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택(金春澤)-堂中夕望(당중석망)(초당에서 저녁나절 풍경을 바라보다)(초당에서 보내는 하루)
升堂不用啓前扉(승당불용계전비) 초당에 오르면 사립문 열 것도 없어라
已自虛明倚翠微(이자허명의취미) 이미 절로 환히 트여 푸른 산 기대 있네
寂寂携書經盛夏(적적휴서경성하) 고요하게 서책 읽으며 한여름을 지내고
悠悠岸幘送斜暉(유유안책송사휘) 한가로이 두건 젖히고 석양을 보내노라
數家婦子煙中語(수가부자연중어) 인가에는 아녀자들 연기 속에 수런거리고
一逕牛羊草際歸(일경우양초제귀) 오솔길엔 소와 양이 수풀 속에 돌아가누나
但使蒼生皆得所(단사창생개득소) 백성 모두 제 살 곳을 얻게만 된다면야
老儒何恨素心違(노유하한소심위) 늙은 선비 평소 마음 바꾼들 어떠하리
*위 시는 “한시 감상 景경, 자연을 노래하다(한국고전번역원 엮음)”(북헌집北軒集)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변구일님은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지난날이었다. 왕실의 인척(姻戚)이기에 조정(朝廷)에서 멀리 떨어져 거리를 두고 살아왔건만 세상 사람들은 나를 놓아두지 않았다. 서로 놓인 처지가 다른 정치 세력 사이의 알력과 쟁투에 휩쓸려 인생의 전반부를 유배되었다가 풀려나는 일이 반복되는 가운데 보냈다.
그러다 부친을 장사 지낸 광주(廣州)의 노산(蘆山)의 기슭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버지 곁에서라면 지난 시절의 상처들이 조금은 아물 것 같아서였다. 가난한 내 삶에 어울리는 초당을 지었다. 나직막한 사립문이 산속에 포근히 안겨 있는 곳이다. 고요한 산속에서 서책에 푹 빠져 여름의 무더위를 잊기도 하고, 붉게 물든 하늘 아래 서서 저 멀리 지는 해를 바라보곤 한다. 마을에서는 오늘도 밥 짓는 연기 속에 아녀자들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길게 뻗은 작은 길에는 소와 양이 수풀 사이로 총총거리며 제집으로 돌아간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산간(山間)의 담박(淡泊)한 일상. 그 옛날 두보(杜甫)도 자신처럼 곤궁한 천하의 한사(寒士)들을 따뜻하게 감싸 주고 싶다는 뜻을 아래와 같이 노래하였다[모옥위추풍소파가(茅屋爲秋風所破歌 모옥위추풍소파가)].
어떻게 하면 천만 칸 넓은 집을 얻어 安得廣廈千萬間(안득광하천만간)
천하의 빈한한 선비들 크게 감싸 주어 다 기쁘게 하고 大庇天下寒士俱歡顔(대비천하한사구환안)
비바라에도 끄덕없는 산처럼 평안하게 해 줄까 風雨不動安如山(풍우부동안여산)
아, 언제나 눈앞에 우뚝한 이런 집을 보게 될는지 嗚呼何時眼前突兀見此屋(오호하시안전돌올견차옥)
내 집이야 부서져 얼어 죽는다 해도 괜찮으리 吾廬獨破受凍死亦足(오려독파수동사역족)
나 역시 불쌍한 이 백성들이 넉넉하게 살 수만 있다면 산중 생활이야 얼마든지 버리고 세상에 나갈 수 있으리라.
김춘택(金春澤)이 이 시를 지을 때의 마음이 이러하지 않았을까?. 김춘택은 본관이 광산(光山)으로,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 그의 오대손(五代孫)이다. 명문가 자제였지만 정치적 부침에 따라 가문이 화를 입는 것을 목격하였기에 그는 평생 행실을 삼가며 벼슬하지 않는 삶을 택했다.
선비의 출처出處 문제는 전통 시대 문학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며 다루어지는 주제 가운데 하나다. 임금과 백성을 위하여 관직에 나가려는 포부와 초야에 묻여 조용히 학문에 종사하며 지내려는 뜻은 항상 선비의 마음에 갈들을 일으킨다. 산중에 살아도 백성에 대한 걱정을 버릴 수 없는 것이 전통 시대 선비의 숙명이었을 것이다.”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김춘택[金春澤, 1670년(현종 11)~1717년(숙종 43),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백우(伯雨), 호는 북헌(北軒), 시호 충문(忠文)]-조선 후기에, 『북헌집』, 『만필』 등을 저술한 문신. 생원 김익겸(金益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숙종의 장인인 김만기(金萬基)이며, 아버지는 호조판서 김진구(金鎭龜)다. 증조모 윤씨에게서 학업을 익히고, 종조부 김만중(金萬重)으로부터 문장을 배웠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특이하여 김수항(金壽恒)의 탄복을 받기도 하였다. 서인·노론의 중심가문에 속하였으므로 항상 정쟁의 와중에 있었으며, 특히 1689년의 기사환국 이후로 남인이 정권을 담당하였을 때에는 여러 차례 투옥, 유배되었다. 1694년 재물로 궁중에 내통하여 폐비 민씨를 복위하게 하고, 정국을 뒤엎으려 한 혐의로 체포되고 심문받았으나,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축출되면서 풀려났다. 그 뒤 노론에 의해서는 환국의 공로자로 칭송받았으나, 남구만(南九萬) 등의 소론으로부터는 음모를 이용한 파행적 정치활동을 행하였다고 공격받았다. 1701년 소론의 탄핵을 받아 부안(扶安)에 유배되었으며,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소생인 세자를 모해하였다는 혐의를 입어 서울로 잡혀가 심문을 받고, 1706년 제주로 옮겨졌다. 시재가 뛰어나며 문장이 유창하였고,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九雲夢)」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이조판서를 추증받았으며, 저서로 『북헌집(北軒集)』 20권 7책과 『만필(漫筆)』 1책이 있다.
*翠微(취미) : 1.산(山)의 중턱, 2.먼 산에 아른아른 보이는 푸른 빚
*幘(책) : 머리쓰개 책, 1.머리쓰개(여자들이 머리 위에 쓰는 수건, 장옷, 너울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2.머리띠, 3.망건(網巾: 머리에 두르는 그물처럼 생긴 물건)
*斜暉(사휘) : 저녁녘에 비스듬히 비치는 햇빛
*暉(휘) : 빛 휘, 1.빛, 광채(光彩), 2. 빛나다, 광채가 나다, 3.밝다
*어휘등급★★ 읽기특급II 대법원인명용
*逕(경) : 좁은 길 경, 좁은 길, 소로(小路)
*素心(소심) : 평소(平素)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