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fmkorea.com/7719915158
21세기 글로벌 시대인 지금은 맘만 먹으면 유럽과 북미도 20시간의 비행으로 갈 수 있지만 과거 조선시대 때까지만 해도 중인 신분인 외교관들만 그 나라에 가서 무역을 하고 조공을 받치는 일들이 있었는데 하지만 중인도 양반도 아닌 상인중에서도 여러 나라를 다니고 그 나라 언어를 습득하여 본국에 돌아온 후 표류한 외국인들을 본국으로 송환시킨 인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오늘은 그 인물에 대해서 알아보자
위 사진이 오늘의 주인공인 신안군 우이도에 살고 있었던 문순득이다.
1777년 정조시대 문덕겸과 어머니 창원 황씨 사이에서 6형제 중 4남으로 태어난 문순득이지만 어렸을 땐 그저 홍어를 가지고선 장사를 하는 평범한 어부였지만 그가 조선왕조실록에 당당히 이름을 생길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가 표류하면서 벌어진 파란만장한 여정이 있었는데 그 여정에 대해서 알아보자
이 날도 어김없이 홍어를 잡기 위해 바다로 나섰는데 갑자기 폭풍이 일더니 배를 제멋대로 조종하기 시작했고 한겨울의 추위와 풍랑을 버티며 도착한 곳이 웬 섬이었는데 거기엔 처음 보는 복장과 언어를 쓰는 주민들이 문순득에게 물과 음식을 주었고 문순득이 여긴 어디냐고 묻자 유구국(오늘날의 오키나와)라고 했다.
예전 우리나라도 제주도를 탐라국으로 독립적인 나라였던 적도 있었던 것처럼 현 오키나와인 유구국도 류큐 왕국으로 불리고 있었는데 헌데 문순득이 살고 있던 우이도에서 유구국까지의 거리는 자그마치 960KM였고 위 거리를 다시 배편으로 가기엔 너무 멀어 문순득은 망연자실하고 있었는데
유구국 주민들도 처음 보는 행색의 낯선 청년이 불쌍했는지 음식과 약 그리고 일거리를 주면서 문순득은 그냥 유구국 주민들과 먹고 자고 말을 배우면서 8개월동안 유구국에서 지냄
그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은 문순득은 1802년 10월 드디어 유구국을 떠나 표류민 송환절차를 거쳐 청나라를 향해 무난하게 순항중이었는데
하지만 무슨 신의 장난인지 또 풍랑을 만남 ㅋㅋㅋㅋㅋ
그렇게 도착한 곳이 아예 피부색도 다른 스페인 제국 필리핀 도독령이였던 루손 섬에 표류하게 됨 당시 상황을 자세히 알기 위해 잠시 지도를 보자면
이런 시앙 유구국보다도 더 아래네? 심지어 3척이었는데 2척은 침몰하고 문순득이 타고 있던 상선만 멀쩡했음 이 때 당시 필리핀은 조선과 무역 교류 자체가 없는 나라였고 그래서 유구국때처럼 문순득 일행을 따듯하게 맞아주지 않을 거라는 예상이 있었고 실제로도 필리핀 사람들은 문순득 일행을 보살펴주지는 않았음
당시 같이 타고 있던 청나라 사람들이 물을 길러 나갔다가 일부가 필리핀 현지인들에게 첩자로 오해받아 잡혀 가는 일도 발생함 하지만 오해가 풀리고 나서 문순득 일행은 필리핀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스페인과 필리핀을 오가는 서양사람들을 통해서 보는 무역을 보며 감탄을 자아내게 되는데 당시 조선 조정은 청나라와 일본의 무역에만 치중되어있었는데 여기는 유럽국가들과 동남아시아 국가들 간의 무역을 봤으니 그럴 수 밖에 ㅋㅋㅋ
우리의 생존왕 문순득은 여송국에서도 먹고 자고 말을 배우며 지낸지 대략 10개월이 지난 1803년 8월 마카오 상선을 얻어타고 마카오로 출발했음 당시 지도로 보자면
대략 저정도 첫번째로 마카오까지 도착하면 그 다음 목적지는 난징이었고 난징까지 간 다음은 베이징이었고 베이징 다음이 의주까지 간 다음 한반도 아래로 쭉 내려와서 3년 2개월 만에 고향에 도착할 수 있었음 그렇게 최장기간 최장거리를 표류하고 돌아온 조선의 어부 문순득은 고향에 가서 부인과 함께 재회를 맞이하는데 여기서 한 선비가 이야기를 듣고 문순득의 이야기를 너무 듣고 싶어함 그가 바로
자산 정약전 바로 다산 정약용의 형이었음 ㅋㅋㅋ
헌데 이 사람의 여정을 이야기로 풀려면 글을 통해서 알려주거나 말로 풀어야 하는데 문순득은
자신의 일을 전부 다 기억하고 있었음
그러면서 첫번째 표류하였던 유구국 사람들에 대한 인상과 인상착의 및 식습관에 대해서 썰을 풀어줌(유구인들은 바지를 입지 않고 저고리로 된 옷을 입었으며 수염은 길렀으나 정수리 머리는 기르지 않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손가락으로 빨아먹었다고도 했음 또한 밥을 짓는 것도 남자가 하고 남녀가 한 자리에 앉아 식사를 했다고도 서술함)
또한 여송국에서 보았던 궁전에 대해서도 진술했었고 또 각국의 언어 풍습 문화 건축 양식 등 본인이 보고 인상깊었던 것에 대해서도 말해주었음 이로 인해 동시대의 동남아시아 동아시아에 대한 문화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통해 학문은 실용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정약용 역시 문순득의 일을 꺼내면서 우리도 화폐의 정형화를 통한 화폐개혁과 이강회라는 실학자는 외국선박에 대한 느낌과 조선에 대한 발전을 위해서는 보고 배워야 한다며 조선 역사상 최초로 선박 관련 논문을 썼는데 유암총서를 기술하기도 했음
* 위 사진은 문순득의 여정을 담은 표해시말의 일부분*
또한 많은 실학자들이 자국 문헌에선 찾아볼 수 없었던 옛 국가의 풍속과 언어를 연구하는 자료로 활용
→ 이런 일들로 인해 유배를 왔었던 정약용의 형 정약전은 문순득에게 호를 선물해주니 이 호가
바로 천초 즉 하늘 아래 니가 처음이다라는 뜻이었고 위 호를 받은 문순득은 정약전을 가족 즉 친형처럼 여기게 되었고 표해시말을 저술하고 나서는 둘 관계는 단순한 형제관계를 넘어서는 무언가로 발전하기까지 함
하지만 문순득의 표류생활이 가졌던 이점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는데
1801년 8월에 표류한 외국인들이 있었는데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을 돌려보내주고자 신하를 파견하여 물어보았는데 애석하게도 이 외국인들이 하는 언어를 몰랐던 당시 조정에서는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고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외국인 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함
그러다 조선에 표착한 유구국 사람 궁평이 이들과 대화한 끝에 루손 사람이라는 것까지는 밝혀냄 하지만 조선에서는 이들 국가와 오늘날로 치면 수교도 맺지 않은 국가이고 지도 업데이트도 제대로 되지 않아서 동쪽국가냐 남쪽국가냐로 싸우고 있을 정도로 조선 밖 세상엔 무지했었음
그래서 제주 관청에선 궁평과 이들을 함께 지내게 하기 위하였으나 궁평이 지네 나라로 돌아감 ㅋㅋㅋㅋ 그렇게 1801년에 표류한 이들은 9년이 지난 1810년까지 제주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문순득에게 마을 주민이 제주에 그런 사람들이 있더라 하니 문순득은 일로카노어로 그들에게 말을 걸자 드디어 집에 갈 수 있게 되었다고 통곡하기까지 함 그가 우리나라 최초 필리핀 통역가였던 거였음 ㄷㄷ
문순득은 이 일 말고도 여러 표류한 외국인들에게 통역을 해주는 일도 했다고 함
이 일로 인해 1835년 그의 공을 치하하여 가선대부 종2품 공명첩을 하사했다고 한다.
이걸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점은 난관에 부딪혔다고 울부짖으며 포기할 게 아니라 문순득의 표류는 개인적으로는 불운이었지만 그 덕분에 많은 이가 필리핀과 서양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었다. 특히 정약용과 정약전, 이강회 등 실학자들의 세계관 확대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 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에 실려있던 문순득이라는 사람에 관한 일대기를 간략하게 풀어보았슴돠 자료 출처는 와빌의 그재무지와 나무위키에서 따왔으며 재밌게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흥미댓펌
이 사람 일대기를 들을 때마다 궁금한 부분인데
몇개월마다 언어를 하나씩해서 둘이나 익힌 문순득은 뭐하는 인간이며
9년동안 머무르고도 조선어를 못 익힌 여송인들은 뭐하는 인간들인지 ㅋㅋㅋ
거에 관한 썰도 있습니다 문순득은 원래 당초 언어적인 능력이 좋아서 그들하고 항상 그들의 언어로 소통할려고 하는 노력을 가졌고 여송국에 갔을땐 무조건 같이 온 청나라 사람들에게도 중국어가 아닌 그 나라의 언어로 소통하게끔 유도했고 반대로 제주도에 갇힌 여송인들은 각자 제주도민들과의 소통보다는 자기네들끼리 뭉쳐서 본인들만의 생활을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제가 아직 글을 쓰는 능력이 부족해서 거기에 관해서까지는 위에서 알려드리지 못했네여
문순득은 한국인 하나없는곳에 어학연수간 느낌이고
여송인들은 한인타운으로 어학연수간거네ㅋㅋㅋㅋ
참고로 문순득은 조선어를 한자로 번역하였으며 또 그걸 류큐어와 일로카노어로도 번역하여서 그거에 관해서 100년전 일본에서는 이미 완득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도 2005년 이것들을 완득하기도 하였습니다
나 이걸로 소설써서 상금 200만원 받았음. 이분에 대해 목포해양대 교수가 쓴 책도 읽었는데... 일단 홍어잡이는 아니고 홍어를 사고파는 홍어장수임. 그때나 지금이나 상인들이 진취적이지. 그리고 당시에 표류자들이 꽤 많아서 표류민을 자국에 돌려보내기 위한 정교한 법적 장치가 다 있었음. 일단 표류하면 심문해서 범죄를 저지르고 바다로 떠난 것인지 확인하고 표류민이 맞으면 정중하게 대우하고 의복 식량으루넉넉하게 지급하라는 조항이 다 있었음. 다만 여송(루손)은 그런 조항에 적용되지 않아서 결국 문순득은 그곳에서 주로 배를 제작 수리하는 일을 하면서 마카오로 돌아가는 배삯을 벌었을 걸로 추측하디라. 이후 마카오에서 조선까지는 당연히 청나라가 경비부담함. 그리고 청나라 사람도 종종 우이도까지 표류해서 문순득은 자신도 어떻게 처분될 지 알아서 큰 고민은 없었을 거임
양반이 되었네. 신분을 샀을라나.
국가에 대한 공로를 인정해서 일종의 가짜벼슬을 준 거임. 제사지낼 때 학생이 아니라 정헌대부같은 직위로 올리면 폼 나잖아.
참고로 위에 등장하는 정약용 형 정약전 영화 있는데 재밌음
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
유배지에서 물고기 관심생겨서 물고기 관한 책 쓰는과정을 그린 이야기
첫댓글 흥미로웤ㅋㅋ
개재미있다 역시 외국어를 익혀야 해 ㄷㄷ
와 대단하시다 ㅋㅋㅋㅋㅋㅋ 넘 흥미돋
시대가 달라도 총명한 사람들은 업적을 이뤄내는구나
역시, 살아남은 것도 대단하고, 거기서 언어를 익힐 정도로 적응한 것도 대단하다
너무 재밌고 읽으면서 두근거렸어
이 사람은 진짜 외국어 능력이 뛰어났나봐. 8갤만에 언어 익힐 정도면 대단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