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갈치의 달
코로나 바이러스가 불러온 변화된 풍경 중엔 쓸쓸한 도시의 거리도 들어있다. 언제나 활기가 넘쳐났던 부산 원도심 광복로가 인적 드문 거리로 바뀐 것이다. 지난 15일 이곳에서 경제파탄과 방역실패를 불러온 정권을 규탄하는 국민대회가 열렸다. 명칭은 거창하지만 이 대회에는 49명밖에 참석하지 않았다. 코로나 방역규칙이 50명을 넘길 수 없도록 참석인원을 제한했기 때문에 일반시민들은 통제선 밖에서 주최 측 연설을 들어야만 했다.
폭정종식 비상시국연대가 주최한 이날 부산국민대회에는 시민 발언과 공동대표 연설 그리고 국민방역위원회 출범식으로 이어졌다. 비상시국연대는 지난해 12월 정당·시민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서 출범했다. 오는 22일엔 대구, 29일엔 광주를 찾아 국민대회를 이어갈 것이라 밝혔다. 신문과 방송이 이날 규탄대회를 다룬 건 하나도 볼 수 없었다. 어쩌면 장기표나 이재오 같은 퇴물 정치인에 식상한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적으로 적은 집회 참석자들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텅텅 빈 광복로 점포들 풍광이었다. 명품 브랜드를 취급하던 목 좋은 곳 매장들은 하나같이 ‘임대’라는 글자가 나붙어 나라 경제가 얼마나 망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집회 후 한 주가 새로 열리는 월요일 오후, 어스름 내려앉는 광복로를 다시 찾았다. 거리는 사흘 전처럼 여전히 조용했고 행사 장소였던 옛 미화당백화점 앞은 을씨년스러운 겨울바람만 휑하니 불어대고 있었다.
60년 전통을 간판에 내세운 원산면옥 홀에선 주인과 종업원으로 보이는 두 여인이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응시하는 표정이 어두웠다. 용두산공원을 오르는 승강기 조명은 색상을 바꿔가면서 네온사인처럼 현란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비대면’에 움츠러들었는지 이용객은 보이지 않았다. 주로 노인들이 몰려 바둑장기로 소일하던 공원벤치 탁자마다 코로나 사태로 노란 바탕에 빨간 테두리를 두른 ‘사용금지’ 딱지가 붙어 적막감이 들었다.
연전 보강공사를 끝낸 부산타워도 코로나 여파로 직격탄을 맞아 영업을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작년 말 문을 닫았다. 그런데도 부산을 상징하는 타워는 바깥으로 은은한 보랏빛 조명을 내보이고 있었다. 텅 빈 공원에 선 앙상한 나뭇가지만큼이나 타워도 황량하게 다가오면서 지난 세월을 떠올리게 했다. 난 부산이 직할시로 승격한 다음해인 1964년 회사의 명에 따라 대전에서 부산에 첫발을 디뎠고 회사 사무실에서 용두산공원은 가까웠다.
당시는 전국을 통틀어도 공원이라곤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어 난 출퇴근 때나 휴일에 용두산공원에서 많은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이곳 부산타워는 서울 남산타워보다 2년 앞선 1973년 세워졌고 120미터 타워 높이는 당시로선 경이적인 것이었다. 공원에서 예비군 교육을 받다가 '아들딸 구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정부시책에 호응하여 공원 밑 기독병원에서 정관을 절제했던 일이 생생하다. 첫째딸에 이어 아들놈이 태어난 지 일주일이 채 안 된 때였다
영화도시 부산을 있게 한 부산극장은 추억 속의 가요 노랫말에도 자주 등장할 정도로 이름을 떨쳤다. 코로나는 남포동 요지를 차지한 부산극장도 화장품 매장으로 바꾸어 충격을 주었다. 맞은편 대영극장 자리 극장도 4층부터는 롯데시네마라 붙였지만 상영 포스터가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영화 상영은 중단한 것 같았다. 삶이 팍팍해 젊은 날엔 제대로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때가 봄날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남포동사무소는 자갈치시장 가까이에 있다. 근년 들어 자갈치시장은 자구책으로 유행하는 노래를 두 곡이나 만든 것 같았다. 벌써 어두워졌지만 전망대가 잘 만들어진 자갈치시장 옥상을 올랐다. 남항 건너 마주보고 선 영도에서 빌딩 불빛들이 바닷물에 반사되어 현란했다. 우리 기성세대들은 6.25동란 전시공간에서 북한을 비롯한 전국에서 밀려든 피란민들에게 부산을 알리는데 큰 몫을 한 자갈치라 긴 설명이 필요치 않은 공간이기도 하다.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용두산 엘레지’ ‘잘 있거라 부산항’ 노래가사를 작은 나무판에다 손 글씨로 올망졸망하게 적어 전망대에 내걸었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이곳 우체통에다 엽서를 부치면 6개월 후에 받아볼 수 있다는 안내문도 붙었다. 그러면서 편지를 기다리는 즐거움도 누려보라고 권하지만 지구촌 소식까지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초고속 인터넷시대에 과연 가슴 졸이며 애틋한 사연을 기다리는 이용객이 있을는지 모르겠다.
자갈치에서 통통배가 오갔던 바다 건너 남항동 선착장에 “그때 왜 그랬어요?”란 네온사인 글씨가 선명했다. 부모 자식 간이나 형제 간 연인 간에 지난날을 회상하며 약하게나마 상대를 원망하는 말이 아니던가. 이 말엔 이미 난 너를 용서했다는 전제가 깔려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나이에도 일곱 글자는 명치끝까지 파고드는 짜릿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옥상전망대에 설치한 우체통도 그런 아픔을 서로 주고받으며 용서하라고 설치한 것이 아닐가 싶다.
옥상 전망대에서 추위에 굳은 몸은 승강기에 오르자 손가락부터 제대로 말을 듣기 시작했다. 지난겨울 백두산야행에서 산 털모자 덕분에 땡땡이중처럼 빡빡 깎은 민머리도 추위를 면할 수 있었다. 내가 자주 찾던 단골집을 비롯한 어물전들이 모두 철수한 자갈치 난전골목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난데없이 노파가 옆에서 억센 손으로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곤 길 복판 바닥 소쿠리에 진열해 놓았던 생선 무더기를 비닐봉지에다 주섬주섬 주워 담기 시작했다.
대구와 민어 부새 조기 등 예닐곱 마리였고 생선들은 모두 말린 것들이었다. 복면강도처럼 눈만 빠끔하게 내놓은 할멈은 내 팔을 끝내 놓아주질 않았다. 가장 큰 대구를 가리키며 5만원씩 팔던 거라고 했다. 몇 년 전 가덕도 앞 용원에서 제철에 3만원이면 살 수 있던 크기였다. 할멈은 탁성에다 말투까지 거칠어 안 사주곤 빠져나올 재간이 없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영감은 칸막이도 없는 난전에 앉아 무심하게 두 늙은이들 수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땅바닥에 가장 낮게 내려앉아 / 철퍼덕 엉덩이를 뭉개고 있는 달 / 손 내밀면 가슴까지 무너져 / 질척한 난전에서 사람 소리를 한다 / 자갈치 아지매 비릿한 전대 속에서 / 부새 비늘과 함께 뒹굴던 백동전처럼 / 막소주 꼼장어구이에 얼큰해진 바다사내 / 깊은 울음 속에서 퍼 올린 순정처럼 / 두리둥실 사람을 닮은 바다와 / 바다를 닮은 사람을 다 끌어안고 / 포장마차 속에서 지글지글 굽히고 있는 / 간이 잘된 자갈치의 달 / 봐라, 봐라, 한 잔 칵 부삐라 / 이리 권하고 저리 권하는 술잔 따라 / 쓸쓸한 내가 발라 먹고 거나한 바다가 발라먹어도 / 비틀거리는 자갈치 발밑에 다시 떨어져 / 하 하 하 환하게 굴러가고 있다’
작은 나무판대기에 먹으로 휘갈겨 쓴 ‘자갈치의 달’ 시는 자갈치시장 옥상전망대 난간에 붙어 젊은 날 퇴근 후 고래 고기와 곰장어 먹으러 찾던 자갈치를 소환했다. 전망대 상공에선 눈썹달을 겨우 면한 섣달초엿새 상현달이 살포시 웃고 있었다. 달은 어쩌면 화사한 빛으로 다가와 왜 그리도 자갈치에 자주 걸음하지 않느냐고 나에게 묻는 것 같았다. 다음에 온다면 짙은 어두움 속에서 추위에 떨며 자신을 카메라에 담던 노인을 기억이나 해줄는지 모르겠다.