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컷의 바람기
원앙의 금술은 거짓말
퓰리처상 수상 기자이자 여류 과학 수필가인 나탈리 앤저가 뉴욕타임즈에 연재했던 글들을 묶어서 펴낸 《짐승 같음의 아름다움(The Beauty of the Beastly)》이란 책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동물들은 암컷의 바람기를 어떻게 잠재울까》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이 책에는 동물사회의 남녀 관계, 부모 자식 관계, 경쟁과 협동, 갈등과 책략, 유전과 적응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하여 모두 서른세 편의 글이 실려 있다. 독자들의 흥미를 위해, 다시 말해서 책을 더 많이 팔기 위해 지나치게 과장되고 선정적인 부분이 군데군데 보이기는 하나, 그 많은 주제에 대한 저자의 폭넓은 지식은 가히 전문 과학자를 무색하게 할 지경이다.
이 책에는 생명의 신비를 담고 있는 유전물질에 관한 분석은 물론 동물 세계의 온갖 삶의 모습들에서 여성들이 월경하는 이유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문제들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역서의 제목으로 채택될 만큼 가장 흥미롭고 자극적인 주제는 역시 첫째 장에서 다른 암컷의 바람기에 관한 것이다. 수컷의 바람기는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암컷의 바람기는 흔히 들을 수 있는 얘기가 아니다.
다윈의 이른바 ‘성선택설’에 의하면 손쉽게 많은 정자를 만드는 수컷은 더 많은 암컷들과 정사를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은 자식을 얻는다. 반면, 암컷은 아무리 여러 수컷들과 정사를 갖는다 해도 쉽사리 자식의 수를 늘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따라서 암컷은 자연히 남녀 관계에 있어서 더 소극적이고 신중할 수밖에 없고, 수컷은 어느 정도 바람기를 타고난다는 것이다.
산아제한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기 전에는 대부분의 문화 권에서 여성들은 일생동안 평균 여섯에서 여덟 명의 자식을 낳았다. 아무리 많이 낳는다 해도 24명을 넘는 예는 거의 없다. 하지만 기네스북에 따르면, 18세기 러시아의 한 여인은 무려 69명의 자식을 낳았다. 쌍둥이 열여섯 번, 세쌍둥이 일곱 번, 네쌍둥이 네 번을 포함하여 모두 스물일곱 번의 임신을 통해 낳은 자식들이다. 한 번이라도 임신을 해본 여성이라면 실로 입이 딱 벌어질 일이다.
하지만 그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것은 남성의 생식력이다. 역시 기네스북에 따르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자식을 본 남성은 17~18세기에 걸쳐 살았던 모로코의 황제 물레이 이스마일이다. 그는 무려 888명의 자식을 두었다. 자그마치 500명이 넘는 처첩을 거느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비교적 암수 차이가 적을 듯한 인간의 경우를 보더라도 남성과 여성의 생식력은 양적으로 엄청나게 다르다. 그러나 동물행동학자들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많은 동물의 암컷들이 실제로 여러 수컷들과 성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금술이 좋다 하여 결혼 선물로 주고받는 원앙새의 암컷도 종종 배다른 새끼들을 낳는다. 하지만 수컷과 암컷이 서로 여러 배우자를 상대한다 하더라도 책략 면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수컷들은 자식을 양적으로 늘리려는 데 비해, 암컷들은 질적 향상을 도모한다.
여러 수컷들과 성관계를 가진 뒤, 정자들끼리 치열한 경쟁을 하게끔 만들어 가장 뛰어난 정자를 택하거나, 여러 수컷들의 정자를 두루 사용함으로써 유전적으로 다양한 자식들을 낳아 예측하기 어려운 환경 변화에 대처하기도 한다.
또 성관계를 가질 때마다 수컷에게 혼인 선물을 받는 암컷들은 좀더 많은 수컷들을 상대하여 자원을 축적하기도 하고, 여러 수컷들과 관계를 가져 그들로 하여금 태어난 자식이 제가끔 자기 핏줄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지속적인 보호와 지원을 제공받기도 한다. 아무리 여러 수컷과 관계를 가졌다 하더라도 암컷은 자기 몸에서 태어난 자식의 유전자 중 절반이 자기 것이라는 확신이 있지만, 자칫하면 엉뚱한 남의 자식에게 투자할 수도 있는 수컷으로서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암컷의 바람기를 잠재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여권주의자들은 흔히 진화생물학 또는 사회생물학이 그들의 이념에 어긋나는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은 또 없을 것이다. 《종의 기원》을 통해 우리 인간과 원숭이가 그 옛날 같은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진화했다고 설명한 다윈의 자연선택설이 그 당시 기독교 정신에 충만했던 서구인들에게 준 충격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최근 과학사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성에 관한 최종 결정권이 여성에게 있다는, 그래서 암컷들에게 잘 보여 그에게 선택받기 위해 수컷들이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하고 몸도 화려하게 가꾸도록 진화할 수밖에 없었다는 성선택 이론이 당시 빅토리아 시대의 남성들에게 던진 충격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자연선택설을 입증하기 위한 연구들은 《종의 기원》이 발간된 즉시 시작되었지만, 성선택설은 향후 거의 100년이 지나도록 검증은커녕 이렇다 할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했다.
성에 관한 한 우위를 빼앗길 수 없다는 남성들의 공포가 그만큼 컸다는 뜻이다. 여성의 눈으로 재조명해 보는 동물사회의 모습들을 통해 진화생물학과 페미니즘의 상호 이해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길 기대해 본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최재천 저
효형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