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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우야(是吾憂也)
이것이 나의 걱정거리이다.
是 : 이 시(日/5)
吾 : 나 오(口/4)
憂 : 근심 우(心/11)
也 : 어조야 야(乙/2)
출전 : 논어(論語) 술이편(述而篇) 제3장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덕(德)이 잘 닦이지 않는 것, 배운 것을 잘 강습하지 못하는 것, 의(義)를 듣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 나에게 불선(不善)이 있는 것을 알고도 고치지 못하는 것, 이것이 평소 나의 삶의 걱정이다."
子曰 (자왈)
공자님께서 말씀하시되,
德之不修 (덕지불수)
덕을 수양하지 못함과,
學之不講 (학지불강)
배운 것을 엮어서 익히지 못함과,
聞義不能徙 (문의불능사)
옳음을 듣고서 그렇게 옮아가지 못함과,
不善不能改 (불선불능개)
잘하지 못함을 잘하도록 고치지 못함이,
是吾憂也 (시오우야)
이런 것들이 나의 근심이다.
공자가 걱정한 네 가지 문제의 가장 큰 원인은 습관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은 잘못된 부분들도 습관화시켜 문제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습관화되면 잘못된 점도 정상으로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집에서 자주 화를 내게 되면 자연스럽게 '집이 아니면 어디서 화를 내겠어?'라고 말하며 잘못된 점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 또 회사에서 다른 동료와 싸우면서 그 이유를 '싸우지 않으면 내 뜻이 관철되지 않을걸?' 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공격적인 태도를 반성하지 않는다.
이처럼 잘못이 습관화되면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고 '선하지 않은 걸 고치지' 못하게 된다.
시오우야(是吾憂也)
이것이 나의 걱정거리이다.
공자는 평소 어떤 걱정을 하며 살았을까? 특히 14년의 긴 주유를 하면서는 무슨 생각이 공자에게서 떠나지 않았을까? 자신의 진면목을 알아보는 왕을 만나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펼쳐보고자 했을 것 같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조바심도 났을것이고, 말 듣지 않는 제자들 때문에 속상해 하시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오늘 공자의 걱정을 보면 역시 공자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공자가 걱정을 했던 것은 덕(德), 학(學), 의(義), 선(善) 이 네 가지였다. 수(脩)는 수(修)로 닦다는 뜻이다. 강(講)은 배우다, 익히다, 연구하다 등 다양한 뜻이 있다. 배운 것을 익히는 의미가 맞지 않나 싶다. 사(徙)는 옮기다, 이사하다 등의 뜻이다. 선을 실천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여러분은 어떤 걱정을 하고 계신가? 혹 공자와 같은 고민을 하고 계시다면 성인의 반열에 오르셨다. 여기서 대중의 걱정거리를 살짝 공유해 볼까? 먼저, 회사를 오래 다녀야 할 텐데 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까가 걱정이다. 먹고 사는 문제는 역시 힘든다. 두 번째는 재미있는 인생을 살면 좋으련만 매일 같은 생활의 반복이 조금은 지겹다. 신나는 일이 없는 것이 걱정 아닌 걱정이다. 아이들이 건강하고 공부도 잘하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것도 걱정이다. 걱정의 질이 공자와 참으로 다르다.
공자가 인간적으로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오늘 말씀을 보고 있으니 그것은 우리들의 착각이다. 가깝고도 먼 당신이다. 오죽하면 공자도 인정한 제자 안회가 한숨을 쉬며 이렇게 고백을 한다. "우리 스승의 도는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지고, 뚫고 또 뚫어보아도 더욱 견고할 뿐. 바라보니 앞에 계시더니, 홀연히 뒤에 계시네(자한10)." 이 정도면 안회도 스승과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인정했다. 안회가 이 정도였으니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은 '할말 없음'이다.
학(學) 하나만을 실천하기도 어려운데 덕(德)과 의(義)와 선(善)은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이다. 자신의 가치기준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옳은 일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제나 이윤의 논리가 우선시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 그렇다.
논어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담론을 품고 있지만 오늘 말씀은 수기(修己) 측면에서 과연 실천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생긴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전진해야겠다.
시오우야(是吾憂也)
이것이 나의 걱정거리이다.
子曰(자왈)
德之不脩(덕지불수)와
學之不講(학지불강)과
聞義不能徙(문의불능사)와
不善不能改(불선불능개)가
是吾憂也(시오우야)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덕을 닦지 못하는 것, 학문을 연구하지 못하는 것, 옳은 일을 알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 착하지 않은 것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나의 근심이다"고 하셨다.
부족함을 걱정하는 사람은 겸손하고, 겸손한 사람은 발전한다. 그래서 공자도 늘 "덕이 닦아지지 못함과 배운 것이 연마되지 않음, 의로움을 듣고서도 의로운 쪽으로 옮겨가지 못함과 착하지 않음을 고치지 못하는 것 등이 다 내 걱정거리이다"라고 말했다. 공자 같은 성인도 수시로 이런 말을 하며 자신을 성찰했으니 하물며 보통 사람에 있어서야!
유가의 경전인 예기(禮記)의 '학기(學記)'편 첫 부분에는 "배운 후라야 부족함을 알고, 가르쳐본 후라야 모자람을 안다. 부족함을 알면 스스로 반성할 수 있고, 모자람을 알면 보강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배움과 가르침은 서로 보완하며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유명한 사자성어 '교학상장(敎學相長: 배움과 가르침이 서로 보완하며 자람)'은 바로 이 구절로부터 나왔다. 부족함을 알아야 '교학상장'할 수 있기에 만세의 스승으로 추앙받는 공자도 늘 공부가 부족하고 실천이 부족함을 자신의 걱정거리로 여긴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속언이 있다. 배움이 부족하면 자기가 아는 것을 '다'로 여겨 용감하게 말하고 과감하게 행동한다. 우리 국민의 걱정거리는 일부 '윗분'들의 싸우는 모습에 지나치게 용감한 면이 있다는 점이 아닐까.
진정한 앎은 실천에 있다
논어 첫 구절에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이 또한 기쁘지 않은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부단한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학습을 통해서 단순히 아는 것에 그치지 말고 진정으로 깨우쳐야 한다는 것을 공자는 더욱 강조하고 있다.
'지지위지지(知之爲知之), 부지위부지(不知爲不知)'는 "그것을 알면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면 알지 못한다고 하라"는 뜻으로 앎의 기본을 말하는 글이다. 이것은 아는 것과 아는 척하는 것의 차이를 말한 것으로 앎의 기본은 정직함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맨 마지막의 '知'자는 지혜를 뜻하는데, "모르면서 안다고 하거나, 또는 다른 사람을 속이며 아는 척 하는 것은 앎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본래 공자가 말하는 앎이란 근신의 미덕에서 나옵니다. 말하자면 ‘知’란 안으로는 충실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지 반성하고, 밖으로는 존현(尊賢)의 자세로 태만함과 오만함을 경계하며 진정한 학문의 길을 가라는 메시지이다.
술이편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에 "德之不脩(덕지불수) 學之不講(학지불강) 聞義不能徙(문의불능사) 不善不能改(불선불능개) 是吾憂也(시오우야)"라는 구절이 있다.
공자가 이르기를 "덕을 닦아 실행하지 못하고, 학문을 배우고 익히지 못하고, 의를 듣고 나서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착하지 못함을 능히 바로잡지 못함이 나의 근심이라"는 공자님의 솔직한 탄식을 표현하고 있다.
논어 자로편에도 '雖多 亦奚以爲(수다, 역해이위: 아무리 시를 많이 외운대 하더라도 또한 어디에 쓰겠는가)'라는 말도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즉 '배움이 배움 그 자체로만 끝난다면 ,별 의미를 둘수 없다'는 이치로 실생활에의 적용과 응용을 위해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
유교의 창시자는 공자였다. 공자는 세상 사람 모두가 칭송하는 성인(聖人)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생이지지(生而知之)한 사람이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때문에 공자같은 성인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러나 공자의 생각은 달랐다. "나는 생이지지한 사람이 아니다. 옛 것을 좋아하고 민첩하게 노력하여 학문과 인격을 구해낸 사람이다(好古敏而求之者也)"고 말하여 보통사람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인격을 도야해서 그런 수준에 오른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누구라도 공부하고 노력하면 자기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서 가능과 진보의 인간론을 주장했다.
더 진지하게는 자신이 보통사람과 차이 없음을 사례를 들어 설명까지 했다. "덕을 닦지 못함, 학문을 강론하지 못함, 의로움을 듣고도 옮겨가지 못함, 착한 일을 안하고도 고치지 못함이 나의 근심이다(德之不修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 述而)"고 말하여 갑남을녀라면 지니고 있을 근심이 자신의 근심이라고 명확히 말했다. 덕을 닦고 학문을 강론하고 착하지 못함을 고치기만 한다면 원하는 인간의 수준에 오를 수 있다는 성인의 말씀이었다.
이렇게 인간은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공자도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경우를 말하기도 했다.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 나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마음속으로라도 잘하고 잘못함을 판단해내는 사람을 보지 못했노라(已矣乎! 吾未見能見其過而內自訟者也/ 公冶長)"고 말하여 자신의 잘못을 저지르고도 마음속으로라도 잘잘못을 판단해 반성하고 뉘우칠 줄 모르는 경우, 그때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절망의 탄식을 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주자(朱子)는 이에 대해 친절한 설명을 한다. 마음속으로 잘못과 잘함을 분별해낸다는 말은 입으로 말은 하지 않아도 마음으로라도 자신의 허물을 느낀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그렇게만 해도 깊이 반성하여 고칠 가망성이 있는데, 그것조차 없다면 그때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공자가 탄식했다고 풀이한다.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문제에 대하여 다산 정약용도 많은 주장을 폈다. 다산은 자신의 삶을 거론할 때마다 자신의 일생은 참으로 뉘우칠 일이 많은 사람임을 전제하고, 잘못한 일과 잘못 살아온 삶에 대하여 후회하고 반성하고 고쳐야겠다는 각오를 언급하지 않은 경우가 많지 않다.
1822년 61세 회갑을 맞아 자신의 자서전을 기록하며 "60년의 회갑을 맞았다. 뭐로 보더라도 죄를 회개할 햇수다(六十朞 皆罪悔之年也)"라고 말하여 회개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일생을 기록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다산은 공자의 절망적인 탄식에 자신의 뜻을 보충했다. '내송자(內訟者)'의 송(訟)을 공개적인 변론으로 보고 마음속으로 자신의 행위가 옳았는가 글렀는가를 따져서 판단을 내리는 것으로 보았다. "마음속에서 천명(天命)과 인욕(人欲)이 싸워 옳은 판단을 내리듯 인욕을 이겨내면 사람은 저절로 그 허물을 알게 되어 옳고 그름도 판단하고 허물도 고치게 된다(天命人欲 交戰于內 克己如克訟 然人能自見其過 … 必能見其是非而知所以改過也/ 논어고금주)"고 말해, 개과할 때에만 인간이 인간일 수 있다는 결론을 맺었다.
공자와 주자와 다산은 인간이란 잘못을 저지르기 마련이지만, 잘못을 알아 고칠 수 있다면 문제는 언제나 해결된다고 여겼다. 지금 우리나라의 권력자들, 아무리 잘못하고도 잘못인 줄을 모르고 마음속으로라도 회개하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라는 공자의 탄식을 읽다보니 나라의 장래가 참으로 걱정이다.
▶️ 是(이 시/옳을 시)는 ❶회의문자로 昰(시)는 동자(同字)이다. 해(日)처럼 정확하고 바르다(正)는 뜻이 합(合)하여 옳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是자는 '옳다', '바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是자는 日(해 일)자와 正(바를 정)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正자는 성(城)을 향해 진격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바르다'라는 뜻이 있다. 이렇게 '바르다'라는 뜻을 가진 正자와 日자가 결합한 是자는 '태양(日)은 올바른 주기로 움직인다(正)'는 뜻이다. 즉 是자는 태양은 일정한 주기로 뜨고 진다는 의미에서 '올바르다'와 '옳다'라는 뜻을 가지게 된 것으로 해석한다. 是자는 때로는 '이것'이나 '무릇'이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어 쓰이기도 한다. 그래서 是(시)는 (1)옳음. 옳은 것 (2)도리(道理)에 합당함 (3)이. 이것. 여기. 이곳 등의 뜻으로 ①이, 이것 ②여기 ③무릇 ④이에(접속사) ⑤옳다, 바르다 ⑥바르게 하다 ⑦옳다고 인정하다 ⑧바로잡다 ⑨다스리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의(義),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불(不),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아닐 비(非)이다. 용례로는 옳으니 그르니 하는 말다툼을 시비(是非), 옳다고 인정함을 시인(是認), 그릇된 것을 바로잡음을 시정(是正),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날을 시일(是日), 마찬가지로나 또한을 역시(亦是), 만일에 또는 가다가 더러를 혹시(或是), 도무지나 전혀를 도시(都是), 변하여 온 사물의 처음 바탕을 본시(本是), 나라의 근본이 되는 주의와 방침을 국시(國是), 옳다고 여기에 확정되어 있는 그 정당의 방침을 당시(黨是), 회사나 결사의 경영 상의 방침 또는 주장을 사시(社是), 학교의 기본 교육 방침을 교시(校是), 민족 정신에 비추어 옳다고 여기는 주의와 방침을 민시(民是), 다른 것이 없이 곧을 변시(便是), 자기 의견만 옳게 여김을 자시(自是),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꼭 들어 맞음을 칭시(稱是), 시비를 가릴 줄 아는 마음을 일컫는 말을 시비지심(是非之心),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한다는 뜻으로 사리를 공정하게 판단함을 이르는 말을 시시비비(是是非非), 옳고 그르고 굽고 곧음 또는 도리에 맞는 것과 어긋나는 것을 이르는 말을 시비곡직(是非曲直), 마음이 곧 부처라는 뜻으로 부처를 밖으로 찾다가 하루아침에 대오大悟하면 내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을 이르는 말을 시심시불(是心是佛), 옳으니 그르니 하고 시비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시야비야(是也非也), 겉은 옳은 것 같으나 속은 다름을 일컫는 말을 사시이비(似是而非), 오늘은 옳고 어제는 그르다는 뜻으로 과거의 잘못을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깨달음을 이르는 말을 금시작비(今是昨非), 어저께는 나쁘다고 생각한 것이 오늘은 좋다고 생각됨을 일컫는 말을 작비금시(昨非今是), 형체는 헛것이라는 뜻으로 이 세상에 형태가 있는 것은 모두 인연으로 생기는 것인데 그 본질은 본래 허무한 존재임을 이르는 말을 색즉시공(色卽是空), 말인즉 옳다는 뜻으로 말 하는 것이 사리에 맞는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언즉시야(言則是也), 제 뜻이 항상 옳은 줄로만 믿는 버릇이라는 뜻으로 편벽된 소견을 고집하는 버릇을 이르는 말을 자시지벽(自是之癖), 여자의 말을 무조건 옳게 쓴다라는 뜻으로 줏대 없이 여자의 말을 잘 듣다는 의미를 일컫는 말을 부언시용(婦言是用), 말로는 옳다 하면서 마음으로는 그르게 여김을 일컫는 말을 구시심비(口是心非), 어떠한 일에 대하여 옳으니 그르니 하고 말함을 일컫는 말을 왈시왈비(曰是曰非),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분명하지 아니함 또는 누가 옳고 그른지 분별하기 어려울 때 하는 말을 일컫는 말을 숙시숙비(孰是孰非), 의리의 유무는 따지지 않고 이해 관계에만 관심을 가짐을 일컫는 말을 유리시시(惟利是視),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여 옳고 그른 것이 질정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혹시혹비(或是或非) 등에 쓰인다.
▶️ 吾(나 오, 친하지 않을 어, 땅 이름 아)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입 구(口; 입, 먹다,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五(오)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❷형성문자로 吾자는 '나'나 '우리'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吾자는 五(다섯 오)자와 口(입 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五자는 숫자 '다섯'이라는 뜻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吾자는 본래 '글 읽는 소리'나 '나의 말'이라는 뜻으로 쓰였던 글자였다. 그러나 후에 吾자가 자신을 지칭하는 '나'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면서 지금은 여기에 言자를 더한 語자가 '말씀'이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吾(오, 어, 아)는 ①나 ②그대 ③우리 ④글 읽는 소리 ⑤짐승의 이름 ⑥막다, 멈추게 하다 그리고 ⓐ친하지 않다(어) ⓑ친하려고 하지 않다(어) ⓒ소원(疏遠)한 모양(어) ⓓ땅의 이름(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글 읽는 소리 오(唔), 나 아(我)이다. 용례로는 우리들을 오등(吾等), 우리네를 오제(吾儕), 나 또는 우리 인류를 오인(吾人), 우리의 무리를 오배(吾輩), 나의 집을 오가(吾家), 우리 임금을 오군(吾君), 우리 문중을 오문(吾門), 우리 당을 오당(吾黨), 옛날에 동쪽에 있다는 뜻으로 우리나라를 일컫던 말을 오동(吾東), 나의 형이라는 뜻으로 정다운 벗 사이의 편지에서 쓰는 말을 오형(吾兄), 맞서 겨우 버티어 나감을 지오(枝吾), 참된 자기를 진오(眞吾), 나는 그 일에 상관하지 아니함 또는 그런 태도를 이르는 말을 오불관언(吾不關焉), 우리 집의 기린이라는 뜻으로 부모가 자기 자식의 준수함을 칭찬하여 이르는 말을 오가기린(吾家麒麟), 자기가 도와서 출세시켜 준 사람을 일컫는 말을 오가소립(吾家所立), 내 집의 걸출한 자식을 이르는 말을 오문표수(吾門標秀), 나도 또한 모른다를 이르는 말을 오역부지(吾亦不知), 나의 혀는 아직 살아 있오라는 뜻으로 몸이 망가졌어도 혀만 살아 있으면 천하를 움질일 수 있는 힘이 있다를 이르는 말을 오설상재(吾舌尙在), 맞부딪치기를 꺼리어 자기가 스스로 슬그머니 피함을 이르는 말을 오근피지(吾謹避之) 등에 쓰인다.
▶️ 憂(근심할 우)는 ❶회의문자이나 형성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본자(本字)는 頁(혈)과 心(심)의 합자(合字)이다. 머리가 위에서 무겁게 마음을 짓누른다는 뜻에서 근심하다를 뜻한다. 또는 뜻을 나타내는 뒤져올치(夂; 머뭇거림, 뒤져 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우)로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憂자는 '근심'이나 '걱정'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憂자는 頁(머리 혈)자와 冖(덮을 멱)자, 心(마음 심)자, 夂(올 치)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니 憂자는 사람의 머리부터 심장, 발까지가 묘사된 글자라 할 수 있다. 그런데 憂자의 구조를 보면 머리와 발 사이에 心자가 있어 마치 큰 머리가 심장을 짓눌르는 뜻한 모습을 하고 있다. 憂자는 '근심'을 뜻하기 위해 이렇게 심장이 압박받는 모습으로 그려진 글자이다. 그래서 憂(우)는①근심, 걱정 ②병(病), 질병(疾病) ③고통(苦痛), 괴로움, 환난(患難) ④친상, 상중(喪中) ⑤근심하다, 걱정하다, 애태우다 ⑥고생하다, 괴로워하다 ⑦두려워하다 ⑧병을 앓다 ⑨가엾게 여기다 ⑩상제(喪制)가 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근심 없을 개(恝), 근심할 양(恙), 근심 환(患), 근심 수(愁)이다. 용례로는 어떤 일을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을 우려(憂慮), 마음이 어둡고 가슴이 답답한 상태를 우울(憂鬱), 근심이나 걱정되는 일을 우환(憂患), 근심이나 우울과 수심을 우수(憂愁), 나라의 일을 걱정함을 우국(憂國), 시름하고 한탄함을 우한(憂恨), 근심하고 두려워함을 우구(憂懼), 근심하고 고민함을 우뇌(憂惱), 근심하고 개탄함을 우개(憂慨), 근심하여 슬피 욺을 우곡(憂哭), 근심스럽고 괴로움을 우군(憂窘), 근심스러워서 어찌 할 바를 모름을 우황(憂惶), 근심하고 괴로워함을 우고(憂苦), 근심과 즐거움을 우락(憂樂), 백성의 일을 근심함을 우민(憂民), 근심과 슬픔을 우비(憂悲), 근심하는 빛을 우색(憂色), 세상일을 근심함을 우세(憂世), 나라 일을 근심하고 충성을 다함을 일컫는 말을 우국진충(憂國盡忠), 시름하는 마음이 심함을 일컫는 말을 우심유유(憂心愈愈), 나라 일을 근심하고 염려하는 참된 심정을 일컫는 말을 우국지심(憂國之心), 세상일을 근심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우세지사(憂世之士), 시름하여 마음이 술에 취한 것처럼 흐리멍텅함을 일컫는 말을 우심여취(憂心如醉), 근심과 걱정과 질병과 고생을 일컫는 말을 우환질고(憂患疾苦), 기나라 사람의 군걱정이란 뜻으로 곧 쓸데없는 군걱정이나 헛 걱정이나 무익한 근심을 이르는 말을 기인지우(杞人之憂), 글자를 아는 것이 오히려 근심이 된다는 뜻으로 알기는 알아도 똑바로 잘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지식이 오히려 걱정거리가 됨을 이르는 말을 식자우환(識字憂患), 근심할 일은 남보다 먼저 근심하고 즐길 일은 남보다 나중에 즐긴다는 뜻으로 지사志士나 인인仁人의 마음씨를 일컫는 말을 선우후락(先憂後樂), 내부에서 일어나는 근심과 외부로부터 받는 근심이란 뜻으로 나라 안팎의 여러 가지 어려운 사태를 이르는 말을 내우외환(內憂外患), 병이 들어 나무를 할 수 없다는 뜻으로 자기의 병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을 채신지우(採薪之憂), 이 시름을 잊는 물건이라는 뜻으로 술을 이르는 말을 차망우물(此忘憂物), 즐겨서 시름을 잊는다는 뜻으로 도를 행하기를 즐거워하여 가난 따위의 근심을 잊는다는 말을 낙이망우(樂而忘憂), 칠실 고을의 근심이라는 뜻으로 제 분수에 맞지도 않는 근심을 이르는 말을 칠실지우(漆室之憂), 밤낮으로 잊을 수 없는 근심이라는 뜻으로 깊은 근심이나 묵은 근심을 이르는 말을 숙석지우(宿昔之憂), 시름을 잊게 하는 물건 또는 술을 마시면 근심 걱정을 잊게 된다는 데서 온 말을 망우지물(忘憂之物), 어진 사람은 도리에 따라 행하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으므로 근심을 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인자불우(仁者不憂), 보는 것이 탈이란 뜻으로 보지 않아서 모르고 있으면 그만인데 눈으로 보면 무엇인가 문제가 생겨 우환이 있게 됨을 이르는 말을 견물우환(見物憂患) 등에 쓰인다.
▶️ 也(잇기 야/어조사 야, 잇달을 이)는 ❶상형문자로 뱀의 모양을 본떠서 본 뜻은 뱀이다. 그 음(音) 빌어 오로지 어조사(語助辭)로 쓰여지고 있다. ❷상형문자로 也자는 '어조사'로 쓰이는 글자이다. 여기서 말하는 어조사란 '~이다'나 '~구나', '또한', '역시'와 같은 것을 뜻한다. 也자는 乙(새 을)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새'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렇다고 也자가 어떤 것에서 기원한 것인지도 명확하지는 않다. 일부에서는 뱀이 꽈리를 틀고 있는 모습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고대에 사용하던 주전자를 그린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두 가지 해석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닌 것은 也자와 결합하는 글자들을 보면 두 해석이 모두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고대에도 也자의 기원에 대해 명확히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也(야, 이)는 ①잇기(한곳에 대어 잇거나 한곳에 닿아서 붙는 일) ②어조사(語助辭), ~이다, ~느냐?, ~도다, ~구나 ③발어사(發語辭) ④또한, 역시(亦是) ⑤딴, 다른, 그리고 ⓐ잇달다(다른 사물에 이어서 달다)(이) ⓑ대야(둥글넓적한 그릇)(이)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영탄하는 어조사 야야(也耶), 그러한가를 야여(也歟), 별로 해로울 것 없음을 야무방(也無妨), 괜찮음 또는 해롭잖음을 야자무방(也自無妨) 또는 야자불방(也自不妨), 마침내 또는 마지막에는 급기야(及其也), 만일에 또는 행여 나를 혹야(或也), 그 사람 또는 그 자라는 궐야(厥也), 나는 것 같음이나 매우 빠름을 비야사(飛也似), 홀로 푸르다는 말을 독야청청(獨也靑靑), 말인즉 옳다는 말을 언즉시야(言則是也), 입이 관문과 같다는 말을 구자관야(口者關也), 옳으니 그르니 하고 시비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시야비야(是也非也), 전쟁에서 사람은 죽는다는 말을 병사지야(兵死地也), 누구들이라고 드러내지 않고 가리키는 말을 모야수야(某也誰也), 의외로 많음을 이르는 말을 하기다야(何其多也)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