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喪配自輓(상배자만)(아내 죽어 만사를 짓다)
遇何晩也別何催(우하만야별하최) 만나기는 늦은데 헤어짐은 어찌 이리도 빠른가?
未卜其欣只卜哀(미복기흔지복애) 기쁨도 맛보기 전에 슬픔부터 맛보았네
祭酒惟餘醮日釀(제주유여초일양) 제삿술은 아직도 초례 때 빚은 것이 남았고
襲衣仍用嫁時裁(습의잉용가시재) 염할 때 입힌 옷은 시집올 때 가져온 옷 그대로네
窓前舊種少桃發(창전구종소도발) 창 앞에 심은 복숭아나무엔 몇 송이 꽃이 피고
簾外新巢雙燕來(염외신소쌍연래) 주렴 밖 새 둥지엔 제비 한 쌍이 날아왔구나
賢否卽從妻母問(현부즉종처모문) 그대 심성 알지 못해 장모님께 물으니
其言吾女德兼才(기언오녀덕병재) 내 딸은 재덕을 겸비했다고 말씀하시네
*위 시는 “현대시의 감각으로 풀이한 김갓갓 시집(金笠詩選集)(정민호 역저)”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역저자는 “시집 온지 얼마 안되어 아내상을 당하고 아내 떠난 집에 제비가 찾아오니 복사꽃이 피니 아내를 그리는 정이 더욱 간절해짐을 표현했다. 끝 구절에 아내의 심성조차 몰라 장모님께 물을 것으로 보아 시집와 얼마 안 되어 죽은 것 같다”라고 감상평을 하였습니다.
*김삿갓[1807 ~ 1863, 본명 김병연(金炳淵),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 속칭 김삿갓 혹은 김립(金笠)이라고 부름, 아버지는 김안근(金安根)으로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은 조선 후기의 시인으로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 때 평안도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에 연좌제의 의해 멸족되어 당시 6세였던 그는 하인 김성수(金聖洙)의 구원을 받아 형 병하(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도망가서 살다 그 다음에 집안이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면서 강원도 영월로 옮겨와 살게 되었다.
과거에 응시하여 김익순의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답을 적어 장원급제하였는데,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조상에 대한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고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머나먼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스스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겼고, 전국을 방랑하면서 각지에 즉흥시를 남겼는데 그 시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아 민중시인으로도 불린다. 아들 익균(翼均)이 여러 차례 귀가를 권유했으나 계속 방랑하다가 전라도 동복(同福:전남 화순)에서 57세로 객사하였다. 유해는 영월군 태백산 기슭에 있으며, 1978년 그의 후손들이 광주 무등산에 시비를 세우고, 1987년에는 영월에 시비가 세워졌다. 작품으로 “김립시집(金笠詩集)”이 있다.
*정민호(鄭旼浩, 1939~, 본관 迎日, 아호 丁巴,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조부 학강(鶴岡)으로부터 한문 수학, 1966년 ‘思想界’ 신인문학상 당선으로 문단 등단, 현역 문단인(시인)으로 활동, 경북문화상, 한국문학상, 한국pen문학상, 한국예총 예술대상 등, 포상으로는 녹조근정훈장(대통령), 예총경주지부장, 경북문인협회장 등 역임, 현재 경주향교 사회교육원 한문지도 강사, 경주문예대학 원장, 시집으로 “꿈의 耕作” 외 15권, 산문집 “시인과 잃어버린 팬티”등, 국역으로 “論語抄”, “鶴岡詩集”, “五言唐音”, “七言唐音”, “唐詩選集”, “교양 明心寶鑑”, “三國史記”, “三國遺事”, “唐詩의 이해와 감상”, “한국인의 한시(漢詩)” 등 다수.
*輓書(만서) : 사람이 죽으면 상여 나갈 때 만장에 써서 달고 나가는 글을 말하는데, 친구나 남이 쓰는 것이 보통이지만, 김삿갓은 자기가 아내의 만서를 썼던 것. 自輓(자만)은 자기가 미리 쓴 만서를 말하는데, 자만을 써 놓는 사람도 있으니 재미나는 일이라 하고, 輓書(만서)는 輓詞(만사)라고 하기도 함
醮(초) : 제사지낼 초
釀(양) : 술빚을 양
첫댓글 김삿갓의 삶이 그렇듯이 그 부인의 삶도 행복하지는 못했겠지요....
갓 시집온 여인의 삶과 죽음이 안타깝네요~~~~~
ㅎ, 인생이 짧네요,
회장님의 멋진 댓글에 감사드리고,
오늘도 행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