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는 이별을 꿈꾼다 (외 1편)
고성만
얼굴에 매화가 피었다는 여자에게서는 은은한 향기가 났다 젊어서는 남자를 주무르고 늙어서는 음식을, 조금 더 늙어서는 말랑말랑해진 기다림을 주무른다는 그 여자의 남편은 외국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먹은 것도 없이 자주 체하던 나는 죽은피를 빼기 위해 그 여자의 집에 들렀다 아직 이별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 알지 못하던 시절 산동네 맨 꼭대기 그 집 앞에는 환한 별밭 뒤 언덕에는 새털구름 떼 손끝이 흘리는 냇물 분홍으로 내리는 눈 풀이 자라기 시작한 마당 뒤 안 은은한 향기 퍼지는 날 남편 없이 낳은 딸의 얼굴에 매화 꽃잎이 번졌다 ―계간 《시결》 2024년 여름호
홍화
넘실넘실 황홀하게 타오르는 불꽃, 붉은 물감 엎질러놓은 듯
나 어릴 적 보리 베는데 도망가지 못하는 까투리와 알을 팔아 운동화 사려던 어머니 장에 가셨다가 결국 못 팔고 눈물 뚝뚝 떨어트리며 돌아오셨다는 이야기 차창 밖을 내다보며 하염없이 울었다는,
바다가 파란 것은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배가 고픈 것은 머리가 어지럽기 때문이다
낡은 필통 속 몽당연필들 동전 몇 개 짤랑이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산밭에서 날린 불티 온 마을을 활활 태우는데 잇꽃 필 무렵
피가 부족해
용지봉 위로 끊임없이 구름이 흘러간다 헬기 착륙장 너머 새 세상이 열린다는데 먼 바다로 통통통통 떠가는 배 구름은 먹장구름은 장맛비를 부른다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4년 6월호 ----------------------- 고성만 / 전북 부안 출생. 1998년 『동서문학』 등단. 시집 『올해 처음 본 나비』 『슬픔을 사육하다』 『햇살 바이러스』 『마네킹과 퀵서비스맨』 『잠시 앉아도 되겠습니까』 『케이블카 타고 달이 지나간다』 『파씨 있어요?』, 시조집 『파란, 만장』이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