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는 6남매의 가정이었고 서울 용산구의 어느 일본식 관사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공직자이었기에 집에서는 한 달이면 몇 번씩 수십 명의 직원들과 회식으로 인해 북적였고 어머니와 친구들 그리고 일을 돕는 가사도우미 분들이 많은 음식들을 만들며 수고를 참 많이 했습니다.
제 위로는 형이 있고 형 위에는 누나가 세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착한 동생도 있었지요. 당시 큰누나는 고2, 작은누나는 중3 막내누나는 중1이었습니다. 큰누나와 막내 누나는 참 예뻤습니다. 특히 큰누나는 하얀 카라가 돋보이는 교복이 무척 잘 어울렸고 날씬한 몸매와 예쁜 얼굴로 인해 동네 분들로부터 막내 누나와 더불어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인지 큰누나는 성격이 남들에 비하여 도도한 편이었고 막내 누나는 새침한 성격이었습니다. 큰누나를 막내누나는 참 잘 따랐고 둘 사이는 동네 사람들에게 의좋은 자매로 보이며 항상 붙어 다녔습니다. 그런 반면에 둘째 누나는 두 누나와 같이 예쁘지는 않았습니다. 살이 많아서 몸무게도 많이 나가 돼지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고 세 자매 중에 안경을 혼자 쓰기도 했으며 어렸을 때 뜨거운 주전자에 손을 데어서 새끼손가락과 검지가 굳어 항상 고부라져 있었습니다.
큰누나와 둘째 누나가 말다툼하는 것을 볼 때면 항상 둘째 누나는 큰 누나에게 잘못했다고 하였고 자기 방에 들어가서 엉엉 울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보기도 했습니다 날씬한 큰누나의 실증으로 버려진 옷들은 항상 덩치가 큰 둘째 누나의 차지였고 자주 허리가 맞지 않아서 마이깡을 늘려입던지 천을 덪대고 미싱에 박음질을 하여 입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큰누나와 작은누나의 새 옷을 사주었지만 둘째 누나가 새 옷을 입은 모습을 거의 못 본 것 같습니다.
언제나 아버지께서 집에서 직원들과 회식을 할 때가 되면 두 누나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둘째 누나는 집안에서 일을 도왔습니다. 음식을 만들다가 부족한 것이 있으면 얼른 시장으로 달려가 음식재료를 사 왔고 주문한 것이 아닌 것으로 잘못 사 왔을 때에는 어머니에게 심한 꾸지람을 듣고 다시 달려가서 얼른 바꾸어 오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둘째 누나는 갖가지 음식을 맛있게 잘 만들었고 음식을 잘한다는 이유로 항상 새벽에 두 누나보다 일찍 일어나 밥을 하고 도시락을 만들고 나서 자신은 등교시간이 늦어져 헐레벌떡 학교로 뛰어갔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둘째 누나를 잘 따랐습니다. 저 역시 형제 중에 둘째였으니까요. 둘째 누나는 저를 참 예뻐해 주었습니다. 언젠가 누나는 학교까지 걸어다니며 남은 용돈으로 저에게 과자를 사주기도 했습니다. 저는 둘째 누나의 함박웃음의 미소가 언제나 너무 보고 싶습니다. 활짝 웃는 커다란 웃음을 보면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제가 사춘기 때에 방학 동안에 말도 안 하고 집을 며칠 동안 나갔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집에 들어갔을 때에 둘째 누나는 달려 나와서 저를 꼭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제 뺨으로 눈물이 마구 흘렀습니다. 누나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누나는 저와 함께 시장에 가서 맛있는 것과 제가 좋아하는 반찬을 가득 샀습니다.
십여 년간 신장투석을 하다가 돌아가신 지 몇 년이 흘렀지만 저는 아직도 둘째 누나를 너무나도 보고 싶습니다. 아마도 그때가 이맘때 즈음이었을 겁니다. 눈이 아주 많이 오던 날이었는데....
집안마다 비슷한 상황들이 많았을 거예요. 그 당시에는 위생과 보건에 대한 조건들이 좋지 않아서 어려서 많이 죽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가정마다 다산을 많이 하였다고 해요. 그리고 부모 입장에서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여식에게 주로 일을 많이 시켰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은 말을 잘 듣지 않고 반항을 하는 자식을 설득시키거나 강제로 도움을 요구하기에는 너무 많은 힘이 많이 들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많은 자식들을 위해 생업에 전념해야 하는 부모의 입장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첫댓글 비디오처럼 눈앞에서 펼쳐지는 가족이야기
잘보고갑니다.
마치 엄마 같은 누나였습니다.
예전의 가족분위기는 누나가 동생들을 업어 키우기도 했지요.
누나가 학교를 다녀오면 어린 동생을 누나의 등에 업히기도 했고요.
맞아요. 엄마 같은 누나...
잘 읽었습니다
가슴에 담아갑니다.
긴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다복한 집안의 아드님이셨군요.
제게도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저를 부모님 처럼 의지 하는것 같아
더 마음이 쓰입니다.
요즘 형제나 남매 없이 자라는
세대들은 이해하기 힘든 정이지요
님의 글에 첫 댓글 답니다
행운이 깃든 새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요. 요금 세대는 이해를 하지 못할 거예요.
당시는 넉넉한 가정들은 아니었지만 형제 또는 남매의 정이 넘쳐났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은 참으로 좋은 세월이었던 것 같습니다.
형재자매들을 많이 낳아주신 부모님께도 감사해야겠지요~^^
그 정많으신 둘째누님이 지금도 살아 계셨더라면,,,,,,,
누님도 아실겁니다
동생의 그 절절한 그리움을요~~~~
그리움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바로 둘째 누나가 생각이 나네요.
좋은 어린시절의 추억을 남겨주고 떠나가신 누님께 항상 고마움을 느낍니다.
참
그리 착하신 분이 왜 그렇게 병사까지?
그리고 외모가 뭐 그리 중요하다고 집에서조차 차별대우를?
안타깝습니다
부모님들은 자식들 앞에서 열손가락의 아픔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지만
그래도 더 정이 많이 가는 자식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둘째 누님은 부모님 앞에서 단 한번도 반항을 하지 않으셨어요.
마음씨가 착한 누님이지요.
착한사람을 꼭 일찍 데려간다고 하네요
그런 분들을 주변에서 보기도 합니다.
평소에 하던 행위들을 떠올리며
그럴리가 하면서도 상황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하기도 하지요.
어머 꼭 형제 많은 집엔 그렇더라고요 일만 하는 자식 노는 자식 일만 한다고 더 이뻐하지도 않고 둘째 누나가 심덕도 좋으셨네요 그런 분이 왜 일찍 가셨을까 형제 이야기도 내 일같이 가슴에 닿습니다.
집안마다 비슷한 상황들이 많았을 거예요.
그 당시에는 위생과 보건에 대한 조건들이 좋지 않아서 어려서 많이 죽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가정마다 다산을 많이 하였다고 해요.
그리고 부모 입장에서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여식에게 주로 일을 많이 시켰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은 말을 잘 듣지 않고 반항을 하는 자식을 설득시키거나 강제로 도움을 요구하기에는
너무 많은 힘이 많이 들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많은 자식들을 위해 생업에 전념해야 하는 부모의 입장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겨울밤..님에 글이 가슴을 짠 하게합니다.
누나와 애틋한 정이 그리움으로...
조은곳에 가계시겠죠!
잘보았읍니다^^
그냥 생각나는데로 쓰다보니까 글이 너무 길어졌어요.
읽으시는 분들께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글의 내용을 보고 애틋한 감정을 느끼셨다고 하시니까 너무 감사하네요.
고맙습니다.^^
노향님을 극진히도 사랑했던 둘째 누나와의 사연이
정겹게 다가옵니다.
하늘 나라 가셨다니 안타깝네요.
저는 11남매중 막내라
네 분의 누님들한테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습니다.
두 분은 89세, 70세로 하늘 가시고
90세, 73세이신 둘째, 넷째 누님만 살아계신데
둘째누님은 요양병원에, 넷째 누님도 건강이 안 좋아
병원을 안방 드나들듯 합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듯이
생로병사는 누구나 거쳐가는 대자연의 순리이자 법칙입니다.
형제분들이 많으셨군요. 자라면서 많은 추억들이 가슴에 쌓여 있을 텐데요.
언젠가 박민순님의 감동적인 가정의 이야기를 읽고 싶네요.
누님들이 건강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