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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제주도의 학살을 말할 땐 4.3 사건이라고들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자면 대량학살이 일어난 건 4월 3일이 아니죠. 11월부터 일어난 대량학살이 우리가 흔히 아는 '4.3'입니다. 그리고 그 학살을 주도한 인물이 있죠. 바로 송요찬 입니다.
△ 제주를 시찰한 정일권 경비대 총참모장(오른쪽). 김영철 해안경비대 참모장(중앙)이 9연대 송요찬 연대장과 함께 삼성혈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1948. 10. 1) <김정무 장군 소장> #
(왼쪽이 송요찬)
... 계엄령이란게 그때 반공... 공산당이 많아야 계엄령을 발표하는데 공산당이 제주도 한 사람도 없었단 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엄령을 선포하고 거기에 따라서 계엄사령관 송요찬이란 놈이 그 놈이 와가지고 제주도를 전부 망쳐버렸어. 사는 사람 집을 다 불태워버리고 살면 붙잡아서 죽이고 군인 한사람이 사람 몇 십명 죽여도 잘 했다고 그랬지... ...죄가 있어 죽은 것이 아니라 국인, 경찰이 그냥 묻지도 않고 사람들 다 죽인 거지...
故강상문 (2009년 12월 인터뷰 당시 91세), #에서 재인용
그 때에 초토화작전이라는 말을 했는데, 싹 쓸어버린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중산간마을에) 그 사람들이 있음으로 해서 산에 올라간 무장세력이 거기에서 도움을 받으니까 분리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거기에 있는 사람은 적이라는 작전개념이었다
金貞武(77세‧서울시 종로구 부암동‧당시 제9연대 군수참모, 준장 예편, 육사2기 동기회장. 2002. 9. 25. 채록) 증언., 같은책, 293~294
난 9연대 군수참모로 제주에 갔습니다. 당시 인사참모는 최세인, 정모참모는 탁성록, 작전참모는 한영주였습니다. 제주에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인데, 하루는 직속부하인 구매관 강의원(姜義遠‧육사 4기생)이 안 보이는 겁니다. 알아보니 송요찬 연대장의 지시에 의해 처형됐다는 겁니다. 난 9월 1일부로 대위 진급을 했는데 9월의 어느 날 연대장이 부르더니 다짜고짜 ‘너 재판장 해라. 이 놈을 죽여야 돼!’라고 했습니다. 누군지도 모르고 범죄사실도 모르는 사람에게 덮어놓고 사형언도를 하라는 겁니다. 사관학교에서 군법회의에 대해 몇 시간 배우긴 했지만 재판을 해본 일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요. 재판정에 나가보니 얼마나 고문을 당했는지 사람이 반쯤 죽어 있었어요. 피고인은 제주도지사였던 박경훈이었습니다. 도지사 관사에서 쌀 한 말을 공비에게 줬다는 게 범죄사실이었지요. 쌀 한 말에 사람의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릴 적 시골에서 쌀 창고 열쇠는 늘 할머니가 갖고 다니던 게 기억 나 “피고가 직접 쌀을 주었느냐?”고 물었지요. 이에 당시 57~58세 가량 된 박경훈 지사는 “아닙니다. 저도 구속돼 조사 받는 과정에서 알게 됐습니다. 우리 집사람 친척이 와서 굶어죽게 됐으니 도와달라고 해서 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더군요. 아무리 도지사 관사에서 쌀이 나왔다 하지만 부인의 행위를 책임질 수는 없으므로 무죄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법무관 등 몇 사람과 평의에 들어갔지요. 어떤 사람은 “사형 집행을 하라고 하는데 한 20년 어떻습니까?”라고 했습니다. 15년을 말하는 이도 있고, 10년을 말하는 이도 있고. 고심 끝에 심판관들에게 “이건 무죄이지만 부인을 데려다 사형을 한다고 하면 곤란하니까 한 3년이 어떻겠소?”라고 제안하고 동의를 얻어 3년을 언도했습니다. 아직도 무죄인 사람에게 3년형을 언도한 것이 양심에 가책이 됩니다. 어쨌든 재판결과를 연대장에게 보고했더니 “이 공산당 같은 놈의 새끼!”라며 철모로 나를 갈기는 겁니다. 하도 맞아서 머리가 크게 부었습니다. 같이 재판에 참여했던 최세인 인사참모도 많이 맞았습니다. 그리고 헌병대장 송효순은 동기생인데 매일 술을 먹고 괴로워했습니다. 물어봐도 말은 안 하고. 그런데 들리는 이야기로는 헌병들이 사람들을 동굴에 몇 십명씩 데려다놓고 갈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민한 것 같습니다. 그는 굉장히 착한 사람이거든요. 결국 손을 써서 중간에 제주를 떠났습니다. 또 한영주 작전참모는 밤낮으로 연대장에게 맞았습니다.
김정무(77세,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당시 제9연대 군수참모, 준장 예편, 육사2기 동기회장. 2002. 9. 25. 채록)의 증언.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보고서, 235
본도의 치안을 파괴하고 양민의 안주를 위협하여 국권 침범을 기도하는 일부 불순분자에 대하여 군은 정부의 최고 지령을 봉지(奉持)하여 차등(此等) 매국적 행동에 단호 철추를 가하여 본도의 평화를 유지하며 민족의 영화와 안전의 대업을 수행할 임무를 가지고 군은 극렬자를 철저 숙청코자 하니 도민의 적극적이며 희생적인 협조를 요망하는 바이다.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탕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기간 중 전도 해안선부터 5㎞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此)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단 특수한 용무로 산악지대 통행을 필요로 하는 자는 그 청원에 의하여 군 발행 특별통행증을 교부하여 그 안전을 보증함
송요찬, 조선일보, 1948년 10월 20일.
같은책, 264
9연대는 한라산 쪽을 향해서 내륙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적으로 간주했다
Harold Fischgrund(81세, 미국 버지니아, 당시 9연대 고문관, 2001. 10. 20 채록) 증언.
같은책, 265
당시 계엄령은 법적 근거도 없는 모호한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계엄사령관인 송요찬 조차도 계엄령이 뭔지 몰랐으니까요. 하루는 홍순봉 경찰청장과 함께 있는데 송요찬이 찾아왔어요. 우리 세 명은 일제 때 만주군과 일본군에서 같이 복무했고, 해방 후에도 함께 경찰전문학교에 근무한 적이 있어서 서로 잘 아는 사이였지요. 송요찬은 홍순봉에게 ‘위에서 계엄령을 내리라고 하는데 어떡해야 하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계엄령이라면 무슨 근거가 있어야 하고 구체적 지침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송요찬도 답답한 노릇이었지요. 또 송요찬은 무식한 편이었습니다. 반면에 홍순봉은 일제경찰로서 만주에서 근무할 때 조선인 중에서는 최고직책을 얻을 정도로 실력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튼 홍순봉이 계엄령이니, 포고령이니 하는 것들을 모두 대신 써주었습니다. 그런데 중산간이라고 해서 무조건 죽인다는 것은 계엄령이라고 해도 안되지요. 일제 때 만주에선 그런 게 있긴 했습니다. 특정지역을 설정해 무조건 발포하는 것이지요
김호겸(서귀포경찰서장 역임)의 증언 (제민일보 4‧3취재반, 앞의 책, 377~378쪽)
같은책, 280
송요찬 연대장은 초토화 작전을 폈다. 거처 가능한 곳을 없애라, 또는 불태워 버리라고 했는데 이런 건 육지에서도 없었다. 초토화 작전이 상부의 지시인지 또는 연대장 독단인지는 모르겠지만, 송요찬 연대장은 일본군 출신으로서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였다
윤태준, 73세, 서울시 동대문구 전농동, 당시 제9연대 보급과 선임하사, 중령 예편, 2001. 5. 2. 채록 증언.
같은책, 294
난 1948년 7월 계몽연극단 20명과 함께 제주에 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연극을 보러오지 않아 흐지부지될 때에 송요찬 연대장이 우리를 무장시켜 특별중대를 만들었습니다. 1개 중대는 4개 소대 80여 명으로 구성됐습니다. 중대장은 대위 계급장을 달았지만 우린 없었습니다. 송요찬 연대장은 9연대 헌병과 장교들을 집합시킨 가운데 “특별중대에 대해서는 타치하지 말라. 만약 손대면 너희들 죽도록 터질 줄 알라”고 해서 기분이 좋았지요. 우리는 한림, 월정, 성산 등지를 순회하며 주둔했습니다. 9연대가 철수하고 2연대가 주둔하자 월정리에 주둔하고 있던 우리 특별중대원 88명은 그대로 2연대 11중대 소속이 됐습니다. 총살집행을 할 때는 “희망자 나오라”고 해서 갔는데, 한번은 한림면 귀덕리에서 총살이 있을 때 내가 일부러 빗나가게 쏘아 한 사람을 살린 적이 있습니다. 내가 그 사람들 신분도 모르고 그냥 남의 말 듣고 하는 건데, 그렇다고 쏘지 않으면 내가 의심을 받으니까 일부러 빗나가게 쏜 것이지요.
노윤복(78세, 남제주군 성산읍 성산리, 당시 서청 특별중대원, 2002. 3. 28 채록) 증언., 같은책, 270쪽
지난 한 해 동안 1만 4,000명~1만 5,000명의 주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 중 최소한 80%가 토벌대에 의해 살해됐다. 섬에 있는 주택 중 약 1/3이 파괴됐고, 주민 30만 명 중 약 1/4이 자신들의 마을이 파괴당한 채 해안으로 소개당했다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097, April 1, 1949., 같은책, 323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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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반도에선 제주도와 비교도 되지 않을 수준으로 남로당이 내란을 일으켰으나 제주도만큼 일반적인 대량학살이 일어난 곳은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주도의 좌우대립은 한반도 땅처럼 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제주도의 분위기는 미국측 증언과 문서로도 알 수 있습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위군중에게 경찰이 발포함으로써 도화선이 된 좌익계의 투쟁은 남한 전역의 73개 시‧군에 파급되어 연인원 110만 명(300만 명이 참가했다는 주장도 있음)이 참가하는 8‧15이후 가장 큰 규모의 대중투쟁이었다.(朝鮮通信社, 朝鮮年鑑-1948年版, 1947, 258쪽)…그런데 전국적으로 엄청난 파장이 있있던 이 사건에 인민위원회 세력이 강했던 제주에서는 참여하지 않았다. 중앙 일간지에는 이 무렵 제주도에서 10‧1 대구사건의 여파로 10월 9일 소동이 일어나 전남 본토에서 미군부대가 파견되었다고 일제히 보도하고 있으나, 그것은 와전된 것이었다. 이는 제주도 미군정청 공보관 케리 대위의 1947년 신년사에서도 엿볼 수 있다. 즉 그는 “(작년을 회고컨대) 육지 각 지방에 소요사건이 발발해서 여러분의 동포 가운데서 많은 희생자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제주도내에 한하여서는 여러분이 시국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함으로써 여사(如斯)한 불행한 소요사건이 없었다는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濟州新報, 1947년 1월 1일.)고 밝히고 있다.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78쪽
제주도는 우익진영과 좌익진영으로 분열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지식인층 지도자들과 대중들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있다. 좌익인사들은 이렇다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있으며, 소위 좌익분자라고 불리우는 인사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다. 대부분의 제주도민들은 국내외적 정치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우익이나 좌익에서 터져 나오는 모든 종류의 선전선동에 쉽게 휩쓸린다. 우익인사들은 ‘빨갱이 공포’를 강조하며 주로 청년단체와 공직에서 좌익인사들의 척결을 통하여 섬을 장악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제주도의 좌익은 반미를 하지 않고 있으며, 최근의 테러는 우익이 선동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제주도 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난에 일차적인 관심을 갖고 있으며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다.
Hq. USAFIK, G-2 Weekly Summary, No. 123, January 23, 1948.,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146쪽에서 재인용
폭력소요를 일으킨 무장대는 소수였습니다. 겨우 약 500명 정도였고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5367쪽), 오히려 한반도에서 벌어진 것과 비교하면 규모가 굉장히 적었습니다. 그러나 한반도와는 비교가 안 될만큼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여기서 학살을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송요찬입니다. 대량학살의 규모가 이렇게 엄청난데도 그것이 덜 알려진 인물입니다. 오히려 의로운 군인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정도니깐요. 이정도로 규모가 큰 학살을 벌인 군인은, 한국군에 한정한다면 에서는 보도연맹 학살과 관련된 김창룡 정도뿐이겠네요.
첫댓글 와.... 석두라는 별명이 있으면서 육참이라니...
고향이 제주인데 토박이 중에서 대다수가 희생유가족일 정도로 큰 사건인데... 묻히는 감이 없잖아 있죠.
4.3 사건은 애시당초부터 유혈사태 충분히 막을 수 있었습니다. 4.3사건은 남로당 중앙도당에서 주도면밀하게 준비해서 터진 그런게 아닌 남로당 지역도당에서 우발적으로 시작된게 시초였지요. 이들이 처음 '무장대'구성했을 당시 무장했다는게 고작 구 일본군 소총 99정 몇정. 대부분이 죽창을 들고 다닌게 전부였습니다. 이걸 가지고 조직적으로 무장폭동을 기도했다라고 제기하기에는 문제가 있죠.(이게 미 국무부 관리를 오랫동안 지냈던 존메릴의 조사 보고서 기록에 그대로 나와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제주도 지역신문 제민일보 참조)
그리고, 초창기 제주도에 주둔했던 연대장 김익렬 중령이 잘 추스려서 유혈사태 막아내기도했었죠
하지만, 당시 군정청 경무국장이던 조병옥이 깽판 저지르고, 강력진압해야한다면서 제주도에 서북청년단 대거 내려보냅니다. 여기서 서청이 제주도에서 사람들 대상으로 아주 못살게 굴었죠. 이게 유혈사태가 터진 시초였습니다.
제주 4.3 사건은 자세히 파고들면 들수록 굉장히 복합적인 요인들이 얽혀있는 사건입니다.
추가로, 제주도에서는 소위 '좌익'이라 불리던 사람들.. 실제로는 미군정에 대해 굉장히 온건적인 스탠스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행정자치기구였던 제주도 인민위원회 경우, 미군정에 상당부분 협조하는 노선을 취했었죠. (미군정이 인민위원회를 부정했었지만, 제주도에서만큼은 달랐습니다.)
@Wehrmacht 김익렬 중령이 잘 추스린거. 까진 좋았는데 그게 당일치기로 박-살 난 이후엔 그냥 희망이 없어보입니다....
아마 남로당쪽도, 군인쪽도, 그대로 평화롭게 물러서는걸 바라지 않았던거라 봐요. (물론 일반 제주도 도민들은 달랐겠습니다만..) 그런상황에서 억지로 갈등만 추스린다고 어떻게 되긴 힘들어 보였을거 같고
그 이후엔 그야말로 제주도에 헬게이트 강림.
4.3...지금도 폭동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있던데 슬프네요
이념이 뭐라고..ㅜㅜ
4월 3일에 벌어진 일은 어떤 기준에서 봐도 명백한 폭동입니다. 그 폭동 진압하는 과정에서 잡으란 빨갱이는 제대로 안잡고 양민들을 어마어마하게 죽여서 문제인거죠.
@팔라이올로구스 네?? 제가 잘못알고 있나요....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반대한게 ....
폭동...인가요....흐음
어디까지가 폭동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에요?
거리에 나서서 물리력행사하면 폭동인가요?
@가seo자라 남로당 조직원들이 경찰서 12개소 습격해서 경찰, 공무원, 경찰가족 수십명을 참살하는건 폭동이죠
@팔라이올로구스 저도 남로당이 한 행위는 폭동이라 보지만 '항쟁'이란 측면도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게 , 그 폭동 이전에 남로당 측 2명이 고문사하고 1명은 고문 후 총살 당한 일이 있었고, 김익렬 대장에 의하면 극렬 폭도는 소수고 대부분 모르고 참여한 민중이라 헸으니 폭동과 항쟁, 둘다 어느정도 성격이 있는 걸로 보입니다.
@팔라이올로구스 물론 저는 일부 극렬 좌파의 선동에 순진한 사람들이 같이 참여한 폭동쪽에 좀 더 가깝다고 봅니다.
@팔라이올로구스 제가 알기로 보통, 체계적인 무장조직을 갖춘 단체와 군인이 총격전을 벌이는 폭동은 폭동이 아니라 내전이라고 부릅니다. 4.3사태의 일련의 과정들은 폭동과 내전의 중간단계...에 가까웠다 생각하고 있구요
아이러니하게도 송요찬 저 양반 아니었음 4.19는......
그리고 졸장이라 불리운 유재흥이 저기선 꽤 개념찬 모습을 보여줬다는 게 아이러니죠
무식하고 잔인한 사람들의 표본이네요... 저런 놈한테 난세에 권력을 맡긴다는것은...
교과서에서 1줄정도로읽었을때에는 반란같은건가했는데 이런일이였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