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유민들의 호응을 통하여 한반도를 재통일하기 위해 궁예가 불철주야 세력을 확장하고 있을 때 상주 사람 견훤(867~935)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모두 견훤이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지금의 문경)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그가 태어난 문경시 가은읍 갈전2리 아차 마을은 ‘뭇오리가 호수에 내려앉은 형상’, 또는 ‘금비녀가 떨어진 형상’의 명당으로 ‘아차’라는 이름은 오리[鵝]와 비녀[𨥁]를 뜻한다고 한다. 견훤은 마을 앞으로는 낙동강의 지류인 영강이 흐르고 뒤로는 옥녀봉이 버티고 서 있는 길지 중의 길지인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아차 마을[갈전 2리]에서 가난한 농부인 아자개阿慈介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자개의 본래의 성은 이李씨였는데 뒤에 견씨로 고쳤다고 한다. 『이선가기李蟬家記』에 의하면 진흥왕의 비妃인 사도思刀의 시호가 백숭부인인데 그의 셋째 아들이 구륜공仇輪公이고 구륜공의 아들이 파진간波珍干 선품善品이다. 선품의 아들 각간角干 작진작珍이 왕교파리王교巴里를 아내로 맞아 각간 원선元善을 낳으니 이가 곧 아자개였다. 전설에 따르면 광주光州 북촌에 사는 부잣집 딸에게 밤마다 자주색 옷을 입은 남자가 찾아왔다가 새벽에 가곤 했다고 한다. 딸에게 그 말을 전해들은 아버지는 “네가 바늘에 긴 실을 꿰어두었다가 그가 오면 그 남자의 옷에 바늘을 찔러 두어라”하고 딸에게 일렀다.
호랑이가 젖을 먹여준 견훤
아버지의 말대로 남자의 옷자락에 바늘을 꽂은 그 다음날 바늘에 꿰인 실을 따라 갔더니 담장 밑에 있는 커다란 지렁이의 허리춤에 바늘이 찔려 있었다고 한다. 견훤이 지렁이의 아들이라는 전설은 그러한 연유 때문에 생겨났지만 그가 태어난 문경, 상주 일대에서는 지렁이를 ‘진훠이’로 읽으며 그 말이 변하여 ‘진훤’이 되었을 듯 싶고, 광주 북촌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외가가 광주가 아니었던가 싶다. 또 다른 전설에는 견훤이 어린 시절 온갖 날짐승이 날아와 보호해 주기를 수년 동안이나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마을 사람들은 견훤이 보통 아이가 아니라 나라에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일찍부터 예언했다고 한다. 하루는 그의 아버지 아자개가 밭갈이를 하고 있을 때 그의 어머니가 새참을 가지러 가면서 견훤을 수풀 밑에 잠시 내려두고 갔더니 그 사이에 호랑이가 찾아와 젖을 먹여주었다고 한다. 견훤은 자랄수록 체격이 남달랐으며 힘이 장사였기 때문에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국역國役을 지게 되는 열 다섯 살의 나이가 되었을 때 견훤은 많은 고민을 하였다. 척박한 고향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아니면 더 나은 무엇을 모색하기 위해 고향을 탈출할 것인가?
견훤은 결국 농사꾼이던 아버지가 무력을 바탕으로 스스로 장군이라 정하고 사불성沙弗城(지금의 상주)에서 호족으로 성장했듯 고향을 떠나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
미국 켄자스 대학의 허스트 3세 교수는「선인, 악인, 추인」이라는 논문 중 ‘고려 왕조 창건기 인물들의 특성’이라는 글에서 “견훤 역시 ‘악인’이라는 이미지로부터 상당히 회복될 필요가 있다. 그는 쇠퇴하는 힘에 대항하여 맹렬히 공격한 한반도 남서부 지역 인물{?}로서, 아직도 천명을 보유하고 있던 신라 왕조와 함께 상당한 군사적․도덕적 힘을 지니고 있던 백제인이었다. 견훤의 왕국은 거의 반세기 동안이나 존재하였으며 더구나 번성했었다. 다만 지지한 사람들과 지지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러나 나는 그도 역시 상당한 지도력과 군사적 자질을 소유하였던 인물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한다”고 논문을 마무리 한 뒤 “운명의 뒤틀림이 없었더라면 10세기 한국은 견훤에 의해 통일되었을지도 모른다. 옛 백제의 중심 지역으로부터 한반도를 통일하는 새 왕조 창건을 합법화하기 위하여 백제 계승자로서의 역사를 선전했을 왕조가 생겨났을 수도 있었다”라고 말하며 견훤 백제의 패망을 아쉬워했다.
그렇다. 한 때 전주는 견훤이라는 사람이 세운 한 나라의 수도였다. 견훤은 기울어져 가는 통일 신라 말에 태어나 백제의 부활을 위해 백제라는 나라를 열었었다.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 미륵의 나라를 열고자 했었고 삼한을 통일하여 더 큰 세상을 꿈꾸었던 그는 집안의 내분으로 역사의 승자가 아닌 패자로 낙인찍힌 채 역사의 뒤안길로 숨어들고 말았다.(...)
신정일의 <한국사 그 변혁을 꿈꾼 사람들> 에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45년 동안 백제라는 나라를 열고서 ‘내가 왕이다’라고 선언했던 견훤 백제의 흔적은 사라진 백제 왕국처럼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 다만『삼국사기』나『제왕운기』의 기록과 더불어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견훤’을 궁예와 더불어 “뭇도적들 중의 한사람일 뿐이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나라 곳곳의 몇 군데에 그 흔적이 어렴풋이 남아있을 뿐이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 견훤의 출생지 아차마을에는 그를 기리는 사당이 세워져 있고, 경북 상주시 화북면에는 천연의 요새 견훤산성이 남아 그날의 역사를 전해주고 있고 경주 남산 자락에는 질풍처럼 내달려와 향락에 빠져있던 경애왕을 응징했다는 포석정과 경애왕릉이 늙은 소나무 숲 속에 숨어있다. 그리고 천년 고도 전주에 후백제 재조명 사업회가 만들어졌다. 정녕 오랜 세월동안 묻혀있던 천여 년 전의 역사가 새롭게 재조명될 날은 과연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