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2.29.주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성화주간)
집회3,2-6.12-14 마태2,13-15.19-23
“최고의 예술작품, 사랑의 성가정 교회 공동체”
<실현시켜야 할 꿈>
“주님의 집에 사는 자 얼마나 행복되리!”
해마다 성가정 축일 미사때 부르는 화답송 후렴은 늘 들어도 흥겹습니다.
이런 성가정교회공동체인 주님의 집에 사는 자들은 참 행복합니다.
“희망과 친절은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어제 BBC방송을 통한 교황님의 메시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의미와 희망을 준다!”
교황님이 제47차 유럽 테제 젊은이들 모임에 주신 메시지입니다.
“꿈은 마냥 기다려야 할 신기루가 아니라, 나의 실천으로 이루어질 현실이다.”
다산 정약용이 주는 말씀입니다. 실현시켜야할 꿈이 바로 성가정 교회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주일은 늘 연말 성탄축제중 맞이하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오늘부터 한주간은 성탄축제와 동시에 겹쳐지는 ‘가정성화주간’이기도 합니다.
성가정 교회 공동체는 가정에서 사회로 국가로 세계로 계속 확장되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궁극에는 온 인류가 하느님의 성가정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며 하느님께서도 바라는 바일 것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의 시야는 가정을 넘어 온 세계로 향해야 함을 봅니다.
말 그대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로 둔 모두가 한가족, 한식구의 성가정 인류 교회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개인이든 교회 공동체이든 하느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여정”중에 있음을 봅니다.
우리가 바라는 성가정 교회 공동체의 원형이 바로 오늘 축일은 지내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입니다.
어떻게 성가정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살 수 있겠는지요?
세 측면에 걸쳐 나눕니다.
첫째,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입니다.
함께 있다하여 공동체가 아닙니다.
같은 피의 혈연만의 공동체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명실공히 작든 크든 하느님 중심의 성가정 교회 공동체여야 합니다.
바로 그 원형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해마다 파스카 축제때마다 예루살렘에 갔던 참 하느님 중심에 충실했던 성가정 공동체였습니다.
참으로 다양성의 평화공존의 관대한 공동체도 하느님 중심에서만 가능합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의 부모가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아냈을 때 한 말씀이 얼마나 하느님 중심에 투철한 소년
예수님의 삶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을 마음속 깊이 간직한 마리아 성모님의 마음도 그대로 하느님의 깊고 넓은 마음을 닮았습니다.
거대한 침묵의 산 배경처럼 느껴지는 요셉 역시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분임을 깨닫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할 즈음엔 이미 타계한 요셉 양부같으나
그의 하느님 중심의 충실한 삶은 남은 예수, 마리아 성가정에 깊은 영향을 미쳤음을 봅니다.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를 그대로 닮은 요셉 양부같습니다.
이런 성가정교회공동체에서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랑의 총애도 더하여 갔음을 봅니다.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는 그대로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를 통해 구체화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평화, 그리스도의 말씀을 특히 강조하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말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그리스도의 한몸 성가정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또한 한 몸 안에서 이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그냥 저절로 이뤄지는 하느님 중심, 그리스도 중심의 성가정 공동체가 아니라
부단히 치열한 사랑의 수행을 통해, 즉 기도와 공부, 찬미와 감사, 평화의 훈련을 통해 이뤄지는
성가정 교회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완성을 향해 가는 순례 여정중 공동체입니다.
완성된 성가정 공동체는 없습니다.
시련없는 온실속의 평탄한 공동체도 아닙니다.
바로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공동체가 그러했습니다.
얼마나 산전수전 다 겪어낸 수난의 공동체였는지요!
그러나 그 와중에도 내면 깊이에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감사와 평화, 희망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예수님의 소년시절도 부모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경우도 많았을 것입니다.
이에 앞서 이집트 피난시절의 고통과 시련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한결같이 희망하고 인내하며 기다리며 각자의 책임에 한결같이 충실했습니다.
무엇보다 우선적인 것이 사랑입니다.
평생 순례여정과 함께가는 사랑공부에 사랑실천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충고가 참 적절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서로 더불어의 순례여정입니다.
더불어의 구원이지 혼자서는 구원도 없습니다.
여기서 언제나 빛나는 모범은 주 예수님입니다.
다음 평생 공부할 과제가 부여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1.동정과 2.호의와 3.겸손과 4.온유와 5.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이런 사랑은 주님을 그대로 닮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이 공부만으로도 턱없이 부족한 인생인데 싸우고 다투고 미워하고...낭비할 시간이 어디 있겠는지요!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이런 사랑을 입으십시오.
역시 부단한 훈련에 습관화해야 하는 동정, 호의, 겸손, 온유, 인내, 용서, 사랑의 수행이자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결코 값싼 성가정 교회 공동체는 없습니다.
우리의 부단한 노력과 함께 가는 은총의 선물이 성가정 교회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성가정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부단한 노력의 합작품이자
최고의 아름다운 예술작품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각자의 자리와 몫, 책임에 충실한 공동체입니다.
서로의 영역, 차이, 거리를 존중하는 예의와 존중, 섬김과 배려의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적절한 충고를 그대로 나눕니다.
비단 가정공동체에서만 아니라 순종과 사랑, 관대한 마음은 분별의 지혜이자 가정밖 어디서나
필수적 덕목임을 깨닫습니다.
“아내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주님 안에 사는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그들의 기를 꺾고 맙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가정교육의 전통이 단절된 무례와 불손, 무질서와 혼란의 적자생존,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야만의 시대에
성가정 교회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든 덕목들을 전통에 자리에 대체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작금의 난세입니다.
집회서의 말씀 역시 성가정 교회 공동체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이런 예의와 배려의 사랑은 언제어디서나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것과 같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자녀들에게 기쁨을 얻고 기도하는 날 받아들여진다.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는 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한다.”
그대로 모두를 보고 배우는 젊은 자녀들입니다.
부모에게 극진히 잘한이들 치고 자녀들이 잘못되는 적,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날로 고령화되는 현세에 적절한 조언입니다.
“얘야,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히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준다.”
죄에 자책할 것이 아니라 죄를 상쇄할 배려와 섬김의 실천적 사랑에 더욱 박차를 가함이
구원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성가정 축일! 참 많은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참 좋은 도움이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내 몸담아 살아가고 있는 성가정 공동체를 위한 사랑의 수행에
결코 지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아멘,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