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우리는 일반적으로 "교양"(Bildung)을 특정한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저 사람 참 교양있어!"라고 말하곤 한다. 이때 말해지고 있는 교양의 의미는 개인이 갈고 닦은 인문학적 지식정도로 축소된다.
그러나 교양은 특정한 개인이 독서를 통해 마음대로 소유하거나 내버릴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시대의 사조를 대표하는 시대정신(Zeitgeist)과 연관된 것이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서술하듯이 교양은 한 사회나 민족의 객관정신으로서 개인의 자유를 실현하는 존재론적 토대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독일어로 "형성"이나 "구성"이란 의미를 함께 갖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특정한 개인의 인식물을 가리키는 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의 발전과 함께 움직이는 동적인 개념이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명제가 귀결되어 나온다. 곧 "역사의 발전에 속한 채로 그것의 역동적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는 자만이 교양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짓다", "구성하다", "형성하다", "만들다", 그리고 "조형하다"란 의미를 가진 Bildung의 동사 bilden은 어원학적으로만 보아도 건축가나 예술가의 행위와 연관된 단어이다. 그래서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 제1부에서 교양을 미학과 접목시켰다.
이미 언급했듯이, 만약 Bildung이 특정한 개인의 인식론적 소유물이 아니라 한 시대의 문화적 토양과 관계한다면 이 토양은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왔던 특정한 공동체와 민족의 관습과 인륜을 반드시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예술가는 공중에 붕뜬 빈 공간에서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저 존재론적 토양 안에서 그의 상상력을 발현한다. 위대한 예술작품일수록 예술가 자신이 속해있는 시대정신을 무시하지 않으며 그 정신 안에 숨어있는 전통을 거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저 토양과 단절된 예술은 없다. 따라서 예술가가 교양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교양이 예술가를 만든다. 우리는 특정한 개인을 교양있는 자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면 그 역시 교양에 의해 지금도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가일수록 전통의 진리에 깊숙이 연결된 시대정신에 민감하며 교양의 존재론적 진리에 자신의 예술을 내맡길줄 아는 자들이다. 우리는 이들을 "진정한 예술가"나 "진정한 교양인"이라고 부른다. - 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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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있는 사람
유희경
교양 있는 사람은 노크하며 묻는다 똑똑 계십니까 교양 있는 사람이여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이 없군요 당신을 위해 던져 버렸으니까요 그것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반듯하게 접힌 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선한 이마를 훔친다 경치가 훌륭하군요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답니다
나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기다린다 어서 그가 말해 주기를 한 층 한 층 올라설 때마다 떠올렸던 영광된 기억과 희망찬 미래의 이야기들을 거기서 얻어 낸 빛나는 영감들 그리고 그가 낚아챈 상념의 거센 발버둥과 울음소리에 대해서도
몹시 피곤하군요 그는 졸린 눈으로 나를 본다 나는 그에게 의자를 가져다주고 그러면 교양 있는 사람은 자리에 앉아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일은 매번 반복되지만 나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는 내가 기다리는 교양 있는 사람이고 언젠가 내가 기다리는 말을 해 주리라는 사실을
시 감상 - 채상우 (시인)
'교양'의 현재 사전적 의미는 '가르치어 기름' 혹은 '학문, 지식, 사회생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품위 또는 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이다. 그런데 '교양'을 뜻하는 영어 'culture'의 원어인 'cultura'의 뜻은 '경작'이고, 독일어 'Bildung'의 의미는 '형성'이다. 즉 '교양'은 원래 '어떤 상태로 잘 가꾸어졌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어떤 상태'란 국가나 민족, 계급, 사회 등이 개인에게 요구하는 이념을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이념의 내면화를 사회화라고 표현한다. 따라서 '교양'이란 한편으론 한 개인의 성장을 뜻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억압과 순종의 결과다. 이는 "교양 있는 사람"에게서 그 무엇도 기대할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