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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16일 연중 제20주일
제1독서 : 이사 56,1.6-7
제2독서 : 로마 11,13-15.29-32
복 음 : 마태 15,21-28
그때에 예수님께서
21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22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23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24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믿음의 승리, 믿음의 전사
-사랑, 한결같고 항구한 기도와 믿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인간이 재앙이구나! 탄식처럼 흘러나온 말입니다.
작금의 현실에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낍니다.
코로나19 펜데믹 감염병과 긴 장마와 홍수로 인한 피해 때문입니다.
이건 장마가 아니라 기후변화 때문이라 합니다.
참으로 하나뿐인 공동의 집인 지구는 물론 인류생존의 위기의 시대요 신호처럼 생각됩니다.
말 그대로 전대미문의 사태가 발생한 것입니다.
마스크를 항상 착용해야 하니 함께의 놀이도, 축제의 노래도, 운동도 사라졌습니다.
사제서품 후 31년 만에 이렇게 노래하지 않고 읽기는 처음입니다.
방금 읽은 화답송 후렴, “창생이 하느님을 높이 기리게 하소서”
노래할 때는 얼마나 흥겹고 고양되는 느낌이었는지 생각납니다.
인간은 재앙뿐인가! 아닙니다. 인간은 희망이요 선물이요 보물입니다.
우리 수도공동체의 수도형제들이 바로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수도원의 반려견들을 잘 돌보는 수도형제에게
저는 지체 없이 문보물이요 문천사요 반려견의 수호성인이라 극찬합니다.
아니 이 미사에 참석한 형제자매님들 한 분 한 분 잘 들여다보면
모두가 희망이요 선물이요 보물입니다.
세상에 사람보다 귀한 희망도, 선물도, 보물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희망처럼, 하느님의 선물처럼, 하느님의 보물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래야 하느님의 참 자녀가, 참 사람이 되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성소요 권리요 의무입니다. 이렇게 살라고 세상에 파견된 우리들입니다.
엊그제 저는 참 귀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부채를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를 살라 받은 손부채 선물입니다.
후에 보낸 분을 알고 더욱 반갑고 기뻤습니다.
부채에 제 졸저의 제목 캘리그래피 소박한 붓글씨체,
“사랑밖엔 길이 없네-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가 명필이었습니다.
앞서 받은 자매의 메시지에 답글, 둘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신부님, 사랑밖엔 길이 없네 넘 악필惡筆이죠. 담엔 더 연습해서 멋지게 성공작 보여드릴게요.”
“아, 자매님이 선물한 부채네요! 소박한 필체가 명필名筆입니다. 적당한 때 만나요!”
제 눈엔 분명 악필이 아니라 명필이었습니다. 하여 집무실 벽 그림 위에 걸어 놓았습니다.
온통 프린터기로 출력한 인쇄체 활자들 속에 친필 글씨를 구경한지 참 오래 되었습니다.
정과 마음이 고스란히 살아 배어 있는 옛 친필 편지들을 대하면
각자 고유의 보물 같은 친필의 글자들이 많이 보고 싶어집니다.
“군고구마 팝니다!” 라는 장사하는 분의 소박한 살아 있는 글씨체가
명필이라 찬탄했던 고 신영복 선생의 말도 생각납니다.
어떻게 하느님의 희망으로, 하느님의 선물로, 하느님의 보물로 살 수 있을까요?
믿음의 전사로, 주님의 전사로 사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마디이자 오늘 강론의 제목입니다.
죽어야 제대인 죽는 그날까지 평생 ‘영원한 현역’의 ‘믿음의 전사’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자의 믿음’의 예화를 통해,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가 ‘이방인들에게 내린 약속 말씀’을 통해,
또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다른 민족들의 구원에 대한 말씀’이 답을 줍니다.
믿음의 전사로 영적 승리의 삶을 살기 위한 참 좋은 무기로 무장하여 영적 전쟁에 임하면 됩니다.
누구나 지닐 수 있고 지녀야 하는 세 가지 영적 무기, 사랑과 기도와 믿음을 소개합니다.
첫째,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누구나 마음 깊은 중심에 심어주신 사랑입니다.
모든 인류가 깊이 보면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한 인류가족입니다. 끊임없이 성장 성숙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지어내신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닮아 공정과 정의를 실천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전인류에게 주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로움이 곧 드러나리라.”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며 주님의 종이 되려고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
나의 계약을 준수하는 모든 이들,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고 나에게 기도하는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리라.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
참 놀랍게도 가톨릭 교회를 통해, 또 오늘 하느님의 거룩한 산
불암산 기슭에 위치한 기도의 집 요셉 수도원 성전 미사를 통해 그대로 실현된 예언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 사랑의 생생한 증거가 오늘 미사에 참석한 형제자매들이요,
복음의 이교인 가나안 여자입니다.
주님께 간청하는 가나안 여자의 마음 깊이에는 하느님 사랑이 불타고 있음을 봅니다.
둘째, 한결같고 항구한 기도와 믿음입니다.
기도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가나안 여자의 기도는 그대로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기도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바로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하느님과 사랑의 소통입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말씀이 영혼의 밥이라면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밥 먹고 숨 쉰다 하여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실천하고 기도할 때 참으로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자기와의 싸움이자 주님과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전사이기도 합니다.
가나안 여자야 말로 기도의 전사, 믿음의 전사의 모범입니다.
참으로 탄력 좋은, 백절불굴의 기도와 믿음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가난한 우리가 마지막으로 바칠 꼭 하나의 기도를 꼽으라면 자비송 하나뿐입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 기도 하나만 끊임없이 바쳐도 구원입니다.
이에 근거한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입니다.
제자들의 냉대와 예수님의 거절에도 결코 포기할 줄 모르는 가나안 여자의 거듭된 기도입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참 좋은 기도입니다.
사정이 절실하고 간절하면 군더더기 말들은 사라지고 기도는 짧고 순수해집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충격적이고 모욕적입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자존심이 상해 포기했다면 가나안 여자는 자기와의 싸움에 지는 것인데
그는 유혹에 빠지지 않고 즉시 자기 비움의 절정의 겸손한 기도로 되받아 칩니다.
다음 문답은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참 감동적인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님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정말 가나안 여자의 탄력 좋은 기도요 믿음입니다.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얼마나 강한지 깨닫습니다.
얼마나 마음 깊이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을 사랑하고 신뢰한 가나안 여자였던지 깨닫습니다.
탓할 것은 주님이 아니라 내 기도와 믿음 부족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주님께 깊이 뿌리내린 신망애信望愛의 가나안 여자의 영혼이었기에
지칠 줄 모르는 탄력 좋은 기도와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마치 누르면 즉시 튀어나오는 탄력좋은 용수철을 연상케 하는 기도와 믿음입니다.
몸의 탄력은 떨어져도 마음의 탄력이, 육신의 탄력이 떨어져도 영혼의 탄력이,
믿음의 탄력이 떨어져선 안됩니다.
하여 수도자들이 날마다, 평생,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바치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시편과 미사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니 수도원은 ‘늪의 수렁’이 되지 않고 ‘숲의 쉼터’가 되는 것입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습니다.
예수님을 감동시킨 믿음과 더불어 치유의 구원입니다.
예수님과의 영적전투에서 가나안 여자의 KO승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기쁨에 넘친 항복선언처럼 들립니다.
가나안 여자는 자기와의 싸움에 이겼고 주님과의 싸움에 이겼습니다.
참으로 가나안 여자의 유쾌하고 상쾌하고 통쾌한 기도의 승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흡사 믿음의 여장군처럼 느껴지는 가나안 여자입니다.
사실 저는 제 주변에서 가나안 여자에 필적하는 믿음의 여장군 같은 자매들을
자주 만나면서 감동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하여 때로 이분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나누기도 합니다.
기도든 믿음이든, 아니 모든 수행에서 한 결 같이 항구함이 제일입니다.
끝까지 견뎌내고 버텨내는 지극한 기다림과 인내의 믿음입니다.
바로 우리 분도 수도자들의 정주서원이 의도하는 바입니다.
매사 이렇게 한 결 같이 항구하고 충실하다 보면 내적으로 정화되고 성화되어
점차 주님의 뜻과 내 뜻이 일치가 되어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입니다.
참으로 내가 필요로 하는 것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일치되기 때문입니다.
이래야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우리 인생은 사랑의 학교, 기도의 학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평생 영적전투를 해야 하는 기도의 전사, 믿음의 전사인 주님의 전사요,
평생 사랑을, 기도를 공부하고 배워야 하는 주님의 학인입니다.
오늘 가나안 여자가 참 좋은 겸손하고 탄력 좋은,
한결같고 항구한 주님의 전사의, 주님의 학인의 영원한 롤모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결코 철회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분발하십시오, 초발심의 자세를 회복하십시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참으로 겸손하고 탄력 좋은,
한결같고 항구한 믿음의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살게 하십니다.
참행복도 참 자유로움도 참 내적부요함도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살 때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살아야 하느님의 희망, 하느님의 선물, 하느님의 보물같은 삶입니다.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고 저희에게 복을 내리소서. 당신 얼굴을 저희에게 비추소서.”(시편67,2).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올해 5월, 교육 콘텐츠 전문 회사 스쿨잼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부모님에게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무엇인가?’
아이들이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스마트폰 없이는 못 산다고 하니까 최신형 스마트폰을 예상했습니다.
혹시 게임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지요.
그러나 저의 예상과 달리 아이들이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응답자의 23.7%가 대답한 ‘칭찬’이었습니다.
그다음 순서를 알려 드리면, 2위가 용돈, 3위가 애정표현, 4위가 선물이었습니다.
물질적인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이 더 최고였습니다.
칭찬이나 애정표현은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의 가치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를 가장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만큼 사랑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과 함께 따라와야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사랑도 있을 수 없으며, 사랑이 없다면 또 믿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사랑을 받기 원하며, 이는 아이에 대한 부모의 믿음을 통해서 완성됩니다.
가나안 부인이 와서 마귀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방인에 대한 부정적 마음이 가득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었기에,
제자들 역시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라면서 소리를 지르는 여인을
예수님 곁에 오지 못하게 막으려고 합니다. 예수님 역시 아주 매정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라고 하시면서,
이방인을 빗대어 강아지라고 표현하기까지 하십니다. 화가 나서 그냥 돌아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 모욕적인 말도 인정하며 주님께 다가섭니다. 주님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주님의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로마 11,32) 주님의 사랑을 말씀하셨듯이,
이방인이라고 해서 차별하지 않고 당신의 사랑을 전해줌으로 인해
그 여자의 딸이 바로 나을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결국, 가나안 부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바라는 대로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어떤 믿음을 보일까요?
주님 사랑이 내게는 늘 부족하다고 불평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 다윗의 자손이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말씀의 전례]는 우리의 구원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달려 있음을 밝혀줍니다.
곧 아무도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과 동시에,
구원이 하느님에 의해 모든 이에게 열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제1독서>인 <이사야서>에서 주님께서는 구원이 모든 이에게 열려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 ~나의 계약을 준수하는 모든 이들,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고,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이사 56,6-7)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자비가 불순종한 유대인들을 통해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내려지고, 마침내는 모든 백성에게 미치리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여러분도 전에는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이었습니다.”(로마 11,30-32)
<복음> 또한 이방인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통하여,
당신을 그리스도로 믿고 받아들이는 이는 누구나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가나안 여인은 “큰 소리로 계속 간청하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마태 15,22)
여인은 예수님을 “주님”이요, “다윗의 자손”, 곧 이방인이면서도 메시아로 고백하지만,
정작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마태 15,23).
그러나 여인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청하였습니다.
마귀 들린 딸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합니다.
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버린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제자들은 그녀를 돌려보낼 것을 재촉하고(15,23 참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박절하게 거절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이때가, 부르심의 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 순간이, 당신께서 우리를 한 발짝 더 가까이 부르시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순간에, 당신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더 깊이 끌어들이고자 하십니다.
가나안 여인은 바로 이 순간, 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하고 청하였습니다.”(마태 15,25).
여인은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태 15,26)하시는
냉혹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겸손과 인내, 믿음과 확신을 밝힙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여인은 진정, 자신의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을 “강아지”로 고백하고 낮춥니다.
마땅한 권리로서의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자비에 의탁하고 믿을 뿐입니다.
비록 이방인이라도 주인의 상아래서 자녀들과 함께 빵부스러기를 먹게 되는 구원의 섭리를 봅니다.
여인은 하느님께서는 만민의 하느님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인의 겸손과 믿음, 구원의 섭리에 대한 확신은 드디어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아,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그렇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가 18,13)라고 기도하는 세리처럼,
겸손으로 자비를 청했습니다. 또한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마태 8,8)라고
고백하는 백인대장처럼, 믿음으로 자비를 청했습니다.
그리고 불의한 재판관에게 끈질기게 청했던 과부(루가 18,1-8)처럼,
하느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 밤새도록 씨름했던 야곱(창세 32,25-27)처럼,
끈질긴 믿음의 인내로 자비를 청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단지 열매 없는 시련과 인내를 강요하시는 잔인한 시험자가 아닌,
완전한 구원과 은혜를 주시는 자비로운 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1고린 10,13).
그리하여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사랑의 계획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도들은 <행전>에서 이렇게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십니다.”(사도 10,34-35)
이토록, 모든 이에게 열리는 구원의 충만함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비가 드넓으심을 믿어야 할 일입니다.
더구나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거절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자유를 그분의 사랑을 거절하는 어리석음으로 쓰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도 가나안 여인의 겸손한 믿음으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저를 도와주소서.”를 간청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삶 안에서 실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마태 15,23)
주님!
당신이 침묵할 때 바로 그 순간이, 한 발짝 더 가까이 부르는 순간임을 깨닫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에, 한 걸음 더 다가가 꿇어 엎드려 절하게 하소서!
바로 그 때가, 주님께서 믿음과 사랑을 더 깊이 끌어들이고 계심을 깨닫게 하소서!
당신의 침묵 안에서 겸손과 끈기와 믿음을 길러내소서!
오로지 당신 자비에 의탁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해군에서 36년 동안 근무했던 군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군인은 교관으로 훈련병을 가르쳤습니다.
훈련병을 가르치면서 얻은 교훈을 대학의 졸업식에서 이야기하였습니다.
훈련병들은 여섯 명씩 조를 이루어 보트를 저어야 했습니다.
가장 빨리 도착하는 보트는 키가 크고 체력이 강한 조원이 아니었습니다.
작지만 모두가 함께 열심히 노를 젓는 조원이었습니다.
노를 젓는 데는 학력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피부색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가문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서 열심히 노를 젓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함께 노를 움직일 동료가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미국의 행정부는 코로나19로 온라인 수업을 받는 유학생들의 비자를 연장하지 않고,
각자의 나라로 돌아갈 것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학과 자치정부는 유학생들이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결국 행정부는 결정을 취소하였습니다.
유학생들은 비자연장을 받고, 계속 공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려울 때 이웃을 내치기보다는 어려울 때 이웃과 함께 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현명한 길입니다.
오늘 제1독서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로움이 곧 드러나리라.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 구원받는 것입니다.
훈련이 고되기 때문에 중도에 탈락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운동장에는 종이 하나 있었습니다. 힘들면 종을 칠 수 있다고 합니다.
종을 치면 새벽에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종을 치면 진흙 바닥에 구르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종을 치면 힘들게 노를 젓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종을 치면 단체 기합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종을 치면 편하게 집으로 돌아 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종을 치면 귀신도 잡는 용감한 해병은 결코 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로 종을 치면 안 된다고 합니다.
교회의 역사에도 많은 시련과 박해가 있었습니다.
신앙의 선조들은 배교의 종을 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참고 순교하였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빛나는 신앙의 별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때로 평등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보상이 주어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실패를 거듭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 모욕과 수치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종을 치지 말라고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은 결코 종을 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어진 길을 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새로운 권위를 지니셨고, 기존의 질서와 틀을 허물었던 예수님은 늘 당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꼼짝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일까요? 그렇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믿으셨고, 예수님께 포도주를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때가 아니었지만 자신을 믿고 부탁한 성모님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행한 첫 번째 표징이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백인대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하인을 고쳐주기 위해서 길을 떠나는데
백인대장이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저도 부하들에게 명령을 하면 부하들이 저의 말을 듣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하인이 곧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말을 듣고 감동하였습니다.
어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도 그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오늘 우리가 만나는 가나안 여인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청합니다.
‘강아지도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말을 듣고 또 감동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그 믿음은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시작이고 출발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보화를 마련하셨으니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시어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을 오롯이 사랑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참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마태 25, 15)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제
부스러기를
숨기지 않습니다.
받아들여야 할
제 삶의 부스러기입니다.
부스러기를 통해
제 자신을 보게 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습니다.
그야말로
삶은 쉽지 않습니다.
나의 부스러기와
마주하는 직면의 연속입니다.
기도가 필요하고
은총이 필요한
부스러기의 여정입니다.
부스러기같이
너무나 작은
우리들 믿음입니다.
부스러기는
겨자씨를 닮았습니다.
그러나
부스러기 하나도
그냥 이루어지진 않습니다.
부스러기를 나누듯
주님께
우리의 아픔을 나눕니다.
부스러기를 아시고
부스러기를 믿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부스러기도
타오를 수 있습니다.
부스러기도
뜨거워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잃어버린 부스러기를
다시 찾습니다.
착하고 맑은 부스러기의
간절한 기도를 봉헌합니다.
부스러기를
사랑하게 됩니다.
이름 없는
수많은 부스러기에게
감사드립니다.
부스러기도
기도 할 수 있습니다.
부스러기와 함께
살아갑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전삼용 요셉 신부
성경에서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누는 것 같습니다.
땅에 붙어 기어 다니는 사람, 직립 보행을 하는 사람, 하늘로 오르는 사람입니다.
이 구분은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믿음이 없는 가리옷 유다는 뱀과 같이 되었고,
아직 승천할 가능성이 있는 인간들은 믿음이 있었다가 없었다가를 반복하며,
완전한 믿음에 도달한 사람은 성모님처럼 하늘에서 삽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나안 여인 안에 이 세 부류의 사람의 모습이 다 들어있습니다.
마귀 들린 딸과 함께 살 때가 땅에 붙어 기어 다니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생겨 그리스도께 치유를 청하기 위해 나섰을 때는 믿음이 조금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견뎌 기적을 얻어내었을 때는 하늘의 사람임을 증명하게 됩니다.
이 믿음은 비단 기적을 청하는 것에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소명을 발견하는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다가 영혼을 구원하는 어부가 되어보겠다고 나선 것이 소명을 발견한 것입니다.
물론 그냥 편하게 살면 되지 뭣 때문에 고생하느냐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주님 앞에 물고기만 들고 나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끔찍한 일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앞에 나올 때 빈손으로 와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원하시는 소명이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일을 찾아 소명을 완수하고 그 열매를 주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분명 그 소명을 위해 져야 하는 십자가를 버리고 주님 앞에 다다랐을 때
그 십자가가 없으면 건널 수 없는 낭떠러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편한가요?
가나안 여인이 마귀 들린 딸과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고 편할까요?
어차피 우리 모두 이러나저러나 고생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소명을 찾아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고생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믿음으로 사람을 나눈다면, 사람은 일을 시작하지 않는 사람,
시작만 하는 사람, 시작했다면 끝까지 가는 사람으로 나뉩니다.
그러나 내가 시작한 일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좌절이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끊임없이 좌절을 선물하십니다.
일단 소리 지르며 따라오는 데도 들은 체도 안 하십니다.
그다음은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라며 사람을 차별하십니다.
그다음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하시며
거의 멸시까지 하시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하며
굽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에서 끝까지 갈 수 있는 이유는 그 과정이 좋게만 끝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희 속담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이란 말이 있습니다. 밥을 지으려다 실패하면 죽이 됩니다.
그러나 죽이 되는 것이 실패하는 것일까요? 누구는 죽을 일부러 끓이기도 합니다.
죽만 파는 죽집도 있습니다. 죽도 잘 끓이면 멋진 음식이 되는 것입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란 말 안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미국의 어느 원예연구소에서
‘희귀한 흰색 금잔화의 씨를 보내시는 분께는 큰 사례 하겠습니다.’라는 광고를 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액수가 너무 커서 순식간에 세간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금잔화는 주황색이나 갈색뿐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흰색 금잔화를 찾으려고 애썼으나 누구도 찾지 못했고,
그렇게 이 이야기는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져갔습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후 한 봉투에 흰색 금잔화 씨가 보내졌습니다.
70대 할머니가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50대에 이 광고를 보고 흰색 금잔화 만들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금잔화 씨를 뿌려 주황색과 갈색의 금잔화 중에 색이 가장 옅은 것들의 씨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뿌려 또 색이 옅은 것들의 씨만 모았습니다.
이런 과정을 20년 거치다 보니 흰색 금잔화가 탄생하게 됩니다.
전문 지식을 갖춘 어떤 누구도 해내지 못한 보통 시골 할머니가
금잔화의 새로운 종을 만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웨이슈잉’의 『한 번이라도 끝까지 버텨본 적 있는가』라는 책에 소개된 일화입니다.
이 책의 앞표지에는 ‘승부는 폭발력이 아니라 버티는 힘에서 갈린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진짜 믿음은 끝까지 버티는 것에서 증명됩니다.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이 말합니다.
“성공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달라도 실패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포기하기 때문이다.”
저는 요리를 못합니다. 하다못해 김치찌개도 끓이지 못합니다.
김치찌개를 생각하면 실패한 김치찌개의 모습부터 떠올리게 되니 시도조차 하지 못한 것입니다.
시도하지 않으면 김치찌개도 못 끓이지만 시도하고 끝까지 가면 김치찜이라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제가 아는 한 청년은 난독증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기억력도 좋지 않습니다.
햄버거 가게에 알바로 취직하려고 해도 햄버거 종류를 다 외울 수 없어서 취직하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카페에 취직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메뉴를 외우는 것도 남들보다 몇 배의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몇 번을 그만두고 싶어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끝까지 버텨서 지금은 원두 이름과 팥빙수 만드는 것만 배우면
커피숍을 단독으로 운영할 수 있는 모든 기술 배우기가 끝난다고 합니다.
수 없는 실패 속에서도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이란 정신으로 가야 합니다.
물론 어떤 일을 시작할 때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시작했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가야 합니다.
미리 실패할 것을 생각하고, 미리 좌절할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일이든 끝까지 가면 실패는 없습니다. 밥 아니면, 어쩌면 밥보다 더 맛있는 죽이 됩니다.
끝까지 가면 밥 아니면 죽이지만, 시작하지 않거나
중도에 포기하면 먹을 수 없는 쓸모없는 것이 됩니다.
믿음이 겸손과 비례하는 이유는 겸손한 사람에게
그 믿음을 꺾을 두려움을 주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행을 멈추었을 때는 생각하고, 생각했다면 실행하십시오.
그리고 실행했다면 반드시 끝까지 가 보십시오.
그러면 다음 것을 시작할 때 큰 용기가 생길 것입니다.
적어도 죽을 끓일 수 있는 기술은 남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일 것입니다.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 하느님의 정원
안 콘실리아 수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합니다.
때때로 수도자의 길을 걸으면 모성의 힘이
우리가 따라 할 수 없는 힘 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가나안 여인은 주님에게 두 번이나 거절을 받습니다.
믿을 곳이라고는 그분 밖에 없는데 그분이 거절을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달립니다.
여인은 이방인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사랑을 신뢰할 때 우리는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거절하시는 말씀에서 긍정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이 개에게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긍정할 때 그녀는 자존심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여자는 가나안 여자로서 가지고 있는 자존심을 극복하였습니다.
자존심은 깊은 열등감에서 나옵니다. 그녀는 여자로서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가나안 사람으로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열등감이 있는 사람들이 자아가 비대하게 켜져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을 무시하면 발끈합니다. 무시하지 않았는데도 무시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이런 열등감을 극복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것은 딸에 대한 사랑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모욕을 받으면서도 무엇인가를 이렇게 많이 사랑한다는 것은
부모가 자식한테 줄 수있는 사랑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뛰어넘는 사랑을 하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