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군의 전술형태를 보면 단편적이지만.. 단편적인 것들을 종합해보면 임무형 전술이 많은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물론 임무형 전술의 시초는 프러시아에서 시작되었고 2차대전때 독일군의 전격전에서 크게 빛을 보인바 있으며 현재도 세계의 지휘형태의 핵심적인 지휘형태로서 미군과 한국군이 많은관심을 갖고 지휘체계에 적용하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우선적으로 언급을 하기전에 간단하게 임무형 전술에대해 간단하게 소개를 해보겠습니다.
독일 원어로는 임무형 전술(Auftragstaktik)이 맞는데, 차라리 이해하기 쉽게 임무형 지휘(Mission Type Command),나 임무형 명령(Mission Type Order)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겠군요.
명령형 전술 : 군단 지휘관 관우는 26일 03시에 A1지역으로 이동하고, 27일 03시에 다시 A2지역으로 이동한 후, 장비부대가 A3지역에서 한중성을 방어하기 위해 A2지역으로 이동하는 적 허저부대를 요격할 때까지 기다린 후, 장비부대가 요격에 성공하면 28일 03시에 한중성을 공격하고, 요격에 실패하면 A1지역으로 후퇴하여 조운부대에 부대유지비 2200금을 양도할 것. 예비 계획은 27일 중으로, 차후 지령은 28일 02시를 전후로 하달하겠음. 부대 이동을 철저히 할 것.
임무형 전술 : 군단 지휘관 관우는 장비부대 및 조운부대를 통솔하여 30일 00시까지 한중성을 점령할 것. 세부 계획은 부대 지휘관 관우의 재량에 맡김.
임무형 전술은 위에서 보는 것처럼 명령형 전술과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바로, 작전을 수행하는 부대 지휘관에게 전폭적인 지휘권을 위임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 임무형 전술은 20세기 초부터 독일에서 개발된 작전 지휘술로 특히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이 소련군에 대해서는 2배 이상, 영미연합군에 대해서는 1.2배 이상의 전투효율을 보이게 된 원인이 되었다. 지금도 독일연방군은 임무형 지휘 통제를 발전시키고 있으며, 최근 미군과 국군에서도 이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 전투효율이 2배라는 것은 아군 100명이 적군 200명과 동일한 전투력을 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병력이 적의 1/2이라도 충분히 전선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임무형 전술은 사실상 목적만 주어질뿐 현장지휘관의 능력에 전적으로 작전권을 맡김과 동시에 현장지휘관은 상위부대의 작전의도를 파악하여 움직이는 전술지휘체계입니다. 고구려군의 경우가 이런 전술을 보이는 흔적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고당전쟁 당시 주필산 전투에서의 고구려군 고연수군과 당군과의 전투가 그러한 목적이 있다고 봅니다. 현재 대체적인 학론으로는 고연수가 지휘관인 고정의 대로의 명령보다는 자신의 공을 위해서 움직였다는 모습을 보이나.. 1차 주필산 전투 자체에 대해서 여러 흔적들 소설까지 포함한다면.. 오히려 주필산 전투 자체는 작전의 실패였을뿐 우선적으로 고구려 구원군의 목적에 따른 지휘관의 재량의 임무형 전술에 가까운 형태를 수행했다고 보여진다 생각합니다.
고당전쟁에서 뿐만 아니라 고구려군의 작전활동을 보면 대체적으로 물론 단편적이기 때문에 더 세부적으로 가자면 고구려군에 관련된 여러가지 서적들이 다시 재 나와야겠습니다만.. 대체적으로 활동을 보면 고구려군은 사실상 임무목적이 주워진 형태에서 작전을 수행했다는 점입니다.
특히 방어전에서 자신들의 요동방어선에서의 기병대의 보급로 차단이나 적 후방의 기습은.. 분명하게 자신들의 성의 재량의 목적이 주워져있고 이것이 자기 재량권에 따른 움직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대체적으로 조선시대때나 고려시대때 몇몇을 제외하고는 잘 보여주지 않는 점입니다. 반면에 고구려군은 원정숫자의 한계성등을 고려해서 작전을 수행했고 대체적으로 효율적인 승리를 추구한바 있습니다. 방어전의 경우 고수전쟁/고당전쟁의 사례가 매우 대표적일 것이며 고국원왕때 전연과의 전투이후 고구려 4만 대군의 움직임등을 방어전에서 가장 돋보이게 보여주며 공격작전 때에는 주필산 전투나 평원왕때 온달의 후주와의 전투에서의 선봉적 역활이나 명립답부의 좌원대첩이나 태조왕때 현도성 공략등에서 조심스럽게 볼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고구려는 융통성 있는 군사작전을 수행했고 적들보다 숫적 우위면에서는 항상 우세하지 못한 면을 보였지만 승리한 사례나 작전의 효율적 문제로 전략/전술에서의 우수한 모습을 보여준 사례를 판단한다면 고구려군의 지휘형태는 대체적으로 현장지휘관의 판단을 존중하며 재량에 맡기는 임무형 지휘체계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물론 현재의 독일군에서 창시된 임무형 전술과는 분명하게 다를 것이며 고대시대의 지휘체계는 분명하게 적용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임무형 전술체계의 모습이 강한 형태를 보여주었던 고구려군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한번 임무형 전술에 대해서 현재 관련 책을 읽어보다가.. 생각이 들게 되어서.. 올려봅니다^^;
위에 임무형 전술관련 글 출처는 디펜스 코리아와 다음카페 밀리터리 월드/작은군사학 출처입니다.
첫댓글 흥미로운 해설이군요. 생각해볼만한 주제인 것 같습니다.
위의 본문대로라면 저의 견해로는 고-수 전쟁, 고-당 전쟁시 수나라 양광은 거의 명령형 전술체계로 고-당 전쟁에서는 부분적으로 임무형과 명령형으로 나누어 져 보입니다..주필산 전투 이전에는 주로 임무형 전술로 보이나 일단 당태종과 이세적 군사등이 합류된 후에는 이세민의 명령형 전술로 보입니다만...특히 육도 삼략등, 기타 병법서에서는 군주(왕)가 삼군을 지휘하는 총수에게 명령형 전술을 금하고 주로 임무형 전술을 권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흠. 흥미롭네요. 임무형 전술이라. ^^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 그런 식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군요. 명령형 전술과 임무형 전술이라.. 으흠.. 그렇게 본다면 대로 고정의와 욕살 고연수간의 군 통수권 문제를 보다 합리적으로 설명하는게 가능하겠군요.
한단인님 글 한번 써주셔야죠.^^ 밀리님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저도 밀리터리학 좀 공부해야 할텐데...^^
;;; 그냥 군통수권 문제에서 단순히 고정의나 고연수 중에 누가 실질적인 군 총사령관인가란 이분법적 인식 문제가 아니란 점이 밀리님의 문제제기여서 그 말이 이치에 맞아 그랬던 것입니다. 그간 제가 생각을 너무 이분법적으로 한 것에 대한 반성이었죠. 어쨋거나 제가 밀리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판국에 글 쓸 깜냥은 아닌 듯 싶군요.
자료 모으는대로 임무형 전술에 대해서 세부적으로 작성해보겠습니다.ㅋㅋㅋ
삭제된 댓글 입니다.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궤멸당한 적이 없습니다. 무전신현님. 고정의가 지구전을 명령했다는것이 대표적이지만.. 지구전 역시 기본적으로 전투를 하는 것입니다.더욱이 15만 대군의 목적은 안시성의 구원입니다. 따라서 지구전이 목적이되 기본적으로 공격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주필산 전투의 대목은 이점을 보여줄수 있습니다. 님께서는 임무형 전술을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만.. 임무형 전술체계를 갖고 있다는 이야기는 지휘체계가 매우 신속할정도이자 지휘관들이 서로 뜻이 맞을정도의 정교한 지휘체계를 갖추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또한 임무형 전술은 중앙이 지방보다 낮고 높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임무형 전술의 기본적 목적은 임무가 주어지면 지휘관의 임무에 따른 재량권을 이야기하는거지 지휘권을 누가갖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상 1차 주필산 전투는 고연수 고혜진의 작전술차원의 기동전 수행이라고 볼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님.. 완전히 추측을 진짜 역사처럼 이야기하시는건 대체 제가 뭐라고 이야기해야하는겁니까? 초전의 예봉이 꺾여 2만명의 피해를 봤다고는 하나 본대 전체가 피해를 입었다고 보기는 상식적으로 생각 밖의 이야기입니다. 이는 군단예하 1개 사단이 피해를 입었다고 군단 전체가 피해를 입었다는 식의 과장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고정의가 제안한 지구전은 오히려 포위작전에 해당하는 상황입니다. 오히려 당군은 배후와 측면에 고구려 대군과 대치함으로서 병력을 나누게됨으로서 안시성의 공격의 병력이 줄어드는 결과를 만들었다고 봐야합니다.
고정의 자체 스스로가 지구전을 언급한 것은 이미 고구려군이 지속적으로 당군의 보급로를 수시로 타격하여 봉쇄했다는 점을 인식했기 때문이죠. 이는 결국 고정의가 언급은 전략이지 작전술과 전술이 아니라는겁니다. 1차 주필산에서 고연수/고혜진이 보여준 공격은 바로 작전술+전술적 형태가 강한 군사작전이 될수 있습니다. 전략이 지구전이라고 해서 공격을 반드시 하지 말아야한다는 근거는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안시성의 배후나 측면으로 공격을 가해서 적을 혼란이나 피해를 주는 역습을 하는 것은방어전 수행에서도 기본적으로 하는 행동입니다.
지휘권 문제의 경우 이미 고정의가 위에 있었다는 점이 근거가 될텐데요? 뒤집을 만한 근거는 없습니다. 참고로 임무형 전술의 언급은 지휘권을 누가갖느냐가 아닙니다. 임무형 전술의 언급은 고연수/고혜진의 1차 주필산 전투의 지휘관의 행동역량 언급입니다.
무전신현님 주필산 전투에서 당나라는 이미 패배한것입니다. 몇달을 발목잡혀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진격할곳도 없어서 완벽한 방어준비가 된 안시성으로 향하게 됩니다. 북쪽의 신성(아니면 탈환된 요동성?), 서쪽의 요택, 동쪽의 요동방어망, 남쪽의 건안성에 포위된 상태에서 안시성을 공격한거죠. 마지막 몸부림이죠. 당군은 이미 주필산 전투에서 발목잡힌것 자체가 패배한것입니다..... 물런 당군이 주필산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것은 아니죠. 그러나 황제가 포위당하고, 당시 당군 최고 군사령관인 이세적마저 위험한 상황에 빠졌습니다.
고구려 선봉부대를 꺽은것은 좋았으나 도리어 이세민, 이세적, 장손무기의 병력들이 고구려군에게 역포위당해버렸습니다. 당군 사기가 꺽일 수 밖에 없죠. 거기다가 고구려군 포로 3만명을 다시 빼앗겼다면? 황제가 포위당함. 최고군사령관 이세적도 위험에 빠짐, 포로군을 다시 빼앗김, 그후 한달간 발목잡힘.... 그동안 동서남북으로 다 포위당함. ㅡㅡ;; 주필산전투에서 당군은 사기가 꺽이고, 1달이란 시간을 허비해 버렸습니다. 믿을 수 있는건 요동성(이마저도?)밖에 없고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신라만큼의 군제가 안되었다고 하시는데 기본적으로 고구려군 역시 몽골군의 천호제와 같은 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몽골군의 천호제는 현재의 분대-소대-중대-대대-여단 체계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체계입니다. 이런체계가 오히려 신라보다 군제적 기능이 세부적으로 안되었다는 이야기는 님의 근거 같군요. 고구려군이 임무형 전술체계를 갖추었다면 이는 오히려 더 군사제도가 더 효율적이고 당시로서는 거의 혁명적일정도의 정교하고 세밀한 군사체제를 갖추었다는 말이 됩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기본적으로 임무형 전술을 구사하려면 지휘통제시스템과 편제체계가 매우 정밀하고 세부적이지 않다면 실현 불가능합니다.
한반도 남부는 고구려가 요동방어선처럼 네트워크 형태를 구성하지 못했다는건 아니라 보여지는군요. 기본적으로 한성이라는 중요거점이 있다는건 거기에 방어하는 방어성시스템 구성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상대적으로 요동방어선보다 양적 질적인 면은 떨어졌겠지만 말이죠. 영토가 넓어서 군제가 정교하게 발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제평생 처음입니다만? 영토가 넓은 로마군의 지휘체계가 형편이 없었던가요? 몽골군은 어떻습니까? 당나라의 군제가 형편없는 수준이 아니었다는건 기본적으로 증명해줍니다. 대국의 군사제도의 조건은 기본적으로 군제가 얼마나 효율적인가입니다.
반말과 존대를 섞지 마시길 바라겠습니다. 님 기동부대의 원조로 따지자면 고구려가 오히려 노하우나 군운용에서 신라보다 우세하면 우세했지 낮지 않습니다. 어떻게 진흥왕이 편성한 기동부대 편성한게 고구려가 이미 대국으로 성장한 형태의 시스템보다 뛰어나다고 이야기할수 있습니까? 무슨근거로요? 영토확장에 만큼 시스템이 따라가주었다는건 이미 김용만 선생님의 책들로도 충분히 근거가 될수 있는 문제입니다. 중국군이 고수전쟁이나 고당전쟁에서 기만전이나 기동전을 펼치면 상당한 위험을 당했다고 하셨는데 제가 알기로는 오히려 역인 경우같습니다만?
삭제된 댓글 입니다.
고수전쟁당시 총지휘부의 총사가 을지문덕이라는 근거는 없습니다. 드라마 보시고 이야기하시는것 같군요. 기본적으로 영류태왕의 작전은 오히려 지휘권 재량을 대폭활용한 사례이자 동시에 임무형 전술에서의 지휘관의 기본행동을 보여준 셈입니다. 님 이론대로라면 말이죠. 근거를 대본다면.. 기본적으로 2차대전 서부전역 직전의 만슈타인의 당시로서는 위험천만한 계획이자 서부전역의 독일군의 작전이었던 지헬슈니트 작전과 비견될수 있는 셈입니다. 당시 독일군 기갑부대의 주문은 측방의 위협을 무시한채로 지속적으로 진격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병에게는 상대적으로 말도 안되적 작전이었기 때문이죠.
2차 고당전쟁 당시 신라군이 쉽게 통과했을 가능성이 과연 존재할지 의문입니다만? 기본적으로 3차 고당전쟁당시 한성을 공략하려고 했을대 신라군이 고구려군에게 공포를 느끼고 있다었다는 점은 님의 주장을 반박할수 있는 근거적 자료가 될수 있지요. 고구려 남부지역의 요동방어선만큼 강력하지 못했어도 취약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을 말입니다.
평양성은 당시 수수군에게 핵심적인 종심이었습니다. 이 종심을 이용하는 종심방어작전을 구사하는게 위험하다 아니다라고 판정지을수 없습니다. 어느작전이든지 항시 위험부담이라는 약점이 뒤따르게 되어있습니다. 종심방어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시면 좋겠군요. 적에게 종심이라는 약점을 보임으로서 역포위하여 공격하는 방법은 즐겨되어왔고 영류태왕 스스로가 평양성이라는 종심을 이용해서적을 유인포위섬멸한점은 위험하다고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전장상황에 따라서 뼈를 취하고 살을 내주는 사례는 작전술에서나 전술에서나 기본적인 사례입니다.
2차 고당전쟁 당시 교전한 사례는 많습니다. 그리고 신라군 자체가 기동이 더디었다는 점은 단순하게 날씨만을 고려할수 없습니다. 황해도 지역은 평지지역입니다. 산악지대가 아닌이상 날씨탓을 할수 없습니다. 전투에서 승리한쪽이 사기가 우세하고 진쪽이 사기가 떨어져 공황상태를 두고 이야기하는것을 너무 과대평가하는것은 안됩니다. 신라군이 공포를 안떨었다하셨는데 3차고당전쟁때 고구려 국경을 넘기 힘들어서 덜덜공포에 떨었다는 기록이 있다는거 아실텐데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화랑도의 체계는 예비대편성이라고 할수 없습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고구려군의 소위 무예수련집단의 활동만해도 예비대성격이 될수 있습니다. 님께서는 예비대의 목적이 무엇인지 잘 모르시는것 같군요. 예비대는 말그대로 방자의 경우 방어선이 뚤렸을때 적의 돌파를 막기위한 존재이며 공자의 경우에는 적의 방어선을 뚫었을때 집중공격할수있는 예비대를 의미합니다. 화랑도가 예비대였다고 하시는데.. 기본적으로 그들의 목적은 사실상 사기진작용의 선봉대라고 볼수있는 자살특공대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신라의 수도를 위협하지 못하셨다고 하셨습니다만.. 어느 강대국도 방어전을 수행하면서 2개전선을 효과적으로 방어한 나라는 드물거니와 동시에 2개 방어전선을 역습으로 전환해서 적의 심장부까지 타격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2차대전때 미국의 경우에는 사실상 본토공격을 받지 않아서 였다는 점을 상기하셔야할 문제입니다. 국력차이와 함께 말이죠. 반면에 고구려와 백제는 거의 당시로서는 특히 고구려는 동등이상의 국력을 갖은 국가와 전면전을 치루는 상황에서 강소국? 수준에 약간 못미치는 신라를 상대로 2개 전선의 방어전선을 운용하여 성공한 사례는 세계전쟁사에서도 드문예로 기억합니다.
님. 화랑도의 경우 현재의 사관학교/ROTC/학군사관등의 존재입니다. 군사학생을 예비대라고 말하는 규정하지 않습니다. 규모가 군단이든 무엇이든 간에요.그들이 군단급 편성이 된다고 해도 그들은 예비대가 되지 못합니다. 님께서는 예비대라는 존재가 매우 2등급 부대나 되거나 훈련이 덜된 부대등으로 취급하시는것 같습니다만.. 예비대는 신속한 기동한 전투력이 막강한 부대로 편성됩니다. 대표적인 병과가 바로 기병입니다. 화랑들의 지금까지의 기록을 보면 항시 선봉의 돌격대나 사기진작의 자살특공대의 역활이상을 수행한 사례는 없습니다. 화랑도의 목적은 사실상 간부편성을 목적으로 세워졌으며 동시에 사기진작의 돌격대정도입니다
밀리님 화랑부대인 낭당이 사기진작의 자살특공대 역활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편견입니다..아마도 관창때문에 그렇게 낭당의 기능을 평가해서는 안됩니다..관창을 제외한 화랑들이 그렇게 사기진작용 또는 자살돌격용으로 쓰인 사례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잇습니다..제가 보기에는 스스로 공을 세우기 위해 지원하여 예비장교로써 전쟁경험을 위한 종군부대로 보는 것이 오히려 보다 타당 하다고 봅니다.
저는 화랑과 낭당을 보는 관점은 두가지입니다. 사관생도와 돌격대입니다. 한가지만을 보는건 아닙니다.
화랑이 참전한 사례는 진흥왕때 사다함의 경우와 진평왕때 북한산성 수비를 위해 그리고 비담의 난때 그리고 무열왕때 조천성 전투때 김흠운 낭당대감, 백제 정벌시, 이후 부흥군토벌시등등입니다..그런데 낭당이 사관생도라는 것도 무리입니다..어디까지나 낭당이나 화랑부대는 간부인 화랑인 경우에만 그렇고 대부분 구성원은 낭도들입니다..그들 청소년들을 돌격용으로 활용보다는 오히려 훗날을 대비한 전투경험을 위해 활용했다고 보는게 타당해 보입니다..
무전신현님. 밀리님의 글 어디에서도 임무형 전술체계가 '중앙의 전략적 통제 시스템' 상에서 정교성이 낮은 지표가 된다고 서술된 적이 없습니다. 즉, 명령형 전술체계와 임무형 전술체계가 서로 장단점이 있다는 점이 글에서 서술되었고 상황 여하에 따라 두 체계는 우열을 나뉠 수 없으며 상황 여하에 따라서 임무형 전술체계가 더 높은 효율을 보일 수 있다고 서술되었는데 그게 왜 군제에 있어서 정교하고 하지 않고를 가늠하는 것이 되는지요? 중앙에서 지방을 통제하는 것만이 곧 정답이요, 진리라는 것입니까? 중앙집권에 대한 환상이 무전신현님의 문제제기에 반영된 듯 싶습니다만?
저 글은 단위 전투에 있어서 현장 지휘관의 재량권의 정도를 따지는 문제이지 무전신현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중앙 군대가 지방군대와 합동작전을 벌일 때 지휘권을 누가 가지느냐란 문제가 아닙니다. 즉, 신라의 중앙 대당과 지방 정 간 합동작전 시 그 지휘권을 누가 가지느냐란 문제를 여기에 대입시키는 것은 올바른 비교대상이 아니란 것입니다. 총사의 역할은 중앙군인 고정의도 가지고 있었는데 하위로 편입된 지방군 지휘자로 고연수를 설정한다면 그 재량권을 따지는 것인데 지금 무전신현님의 문제제기에서는 단지 신라의 중앙과 지방군의 총 지휘권을 따지는 것은 지적되었지만 단위전투 지휘관의 재량권 문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본문은 어디까지나 임무형 전술과 명령형 전술에 대한 설명입니다...다만 어느 전투에서 딱히 명령형 전술이다, 임무형 전술이다 구분이 확연하게 들어날 수 없다고 봅니다...兵者詭道也..전쟁은 속임수이다!...하나의 전투에서도 상황에 따라 정공법과 변칙 기공법이 마구 혼재되어 치루어 지는게 일반적입니다..하물며 2차 고-당전쟁에서 고구려군의 전술 체제를 한마디로 딱잘라 구분한다는 것도 무리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