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4 정기답사 안내
1. 출발일시 : 2016년 4월 10일(일요일)
2. 출발장소 : 양재역 1번 출구 서초구청 맞은편 농협 앞 (08시 00분)
죽전 경부고속도로 정류장 (08시 15분)
신갈 경부고속도로 정류장 (08시 25분)
오산 IC 앞 (08시 40분)
3. 이동경로 : 양재역→경부고속도로→죽전정류장→신갈 정류장→오산IC→경부고속도로→회덕분기점→호남고속도로→서대전IC→광산김씨 사계 김장생 선생 묘→계백장군 묘→파평윤씨 명재 윤증고택→파평윤씨 선영→종학당→645도로→탄천IC→천안논산간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오산→신갈 정류장→죽전 정류장→양재동
4. 연락처
회장 태영훈 : 010-8285-7942
부회장 이인호 : 010-3126-7992
부회장 김영태 : 010-9880-3669
총무 황미영 : 010-6363-5718
5. 답사지
논산
숭풍회 2016년 4월 답사는 충청남도 논산지역으로 갑니다. 논산은 동북쪽으로 계룡산과 동남쪽으로 대둔산이 경계를 이루고, 노성천과 논산천이 흐르는 논강(논산과 강경)평야는 드넓고, 두 내와 금강이 만나 서해와 통하는 강경포구가 있어 물산이 풍부한 지역입니다. 호남에서 서울을 가려는 사람과 금강을 통해 서울까지 가려는 온갖 물산이 모여들었던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이 때문에 논산은 서로 뺏고 뺏으려는 치열한 격전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삼국시대 계백과 김유신의 싸움과 후삼국 때 왕건과 신검의 싸움이 모두 지금의 논산인 황산벌에서 벌어졌습니다. 1952년 신병을 훈련시키는 논산훈련소가 세워져 이 땅의 젊은이들이 황산벌에서 고되게 부대끼는 것을 보면 땅의 기운은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논산은 학문의 고장으로 기호학파(畿湖學派 : 경기 충청 해서의 서해안 지방)의 중심지였습니다. 영남학파가 고려와 조선의 왕조교체에 불만을 품고 은거한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 중기 이황이 배출되면서 성립되었다면, 기호학파는 영남학파인 동인에 대항하기 위하여 서인세력이 기호지방을 중심으로 결집되었습니다. 기호학파를 성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는 율곡 이이,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을 들 수 있습니다. 기호학파는 인조반정을 통해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크게 세력을 확장하였습니다. 특히 이이의 문인인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명제 윤증 등 연산과 회덕 지역을 중심으로 한 학자들이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이러한 기호학파들이 숙종 대에 이르러 회덕을 중심으로 한 송시열 계열의 노론과 노성을 중심으로 한 윤증의 소론이 분열되었습니다.
논산은 부의 고장이기도해서 윤덕병 한국야쿠르트 회장의 고향입니다. 윤덕병 회장은 명제 윤증의 8대손으로 1927년 2월 9일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윤덕병 회장은 1974년 한국야쿠르트유업주식회사 회장에 취임하였으며, 고향사랑이 남다르다고 합니다.
1) 사계 김장생 선생 묘와 광산김씨 선영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고정산 아래에 있다. 오늘날 광산김씨를 있게 한 양천허씨 부인 묘를 비롯한 유복자 김철산 묘, 사계선생 묘 등이 있다. 보국이 수려하고 잘 짜여진 명당이다.
양천허씨 부인은 조선조 대사헌 허응(許應)의 딸로 재덕을 겸비했다. 10여세에 광산김씨 김약채의 큰아들 김문과 결혼한다. 김문이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과 검열을 지내다가 조선 태조 2년에 사망하니 그 당시 허씨부인의 나이는 불과 17세였다.
김문이 사망하자 친가부모들은 딸의 가엾은 생활을 안타깝게 여겨 개가시키려 했다. 이를 눈치 챈 부인은 몸종 하나만 데리고 시가인 개성에서 연산까지 걸어 내려와 살게 되었다. 그 정성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허씨부인이 잉태하여 유복자로 태어난 아들은 김철산으로 후에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김철산의 아들인 김국광은 좌의정에 이르고 광산부원군이 되었다. 양천허씨 부인의 정절과 열행은 세조1년 7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나라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열려정려를 내리고, 정경부인의 시호를 내렸다.
김국광의 5대손이 김장생이며 그의 아들이 신독재 김집이다. 부자가 예학의 태두로 문묘에 배향되었으니 유일무이하다. 이들 부자의 문하에 송준길, 송시열 등이 다시 문묘에 배향되니 해동18현 중 4명이나 해당된다. 사계 김장생은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 계백 장군 묘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에 있다. 백제 의자왕 20년(660)에 나당 연합군이 백제에 침입하였을 때, 5천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최후를 맞아 묻힌 곳이다. 출전하기에 앞서 처자를 적국의 노비를 만들지 않으려고 자기 손으로 죽여서 비장한 결의를 보인 계백은 황산벌에서 김유신의 군사 5만명과 대결하여 4차례에 걸쳐 물리쳤다. 그러나 어린 화랑 관창의 죽음으로 사기가 오른 신라군의 총공격을 받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계백장군의 의로운 죽음을 본 백제 유민들은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은밀하게 가매장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후 묘소 인근마을 주민을 중심으로 묘제를 지내오던 관행이 이어져 왔다. 전에는 계백장군 묘라는 것이 밝혀지지는 않고 주민들 사이에서만 구전되어 왔는데 근래에 이르러 본격적인 고증작업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비석도 10년 전에는 『傳百濟階伯將軍之墓』에서 傳자를 빼고『百濟階伯將軍之墓』로 바꾸었다.
이 가장골의 묘를 계백장군의 묘로 고증한 것은 전 부여박물관장이었던 고 홍사준 선생이라고 한다. 그는 첫째, 묘소의 방향이 정남향으로 백제분묘와 같은 방향으로 설치된 점. 둘째, 묘소 뒤쪽의 산 이름이 충장산, 충혼산, 충훈산, 수락산으로 불리워 장군의 죽음과 같은 맥락의 지명유래가 있는 점. 셋째, 장군의 시체를 가매장한 데서 이곳 지명이 가장골이고 마을 지명이 충곡리라 부르고 현지주민들에게 장군묘로 전해진 점. 넷째, 백제 최후의 결전장이던 황산벌이 묘소와는 근거리에 있는 점등을 들었다.
얼마 전까지 이곳은 공동묘지였다. 이제 장군묘역 성역화 작업을 하면서 타 묘들은 모두 이전시키고 장군 묘역만 남아있다. 파묘한 자리 중에서 풍수공부하기에 좋은 곳이 있다. 초보자들을 위해 이곳에서 현장 실습을 할 예정이다.
3) 윤증 선생 고택
논산시 노성면은 조선시대에는 노성현이었다. 윤증 고택의 현무봉이 마치 공자가 태어난 이구산(尼丘山)과 거의 흡사하게 생긴 까닭에 붙은 이름이다. 공자의 이름이 `구(丘)`인 것도 이구산에서 기인하는데, 이구산을 이산(尼山)으로 줄여 부르는 것도 공자의 이름 `구`를 피한 것이다. 공자의 고향은 오늘날의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인데, 옛날에는 노성(魯城)이라고 불리었다.
이구산은 주변에 별다른 높이의 산이 없어, 쉽게 눈에 뜨이는 봉우리이다. 마치 비구니의 깎은 머리처럼 둥그스름하게 생겨 우뚝 솟아있다. 그래서 저절로 이 지방 사람들에게는 옥녀봉으로 불린다. 옥녀봉은 오행으로는 금성체에 해당한다. 금성체를 구성법(九星法)으로 따지면 무곡체(武曲體)라고 한다.
윤증은 원래 앞산 아래 유봉마을에서 살다가 현재의 터에 새 집을 짓고 이사했다. 명재의 8대 손이 한국야쿠르트의 창업주 윤덕병 회장이고, 명재의 둘째 동생 윤발의 후손에서 웅진그룹 윤석금 회장이 나왔다.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1, 인조7-숙종37)
윤증은 숙종 때의 학자이며 소론의 영수로 태어난 마을 뒷산 이름을 따서 유봉(酉峰)이라 호를 불렀다. 시호는 문성(文成)이고 아버지는 윤선거(尹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 이씨로 이장백(李長白)의 딸이다. 윤증의 조부 윤황은 우계 성혼의 딸과 결혼했다. 당시 서인과 남인이 있었고 서인은 윤증에 의해서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었다. 역사는 이를 사색(四色)이라고 부른다.
윤증은 1642년(인조20) 14세 때 아버지 윤선거가 유계(兪棨)와 함께 대전 아래 금산에 살면서 도의(道義)를 공부했는데, 그때 공부하면서 성리학에 전념하기로 마음먹었다. 19세에 권시의 딸과 결혼하고, 권시에게 배우기도 했다. (권시와 유계는 모두 윤선거의 친구들이다.) 그 전에 주자학을 김장생의 아들 김집에게서 배웠는데, 늙은 김집은 송시열이 주자학에 정통하므로 그에게 배우라고 했다. 29살 되는 해에 대전 회덕에서 살던 송시열에게 주자대전을 배웠다.
효종 말년에 학업과 행실이 뛰어나 조정에 천거되었고, 35세(1663, 현종4)에 공경과 3사가 추천하여 공조랑 사헌부 지평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그 뒤 1682년(숙종8) 호조참의, 1684년 대사헌, 1695년 우참찬, 1701년 좌찬성, 1709년 우의정, 1711년 판돈녕부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가 세상을 뜨자 스승 송시열에게 행장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송시열과 윤선거는 막연한 친구 사이였는데 남인의 이론가인 남휴에 대해서 송시열은 사문난적으로 처단하자는 강경론이었고, 윤선거는 온건론을 펴면서 사이가 갈라졌다. 송시열은 행장을 쓰되 윤선거를 비난했고 이를 윤증이 간곡히 고쳐달라고 했으나 고쳐주지 않았다. 이에 윤증과 송시열은 사제지간의 의리가 끊어졌고 서인은 송시열을 영수로 삼는 노론과 윤증을 영수로 삼는 소론으로 갈리었다. 노론은 청나라와 남인에게 강경한 반면, 소론은 온건파였다.
기호학파의 중심지 논산
논산은 기호학파(畿湖學派 : 경기 충청 해서의 서해안 지방)의 중심지였다. 영남학파가 고려와 조선의 왕조교체에 불만을 품고 은거한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 중기 이황이 배출되면서 성립되었다면, 기호학파는 영남학파인 동인에 대항하기 위하여 서인세력이 기호지방을 중심으로 결집되었다. 기호학파를 성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는 율곡 이이,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을 들 수 있다. 기호학파는 인조반정을 통해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크게 세력을 확장하였다. 특히 이이의 문인인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명제 윤증 등 연산과 회덕 지역을 중심으로 한 학자들이 주도권을 잡았다. 이러한 기호학파들이 숙종 대에 이르러 회덕을 중심으로 한 송시열 계열의 노론과 노성을 중심으로 한 윤증의 소론이 분열되었다.
4) 비봉포란형의 윤선지 · 윤돈 · 윤창세 묘
충남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121에 있다. 윤선지(尹先智)-윤돈(尹暾)-윤창세(尹昌世) 3대 묘가 있다. 윤창세의 아들이 팔송(八松) 윤황이고, 윤황의 아들이 윤순거와 윤선거이다. 윤선거의 아들이 명제 윤증이다. 종학당이 문중 학교로 인재를 양성했다면, 병사 선영은 묘의 음덕으로 최고의 명문가로 만든 곳이라 할 수 있다. 안산인 앞산(125.9m)은 교과서적인 귀인봉으로 이곳 묘역을 바라보고 있다. 앞산 아래 장구리에 윤황고택이 있고 유봉마을에서 윤증이 어린 시절 살았다.
파평윤씨가 노성에 뿌리를 내린 것은 입향조(立鄕祖) 윤돈(尹暾)때문이다. 윤돈이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이구산의 서쪽 자락 비봉산(飛鳳山) 아래이다. 윤돈은 파평윤씨 21대에 해당하며, 주로 선조 때 정치적으로 활약하여 공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장마로 인해 자신의 책임 하에 조성되었던 선조의 능이 무너지자, 마침내 파직되어 이산으로 내려와 파평 윤씨 노종파(魯宗派)를 연 인물이다.
파평윤씨 노종파는 흔히 노성윤씨라고도 부른다. 그들의 자존심이 드러나는 표현인데, 그도 그럴 것이 윤돈 이후로도 아들 창세(昌世), 수(燧)·황(煌)·전( ) 등의 세 손자가 있었고, 그 뒤를 이어 문거(文擧)·선거·순거(舜擧) 세 증손자가 이름을 날렸으며, 급기야는 소론의 거두 윤증까지 큰 정치가와 학자들이 연이어 나온 탓이다.
참고로 파평윤씨의 시조는 고려태사(高麗太師) 윤신달(尹莘達)이다. 고려 때에 여진족을 정벌하여 함경도를 개척한 윤관(尹瓘) 장군이 5대가 되고, 15대 윤곤(尹坤)은 2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의 편에 가담하여 파평군(坡平君)으로 봉해졌다.
5) 파평윤씨 집안 교육기관 종학당(宗學堂)
충남 논산군 노성면 병사리에 있는 종학당은 파평윤씨 노성파의 집안 교육기관이다. 문중 자제뿐 아니라 외척, 처가의 자녀들까지 합숙교육을 시켰던 곳이다. 개인 가문의 종학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으며, 강학당과 숙소, 휴게실 등이 갖춰진 초등부터 대학교육까지 체계적인 원스톱 자녀교육 프로그램을 갖추었던 곳이다. 뒤에 보이는 노성산(348.1m)과 앞에 보이는 병사 저수지 등 풍수적인 조건과 수려한 산수를 배경으로 이곳에서 47명의 과거급제자를 길러 냈다.
조선시대 과거급제자 수를 보면 전주이씨 844명, 파평윤씨 412명, 안동권씨 359명, 남양홍씨 324명, 안동김씨 310명 순이다. 파평윤씨 412명 가운데 노종파에서만 47명 배출은 단일파로서는 조선최고의 기록이라고 한다. 노성파에서 시호를 받은 인물이 9명이나 된다고 하며, 특히 윤황-윤선거-윤증은 3대가 모두 시호를 받았다.
저수지 건너편 마주보이는 곳에 선영이 있는데 아마 후손들에게 조상을 보면서 공부하라는 것일 것이다. 종학당을 처음 세운 사람은 명제 윤증의 백부인 윤순거로 아우인 윤선거와 함께 후학 양성에 힘썼다. 윤증도 종학당에서 후손들을 지도했다.
산맥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