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RDfENz1fXEw?si=xDh7AXntwZrCwO7O
Kaddish (Recorded 1928)
당대의 명성높은 콘서트 가수이자 라흐마니노프의 연인이기도 했던 러시아의 소프라노 니나 코셰츠(Nina Koshetz, 1891-1965) 의 녹음 한 편을 담아와 소개드립니다.
카디시[Kaddish] Qaddish라고도 씀. 유대교에서 예배 때 부르는 송영(하느님을 찬송하는 시). 대개 모든 회당 예배에서 주요순서의 마지막에 아람어로 낭송한다. 이 송영의 핵심은 "주께서 뜻을 따라 창조하신 온 세상에서 그 크 신 이름이 영광스럽고 거룩하게 되옵소서. 우리 살아생전에 영원히 당신의 나라를 세우소서"라는 구절이다. 회중들은 "주님의 그 크신 이름이 영원무궁히 높힘을 받으소서"라고 받아 부른다. 이 송영의 주요사상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리스도교의 주기도문에도 담겨 있다. 원래 카디시는 랍비 학교에서 수업을 마친 다음이나 설 교 뒤에 낭송했으나 회당 예배의 정규 순서가 되었다. 이 송영은 하느님을 찬송하는 내용에 덧붙여 메시아 시대가 속히 오기를 간구 하는 기도를 포함한다. 또한 죽은 자들의 부활은 메시아의 도래와 연관되기 때문에 카디시는 결국 장례식 기도가 되었다. 부모나 가까 운 친척이 죽으면 그 유족들은 11개월 1일 동안 이 송영을 부른다. 카디시는 형식이 긴 것도 있고 짧은 것도 있다. 060623. Edi. Dr.Q |
라벨 (Maurice Ravel, 1875 ~ 1937)
프랑스 작곡가. 시부르 출생. 음악애호가인 아버지의 권고로 7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1889, 14살의 나이로 파리음악원에 입학했다. 같은 해, 파리세계박람회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이국정서(異國情緖)가 풍부한 음악과 접하게 되었는데, 이 경험은 그가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바스크인의 피와 맞물려서 그의 음악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97년부터 G. 포레에게서 작곡을, A. 제달주에게서 대위법을 배웠다. 이 시기에 라벨은 스승 포레와 E. 사티에게서 큰 감화를 받았다. 그리고 98년 《귀로 듣는 풍경》을 첫작품으로, 99년에 피아노곡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에스파냐 무용곡의 일종)》 등 이국정서가 넘치는 개성적인 작품을 발표했다.
그러나 비평가들로부터는 별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로마상 콩쿠르에서는 4차례 모두 대상(大賞)을 획득하지 못했다. 당시, 그는 이미 신진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 낙선 결과는 세론의 표적이 되었으며, 파리음악원 원장의 사직(辭職)으로까지 발전했다. 한편, 이 무렵 그는 《물의 장난(1901)》 《현악 4중주곡(1902∼1903)》을 발표하여 새 세대의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획득했다. 이 시기에 평생을 두고 존경하게 된 C. 드뷔시와 만났다. 그리고, 드뷔시의 숭배자인 시인 트리스탕 클링그조르의 시에 관현악 반주를 곁들인 가곡 《셰헤라자데(1903)》를 발표했다. 그 후 제 1 차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피아노곡 《거울(1904∼1905)》 《밤의 가스파르(1908)》, 오페라 《에스파냐의 한 때(1907∼1909)》, 디아길레프의 의뢰에 의한 발레음악 《다프니스와 클로에(1909∼12)》, 관현악곡 《에스파냐 광시곡(狂詩曲, 1907∼1908)》 《어릿광대의 아침 노래(1918)》, 가곡집 《박물지(博物誌, 1906)》 등의 우수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후에, I.F. 스트라빈스키에 의해 <스위스 시계처럼 정밀하다>는 평을 받게 될 정도로 명석하고도 분석적인 구축력, 치밀하고도 미세한 객관성은 이 무렵에 완성되었다. 이러한 특징은 우렁차게 소리높여 부르는 것보다는 조용히 말을 건네는 스타일의 그의 가곡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제 1 차세계대전 후에는 활력 넘치는 문화상황에 고무되어 그는 재즈음악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국면을 강조하게 되었으며, 1막 오페라 《어린이와 마술(1920∼25)》, 바이올린 소나타(1923∼27) 등을 발표하였다. 1927∼28년에는 미국 연주여행 후에 유명한 《볼레로》를 작곡하였고, 28년 파리 오페라하우스에서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둔 뒤 발레영화로도 제작되었다.
글출처: 심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