학에 가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취직하면
행복한 삶을 사는 걸까요?
성경은 세상이 말하는 형통의 삶의 공식과
다른 공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적 형통의 공식은 단순합니다.
‘죄를 멀리하고 말씀을 가까이하라.’
‘세상적인 성공만 가르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모습을 가르쳐라’
그러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우리가 먼저 본을 보여야합니다.
구국 기도에서
‘부모가 먼저 본을 보이게 해달라’는
고백만 하지 말고,
진짜 그렇게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어릴 적부터 가난한 촌 동네에서 살면서
고생만 하던 여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너무 아프셨는데
할머니는 ‘니 엄마 곧 죽을 거다’며
새 엄마를 집에 데려 왔습니다.
굿도 해보고 약도 써봤지만 낫지 않던
그녀의 엄마가
어느 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죽을 때 죽더라도
교회 한 번 가보고 죽자.”
그렇게 시작된 신앙생활과 더불어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죽을 날 만을 기다리던 어머니가
점점 회복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 하셨던 것은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않았던 것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했던 것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의 병은 깨끗이 나았습니다.
이후 가족들 모두 교회를 다녔죠.
그렇게 세월이 흘러
그녀는 꿈이 생겼습니다.
배우가 되는 것이었어요.
서울로 상경하여
MBC 공채에 시험을 봤습니다.
1차, 2차, 3차 시험까지 통화하고
5명 중 1명만 떨어지는 면접을 보았습니다.
당연히 붙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혼자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먹고 살기 위해
인력 사무소를 찾아갔습니다.
여기서 추천해 준 일이
세신사 일이었습니다.
한 달 가량 일을 배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일을 가르쳐 주던 선배가
신문을 주며 연기 오디션이 있다고
했답니다.
최종 면접까지 붙어서 가보니
이천명이 넘는 지원자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긴장하며 연기를 연습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가슴에 성경책을 안고
대기하는 내내 말씀을 읽어 내려갔어요.
면접이 끝나고 결과 발표하였습니다.
2314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여주인공으로 합격했습니다.
그리고 데뷔한 영화가
<장군의 아들 2>입니다.
그리고 이 배우는 송채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복 받는 인생이 되길 원하십니까?
그러면 달라져야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의 삶은
세상이 걷는 길과 다르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라가지 말며,
죄인들의 길을 보며
부러움 속에 멈춰 서지 말아야 합니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아야 해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것에 온 마음을 쏟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의지하는 자를
주목하여 보십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인생,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철을 따라 열매 맺는 삶이 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