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오카리나
최한식
두루미 대가리 같기도 하고 어릴 적 물총 같게 보이기도 하는 오카리나 하나가 내 앞에 놓여 있다. 자그마해서 위압적이지 않아 덜 부담스럽고 도자기라서 더 정감이 간다. 오카리나가 나와 오래 같이 있어 주고 외로울 때나 즐거울 때에 친구가 되어 주면 좋겠다. 어느 곳 무슨 사연이 서려 있는 흙이 골라져서 빚어지고 구어 져 나에게 운명처럼 다가와 상념을 자아내게 할까? 수 만년 세월 속에 이 고장 저 마을의 흙과 바람과 물이 홍수와 태풍에 섞이고 온갖 사람과 동물과 풀과 나무의 뼈와 살들이 어우러져 풍화 침식되어 함께 구어 진 저 자그마한 체구에는 희로애락의 모든 노래와 이야기들이 켜켜이 담겨 있겠지.
처음에 오카리나를 배우자는 의견이 불쑥 나왔을 때 몹시 당황스러웠고 난감했었다. 오랜 세월 함께 하다가 별 이유 없이 갑자기 빠질 수도 없고 이제까지 어느 노래 가사 하나 제대로 외우지 못하고 다룰 줄 아는 악기 하나 없는 나보고 어쩌라는 것인가. 오카리나를 가르쳐 주겠다는 친구나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근심스런 빛이 조금도 없고 오히려 들뜨고 신나 보였다. 가르쳐 주겠다는 친구는 음악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강의도 한 적이 있는 데 몇 년 전부터 오카리나에 푹 빠져서 지역에서 팀을 만들어 가르치고 그것으로 봉사활동도 하고 전국적인 동호회활동도 한다. 얼마 전에는 우리 집에 와서 아내와 나 단 둘을 앉혀 놓고 몇 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어쩌다 전화해 보면 개울가에 앉아 오카리나를 불고 있다고도 했다. 급기야 구입할 오카리나를 선정했다고 문자가 왔다. 함께 얽혀서 가는 데까지 가보자. 이 나이에 좀 뻔뻔해진들 그게 무슨 흉이랴 모르는 이들도 아니고 숨길 것 없이 서로 다 아는 데.
첫 시간이 되었다. 오십 대 후반 선생님은 가르치고 육십 대 둘 오십 대 셋 이렇게 다섯은 배운다. 모두들 긴장해서 기초적인 것도 잘되지 않는다. 왜 남이 안 되면 그렇게 즐겁고 우습고 신나는 것일까? 가르치는 이는 열이 나고 배우는 이들은 어렵고…. 그렇게 또 다른 신세계가 열리고 있다. 우리가 힘들어서 일까 선생님이 몇 곡을 연이어 불어 젖힌다. 또 다시 연습에 돌입해서 이번에는 한 사람씩 한다. 숨을 데가 없어서 서로가 조금은 민망할 법도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마냥 즐거워 킥킥대고 연습은 중단되고 웃음바다가 된다. 팔이 저리다. 그 가벼운 것을 들고 하는 데도 긴장하니 힘이 들고 머리가 딱딱 아프다.
누군들 잘하고 싶지 않으랴. 몇 번을 강조해도 막아야 할 바람구멍 술술 뚫리고 손가락 떼는 것도 너무 힘들다. 선생님은 박자를 충분히 불라 하는데 학생들은 늘 당황스러워, 첫 시간 배운 것, 도 레 미 레 도. 숨 쉬는 곳 몰라서 허덕거려도 시간 갈수록 좋아 진댔지, 지난 시간 빠진 이는 표시가 난다. 밀어 내는 숨결도 불안정하고 도 소리 하나도 확실치 않다. 그렇지요, 좋아요. 선생님 칭찬에 피곤한 줄 모르고 손가락에 주었던 과도한 힘도 조금은 편안해 지는 듯하다. 첫 술에 배부르랴 시작이 반이라는 데, 악기를 하나라도 배운다는 자체가 나에게는 커다란 기적인 거다. 시간시간 쌓이고 익숙해지면 길거리에 함께 나가 공연을 하자고 한다. 쉬지 않고 하나하나 배우고 익혀 나도 내 나이 칠순 넘을 때 저녁노을 지는 개울가에서 내 아이들의 아이들 뛰어 놀 때에 펀펀 널찍한 바위에 앉아 오카리나 한 곡조 자신 있게 들려주고 싶다. 또한 아이들 모아놓고 알아듣든 못 듣든 내가 깨친 삶의 얘기도 해주고 싶다.
모두가 헤어져 가고 오카리나만 내 앞에 오도카니 놓여 있다. 내 속도대로 가리라. 마음 비우고 오랜 세월 함께 하면 악기도 내 진심을 알아 자신의 비밀 털어 놓고 고운 소리도 한 서린 소리도 풀어 놓기도 하고 담아 주기도 하리라. 그렇게 세월가고 미운 정 고운 정 들리라. 내 운명의 오카리나 그 때에 내 오카리나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