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살다 '화이부동 & 불이"
어제는 저녁 무렵에 집을 나섰다. 밤에 낭독을 하기 전에 신체를 환기 시키려는 목적에 의해서였다.
사람이 모여서 무언가를 하려면 우선 그 자신의 몸가짐이 만들어져야만 정신을 순환시키기 때문이었다. 피곤함에 찌든 모습을 보여 준다면 그 피곤은 나 아닌 타자들에게 전이되기 때문이다. 좋은 에너지를 서로에게 순환시키는 것은 중요하다. 함께 모여 무엇인가를 해나갈 때에는 서로가 가지는 에너지들의 파장이 일의 완성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알아차린 지는 오래되었다. 다회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다회가 다회로, 다회가 낭독회로, 낭독회가 텃밭으로, 텃밭은 다시 화상 낭독회로 이어진다. 외견상 별로 상관관계가 없을 것 같은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다시 알아차리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돌고돌아서 다시 내 앞에 있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한다. 내가 오랫동안 좇고 있었던 것에 대하여.
산책하며 귀에 이어폰 꽂거나 스마트 폰 들고 다니면 생각하는 데에 도움이 안 된다고 하지만, 귀로는 듣고 일어날 생각과 잡아챌 생각은 다 하게 된다고 여겨졌다. 산책을 하며 몸을 환기시키고, 생각을 정돈하고 마음 역시 현재에서도 해나갈 것들에 대하여 '맘먹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 어떤 일도 마찬가지이겠으나, 낭독회도 서로의 컨디션은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서로의 컨디션 조절을 해주는 것 역시 서로의 에너지를 중심에 모아서 다시 서로에게 환원시키는 하나의 방법이다. 목소리와 표정, 말하는 방식 역시 서로를 거스르지 않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서 노력은 억지로가 아닌 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단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자연스러워지는 것이 바로 우리가 낭독을 할 때 우리가 새롭게 만든 낭독에서의 도덕이다.
니체철학을 읽으며 완전하게 감을 아직 잡기는 어려워도 신체사유는 가능하다. 어쩌면 이리 다시 모이게 된 것도 신체사유가 가능해서이지 않을까 싶다. 긴 시간을 돌아서 '여기'에서 다시 만났다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우리 삶에서 구현해볼 테스트 장으로서의 '여기'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한 지금 여기에서의 기억이 우리의 미래를 열 것이다.
밤 12시가 넘도록 나눈 대화들은 니체와 그리고 일상이다. 서로가 힘들어 하는 것을 미션 수행으로 주고 그것을 완료하면 우리 자신들 각자가 서로에게 선물해 주기로 하였는데, 모든 번거로운 방식을 제하고 나니 남는 것은 결국 '계契' '였다. 매달 한 사람에게 만 원씩 몰아주기로. 어쩌면 이러한 것도 번거로울 수는 있다. 하지만 생활을 만들어 가는 것에서 비록 어차피 샘샘일지라도 서로 순환시키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안의 경제가 돌아간다는 것에서 보자면 이것도 같은 원리일 것이다. 움직임이 필요한 것이니까 말이다. 이 또한 각자가 제안하고 서로 받아 주고 그리고 역할을 분담한다는 데 의의가 있을 것이다. 서로의 말이 서로에게 먹혀든다는 것에 생의 환희가 있는 것이 아닐까.
다회에 가기 전에 컨디션 조절을 먼저 하고, 마음가짐을 정돈하고 호흡을 가다듬듯이, 낭독회를 하기 전에도 거울 보고 얼굴도 살피고, 차를 우려 놓고, 다른 조명을 끄고, 스탠드 불빛만 켜고, 겨울이니까 가습기 틀고, 스토브도 옆에 틀어 놓고, 읽은 책은 늘 그 자리에 있지만, 다시 페이지들을 펼쳐 보고, 책상을 정돈하고, 드디어 스마트 폰을 거치대에 끼우고, 룸스에 접속한다.
이때 마치 하나의 방송 시작하는 느낌을 받는다. 반가운 친구들이 접속하면 서로의 얼굴을 보며 인사를 나눈다. 이상도 하지! 실제로 얼굴보는 것과 화면에서 얼굴 보며 하는 대화는 또 다르다. 그리고 화면은 그 자신이 보여줄 각도만 보게 되는 것으므로 , 이건 정말 고정된 방송처럼 약간의 긴장감도 준다.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같은 하나를 다른 버전으로 끊임없이 반복하며 연마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을 '화이부동和而不同' 과 '불이不二' 라고 표현해도 괜찮을 듯하다. 아마도 이것은 언젠가 또 다른 버전으로 나타날 것이다.
#화이부동和而不同 #불이不二 #낭독 #니체의선악의저편 #미션수행중
첫댓글
차사발과 말차 탕색이 잘 어울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