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列國志 제143회
오원(伍員)의 字는 자서(子胥)이며, 감리(監利)에서 태어났다. 신장이 1장(丈)이고, 허리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었다. 미간(眉間)이 한 자이고, 눈빛이 번개처럼 번쩍였다. 힘은 정(鼎)을 들어 올리고 산을 뽑을 만한 용맹을 지녔으며, 경문위무(經文緯武)의 재능을 지녔다.
[‘경문위무(經文緯武)’는 文을 종(縱)으로 하고 武를 횡(橫)으로 한다는 뜻으로, 文武를 겸전(兼全)했음을 말한다.]
세자의 태부(太傅)인 연윤(連尹) 오사(伍奢)의 아들이며, 당군(棠君) 오상(伍尚)의 아우였다. 오상과 오원은 부친 오사를 따라 성보(城父)에 가 있었다. 언장사(鄢將師)가 초평왕(楚平王)의 명을 받들어 두 사람을 유인하여 입조하게 하려고, 먼저 오상을 만나고 또 오원을 만나겠다고 청하였다.
오상이 부친의 서신을 가지고 내실로 들어가, 오원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다행히 죽음을 면하고 우리 둘을 후작에 봉하겠다고 하네. 왕의 사자가 문 밖에 와 있으니, 아우는 나가서 만나 보게.”
오원이 말했다.
“아버지께서 죽음을 면하셨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하지만 아무런 공도 없는 우리를 후작에 봉하겠다는 것은, 우리를 유인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면 필시 죽음을 당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친필로 쓰신 서신인데, 어찌 우리를 속이시겠는가?”
“아버지께서는 국가에 충성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필시 복수할 것임을 아시고, 우리와 함께 죽음으로써 후환을 끊으려는 것입니다.”
“아우의 말은 지나친 억측이네. 만일 아버지께서 쓰신 서신이 진정이라면, 우리는 불효의 죄를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형님! 잠깐 앉아 보십시오. 제가 길흉을 점쳐 보겠습니다.”
오원은 점을 쳐 본 다음 말했다.
“점괘가 좋지 않습니다. 주군은 신하를 속이고, 아버지는 아들을 속이는 괘입니다. 가면 반드시 죽습니다. 후작은 무슨 놈의 후작이란 말입니까?”
오상이 말했다.
“후작이 탐나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뵙고 싶을 뿐이네.”
“楚王은 우리 형제가 외방(外方)에 있는 것이 두려워 감히 아버지를 죽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형님이 가신다면, 도리어 아버지의 죽음을 재촉하는 결 과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를 뵐 수 있다면 죽어도 좋겠다.”
오원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다.
“아버지와 함께 죽는다고 해서 득 될 일이 무엇입니까? 형님이 간다 하더라도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오상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아우는 어디로 가려는가?”
“楚나라에 복수할 수 있는 나라를 찾아가겠습니다.”
“나의 지혜가 아우에게 미치지 못함을 알고 있네. 나는 楚나라로 갈 터이니, 아우는 타국으로 가게. 나는 아버지와 함께 죽음으로써 효를 다하고, 아우는 원수를 갚음으로써 효를 다하게. 이제 각기 자기 뜻대로 가야 하니, 다시는 만나지 못하겠구나.”
오원은 형에게 사배(四拜)를 올리고 영결(永訣)하였다. 오상은 눈물을 거두고 밖으로 나가 언장사에게 말했다.
“아우는 후작을 원하지 않으니, 억지로 데려갈 수 없겠습니다.”
언장사는 오상과 함께 수레를 타고 영도(郢都)로 돌아갔다.
평왕은 오상을 옥에 가두었다. 오사는 오상이 혼자 온 것을 보고 탄식하였다.
“운(員)이 오지 않을 줄 알았다!.”
비무극(費無極)이 평왕에게 아뢰었다.
“오운이 멀리 도망치기 전에 빨리 붙잡아야 합니다.”
평왕은 대부 무성흑(武城黑)에게 병졸 2백 명을 주어 오운을 잡아오라고 명하였다.
오자서(伍子胥)는 楚兵이 자기를 잡으러 온다는 것을 알고 통곡하면서 말했다.
“아버지와 형님은 죽음을 면치 못하겠구나!”
오자서는 아내 가씨(賈氏)에게 말했다.
“나는 타국으로 달아나서 군사를 빌려 父兄의 원수를 갚으려 하오. 이제 당신을 돌볼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소?”
가씨는 오자서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대장부가 父兄의 원한을 품고 있는 것만으로도 폐부가 찢어지는 듯할 텐데, 어느 겨를에 아내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제 염려는 말고 당신은 속히 떠나십시오.”
가씨는 방으로 들어가더니 목을 매어 자결했다. 오자서는 한바탕 통곡하고서 아내의 시신을 장례 지낸 뒤, 소복(素服) 차림에 행낭을 메고 활과 칼을 차고서 길을 떠났다.
오자서가 길을 떠난 지 반나절이 채 되지 않았는데, 楚兵이 당도하여 오자서의 집을 포위하였다. 무성흑은 집을 수색했으나 오자서를 찾지 못하자, 필시 동쪽으로 갔으리라 짐작하고 어자를 재촉하여 수레를 동쪽으로 급히 몰게 하였다. 약 3백리쯤 달려가 사람이 아무도 없는 들판에 이르렀다.
그때 오자서가 활을 쏘아 어자를 쏘아 맞히고, 다음에는 무성흑을 겨냥했다. 무성흑은 놀라서 수레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 오자서가 소리쳤다.
“너를 죽이고 싶지만, 楚王에게 복명하도록 살려 주겠다. 楚나라의 종묘사직을 보존하고 싶거든 나의 父兄을 살려 두라 일러라. 만약 그렇지 않을 때는, 내 반드시 楚나라를 멸망시키고 楚王의 목을 잘라 원한을 갚을 것이다!”
무성흑은 머리를 감싸 쥐고 도망쳤다.
무성흑은 돌아가 평왕에게 보고하였다.
“오자서는 이미 도망쳤습니다.”
평왕은 크게 노하여, 비무극에게 오사 父子를 저자에서 참형에 처하라고 명하였다. 형장에 끌려나온 오상은 비무극에게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네놈은 참언으로 주군을 미혹시켜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을 해치는구나!”
오사가 아들을 만류하며 말했다.
“견위수명(見危授命)은, 신하된 자의 직무이다. 충신인지 간신인지는 공론(公論)이 가려줄 것이니, 저자를 꾸짖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다만 운(員)이 오지 않았으니, 오늘부터 楚나라의 君臣이 편히 밥을 먹지 못할 것이 걱정이로구나.”
[‘견위수명(見危授命)’은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던진다.’는 뜻으로,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친다는 말이다.
논어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이익을 보면 義를 생각하고, 위급한 일을 보면 목숨을 바치며, 오랜 약속에 평소의 말을 잊지 않으면, 또한 성인(成人)이라 할 수 있다. (見利思義 見危授命 久要不忘平生之言 亦可以爲成人矣)”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오사는 목을 내밀어 참형을 받았다. 이를 지켜보던 楚나라 백성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날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비풍(悲風)이 차갑게 휘몰아쳤다.
사관이 시를 읊었다.
慘慘悲風日失明 차가운 바람은 슬피 부는데 태양도 빛을 잃었으니
三朝忠裔忽遭坑 삼대 충신의 후예가 홀연 죽음을 당했도다.
楚庭從此皆讒佞 초나라 조정은 이로부터 간신배들로 들끓었으니
引得吳兵入郢城 그리하여 吳兵이 영성(郢城)에 침입하였더라.
[훗날 오자서가 오나라 군대를 이끌고 영성에 들어오게 된다.]
평왕이 비무극에게 물었다.
“오사가 처형당할 때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소?”
비무극이 말했다.
“다른 말은 없었고, 다만 오자서가 오지 않았으니 楚나라 君臣이 밥을 편히 먹지 못할 것이라고만 했습니다.”
“오자서가 달아났지만 필시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오. 다시 추격하도록 해야겠소.”
평왕은 좌사마(左司馬) 심윤술(沈尹戍)로 하여금 군사 3천을 이끌고 가서 오자서를 붙잡아 오게 하였다.
오자서는 큰 강에 당도하여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냈다. 입고 있던 흰 도포를 벗어 강변의 버드나무 가지에 걸어놓고, 신발을 벗어 강변에 내버렸다. 그리고 짚신으로 갈아 신고 강을 따라 곧장 내려갔다.
심윤술은 강변에 당도하여, 오자서의 도포와 신발만 주워 돌아와 평왕에게 보고했다.
“오자서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무극이 말했다.
“신에게 오자서의 도망 길을 차단할 수 있는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평왕이 물었다.
“그게 무엇이오?”
“사방에 방을 붙여 누구든지 오자서를 사로잡는 자에게는 곡식 5만 석을 주고 상대부에 봉한다고 하십시오. 그리고 만약 오자서를 숨겨주거나 도망치도록 도와주는 자는 일가족을 참하겠다고 하십시오. 모든 길과 관문, 나루터에서는 검색을 철저히 하라고 명을 내리시고, 열국에 사신을 보내 오자서를 절대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이르십시오. 그리하면 놈은 오도 가도 못하게 되고, 비록 잡히지 않는다 하더라도 완전히 고립되어 큰일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평왕은 그 계책에 따라, 오자서의 화상을 그려 모든 관문에 보내고 검문을 철저히 하여 오자서를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
한편, 오자서는 강을 따라 동쪽으로 가고 있었다. 처음엔 吳나라로 가려 했으나, 길이 너무 멀었다. 문득 宋나라로 망명한 세자 건(建)이 생각나서 수양성(睢陽城)을 향해 길을 재촉하였다. 宋나라로 가는 도중에 한 무리의 수레가 앞에서 달려왔다. 오자서는 楚兵인 줄 알고 급히 숲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오자서와 팔배지교(八拜之交)를 나눈 신포서(申包胥)였다.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팔배지교(八拜之交)’는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우정을 말한다.]
오자서가 숲에서 뛰어나가자, 신포서는 황망히 수레에서 내려 물었다.
“자네는 무슨 일로 혼자 이 길을 가는가?”
오자서는 楚王이 父兄을 죽인 사실을 애기하며 한바탕 통곡하였다. 신포서 역시 슬퍼하면서 물었다.
“자네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
“내 듣건대, 부모의 원수와는 불공대천(不共戴天)이라 하였네. 나는 타국으로 가서 군사를 빌려 楚나라를 정벌하여, 楚王의 살을 씹고 비무극의 시체를 갈가리 찢어 원수를 갚을 것이네.”
[‘불공대천(不共戴天)’은 한 하늘 아래 같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왕이 비록 무도하다 하나, 주군일세. 자네는 대대로 楚나라의 국록을 먹었는데, 신하로서 어찌 주군을 원수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옛날 걸(桀)·주(紂)가 그 신하에게 죽음을 당한 것은 그들이 무도했기 때문이네. 楚王은 며느리를 빼앗고 적자를 버렸으며, 아첨배의 말을 듣고 충성스럽고 선량한 신하를 살해했네. 그것만으로도 나는 군사를 빌려 영도에 들어가 楚나라를 위하여 쓰레기들을 소탕할 것이네. 하물며 골육의 원수는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만약 楚나라를 멸망시키지 못한다면, 나는 맹세코 천지간에 서 있지 않을 것이네!”
“내가 자네에게 원수를 갚으라 하면 그것은 不忠이요, 원수를 갚지 말라 하면 그것은 不孝이니, 자네가 알아서 하게. 붕우의 의리로 다른 사람에게 자네를 만났다는 말은 하지 않겠네. 하지만 자네가 만약 楚나라를 멸망시키려 한다면 나는 반드시 楚나라를 존립시킬 것이며, 자네가 楚나라를 위태롭게 한다면 나는 반드시 楚나라를 안정시킬 것이네.”
오자서는 신포서와 작별하고 떠나갔다.
[관중과 포숙아처럼, 오자서와 신포서도 公과 私가 분명하다. 과연 훗날 신포서는 어떻게 할까?]
오자서는 며칠 후 宋나라에 도착하여 세자 건을 만났다. 두 사람은 서로 끌어안고 울면서 평왕의 악행을 호소하였다. 오자서가 말했다.
“세자께서는 宋君을 만나 뵈었습니까?”
세자 건이 말했다
“宋나라에 변란이 일어나서 君臣이 싸우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아직 알현하지 못했습니다.”
한편, 宋君의 이름은 좌(佐)인데, 송평공(宋平公)의 애첩의 아들이었다. 평공은 내시 이려(伊戾)의 참소를 듣고 세자 좌(痤)를 죽이고 좌(佐)를 세자로 세웠다. 주경왕(周景王) 13년 평공이 훙거하고 좌(佐)가 즉위하였으니, 그가 송원공(宋元公)이다. 원공은 외모가 추하고 성질이 유약(柔弱)했으며, 사욕이 많고 신의가 없었다.
원공은 대대로 경(卿)의 벼슬을 지내온 화씨(華氏)의 강성함을 미워하여, 공자 인(寅), 공자 어융(御戎), 상승(向勝), 상행(向行) 등과 공모하여 화씨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상승이 그 음모를 상녕(向寧)에게 누설했는데, 상녕은 화향(華向)·화정(華定)·화해(華亥)와 친했기 때문에 먼저 난을 일으키기로 모의하였다.
[송상공(宋殤公) 때 태재(太宰) 화독(華督)이 정권을 장악했으며, 그 후로 화수로(華秀老)·화어사(華御事)·화우(華耦)·화원(華元) 등이 등장했었다. 제110회에 화원은 남북 간의 화평을 처음 주창했었다. 화해는 화원의 아들이며, 제137회에 진소공(晉昭公)이 채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궐은(厥憖) 땅에 열국의 대부들을 소집했을 때 참여했었다.]
화해가 병이 난 척하자, 백관이 모두 문병을 왔다. 화해는 공자 인과 어융을 죽이고 상승과 상행을 창고에 가두었다. 원공은 소식을 듣고 급히 어가를 타고 화씨 집에 와서, 두 사람을 석방하라고 요청하였다. 화해는 세자와 측근 신하를 인질로 보내면 두 사람을 석방하겠다고 하였다. 원공이 말했다.
“예전에 주왕실과 鄭나라가 인질을 교환한 적이 있었소. 과인이 세자를 경의 집에 인질로 보낼 테니, 경의 아들도 과인에게 인질로 보내시오.”
[제9회에, 주평왕(周平王)이 태자 호(狐)를 정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정장공(鄭莊公)은 세자 홀(忽)을 인질로 보냈었다.]
화씨들은 상의하여, 화해의 아들 화무척(華無慼), 화정의 아들 화계(華啟), 상녕의 아들 상라(向羅)를 공궁에 인질로 보냈다. 원공 역시 세자 란(欒), 모친의 아우 진(辰), 공자 지(地)를 화해의 집에 인질로 보냈다. 화해는 상승과 상행을 석방했고, 두 사람은 원공을 따라 돌아갔다.
원공과 부인은 세자 란을 못 잊어 매일 화씨 집에 들러, 세자가 식사하는 것을 본 다음에 돌아갔다. 화해는 그것이 불편하여 세자를 궁으로 돌려보내려고 하였다. 원공은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하였다. 그런데 상녕이 반대하며 말했다.
“세자를 인질로 잡고 있는 까닭은 주군을 믿지 못해서인데, 만약 인질을 보낸다면 필시 화가 닥칠 것입니다.”
화해가 세자를 돌려보내지 않기로 하자, 원공은 크게 노하여 대사마(大司馬) 화비수(華費遂)를 불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화씨를 공격하라고 하였다. 화비수가 대답했다.
“세자가 그곳에 있는데, 주군께서는 그건 생각지 않으십니까?”
원공이 말했다.
“생사는 천명에 달려 있소. 과인은 더 이상 치욕을 참을 수 없소!”
“주군의 뜻이 결정되었다면, 노신(老臣)이 어찌 감히 사사로이 종족을 비호하기 위해 군명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화비수는 즉시 군사를 정돈하였다. 원공은 인질로 와 있던 화무척·화계·상라를 모두 참수하고 화씨를 공격하라고 명하였다.
화등(華登)은 평소 화해와 친밀했기 때문에 달려가 고하였다. 화해는 황급히 가병들을 소집하여 싸웠으나, 패하였다. 상녕이 세자를 죽이려 하자, 화해가 말했다.
“주군에게 죄를 짓고 또 주군의 아들까지 죽인다면, 사람들이 나를 비난할 것이오.”
화해는 인질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도당들과 함께 陳나라로 달아났다.
화비수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첫째는 화추(華貙), 둘째는 화다료(華多僚), 셋째는 화등이었다. 화다료는 평소 화추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화씨의 변란이 일어나자 원공을 찾아가 참소하였다.
“화추는 실은 화해·화정과 함께 모의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을 陳나라에서 불러들이고 내응하려고 합니다.”
원공은 그 말을 믿고, 내시 의료(宜僚)를 화비수에게 보내 그 사실을 고하게 하였다. 화비수가 말했다.
“이는 필시 다료가 참소한 것인데, 주군께서 추를 의심하시니 쫓아내라고 청하겠소.”
화추의 가신 장개(張匄)가 몰래 엿듣고서, 돌아가는 의료를 붙잡아 심문하였다. 의료가 말하지 않으려 하자, 장개가 검을 뽑아 들고 말했다.
“말하지 않으면 죽일 것이다!”
의료는 두려워 사실을 모두 털어놓았다. 장개는 곧바로 화추에게 달려가 보고하고, 화다료를 죽이겠다고 청하였다. 화추가 말했다.
“등(登)이 이미 도망쳐서 부친께서 상심하고 계신데, 우리 형제가 또 싸운다면 부친께서 어찌 견디시겠는가? 내가 피하는 것이 좋겠네.”
화추는 작별인사를 하려고 부친을 찾아갔는데, 장개도 따라갔다. 도중에 마침 조정에서 나오던 화비수와 만나게 되었는데, 화다료가 수레를 몰고 있었다. 장개는 화다료를 보자 노기가 폭발하여, 패검을 뽑아 들고 달려가 화다료를 죽였다. 그리고 화비수를 겁박하여 함께 노문(盧門)을 나가 남리(南里)에 주둔하고, 사람을 陳나라에 보내 화해·상녕 등을 불러 함께 모반하였다.
송원공은 악대심(樂大心)을 대장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남리를 포위하고 공격하게 하였다. 화등은 楚나라로 가서 원병을 요청하였다. 초평왕은 원월(薳越)로 하여금 화씨를 구원하게 하였다.
오자서는 楚軍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세자 건에게 말했다.
“宋나라에는 머물 수 없습니다.”
오자서는 세자 건과 함께 그 母子를 데리고 서쪽의 鄭나라로 달아났다.
그 상황을 읊은 시가 있다.
千里投人未息肩 천리 길을 찾아와 아직 숨도 돌리지 못했는데
盧門金鼓又喧天 노문(盧門)의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네.
孤臣孽子多顛沛 외로운 신하와 버림받은 아들은 또 곤궁에 처하여
又向滎陽快著鞭 다시 형양(滎陽)을 향해 달려간다네.
楚軍이 화씨를 구원하러 오자, 진경공(晉頃公) 역시 제후들을 거느리고 宋나라를 구원하러 왔다. 제후들은 楚軍과 싸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송원공에게 남리의 포위를 풀도록 권하고 화해와 상녕 등은 楚나라로 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양군은 철수하였다.
그때 鄭나라에서는 상경(上卿) 공손 교(僑)가 세상을 떠나, 정정공(鄭定公)이 애통해 하고 있었다.
[제135회에, 진평공(晉平公)이 사기궁을 짓고 낙성식에 제후들을 초청했을 때 정간공(鄭簡公)과 공손 교가 晉나라에 갔었다. 정정공은 정간공의 아들이고, 이름은 영(寧)이다.]
정정공은 평소에 오자서가 3대에 걸친 충신의 후예이며 천하에 비할 자가 없는 영웅임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때 鄭나라는 晉나라와 화목하게 지내면서 楚나라와는 원수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세자 건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정정공은 매우 기뻐하며 일행을 객관에 묵게 하고 후하게 대접하였다.
세자 건과 오자서는 鄭伯을 알현할 때마다 울면서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정정공이 말했다.
“鄭나라는 나라도 미약하고 병력도 적어 별 소용이 없습니다. 그대들이 원수를 갚으려면 晉나라에 가서 상의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세자 건은 오자서를 鄭나라에 남겨 놓고, 자신은 晉나라로 가서 진경공을 알현하였다. 경공은 자세한 상황을 물어 본 다음, 세자 건을 객관으로 보내고 육경(六卿)을 불러 楚나라를 정벌할 일을 의논하였다. 그때 육경은 위서(魏舒)·조앙(趙鞅)·한불신(韓不信)·사앙(士鞅)·순인(荀寅)·순력(荀躒)이었다.
[제142회에, 진소공(晉昭公)이 훙거하고, 진경공(晉頃公)이 즉위하여 위서가 국정을 맡아 순력·범앙과 함께 정사를 보았다고 했었다. 조앙은 조무(趙武)의 손자이며 조간자(趙簡子)라고도 불렸다. 사앙은 곧 범앙이다. 제111회에, 사회(士會)가 적적(赤狄)을 평정하고 돌아와 범(范) 땅에 봉해져 범씨(范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했다. 사씨라고도 하고 범씨라고도 하게 되었다.]
당시 육경은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서로 다투기만 했으며, 군주는 약하고 신하들이 강하여 경공은 자신의 뜻대로 정사를 처리하지 못했다. 육경 가운데 위서와 한불신은 어질다는 명성이 있었지만, 나머지 네 사람은 권력을 탐하고 위세를 부리는 무리들이었다. 특히 순인은 심하게 뇌물을 좋아하였다.
[후에 晉나라는 한(韓)·위(魏)·조(趙) 3국으로 나뉘게 되는데, 이때부터 그 조짐이 있었다.]
자산(子產)이 鄭나라 국정을 맡고 있었을 때는 항상 예의를 잘 지켰기 때문에, 晉나라 경들도 자산을 공경했었다. 그런데 자산이 세상을 떠나고 유길(游吉)이 정사를 맡게 되자, 순인은 뇌물을 요청하였다. 유길이 뇌물을 주지 않자, 순인은 鄭나라를 미워하게 되었다.
楚나라 세자 건이 오자, 순인은 은밀히 경공에게 말했다.
“鄭나라는 晉·楚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면서 그 마음이 일정하지 않은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楚나라 세자가 鄭나라에 머물고 있는 것은, 鄭나라가 그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자가 내응하고 우리가 군대를 일으켜 鄭나라를 멸망시킨 후, 세자를 鄭나라에 봉하여 서서히 楚나라를 도모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경공은 그 계책에 따르기로 하고, 순인으로 하여금 은밀히 세자 건에게 고하게 하였다. 세자 건은 흔쾌히 그 계책에 찬성하였다. 건은 경공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鄭나라로 돌아갔다.
첫댓글 정나라에서 진나라 순아무개가 초나라 세자였던
건하고 일을 벌이는데, 그 귀추가 궁금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