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가 시해당한 비운의 현장 건천궁
경복궁의 향원정 뒤쪽에 자리 잡은 건천궁乾淸宮은 조선 후기에 고종이 명성황후를 위해 지은 별장으로 경복궁 중건이 끝난 지 한 해 뒤인 1873년에 궁궐 안에서도 가장 깊숙한 자리에 창건되었다.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이곳 건청궁의 곤녕합坤寧閤에서 비운의 황비인 명성왕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되었다.
온갖 질곡의 세월을 겪으며 아들을 왕위에 오르게 한 대원군은 며느리인 민비와의 마찰로 편할 날이 없었다. 한 나라에 두 명의 영웅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학농민혁명이 한창이던 1894년 9월에 일본공사로 부임한 인물이 일본에서 내무대신으로 총리대신 대리를 맡았던 이노우에 가로우(井上馨)이었다. 그는 강화도 조약을 맺을 당시 일본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했던 사람인데 그가 주도적으로 을미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했다.
당시 정치적으로 소외되어 있었던 민비는 그, 전에 견지했던 일본의 조선보호정책을 맞받아치는 전략을 구사하게 된다. 그것은 러시아를 끌어들여서 일본을 거부하는 정책이었다.
그 무렵 철종의 사위였던 박영효가 민비를 암살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다시 일본으로 망명을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민비의 반일감정을 더욱 자극시켰다. 민비는 조선에서 청나라가 누렸던 이권을 러시아에게 보장해주어 러시아가 일본세력을 보장해주기를 바랐고 러시아 역시 그것을 호기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것은 민비의 중대한 착각으로 러시아. 독일 프랑스 연합은 몇 달아 못가서 깨어지고 말았다. 민비는 김홍집의 친일내각을 몰아내고 친러 내각을 세우고자 하였고, 그것은 눈치 챈 일본은 러시아에 “조선을 분할하자‘는 제안을 했다. 민비는 이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있던 앨런(H.N.Allen)의 도움을 받아 제2차 김홍직 내각을 무너뜨리고 제3차 내각을 구성했는데 이때 임각한 사람들이 박정양, 이범진, 이완용 등이었다.
회유나, 설득으로 조선의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노우에는 일본 정부에 자신의 후임으로 육군 중장 출신인 무단파인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추천했다.
이노우에가 각본을 짜놓고 돌아간 뒤 행동계획이 구체화된 이 사건의 암호명은 ‘여우사냥’이었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또는 명성황후 시해 참변, 민비학살사건이라고도 부르는 이 사건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인 명성황후를 조선 주재 공사관인 미우라 고로의 주도하에 일본 낭인들이 시해한 사건이다.
일본인이 민비를 시해하기 위해 궁궐에 들어왔을 때 그들을 만난 홍계훈이 “왜병을 부른 칙령이 있는가?” 하고 꾸짖었다고 한다., 그러나 홍계훈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총탄에 맞아 들려 나간 뒤 며칠 만에 죽고 말았다. 홍계훈은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주성에 입성한 동학군과 전주화약을 맺었던 사람이다.
이 사건이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8월 20일(무자) 일본 공사 삼포오루三浦梧樓가 대궐을 침범하여 왕후 민씨는 시해 당했고,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과 대대장 홍계훈洪啓薰은 적에게 대항하다가 죽었다.
왕후는 오래도록 정치에 배제되어 간여하지 못하게 되자, 정상형井上馨에게 뇌물을 후하게 주고 임금에게 정권을 되돌려 주도록 하여 자신이 예전처럼 중앙에서 권세를 부리고자 하였다.
박영효朴泳孝는 그것을 질시했기 때문에 5월의 음모가 있었던 것이다. 삼포오루는 이런 정황을 박영효에게 익히 듣고는 일을 도모하려 생각한 것이다.
그 무렵 왕후는 권세가 조금씩 커지자 매일 밤 궁중에서 놀이를 벌이고 가곡을 들었다.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인 스기무라 후카시(小村室이란 자에게 영리한 딸이 있었는데, 왕후는 이 여자를 총애하여 늘 불러서 만났다. 삼포오루는 거느리고 있는 일본인으로 하여금 광대들과 뒤섞여 놀이를 구경하도록 하면서, 몰래 왕후의 초상 수십 장을 그리도록 하여 보관하고 있었다.
기일을 정해 거사하는데, 남의 나라 국모를 시해했다는 죄가 두려워 드디어 대원군과 내통하여 그날 밤 공덕리(지금의 마포구 공덕동)로 나가 대원군을 가마에 실어 앞세우고 여러 일본인들이 뒤 따랐다.
각기 왕후의 초상화를 한 장씩 가지고 있었으며 소촌실의 딸은 그들을 인도하였다. 곤녕전에 이르자 대궐 안은 횃불이 비쳐 개미도 헤아릴 정도였다. 이경직을 만나자 왕후가 어디 있는지를 물었다. 이경직이 모른다고 하며 저들을 막자, 이경직의 좌우 팔뚝이 모두 떨어져 나가 죽었다. 왕후는 옷장 속으로 숨었으나 적들은 머리를 휘어잡아 끌어내었고, 소촌실의 딸이 확인해 주었다.
왕후는 수차 목숨을 구걸했으나 적의 칼날이 마구 내리쳤다. 시신을 검은 천으로 싸서 석유를 끼얹고 녹산鹿山의 숲속에서 불태우고는 몇ㅍ 조각 잔해를 수습해 즉시 태운 자리에다 묻었다.
왕후는 기민하여 권모술수가 많았는데, 정치에 간여한 20년 도안 점차 망국에 이르게 하더니 마침내 천고에 없던 변을 당하게 된 것이다.
훗날 전해지는 말로는 왕비를 죽인 뒤 시체를 놓고 시간屍姦을 하는 몸짓을 했다고도 하고, 옷을 벗겨놓은 뒤 국부를 들여다보았다고도 하고, 혹은 시체를 능욕했다고도 한다.
명성왕후는 그렇게 비운의 생을 마감했는데, 명성왕후의 생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명성왕후를 여러 번 접견했던 언더우드 여사가 훗날에 지은 <상투와 함께 15년>에 생전 모습이 실려 있다.
“왕비를 대면한다는 것은 가장 큰 관심사로서 자못 흥분되었다. 갸름하며 약간 창백한 얼굴에 유난히도 반짝이는 총명스런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시선을 끄는 미모는 아니었으나 용모이세 풍기는 지적이고, 예리함이 상대방을 압도했다. 외모와는 달리 대화 시에는 밝은 표정을 지었으며, 명료하고 우이하며 재치가 넘치는 모습으로 호감을 주었다. 그녀의 지적 수준은 상당했으며, 국제 정세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사건이 끝난 뒤 미우라는 7시쯤 공포에 질려 있는 고종을 알현했고, 고종은 그에게 시국을 수습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사건은 그 뒤 여러 추측을 낳았다. 이 사건을 대원군이 일본인들과 함께 민비를 몰아내기 위해서 ‘간사한 무리를 몰아내라’는 유시를 내렸다고도 하고, 박은식이 지은 《한국통사》에는 대원군이 입궐하는 일본인들에게 “오늘은 단지 왕실을 호위하는 것뿐이다. 궁중에서 폭거를 행하지 말라” 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황현은 ‘김홍집등이 대원군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기술한 것을 보면 대원군이 민비시해에 동의 했는지가 확실하지 않다.
을미사변이 끝난 뒤 고종은 허수아비처럼 되었고 대원군 역시 일본의 요구에 따라 경복궁에 들어온 뒤에는 거의 유폐된 것이나 마찬가지로 움직이지 못했다.
일본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이 만행을 목격한 외국인들이 있었다. 미국인 고문인 다이(W. M. Dye)와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A. J. Sadatin)등이 그 현장을 보고서 다른 외국인들에게 알렸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서울 편에서
그날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2024년 5월의 건청궁은 봄날의 햇살 아래 한가했고, 나 역시 한참을 어슬렁거리다가 돌아왔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